국어문학창고

지하철(地下鐵) 정거장에서 / 파운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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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地下鐵) 정거장에서 / 파운드/정규웅 옮김

 

군중(群衆)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IN A STATOIN OF THE METRO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요점 정리

작자 : 파운드/정규웅 옮김

갈래 : 서정시, 이미지즘시

성격 : 서정적, 순간적, 시각적

표현 : 대구법

구성 : 대칭적 구성

주제 : 정거장에서 직면한 한 장면의 생생한 인상

의의 : 시인의 주관적 감정이나 사상이 배제된 정확하고 선명한, 객관에 충실한 그림을 그려 냄으로써 시의 회화화를 주창한 이미지즘(imagism)의 실천에 크게 기여함.

출처 : <지하철 정거장에서>, (민음사, 1998).

내용 연구

군중 ~ 이 얼굴들 :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라는 말은 돌연히 의외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군중들의 얼굴이 시인의 주관에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까맣게 ~ 위의 꽃잎들 : 시인의 주관에 비친 아름다운 얼굴들을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잎에 비유하고 있다. 축축한 검은 가지와 환한 꽃잎의 대조에서 꽃잎의 아름다움이 강조될 뿐 아니라, 시인이 받는 돌연하고 의외적인 인상이 강조된다.

이해와 감상

파운드는 창작 동기를 "나는 3년 전에 파리의 지하철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얼굴, 부인의 얼굴 등을 보면서 그 인상을 표현하려고 애썼으나 그 신선한 감정을 나타낼 수 있을 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중략) 나는 30행의 시 한 편을 썼지만 그것을 찢어 버렸다. 6개월 후에 그 반 정도의 시로 고쳤고, 1년 후에 2행의 짧은 시로 만들었다."

그는 '얼굴들'과 꽃잎들'을 대조시켜 이러한 대립이 빚어내는 묘한 효과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모더니즘은 다분히 한시(漢詩)와 비슷하다. 두 행의 시어의 선명한 대립이 빚어 내는 대구법, 감정의 배제는 한시에서 배워 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여간 이 시는 지하철 정거장에서 얻은 한 순간의 인상을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낸 이 2행의 시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적 면모를 집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심화 자료

에즈라 파운드(Ezra (Loomis) Pound)

1885. 10. 30 미국 아이다호 헤일리~1972. 11. 1 베네치아.

 

미국의 시인·비평가로 20세기 영미시에 끼친 지대한 영향 때문에 '시인의 시인'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를 지지하는 방송을 하여 전쟁 후에 체포당해 1958년까지 정신병원에서 억류되었다.

 

초기생애와 작품활동

 

아이다호의 작은 광산촌에서 연방 토지사무국 공무원인 위스콘신 출신의 아버지 호머 루미스 파운드와 뉴욕 시 출신 어머니 이사벨 웨스턴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경 가족은 동부로 이사했고, 1889년 6월 아버지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조폐국에 취직하면서 윈코트 근처에 정착했다. 파운드는 여기서 평범한 중산층 아이로 자랐다. 첼트넘 사관학교에 2년간 다니다가 졸업 전에 그만두고, 지방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2년간(1901~03) 다니면서 평생의 친구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를 만났다. 1905년 뉴욕 주 클린턴의 해밀턴대학에서 철학학사학위를 받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돌아와 대학원과정을 밟았다. 1906년 6월에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1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학교에서 영문학과 영문법은 물론 라틴어·그리스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독일어·스페인어·프로방스어·앵글로색슨어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가을 인디애나 주 크로퍼즈빌에 있는 워버시장로교대학의 로망스어 교수가 되었다. 대체로 그는 장로교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였다. 첫 직장을 곧 그만두고 1908년 2월 가벼운 짐과 적어도 한 미국 출판업자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한 시집 원고를 들고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전에도 유럽에는 3번이나 갔었는데, 1898년에는 대고모와, 1902년에는 부모와, 1906년 여름에는 혼자서 방문했다. 이때 모은 자료를 기초로 르네상스 시기 라틴 시인에 대한 〈라파엘풍 라틴 Raphaelite Latin〉과 음유시인에 대한 〈흥미로운 프랑스 출판물 Interesting French Publications〉(둘 다 필라델피아의 〈북 뉴스 먼슬리 Book News Monthly〉 1906년 9월호에 실림), 〈부르고스, 꿈의 도시 옛 카스티야 Burgos, a Dream City of Old Castile〉(〈북 뉴스 먼슬리〉1906년 10월호에 실림)를 썼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도 별로 없이 떠나 배를 타고 지브롤터와 스페인 남부를 지나 베네치아로 갔다. 1908년 6월 베네치아에서 자비로 첫 시집 〈A lume spento〉를 출판했다. 1908년 9월경에는 런던으로 가서 작가이자 편집자인 포드 매덕스 포드(그가 펴내는 〈잉글리시 리뷰 English Review〉에 파운드의 글을 실어줌)와 사귀었고, 윌리엄 버틀리 예이츠의 문학 서클에 들어갔으며, 철학자 T. E.흄이 주관하는 현대 그룹 '이미지파'에 들어갔다.

 

외국에서 거둔 성공

 

영국에서는 곧 성공을 거두었다. 시집 〈페르소나이 Personae〉가 1909년 4월에 출판되었고, 10월에 2번째 시집 〈환희 Exultations〉가 나왔다. 런던에서 한 강의(1909~10)를 바탕으로 쓴 3번째 책 〈로망스의 정신 The Spirit of Romance〉은 1910년에 출판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필라델피아나 뉴욕 시에서 문단에 진출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1911년 2월 유럽으로 돌아갔고, 이탈리아·독일·프랑스를 방문했다. 1911년말 사회주의 주간지 〈뉴 에이지 New Age〉의 편집자이며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앨프레드 R. 오러지를 알게 되었다. 오러지는 파운드에게 〈뉴 에이지〉의 지면을 할애해 이후 9년 동안 적지만 정기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12년 파운드는 시카고의 작은 잡지사 〈포이트리 Poetry〉의 런던 주재기자가 되었다. 그는 이 잡지의 중요도를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고, 곧 영미 시단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로버트 프로스트와 D.H.로렌스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들의 시를 높게 평가한 사람이었으며 모더니스트 조각가 제이콥 엡스타인과 헨리 고디어 브제스카에게 찬사를 보냈다. 1912~14년의 이미지스트 운동의 선구자이자 '이미지파'의 후계자로서 시에서 직접적이고 간결한 언어, 정확한 이미지의 사용을 강조하는 최초의 이미지스트 선언문을 작성했으며, 이미지스트의 첫번째 시선집 〈이미지스트 Des Imagistes〉(1914)를 편집했다.

 

현대문학의 형성자

 

친구 예이츠는 이미 유명해져 있었지만, 파운드는 그를 설득해 새로 간결한 문체를 쓰도록 했다. 1914년에 예이츠의 친구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딸 도로시 셰익스피어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당시 무명이던 제임스 조이스와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에고이스트 The Egoist〉지 비공식 편집자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뉴욕 시의 〈리틀 리뷰 The Little Review〉 런던판 편집자가 되어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율리시스 Ulysses〉를 출판하도록 도와 조이스의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재정 보조를 확보해주었다. 또한 1914년 T. S. 엘리엇이 자신처럼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계속해서 자신의 시집 〈반격 Ripostes〉(1912)과 〈재계(齋戒) Lustra〉(1916), 산문 비평집 〈파반과 분할 Pavannes and Divisions〉(1918)을 출판했다. 1913년 위대한 동양학자 어니스트 페널로사의 글을 읽게 된 뒤에는 고대 중국 시의 영어판인 〈중국 Cathay〉(1915)과 일본 노극[能劇]에 관한 저서 2권(1916~17)을 출판해 호평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중의 살육과 전후 영국에 만연한 무력감에 불안을 느껴 파리로 가기로 결정하고, 떠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작품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에 대한 경의 Homage to Sextus Propertius〉(1919년 〈Quia Pauper Amavi〉에 실림), 〈휴 셀윈 모벌리 Hugh Selwyn Mauberley〉(1920)를 출판했다.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에 대한 경의〉는 프로페르티우스와 로마 제국을 통해 1917년의 대영제국에 대해 논평한 것이며, 〈휴 셀윈 모벌리〉는 1919년 영국 문단문화의 한 측면을 정교하게 새겨놓은 '초상'으로서 20세기에 가장 찬사를 받은 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1921~24) 젊은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만나 그를 도와주었고, 프랑수아 비용의 시를 바탕으로 오페라 〈유언 Le Testament〉(1926 파리 공연, 1931, 1962 BBC가 런던에서 상연)의 대본을 썼다. T.S.엘리엇을 도와 장시 〈황무지 The Waste Land〉를 편집했으며, 뉴욕 문예지 〈다이얼 The Dial〉의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칸토스 The Cantos〉

 

1924년 파리에 싫증을 느낀 그는 이탈리아 라팔로로 이사해 20년을 살았다. 1925년에 미국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정부인 올가 러지와의 사이에서 딸 마리아가 태어났고, 1926년에 아내 도로시는 아들 오마르를 낳았다. 딸은 이탈리아령 티롤의 한 시골 여인이 길렀고, 아들은 영국에 사는 친척집에서 자랐다. 1927~28년에 자신의 잡지인 〈에그자일 Exile〉을 편집했고, 1930년에는 〈30편의 초고 A Draft of XXX Cantos〉라는 제목으로, 1915년부터 쓰기 시작했던 야심적인 장시 〈칸토스〉의 일부를 다양하게 엮어 출판했다. 1930년대에 〈칸토스〉가 더 증보되어 〈새 칸토스 11편 Eleven New Cantos〉(1934)과 〈5번째 칸토스 10편 The Fifth Decad of Cantos〉(1937)·〈칸토스 52~71 Cantos VXII-ⅦⅩⅠ〉(1940) 등이 나왔고, 걸작 산문집 〈새롭게 하라 Make It New〉(1934)가 나왔다. 점차 음악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1930년대에 라팔로에서 몇 차례 음악회를 기획했으며, 올가 러지의 도움을 받아 17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를 재발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문화와 역사의 지속적인 연구 결과 뛰어난 단문집 〈쿨처 안내 Guide to Kulchur〉(1938)를 출판했다.

 

1930년대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자 그는 경제사를 비롯한 역사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 1918년 런던에서 사회신용설의 주창자인 C. H. 더글러스를 만난 후 경제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사회신용설은 불충분한 구매력에 따른 부(富)의 부당한 분배가 불황을 초래한다는 경제 이론이다. 파운드는 정부와 일반 대중이 돈과 금융을 잘못 이해하고, 국제 은행가들이 돈을 조종한 결과 세계가 일련의 전쟁에 빠지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화폐개혁에 몰입해 〈경제학 입문 ABC of Economics〉(1933)·〈사회적 신용 Social Credit〉(1935)·〈돈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What Is Money For?〉(1939)를 썼으며, 정치에도 관여해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글 〈제퍼슨과 무솔리니 Jefferson and/or Mussolini〉(1935)를 썼다 (→ 색인 : 파시즘). 그가 몰입한 이 주제는 〈칸토스〉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초기작에서도 개인적·역사적 일화들이 통제되지 않은 흔적이 드러난다.

 

반미(反美) 방송

 

유럽에서 전쟁이 임박하자 그는 이탈리아와 미국이 서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자신이 한몫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1939년 미국에 갔다. 그러나 실망을 안고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이탈리아와 미국이 교전한 뒤인 1941~43년에 로마의 라디오를 통해 문학·경제·금융·정치 등의 광범위한 주제를 가지고 수백 회에 걸쳐 방송했고 종종 미국이 전쟁을 벌였다고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그는 1945년 미국군에 체포되어 피사 근처 전범 수용소에 6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열악한 조건인 그곳에서 공자를 영어로 번역했고(〈위대한 학설과 흔들리지 않는 축 The Great Digest & Unwobbling Pivot〉, 1951), 계속 집필중이던 장시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피사 칸토스 The Pisan Cantos〉(1948)를 썼다. 반역죄로 재판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재판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정신이상'이라는 의사들의 선고를 받고, 정신 질환 죄수를 수용하는 워싱턴 D.C.의 세인트엘리자베스 병원에서 12년(1946~58)을 보냈다. 이 기간에도 〈칸토스〉를 이어나가 〈절단 Section:Rock-Drill〉(1955)· 〈왕관 Thrones〉(1959) 등을 썼으며, 고대 중국의 시와 소포클레스의 〈트라키니아 Trachiniai〉를 각각 〈고전 시선집 The Classic Anthology〉(1954)과 〈트라키스의 여자들 Women of Trachis〉(1956)로 번역했다. 한편 정기적으로 방문객들을 만났으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1949년에 〈피사 칸토스〉로 저명한 볼링겐상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논쟁이 다시 뜨거워졌다. 1958년 4월 18일, 재판을 받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나오고 고소가 기각되면서 세인트엘리자베스 병원에서 풀려났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6개월씩 라팔로와 베네치아를 오가며 지냈다. 저술 기간 60년 동안 혼자 70권을 썼으며, 70여 권의 다른 책에 기고하고, 1,500편 이상의 글을 썼다. N. Stock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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