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by 송화은율지식,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전통적 지식인의 상
과거의 사회에도 유별나게 창조적인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식인'이란 개념이 어떤 종류의 정신 활동에 종사하는 집단이나 개인들을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소크라테스, 공자를 비롯한 옛 현인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의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자연의 비밀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철학자들은 실제로 이러한 작업에 자신의 전생애를 걸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왔다. 그러나 이들은 철학자, 현인, 혹은 선비라고 할 수는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식인'이라도 부르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대학의 출현과 더불어서이다. 정부 당국에 대한 학생의 권리와 지식인으로서의 문화적, 사회적 의무를 규정한 프랑스 파리 대학의 학칙(1215년)은 이 때부터 지식인이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음을 말해 준다.
당시의 대학인 혹은 지식인은 지식의 얽힌 매듭을 풀고 세계에 관한 총괄적인 이론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14, 15세기에 이르러 지식인들은 중세 기독교 사상의 속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쇄술이 점차 발달하면서 지식인들은 비로소 자기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한 도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 사상이 출현하면서 지식을 사회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지식의 진보가 도덕의 진보를 가져오고 인류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보급함으로써 사람들이 지금까지 처해 있던 지적으로 미숙한 상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브나로드 운동*'이나,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치하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애국 계몽 운동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식인과 권력
각 국가마다 시기적으로는 다르지만 대중 교육의 보급, 확산과 함께 대학인, 또는 지식인이 광범위하게 출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식인은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는 표현은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식인'이라는 표현이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지성인'이라는 표현을 써서 지식인과 구별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지식인'이란 용어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에서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1898)'에 관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육군 대위로서 간첩 활동을 한 협의로 당국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함에도 군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작가, 학자를 비롯한 수백 명의 사회 저명 인사들이 '지식인의 선언'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드레퓌스의 유죄 판결에 항의하고, 재심을 요구하였다. 나중에 진범이 따로 있고, 드레퓌스는 무죄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지식인의 선언'을 비판한 사람들도 많았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지식인의 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몇몇 사람들은 드레퓌스의 옹호자들이 피의자의 결백을 확신한 나머지 '지식인'이 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의 권한 바깥까지 손을 뻗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드레퓌스가 유죄인가, 무죄인가 하는 문제는 당국이 판단할 일이지 지식인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인이야말로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식인이 사회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중을 조직해 나감으로써 사회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인들은 전근대적인 정치 체제,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반민주적인 사회 체제를 무너뜨리고 문명과 사회의 진보를 이룩하기 위한 싸움 속에서 스스로를 '대중,' 또는 '민중'과 구분하고 대중들에게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어떤 행동을 호소하였다. 지식인이 전통적으로 진리와 정의를 수호하는 집단으로 여겨지는 한 지식인들의 호소는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 4.19 혁명 당시 대학 교수들의 시위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학생 운동이 민주화의 기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정치 현실에 대해 침묵하거나, 정치 권력에 영합하는 일이야말로 지식인의 사명을 저버리는 행동으로 비난받았다.
이처럼 지식인이란 용어는 역사적 의무에 대한 자각을 통해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지식인의 사회 참여가 적극적인 경우 지식인들은 종종 철없는 반항 정신을 가지고 사회를 교란시킬 독약을 퍼뜨리는 자들, 혹은 자신들의 독단적인 지식을 가지고 독재를 실현하려는 위험한 자들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지식인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좌익적 사고를 가지고 정치 현실의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사람들을 향해 퍼부어졌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좌익적 사고, 특히 현대의 마르크스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 미국의 아이젠하워(Eisenhauer) 대통령은 "지식인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말을 쓰는 인간이다"라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과 반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개혁하려는 운동 속에서 지식인들은 커다란 기여를 했지만 파시즘* 체제를 수립하고 사회주의적 관료 독재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들도 지식인들이었다.
결국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물음은 그 지식인이 처한 사회 현실이 어떠하고 참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 없이는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지식이 가치 중립적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식인은 그가 가진 지식의 윤리 판단을 배제함으로써 사회 현실의 문제들에 침묵해 버릴 수도 있고, 부당한 권력의 지배를 위해 봉사할 수도 있으며, 그러한 억압적인 정치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도 있다. 결국 지식인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 현실에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진리를 구하고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지식인의 노력은 그것이 비록 오류로 판명 난다 할지라도 멈춰져서는 안 될 것이다. 진리는 오류를 통해 발전해 나간다. 어떤 지식도 단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의 체계에 불과할 뿐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양한 주장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더 나은 사회를 실현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다원주의적 사고야말로 지식인이 취해야 할 기본적 자세라 할 것이다.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지식인의 역할, 윤리 문제는 새로운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지식의 발달은 과학 기술 문명의 엄청난 진보를 가져왔지만 인간의 소외는 점차 커져가고 인류는 생태계의 파괴와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식의 발전이 인류를 해방시키리라는 믿음에 회의가 생겨난 것이다. 이제 과학 기술의 가치를 보다 근원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지식 윤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용어 설명>
* 브나로드 운동 :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청년 귀족과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농민을 주체로 한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일으킨 계몽 운동
* 파시즘 : 파쇼란 원래 막대기의 묶음. 단결을 의미하는 이탈리아 어로 1919년 무솔리니가 조직한 '전투자 동맹'의 명칭이 되고, 1921년 이것이 '파시스트 당'이 된 것에서 유래한다. 언뜻 보기에 사회주의로 보이는 정책을 내세워 현실에 불만을 가진 중간 계층을 선동하면서 그 정책을 실현할 강력한 지도자에 대해 대중적 충성을 서약하게 하고, 이를 기초로 의회 제도를 폭력적으로 전복시켜 반민주주의적인 폭력 지배를 행사한다.
극단적인 반공주의, 강력한 관료주의, 일체의 자주적인 노동 운동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위로부터의 노동 조직의 강제적 편성, 사상, 언론, 집회, 결사 등의 민주적 제 권리의 박탈, 노골적인 침략적 군국주의를 고취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좁게는 히틀러의 나치즘을 넓게는 제3세계 군사 독재 체제를 포괄하여 '파시즘'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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