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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혁명의 역사 및 의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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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혁명

 

시민 혁명의 역사

 

시민 혁명은 봉건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전환할 때 일어난 혁명이다. 이 혁명은 지배 계급인 봉건 세력에 대하여 피지배 계급인 부르조아 계급이 일으킨 혁명이기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또 이 혁명에 의해 근대 민주주의 정치 형태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혁명은 경제 체제상에서는 봉건 제도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사회로의 길을 활짝 열어, 사회적 생산력을 현저하게 고양시킨 점에서 소위 근대 문명 세계를 만드는 데 공헌한 혁명이다.

 

시민 혁명을 전형적으로 성취한 나라는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것으로서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1640), 미국의 독립 혁명(1775), 프랑스 대혁명(1789) 등의 세 가지가 상정되지만, 이들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 대표되는 시민 혁명 사례는 결코 서유럽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것은 아니다. 시기는 늦지만 독일의 3월 혁명(1848), 일본의 명치유신(1868), 러시아의 제1차 혁명(1905), 중국의 신해 혁명(1911) 등도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부르조아 혁명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시민 혁명이 최초로 서유럽 국가에서 발생한 것은 서유럽에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가장 먼저 그리고 전형적인 형태로 발생했기 때문이며, 그 이외의 이유, 예를 들면 유럽인이 인간적으로 우월하다든가 혁명적이라든가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증거로, 유럽 이외의 후진국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이 시작되었고 이들 국가에 있어서도 역시 시민 혁명을 목표로 하는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진국에서의 시민 혁명은 서유럽의 경우와 같이 완전한 형태로 전개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첫째, 세계 자본주의 단계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가 계급이 급속하게 형성되었고,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확실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며, 둘째, 시민 혁명을 전개함에 따라, 혁명이 자본주의 그 자체의 타도를 목표로 한 노동자 운동으로 전환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후진국의 시민 혁명은 철저하게 수행되지 못했으며, 대부분 부르조아지와 봉건 세력의 타협에 의해서 혁명은 단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시민 혁명의 의의

 

시민 혁명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현상은, 자본가 계급이 대두하여 봉건 세력, 즉 봉건 지주와 교회로부터 정치 권력을 자신들에게로 옮겨왔다는 점이다. 이 때 자본가 계급인 부르조아지는 의회(입법 기관)를 기반으로 왕과 특권 신분의 행정 권력(집행 기관)에 대항하였다. 그렇지만 부르조아지의 투쟁은 의회주의적인 방법 즉 의회 내에서의 토의와, 왕실 의회간의 평온한 교섭 등에 의해서는 성공할 수 없었다. 투쟁은 양진영 모두 군사력을 동원하여 승부를 겨룬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왕정이 폐지되고 혹은 왕이 처형되고 의회의 압도적인 우위가 확립되면서 시민 혁명은 끝을 맺었다. 부르조아지는 바야흐로 국가 권력의 근본을 지배하고, 새로운 국가의 주인공이 되었다.

 

완전히 무너진 봉건 세력은 모든 정치적 특권을 빼앗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재산마저 빼앗겼다. 물론 평범한 한 시민으로 생활하는 것은 인정되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지주 혹은 부르조아지로서 새로운 부르조아 사회 속에 영입되기도 했다. 국왕도 일단은 폐지되지만, 새로운 부르조아 사회가 완성되면 오히려 부르조아의 보호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고 다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경우가 특히 명확한 예이지만, 프랑스에서도 왕정이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1814), 나폴레옹 제정(1804, 1852)이라는 독재 정치의 시기까지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지가 지배하는 부르조아 국가라는 면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시민 혁명은 이와 같이 부르조아지가 봉건세력과 싸워서 승리한 혁명이다. 부르조아지란 오늘날 일본에 있어서나 서유럽에 있어서나 공히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사회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세력이다. 그러한 세력의 지배가 시민 혁명으로 세워졌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대다수의 국민의 행복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에 관한 의문이 나올 수도 있다.

 

사실 이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제기되는 질문이다. 몇몇 논자들은 시민 혁명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자본주의의 성립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으로서 인류 역사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으면 발전적 단계로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자본주의의 성립은 봉건적인 생산 양식과 비교해서 생산력을 더 한층 고도로 발전시킴으로써 인류의 생활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 자본주의의 성립이야말로 중세적 정체에서 인류를 해방하는 역사의 진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셋째,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결정적으로 시민 혁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전근대적 봉건적 관계가 일거에 그리고 철저하게 폐지되었고, 새로운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사조를 광범위하게 유포시켰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시민 혁명을 거치지 않거나 타협적인 변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봉건적인 관계가 청산되지 않고, 봉건 세력이 잔존한 채로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 민중에게는 봉건적 착취와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이중의 부담이 가해지게 된다. 이것이 민중에게 고통인 것은 명백하다. 넷째, 부르조아지가 이룬 시민 혁명은 부르조아지만의 힘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혁명에서의 원동력은 소시민과 농민의 힘이었다. 실제적으로 이 민중의 활동이 크게 작용하여, 부르조아 국가의 민주주의적인 정치 형태가 성립하였다. 민주주의의 원리에서부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확립되고 주권 재민이 인정되고, 다수결 원칙이 채용되었지만, 이것은 단지 법률상의 해방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해방을 물질적인 면에서의 해방으로까지 밀고 나가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따라서 시민 혁명은 부르조아지가 이룩한 혁명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혁명이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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