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찾아서 / 이익섭
by 송화은율좋은 글을 찾아서 / 이익섭
작가의 글은 모범적인 글이어야 하고, 모범적인 글이란 무엇보다 먼저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이어야 할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온전히 만들어지지 않은 글은 결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는 특히 냉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어떤 내용을 전달하느냐에 못지않게 그 내용을 담는 문장을 다듬고 가꾸는 일에도 혼신(渾身)의 힘을 기울여야 하고 또 그러한 책임을 짊어진 사람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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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쉼표 하나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쪹 이 점에서 근래 쉼표 사용에 고심하는 작가가 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필자는, 이제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따라서 그 작가 역시 이제는 신진 작가는 아니지만, 김승옥의 소설을 읽으며 몇 가지 새 세대 물결의 신선감에 흥분을 느낀 적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쉼표 사용이었다.
⑴ ㈎ 형광등이, 낡았는지, 불이 사그라졌다가 다시 켜지곤 했다.
㈏ 천사는, 처음 출근한다는 기쁨 때문에 역시 새벽 네 시에 잠이 깨어 있는 나를 아 직도 자고 있는 줄로 알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내 문 앞을 조심조심 걷는다.
- 다산성(多産性)
예문 ㈎의 쉼표는 없어도 의미 전달에 별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쉼표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거기에서 잠시 숨을 쉬며 읽노라면 정말 그렇게 읽어야 옳다는 생각이 들며 그 쉼표가 참 신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낡았는지는 사실 잠깐 머릿속을 스치는, 한 층위 낮은 삽입구의 성격이며, 이를 쉼표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예문 ㈏의 쉼표는 비중이 더 큰, 그만큼 더 적절히 사용된 쉼표라 할 만하다. 이 문장은 다소 모호성을 띤 문장이다.처음 출근한다는 기쁨 때문에 새벽 네 시에 잠이 깨어 있는 사람이나가 아니라천사인 것처럼 오해를 일으키는 점이 그것이다.천사는다음의 쉼표는 그러한 혼란을 덜어 주는 기능을 한다. 의미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데 쉼표의 역할이 결정적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예문 ㈏의 쉼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의, 국어 문장과의 부단한 씨름을 보는 것 같아 위의 두 예문을 보며 필자는 당시 새 세대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기조차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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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김승옥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작가의 글 한 부분을 마저 보자. 역시 다산성의 한 부분이다.
⑵ 그리고 침을 삼키고 네.라고 커피만큼 작게 말했다.
-- 동생들은 학교에서 다 돌아 왔고요…….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 다음에 네.
-- 오늘 낮에 무엇을 하셨어요?
고개를 숙인 채 침묵.
-- 빨래하셨어요?
침묵.
위의 장면은 예문 ⑴-㈏의 천사, 즉 막 고등 학교를 졸업한 주인집 딸과 그 집 하숙생이 다방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다. 커피만큼 작게 말했다.는 구절도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당시 커피 가격이 동결되어 물가는 오르는데 커피값은 올릴 수 없었다. 이에 커피의 양을 자꾸만 줄여 갔던 것이다. 한꺼번에 두 잔을 시켜 마시기도 했던 시절의 배경을 알면 재미있는 표현으로 이해될 것이다.
예문 ⑵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문장의 길이다. 문장이 새 행이 진행될때마다 점점 짧아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침묵. 하고 겨우 한 단어로 끝났다. 줄이 점점 짧아지다가 점 하나로 끝났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각 행의 길이를 점점 짧게 해 간 것은 무슨 의도일까? 결코 우연의 결과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작가의 어떤 치밀한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이 소설에서 여고를 갓 졸업한 여주인공은 몹시 수줍음을 타는 소녀다. 거기에 남자와의 첫 데이트.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고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고 몸도 점점 오그라든다. 예문 ⑵의 행의 길이는 바로 이 분위기와 일치한다. 문장의 길이도 함께 점점 오그라들면서 짧아지는 것이다. 침묵. 하고 끝날 때는 마치 소녀의 몸이 조그만 점 하나가 되어 의자에 폭 파묻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만일 문장의 길이를 조절하지 않고, 그리하여 가령 마지막 행을 이번에도 끝내 침묵을 지켰다.라든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침묵으로 일관하였다.라고 했다면 어떠했을까? 글의 분위기, 아니 글의 효과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예문 ⑵를 읽으면서 필자는 마치 석공(石工)이 돌을 다듬듯 작가가 국어 다듬기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문장을 다듬는다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작가가 몇 있다. 특히, 문장의 길이와 관련해서는 피천득과 이태준이다. 이들의 다음 두 예문도 필자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했던 문장들이다.
⑶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 피천득, 오월
⑷ 비둥이란 대체로 무엇이뇨?
하늘이 우룽거림을 천둥이라 땅이 우룽거림을 지둥이라 하나니 여기 코가 우룽거림을 비둥이라 한들.
- 이태준, 비둥
예문 ⑶은 범상한 우리로서는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우아한 간결체 문장이 아닌가 한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먹은 젊은이의 청신한 얼굴과 같은 달이다. 정도가 고작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문체일 것이다. 그런데 예문 ⑶에서는 오월=청신한 얼굴로 뛰었을 뿐만 아니라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란 뛰어난 생략법을 구사하고 있다.
예문 ⑷는 또 다른 매력을 주는 글이다. 역시 전체적으로 생략법에 의해 간결체를 추구한 점이 매력 포인트일 것이다. 비둥이라 한들을 보자. 이처럼 한들로 한 문장을 끝맺는 방식은 국어에는 원칙적으로 없는 방식이다. 한들 어떠리 정도의 어떠리를 생략한 것이겠는데 그것이 신선감을 준다. 이 비슷한 수법은 하늘이 우룽거림을 천둥이라 땅이 우룽거림을 지둥이라 하나니에도 나타난다. 천둥이라 다음에 으레 하고 정도가 쓰일 것을 과감히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예문 ⑷에서는 어미 선택도 주목을 요한다. 무엇이뇨의 -뇨와 하나니의 -나니가 매우 적절히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기행문의 일부인데, 같은 방에 동숙(同宿)하게 된 낯모르는 사람이 코를 하도 심하게 고는 바람에 잠을 설친 이야기를 코믹하게 쓴 글이다. 그 코믹한 분위기에 고어적(古語的)인 냄새가 풍기는 이 어미들이 매우 적절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 집 다섯 살짜리가 가로되의 가로되처럼 근엄한 분위기에 쓰이는 표현이 오히려 코믹한 이야기에 효과를 내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국어는 어미의 선택이 어려울 때가 많다. 어미 하나에 의해 미묘하게 글의 맛이 달라지고 글의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비둥이란 무엇이뇨의 -뇨를 바꾸어 비둥이란 무엇이냐 - 비둥이란 무엇이니, 비둥이란 무엇일까 - 비둥이란 무엇이지 등의 문장으로 만들어 보자. 어느 두 짝도 의미가 똑같지는 않다. 그런데 만일 이 미묘한 의미차를 살려 영어로 번역한다고 가정해 보라. 신(神)이 와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국어는 어미가 발달해 있는데, 이 점에서도 예문 ⑷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는 글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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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필자에게 기쁨을 주었던 몇 가지 묘사의 예를 보기로 한다. 문장 구사에서 작가가 참으로 그 재능을 발휘하는 것은, 그리고 독자가 글의 참맛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묘사에서가 아닌가 한다. 그만큼 필자는 멋진 묘사에 많이 끌리는 편이다. 먼저 이청준의 문장 하나를 보기로 한다.
⑸ 열 걸음도 못 떨어져 앉은 거무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담뱃불만 이따 금씩 숨을 쉬고 있다. - 석화촌(石花村)
대개는담뱃불만 밝아졌다 흐려졌다 하였다고 할 것을 담뱃불에 생명을 주어 담뱃불이 숨을 쉬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만한 비유는 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 비유가 기분 좋고 오래 인상에 남는다.
다음 황동규의 시 한 구절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⑹ 어제 오후 큰눈이 내려
포구(浦口)의 길이 모두 지워졌습니다. - 겨울 편지
눈이 길을 지워 버렸다는 표현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한 시인의 뛰어난 감각이, 그리고 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지우다의 의미를 확장하고 우리의 시각 또한 그만큼 넓혀 주는 것이다. 꼭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써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있는 단어로도 그것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국어는 무한히 그 힘을 확대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국어는 어떻게 부리느냐에 따라 거칠어지려면 끝없이 거칠어질 수도 있고 세련되려면 또 끝없이 세련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조련사를 만나 잘 길들여진다면 국어의 힘이 한결 강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좋은 묘사를 만나면 기쁜 것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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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기행문을 읽노라면 그렇게 압도당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처럼 사람을 압도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화려한 어휘의 구사에서 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覲參記)의 한 부분을 보기로 하자.
⑺ 가도 가도 여전한 밀림 지대이다. 하루쯤으로야 우리의 장원심밀(長遠深密)한 지미(至 味)를 다 알겠느냐 하는 듯 이깔나무의 장림(長林)은 여전히 끌밋한 맵시와 싱싱한 빛 과 삑삑한 숱으로써 사람의 턱 밑에 종주먹5)을 댄다.
이 글은 삼지(三池)에 도달하기 직전의 정경을 묘사한 글이다. 화려한 문체가 사람을 들뜨게 하지만 그 화려한 문체는 또 현란한 어휘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앞세대 분들의 글에서는 우리에게는 낯선, 그래서 권위 있게 느껴지는 한자어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남선의 글에서는 그 외에 고유어 계열의 어휘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위의 예문만 보아도 끌밋한, 숱으로써, 종주먹을 등 다채로운 어휘를 구사하고 있다.
이기문 교수의 당신의 우리말 실력은?은 한때 염상섭 등의 작가의 작품에서 어휘를 뽑아 출제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우리가 당혹했던 것은 우리의 어휘력이 얼마나 빈약한가 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 언어가 변화한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러한 어휘와 우리들을 연결시켜 주어야 할 사람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휘가 단절된 책임을 반드시 작가에게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에서 그 어휘 사용이 너무 단조롭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남다른 어휘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작가의 한 요건이라 한다면,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 우리 작가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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