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조해일 - 아메리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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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아메리카
내용(內容)과 수법(手法)의 다양성(多樣性)
權寧珉

  

 

 조해일(趙海一)은 이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가장 자유로운 작가의 한 사람이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말은 그가 창조해 낸 소설의 세계가 단순한 시간이나 공간의 법칙성에 묶여 있지 않다는 뜻에서이다. 그의 소설은 사회사의 한 사건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며, 현실의 단순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가장 자유로운 양식화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역사적 소재와 상황 의식을 결부시킨 「임꺽정」과 우화적 수법으로 착상된 일종의 미래 소설 「1998년」, 그리고 절실한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아메리카」와 평화로운 미래를 환상적으로 보여 주는 「통일절소묘(統一節素描)」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소설이 보여 주는 환혹(幻惑)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인간 행위의 합리성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이 현실의 도처에서 반박당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순전히 작가인 조해일의 개인적인 경험의 비전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자아(自我)의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소설은 인간을 현실적 상황에 맞서게 하는 꾸준한 긴장을 수반한다. 더구나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충동하는 광란(狂亂)까지도 담고 있다. 우리는 그의 소설에서 어떤 경우에는 서두부터 사소한 인간 드라마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되기도 하고, 전체적인 소설 내용의 윤곽이 드러나기도 전에 진실한 우리 자신의 용모를 그의 소설 속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의 중요성은 작품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온갖 시련 속에, 그리고 현실이 모든 망령을 극복하고 좀 더 가까이 우리들의 적나라한 현실에 접근해 가도록 해주는 그러한 기회 속에 그의 소설의 중요성은 존재한다.

   조해일의 문학적인 방향은 그의 첫 작품 <매일 죽는 사람>에서 이미 상당한 포괄성을 지닌 채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 작품은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선택도 부여받지 못한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러인 <그>는 언제나 들러리에 불과하다. 스타의 한 칼에 무수히 죽고, 무수히 쓰러지는 들러리이다. <그>에게는 각본대로 짜여진 한 도막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의 배역 이외에 <그>에게는 어떤 연기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의 한 장면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현장이 바로 그 영화 장면의 한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음미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세상의 모든 편리한 방식,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모든 편리한 규범에 지쳐 버린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밟아 온 길을 돌아보거나 또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퍼스펙티브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결말이 나거나 최종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 다리가 경직이라도 일으킨 듯, 뻣뻣하고 불편했으나 그는 안간힘을 써서 걸었다. 골목의 가게들은 아직도 불을 켜 놓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죽은 사람을 전송하기 위한 장의의 불빛처럼 보였다. 어느 나라에서는, 맨발은 바로 입관식 전의 사자(死者)를 뜻한다던가? 그는 생각했다. 하긴, 어디 나만이 죽는 것이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커다란 소멸의 흐름 속에 던져진 채 있다. 시간까지도…….누구나 매일매일 조금씩은 죽어 가면서 살고 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인용의 맨 끝 구절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자신의 삶의 어떤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작가의 소박한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이란 구체적인 경험의 순간들 속에서 그 자체가 성취된다. 소설도 그와 같아서 순간들의 창조 속에서 그 자체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아주 포괄적인 형식이기 때문에 순간 순간의 인간의 모든 다양성을 위한 여백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소설이 의미 있는 인간 경험의 총체적인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조해일은 「매일 죽는 사람」에서 우리 모두가 요구하는 도덕적 생활을 창조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이 소설은 인간의 고뇌의 크기를 완벽하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대한 정리된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의 현실적 상황이나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활 방식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서는 흔히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 소설의 결말에서 인생을 살아 볼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결심을 <그>를 통해 보여 주려고 한 것은, 하나의 사족과도 같은 것이긴 하지만, 소설적인 가능성을 말하는 작가의 비전에 해당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매일 죽는 사람」이후 조해일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과 확신적인 자세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가치 있는 삶의 어려움을 사소하고도 주변적인 사건을 통해 그려 보이기 시작한다. 행위와 성격에 생생한 시각적 윤곽을 이루며 결합되고 있는 <뿔>과 <멘드롱 따또>가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하는 작품이다.

  「뿔」은 작가 조해일이 세세한 인간의 행동과 그 표정까지도 얼마나 치밀하게 정서적 가치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인 <가순호>가 왕십리에서 흑석동까지 그의 이삿짐을 옮기는 과정이 이 작품의 근본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선적 구조 위에 배열된 여러 가지 삽화들이 인간의 삶에 작용하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을 유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점을 간과할 경우, 이 소설에서 충만하고도 유익한 삶에 근접할 수 있는 인간다움의 참모습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 의도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소설 <뿔>이 갖고 있는 작품 구조상의 밀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작품에서 지게꾼을 통한 인간의 참모습에 대한 주인공 <가순호>의 관찰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 주인공 자신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 대한 이해의 관건은 주인공인 <가순호>가 가족들과 떨어진 채 이리저리 이사 다니게 된 개인적 동기와 사회 전체의 모습이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느냐를 바르게 인식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변두리 교회 하나를 맡아서 하느님만 갈구하며 살고 있는 아버지 내외와 별정치적 신념도 없으면서 타성적인 야당 생활을 하고 있는 맏형,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임관 이후 어느 동기생보다 빠른 진급으로 중령에 이르러 있는 둘째형, 미국인 상사의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여고 때 이래의 도미 계획을 착착 실천에 옮기고 있는 누이동생, 이상주의자다운 명석한 조직 능력도 없이 무턱대고 노동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셋째형, 그리고 잡지사 근처에 있는 다방에 드나들며 책 읽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어쩌다 글줄이나 얻어 싣게 되거나 번역 거리라도 맡게 되면 거기서 얻는 푼돈으로 간신히 하숙비나 물게 되는 것이 고작인 가 순호 자기 자신. 이렇게 주욱 머리에 떠올려 봐도 누구 하나 참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는 건 그리고 개답게 살지 못하는 개와 다를 바 없다. 이를테면 짖지 않는 개가 무슨 개란 말인가. 하긴 무는 개가 있기는 하다.

  인용으로 보아, 주인공 <가순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가족들과의 관계에 근거한다. 그의 가족들은 각각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모든 양식을 망라하고 있지만, 전혀 인간답지 못한 삶에 대한 태도가 문제이다. 구체적인 소설적 장면에서 이러한 문제가 노출된 것은 주인공과 그의 형의 만남에서이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과 알력은 그들의 가시 돋친 대화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속에 현실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암시가 작용한다. 주인공의 정신적 방황이 이러한 문제들에 깊이 연관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을 상황의 실감나는 묘사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참다운 소설이 언제나 인간적인 척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사실 그대로, 점묘되는 삽화처럼 그려지고 있는 지게꾼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정감 어리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뿔」의 경우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 외적 상황에 의해 어떻게 무기력해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작품이 「멘드롱 따또」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동기의 오류, 현실과 상상의 혼동, 그리고 어떠한 사회에서나 흔희 볼 수 있는 약함과 어리석음 들을 통해 삶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멘뜨롱 따또>라는 별명을 갖게 되는 <김관호>와 <우리>라는 상대적인 존재의 설정은 이 작품의 소설적 상황에 긴장과 갈등을 수반하도록 한다. <김관호>의 인간적인 행동은 사회적 제도와 규범의 틀 속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오히려 무서운 선입견으로 작용하고, 그러한 선입견이 한 인간의 행동을 밝히고 요약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악의적인 수법으로 이용된다. <김관호>와 <우리>들 사이에 일어나는 낱낱의 사건들은 선입견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엉뚱한 옆길로 벗어나고, 양자간의 진실한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둡게 드리워진 선입견의 허울을 벗겨 내는 작가의 작업은 인간성에 대한 솔직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인공 <김관호>가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며 죽게 되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수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해일이 인간의 경험을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확고한 위치에 도달한 것은 그의 중편 「아메리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천박한 인생관에 기반을 둔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보여 주면서, 인간의 삶의 지루하고도 사소한 점, 전혀 매력적일 수 없는 요소들, 그리고 그러한 요소가 들끓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는 어려움 등 어떠한 것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군대에서 제대한 <나>라는 주인공이 기지촌에서 숙부가 경영하는 홀에 취직하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의 스토리는, 모든 과거의 의식, 혹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워 버리는 환락의 현재적 시간성 위에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모든 등장 인물들은 무시간적(無時間的)이며 그들의 삶 역시 허황되기 짝이 없다. 사소한 좌절감에 몸부림치면서도 때로는 자신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환락을 만끽하는 댄서들의 생활에서 <나>는 고통스런 한국인의 삶의 양식의 한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미군 병사들에게 기생하고 있는 기지촌의 댄서들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세계와 함께 있는 것이며, 그들의 삶 자체가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불행한 현실과,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모순된 사회 구조와 대결하기 위해 서울에의 취직 길을 포기하고 만다. 물론 작가는 <나>의 이러한 결의와 행동이 어떤 방향으로 경험적 현실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인지 밝히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새로이 각성된 삶과 그것을 지향하는 진지한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조해일의 소설은 단순히 주인공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서로 얽혀져서 그들의 삶이 어떤 운명의 양상을 띠는 그런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보여 주는 현실에 대한 가장 자유로운 양식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가 일련의 연작의 형태를 빌어 소설적 형상화에 접근하고 있는 「임꺽정」에서 그 중요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임꺽정」은 임꺽정(林巨正)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활동에 대한 작가의 의도적인 재단에 의해 한 조각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러한 에피소드적 수법이 담고 있는 문제의 중요성은 소설적 구조의 특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소재를 통해 현실적인 상황 의식을 담고자 하는 작가의 특유한 현실 감각과 지적 고뇌가 이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임꺽정」의 경우가 역사의 한 장면을 통한 현실에 대한 반증이라고 한다면,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무쇠탈」과 「심리학자(心理學者)들」을 통해 상당한 박진감으로 나타난다.

  「무쇠탈」에서 대하게 되는 기지에 넘치는 언어와 문체는 숨가쁘다. 그러나 이 소설을 끝까지 읽는 것은 하나의 모험을 강행하는 것과도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의 훈련에 속하는 일이며, 어이없이 웃어 버릴 수밖에 없는 이 소설의 결말의 불쾌감은 하나의 극적 경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혼 부부의 아파트에 갑자기 침입한 강도들의 여유 있는 행동은 그들이 벌이는 도박판의 장면에서 야릇한 감흥을 일으키게 하지만, 마침내 여인을 강탈하게 될 때, 충격적인 배반감을 어찌 할 수가 없다. 흔히 일컫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한자 숙어의 소설적인 해명을 우리는 <무쇠탈>을 통해 보게 되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무테 안경> <네모턱> <물방울 무늬 넥타이>라는 인상 착의로만 설명되고 있는 세 명의 강도는, 작가가 고의적으로 추상화시키고자 하는 현실적 상황과 상통한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때때로 마주치게 되는 형체와 속성을 분간하기 어려운 고통스런 상황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 간단한 줄거리의 소설을 통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전도된 상황이 현실의 도처에 출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현실적 상황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무쇠탈」에서 환기되고 있는 상황 의식이 윤리성의 문제로 확대, 타개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심리학자들」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은 시외 버스 안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통해 인간 행위의 기준이라는 것이 갖는 허세와 위선과 약점을 폭로하고 있다. 한 여인의 팔목시계를 소매치기하는 일당들의 행위가 공공연하게 묵인되는 가운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그들의 범법 행위가 무고한 개인에게 계속적인 피해를 끼치도록 허락되지는 않는다. 의분을 참지 못한 청년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승객들의 표정에 조금씩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망설임과 조바심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그들의 얼굴은 차츰 상기해 갔다. 코르덴 모자가 그러한 승객들을 아주 관대한 미소를 띠고, 그러나 눈에 힘을 주어 둘러보았다. 그러나 승객들은 거의 자유롭게 자기들의 생각에만 골몰한 듯했다. 코르덴 모자의 관대한 미소가 약간 일그러지며 당황한 표정이 스쳐갔다. 그때 청년이 가래 끊는 듯한, 거의 젖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외쳤다.

  “우리는……사람이 아닙니까!”

  이 대목에서 고양된 정서와 사실을 묘사하는 치밀한 문체는 소설의 극적인 결말을 도와준다. 인간은 쉽사리 상황이나 습관에 길들지만, 인간다움의 의식은 매몰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충동을 제한하는 광기에 찬 사회적 상황은 인간의 정신으로 타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적인 척도와 연관된다.

  소설은 흔히 꾸며진 이야기라는 평범한 정의로 규정되고 있지만, 작가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일상적인 현실에서의 잡다한 경험들은 소설의 세계 속에서 재구성되고 질서가 부여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마련이다.

  조해일의 소설은 작가의 경험적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더라도 확실한 윤곽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소설적 의미의 극도의 함축성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의 소설은 또한 인생의 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세부적인 묘사, 특이한 언어 구사와 섬세한 문체가 그 요소를 전달한다. 이러한 조해일의 소설적 수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현학적인 심각성을 회피하면서도 일종의 유쾌한 당혹감을 느끼게 하며, 인간의 참모습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극적인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비교적 단편적인 내용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서의 고유한 신념과 객관성을 지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우리들이 처하고 있는 현실적 고뇌에 어떤 출구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들의 정신 속에 그러한 고뇌를 반사해 주는 여러 가지 징후를 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현실 세계에 대한 의식이 강한 그의 소설 속에서 용케도 모든 것에 결론을 짓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상상력의 함축성을 살려 낸다. 인간이 살아 잇다는 것만으로 그 삶이 충족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놓고, 그가 소설을 통해 펼치는 지성의 드라마는 언제나 그의 독특한 사상적 톤을 유지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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