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by 송화은율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狂噴(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김윤식, 김종철저 문학교과서)
첩첩한 돌 사이에 미친 듯이 내뿜어 겹겹 봉우리에 울리니
사람의 말소리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항상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림이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둘러 싸네 (이문규, 권오만 문학교과서)
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 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 이은상 옮김)
바위 바위 내닫는 물 천봉을 우짖음은,
속세의 시비 소리 혹시나마 들릴세라
일부러 물소리로 하여 귀를 먹게 함일다. (손중섭 편저 옛시정을 더듬어)
미친 물(奔) 첩첩의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려,
사람들의 말소리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세상의 시비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쌌네. (오세영, 서대석 문학교과서)
요점 정리
작자 : 최치원(崔致遠)
갈래 : 칠언절구, 서정시
연대 : 신라 말기
성격 : 상징적, 현실비판적
표현 : 대구법, 의인법
구성 : 기승전결의 4단 구성
주제 : 산중에 은둔하고 싶은 심정, 자연을 통해 현실적 고뇌 극복 , 자연 속의 침잠을 통해 세속과 거리를 두고자 함.
의의 : 해동 문동인 최치원의 대표적 한시
출전 : <동문선> 제 19권
내용 연구
기 |
웅장한 물(단절의 이미지)소리를 표현한 것으로 스스로를 인간 세상과 단절시키고자 하는 작자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
자연의 소리 |
승 |
시끄러운 시비 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작자의 내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
인간의 소리 |
전 |
작자의 내면 세계가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 |
작가의 심리 |
결 |
물소리는 작자의 내면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켜 고독에 침잠하고자 하는 작자의 심리를 잘 나타내었다. 여기서 유수가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
세속과 격리 |
狂噴 : 미친 듯 내뿜음일 때는 噴이 타당하나, 미친 듯이 달릴 때는 奔이 타당하다. 그런데 일부 교과서는 분을 서로 다르게 쓰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이 물을 통해서 세상과 단절하려는 의미가 강하다고 볼 때에는 噴이 더 강한 느낌을 주고 타당한 듯하다.
疊石 : 첩첩이 쌓인 바위
重巒 : 겹겹이 들어선 산봉우리. 만은 뫼 만
人語 : 사람들의 말소리
難分 : 분간하기 어렵다
是非聲 : 옳으니 그리니 하는 말다툼 소리
故 : 짐짓
籠 : 싸다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 작자의 현실적 갈등이 잘 나타나 있음
狂噴疊石(광분첩석) : 첩첩의 바위를 미친 둣이 달림
吼重巒(후중만) : 겹겹의 봉우리를 울림
人語難分(인어난분) : 사람의 말소리를 분간하기 어려움
咫尺間(지척간) : 매우 가까운 거리
常恐(상공) : 항상 두려워 함, 행여 ∼할까 늘 마음을 씀
是非聲到耳(시비성도이) : 시비를 따지는 소리가 귀에 들리다
敎流水(교류수) : 흐르는 물로 하여금 ∼하게 하다
盡籠山(진롱산) : 온 산을 감싸다
이해와 감상
작자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하여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그래서 작자는 흔히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라고 일컬어진다. 귀국 후 최치원은 시무책을 올리며 국정의 쇄신을 꾀해 보기도 했으나 결국 현실과 뜻이 맞지 않아 말년에는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은 7언 절구로, 세상을 등진 서정적 자아의 모습을 잘 그렸다. 기(起)에서는 산골을 흐르는 냇물의 모습과 소리를 묘사했고, 승(承)에서는 그 소리가 사람 사이를 막아 버린다고 했다. 전(轉)에서 서정적 자아의 심적 태도를 드러낸 다음, 결(結)에서는 기·승 2구(句)를 받아 그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했다. 기(起)에서의 묘사와 결(結)에서의 마무리가 탁월한 작품이다.
작자의 심리 상태를 극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법은 대조법이고, 자연의 물소리와 대조되는 것은 是非聲(시비성)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물의 이미지는 단절을 의미하고 주제를 함축적으로 나타낸 시어는 流水(유수)이다.
이 시는 현실적으로 패배한 지식인 최치원의 내면적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해와 감상1
유학자들은 왜 신선을 꿈꾸었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 이미 학을 타고 피리를 부는 신선, 용과 봉황을 타고 하늘을 나는 선인 등이 그려지는 등 신선 사상은 고대로부터 한국인의 의식 구조 내면에 침전되어 면면히 흘러 왔고, 다양한 문화 현상에 혼재해 나타났다. 신선의 삶은 도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유가의 뜻이 있는 선비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시대 상황에 따라 신선처럼 사는 삶을 추구하곤 했다. 특히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더욱 그랬다. 현실의 부조리와 폭력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표상으로서, 신선은 때론 은일자(隱逸者)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고 하여 한국 사상의 정체성에 관해 의미 있는 말을 남긴 최치원(崔致遠, 857년~?)은 「제가야산독서당시(題伽倻山讀書堂詩)」에서 이렇게 읊었다.
미친 듯 바위에 내달아 겹겹의 산봉우리 울리기에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걱정하여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에워싸게 했노라.
최치원은 이 시 기구(起句)의 ‘광분첩석(狂奔疊石)’에서 폐쇄적인 당시 지도층의 부패와 정쟁을, 승구(承句)의 ‘인어난분(人語難分) ’에서 자신이 올린 시무책(時務策)의 개혁 구상이 시시비비 벽에 부딪쳐 좌초되었음을, 전구(轉句)와 결구에서 세상과 단절하고자 하는 심정을 드러낸다. 이런 심정은 그로 하여금 결국 가야산에 은둔하게 한다.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9년)은 “최치원은 신선이러니, 표연히 세상을 떠나 버렸네… 혼탁한 이 세상에 태어나긴 했어도, 청천의 학과 같아, 어찌 뭇 새의 벗이야 되랴.”(林億齡, 「雙溪寺詩」, 『東國輿地勝覽』, 권23, “致遠仙人也. 飄然謝世 … 濁世身如寄, 靑天鶴不”)고 읊었다. 이런 삶을 현실도피적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입장을 달리해 보면 현실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최치원과 같이, 혼탁한 세상에서 신선 같은 삶을 살고자 한 지식인은 역사적으로 매우 많았다.(출처 : 조민환 - 춘천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문화와 나 '2003년 겨울)
심화 자료
최치원
신라시대의 학자로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고,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퓨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섬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격황소서
일명 토황소격문이라고 이라 하고,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벼슬하며 황소(黃巢)를 치기 위하여 지은 격문(檄文)으로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881년(헌강왕 7) 최치원은 그 토벌총사령관인 고변(高폿)의 휘하에 종군하였는데,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명문이었다 한다.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
격황소서 본문 일부
광명 2년 7월 8일 제도도통검교태위 모는 황소에게 고하노니, 대저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음을 도라 하고 위태로움에 임해서 변통을 앎을 권이라 한다. 슬기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여 성취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역하다가 실패하게 된다. 그런즉 백 년의 생명이지만 살고 죽는 것을 기약하기 어렵고, 만 가지 일은 마음이 주인임에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이제 내가 왕사로서 정벌함은 있으나 싸우지 않고, 군정은 먼저 은혜를 베풀고 베어 죽이는 것은 뒤로 한다. 장차 상경을 수복하고 진실로 큰 믿음을 펴려고 함에 공경스럽게 가유를 받들어 간사한 꾀를 쳐부수려고 한다. 또 너는 본래 먼 시골 구석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떳떳한 기강을 어지럽게 하며 드디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신기를 노리며 성궐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이미 죄는 하늘에 다을만큼 지극하였으니 반드시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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