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정의란 무엇인가?

by 송화은율
반응형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논하고, 사회의 부정의가 팽배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국가란 어떤 것인가?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 중에서 󰡐마징가 Z󰡑라는 것이 있었다. 아수라 백작과 쇠돌이가 조정하는 마징가의 대결...마징가는 󰡐좋은 놈󰡑이었고, 아수라 백작 쪽은 󰡐나쁜 놈󰡑이었다. 선과 악이 분명했다는 애기다. 이 만화에서의 정의는 마징가가 아수라 백작군()을 완전히 무찔렀을 때 실현되었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는? 현실에서도 󰡐악당󰡑들만 무찌른다면 정의가 실현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먼저 다음을 고려해 보라. 도대체 누가 악당인가?

 

몇 해 전 아프리카 한 국가에서 일어나 미대사관 폭파 테러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렇다면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인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것이다. 이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악마󰡑들이다. 그러나, 테러집단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숭고한󰡐애국지사󰡑. 왜냐하면,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폭탄을 터뜨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히려 미국의 부당한 대우와 폭거를 알리고 저항하는 것에 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제압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이 저항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양 쪽이 전부 󰡐정의󰡑에 호소하여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점이다. 테러를 당한 쪽은 공격한 쪽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하고, 테러를 행한 쪽은 정의를 이룩한 행위였을 뿐이라고 반박하다. 양 쪽이 모두 자신이 󰡐정의로왔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도 이와 같다. 누구도 자신이 부정의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독재자도 󰡐부정의󰡑를 행하기 위해서 국가를 파멸시켰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정의󰡑를 실현 하려고했으면 일부 󰡐부정의󰡑한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두 내세우고 있는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1. '강자의 정의가 곧 정의이다.' : 정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견해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정의란 아무 것도 아니다(Jistice is nothing) 정의는 단순히 명분일 뿐이며, 결국 강한 자의 의견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 진다". 경찰관 출신이 몰던 차와 평범한 서민이 몰고 가던 차가 부딪혔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경우는 경찰관 출신이 몰던 차가 유리한 판결을 받는다. 선진국에서 석면공장을 세우면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로 지탄받지만, 그 선진국이 후진 국가에 석면 공장을 짓게 하고 수입하는 것은 󰡐정당한 국제 상거래󰡑로 인정된다. 이 모든 행위가 말해주는 것은 정의란 오직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힘의 논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롭기 이전에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이 곧 정의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당장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정의가 명분 만은 아님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수 십만 명의 목숨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철권을 휘두르던 독재자라도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천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릴 수 있다. 또한, 위안부 문제를 보자. 일본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자국의 이익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파해치며 해당국,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인간 사회는 힘으로만 이루어진 동물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정의라는 것이 있다. 그 것이 무엇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고 해도.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2. '정의는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 정의에 대한 실용주의적 견해

 

정의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면 이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해답을 우리는 범죄 조직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범죄 조직은 사회의 악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범죄 조직 만큼 󰡐윤리성󰡑을 강조하는 집단이 없다. 선임자에 대한 반항은 곧 죽음이며 배신이란 곧 평생 불구자로 살만큼의 보복을 받음을 의미한다. 충성, 윗사람에 대한 존경과 복종, 서로간의 유대감...모두가 정의와 관련된 덕목들이다. 이 덕목들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도덕적인 집단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것은 정의가 사회를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생활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 정의는 유익하다. 만약 범죄 집단의 모든 이들이 이러한 덕목을 무시해 버리고 산다면, 집단은 그 순간부터 존재할 수 없다. 사회 전체도 마찬가지다. 집단 내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존중할 것을 보장하지 않으면 사회는 결코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우리의 생존 보장이라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유용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정의를 보는 일면적인 견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의가 나에게 유익하지 않을지라도 󰡐정의로워지기󰡑 때문이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사건'을 보라. 배가 가라앉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인데도 남자들은 노약자와 여성들에게 보트의 자리를 양보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악단단원들은 승객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죽는 순간까지 음악을 연주한다. 이들에게 정의가 유익했는가? 자신이 없는 사회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정의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렇다면 정의는 과연 우리에게 유용하기에 존재하는 가치인가?

 

 

3. '정의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이다' : 정의에 대한 이상주의적 견해

 

그렇다면 오히려 정의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아닐까? 인간인 이상 추구해야 하는.... 󰡐신의 이름으로󰡑, 󰡐천리(天理)를 따라󰡑, 와 같은 말들이 전근대적으로 보이고, 비합리적인 듯 들리지만, 앞서의 고찰과 연관 지어 보면 그다지 틀린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정의는 단순한 명분만도 아니며, 단순히 이익이 되기 때문에 따르는 것도 아니기에.

그러나, 보편적 가치로 정의를 보았을 경우, 이 정의는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예컨대, 재개발 지역에서 20층 짜리 건물을 지어야겠다고 주장하는 쪽과, 다른 이들의 일조권을 침해받기 때문에 이를 허락할 수 없다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상황을 생각해 보라. 둘 다 정의를 내세운다. 건물을 짓겠다는 측은 자신의 재산권 행사라는 정의를, 못 짓게 하는 쪽은 타인의 권리 보호라는 정의를. 이 경우 누가 이기는가? 결국 힘이 있는 쪽의 손이 올라가지 않는가?

또한, 죽어가는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 공금에 손을 댄 은행원을 생각해 보자. 죽어가는 부모님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임에 반해, 공금을 유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경우 어떻게 이 사람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보편적 가치인 정의는 이 경우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있다. 앞서 일조권 분쟁의 경우, 아무리 힘있는 자가 이긴다고 할지라도 정의는 있다. 법률의 논리적 해석, 상황의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항고, 상고가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약 힘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이라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분개하고 해결책을 요구한다. 이 것이 바로 정의가 있음의 예이다. 그리고 또한, 앞서 은행원의 예에서도 우리가 이러한 상황자체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정의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가 과연 무엇인가를 정의 내리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정의로 보느냐에 따라 사회의 가치 규준은 크게 달라진다. 이 번 시간을 통해서 정의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교제에 있는 논술 기출 문제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자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사형을 언도받는다. 소크라테스에게 씌워진 죄명은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것과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라는 것이었다. 대화편 '변명'은 이러한 죄명에 맞서서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행한 변론이다.

 

변론에도 불구하고, 500인의 법정은 소크라테스에게 360:240 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은 아테네 민주정치에 우민 통치라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오늘날 누구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원인은 아테네의 우매한 민중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등에'이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민중의 어리석음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고받은 그 순간에서도, '등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재판관들에게 눈물로 자비를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는 재판관들이 '옳고 그른 것을 음미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게 하도록'노력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재판관들의 그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지 못해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자신의 이로움보다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그의 모습은 순간의 이익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옳음'을 위해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광신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그러면 이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들어보기로 하자.

 

판결전 변론(17a-35d)

 

'편견에 대한 변론(18a-24b) : 고발자는 나를 다음과 같은 죄를 범하였다고 말한다. , 그들은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비의를 탐구하고 설득력이 약한 주장을 강한 주장보다 더 그럴 듯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신론적인 행동을 공공연히 행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모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함은 사실, 나를 고발한 멜레투스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이 것은 오래 전부터 나에게 가해져 온 풍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고발인은 멜레투스가 아니라, 이전부터 나돌던 '풍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풍문을 퍼뜨리는 사람은 '군중'일 뿐 고발할 수 있는 한 사람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풍문이라는 '오래된 고발자'에게 먼저 변론하고 싶다.

 

오래전 나의 친구 카에레폰이 델피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신탁의 결과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신탁의 겨로가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신탁이 옳은지를 알기 위해서 세상에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이 나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를 검토할 때마다 나느 그들이 진정 현명한 것이 아니라, '현명해 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무지할 뿐이었다. 내가 그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반면,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지혜를 검증하려고 했던 나의 행위는 진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들에게는 무척 불쾌했을 것이다. 내가 모함을 받은 이유는 바로 이 것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그들의 지혜가 허세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서 그들을 불쾌하게 한 것 말이다. 나를 추종하던 젊은이들이 나의 행동을 모방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질문을 할 때, 그들은 올바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이 것이 또한 그들을 화나게 했고, 그들은 나에게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비난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철학자들에게 가하는 상투적인 비판을 던졌다. '자연(NATURE)'의 비의를 캐고 있다.''무신론자다', '약한 논변을 강하게 한다'등이 그런 것들이다.

 

고발자들에 대한 비판(24B-28A) : 뿐만 아니라 멜레투스와 고발자들은 그들이 고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멜레투스는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나 외의 모든 아테네 시민들은 젊은이들을 옳게 인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말을 조련시킬 때 말을 훌륭하게 길들이는 사람은 숙달된 조련사일 뿐이다. 일반 대중은 말의 버릇을 망쳐 놀 뿐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을 옳게 교육시키는 것은, 옳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멜레투스의 말에 따르면 나는 나쁜 시민이다. 어떤 사람도 나쁜 사람 겨ᄏ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멜레투스는 내가 무신론자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주자은 모순된 것이다. 그는 내가 철저한 무신론자이면서 초현상적인 현상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초자연적 존재는 믿지 않으면서 초자연적 현상은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재검토함(28A-34B) : 당신들은 재판을 받는 나의 태도가 건방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그러나 사람은 무릇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나에게 사람들의 삶이 옳은지 그른지,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지혜가 과연 진정한 지혜인지를 검토하게끔 하였다. (이것은 신탁, 꿈 등을 통하여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면, 그것은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당신들으리 삶을 검토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등에를 잃게되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왜 냐가 의회에서 이러한 작업을 행하지 않고 개인적으로만 했는가 하고 비판할 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의회에서 이런 일을 행하였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이로운 것을 주기 전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공적으로 당신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죽음이 두려워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레온의 체포를 반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고발자들은 내가 당신들을 타락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 때문에 타락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면 왜 멜레투스는 그들을 부르지 않는가? 오히려 나와 함꼐 삶과 지혜를 검증했던 사람들은 나를 옹호하려고 하고 있다.

 

결론: 재판관들의 자비에 호소하지 않음(34B-35D) : 나는 당신들에게 가족이나 눈물로 호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들과 국가에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재판을 함에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공정히 가릴 것을 선서하였다. 눈물이나 가족에 의한 호소로 당신들의 판단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이로ᄒ게 되는 방향으로 판결 내리는 것을 신과 당신들에게 맡기려 한다.

 

판결 후 형량에 대한 변론

 

나는 당신들의 판결을 보고 놀랐다. 멜레투스는 나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나에게 가해진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짧았다. 나는 누구도 해친 적이 없다. 나는 당신들에게 유익한 일을 했던 것이다. 유익한 일을 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할 것은 프리다니움에서의 만찬이지, 사형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무죄라고 확신하므로 나의 형량을 제안하지 않겠다. 자신과 사람들의 삶을 토의를 통해서 검증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검증 받지 않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들이 벌금을 부과한다면, 나는 벌금을 낼 수도 있다. 나는 1은미라는 낼 수가 있다. 나의 친구 플라톤과 클리톤, 클리토불루스는 30미나를 내라고 한다. 그렇게 하겠다. 왜냐하면 재산상의 손실은 벌금을 내는 사람 자신을 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판결 후 연설(38C-42A)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에 대한 연설(38C-39E): 나는 판결의 결과가 나 자신의 논변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다신들 앞에서 울며 용서를 호소하지 않은 것이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병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도망가 버리면 된다. 그러나 사악함을 피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강하고 빠르다. 나는 죽음에 따라잡혔지만, 당신들은 사악함에 따라잡힐 것이다.

 

무죄방면을 선고한 사람들에 대한 연설(39E-42A): 당신들은 나의 운명이 좋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가 악한 일을 할 때마다 나에게 충고를 보냈던 나의 '다이몬'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화에서처럼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어느 것이더라도 죽음은 좋은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 죽음이란 깊은 휴식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 다른 세계에서는 신들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줄 것이며, 또한 삶에 대한 검토를 현명한 사람들과 계속할 수 있기게 좋은 것이다.

 

당신들도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옳은 사람을 신이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나는 나의 적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은 부탁하고 싶다. 만약 나의 아들이 성장하여 선함 자체보다 돈이나 명예에 더 신경 쓴다면, 그리고 그 자신을 이유 없이 더 높게 보고 있다면, 내가 당신들에게 한 방식으로 나의 아들을 설득해 달라.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 모두는 정의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가야 한다. 나는 죽음으로, 당신들은 삶으로.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

 

교사 안광복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