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전광용 - 현실의 나신(現實의 裸身)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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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현실의 나신(現實의 裸身)
朴 東 奎

 

 

전광용 씨의 호는 백사(白史)이다. '어찌 일이 그렇소'하고 강한 함경도 사투리를 버리지 않고, 독특하게 쩌렁쩌렁하는 목소리를 가졌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이며 교수이고 문학 박사이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일면이 문학적 편력에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1919년 3월1일 함경 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나 21세기가 되던 해, 동아 일보 신춘 문예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로 처음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1939년 등단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것은 그가 밝히지 않은 점도 있을 것이고,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는 해방 후 본격적인 창작 활동의 시기를 더욱 중시한 때문이리라.

 1947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과에 입학, 《시탑(詩塔)》 동인이 되어 김윤성. 조남사. 공중인. 정한모와 어울려 문학적 수업을 펼쳐 나갔다. 그리고 그의 최초의 단편집인 《흑산도》의 발문(跋文)에서 '나의 작품 행동에 끈기 있는 격려와 편달(鞭撻)을 퍼붓는'이라고 밝힌 《주막》 동인을 그 다음해인 1948년에 만들어서, 정한숙. 남상규. 김봉혁. 등의 동인과 거의 매월 작품 낭독회나 회람 등을 통해 서로의 문학 활동을 도와 나갔다. 환도(還都) 후인 1955년 조선 일보 신춘 문예에 <흑산도>가 당선되었다. 그의 두 번째 문단 데뷔였다.

 그 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고, <사상계(思想界)>에 <신소설 연구>라는 알찬 학술 논문을 1년간 연재하여 학계에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창작 활동은 1962년 동인 문학상을 받기까지 50년대의 전위적 위치에 서서 전통적 수법에 의한 현장의 소설로 평가되면서, 성의 있는 활동을 하였다. 당시에 발표된 중요한 작품들을 열거하여 보면, <G.M.C>라는 사회 고발적 주제의 작품을 필두로, <동혈 인간(動血人間)> <지층(地層)> <영 1234> <사수(射手)> <크라운장> <충매화(蟲媒花)> 등이다.

 <꺼삐딴 리>로써 동인상을 받은 후 장편 <태백 산맥>, 단편 <나신(裸身)> <젊은 소용돌이> 등을 통하여 인간의 새로운 삶이 역정(驛程)을 그려 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죽음의 자세>에서와 같은 새로운 기법의 실험도 기도하였다.

 그는 그렇게 다산(多産)의 작가는 아니다. 오히려 과작하는 편이다. 그는 펜 클럽 사무총장, 부회장을 거치는 한편 국어국문학회 대표 이사를 역임하는 등 사회 활동도 폭이 넓다.

 소설에 있어서 특이한 소재(素材)야말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첫 번째 기술이 된다. 광부촌이라든지 군인 집단. 창녀촌. 기지촌. 바라크촌 등 특이한 인간 집단의 생활이야말로 그 자체가 어떤 특이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가는 이러한 인간 집단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이 특이한 인간 집단이 단순히 어떤 하나의 호기심적 대상(對象)일 때, 그것은 소설의 참다운 소재적 특이성을 가진 것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주는 인간 관계의 깊이와 농도, 삶의 진실적 양태(樣態)와 굴절 등을 승화시켜 내어야만 비로소 소재의 특이성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논리가 오히려 그 반대적 입장에서는 독자적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즉, 평범하고 일상성이 짙은 소재를 선택하였을 경우 독자들은 자기들 주변에서 흔히 체험하는 것들이라고 지루해하거나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한 인간의 영원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나 삶의 행적 등을 독자들은 그것이 단순히 특이하지 않다는 것만으로 외면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성은 무엇보다도 소재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얻은 결과이다. 그것은 소설로서 소재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의 가장 기초적 설명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이 기초적 설명을 문제삼는 것은 전광용의 소설에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점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이한 인간 집단에 대한 강력한 집착과 일상성에 젖은 인간 집단에 대한 애착 등 두 가지의 극단적인 대조적 소재를 전광용의 소설에서는 찾을 수 있다.

 그의 초기작이며, 바닷가 어부의 특이한 생활 철학과 윤리 의식을 가진 인간들의 생활상을 다룬 <흑산도>와 국토 건설대라는 특이한 병역 기피 집단의 생태를 다룬 장편 <태백 산맥> 등이 특이한 소재를 가진 부류이고, 일제시대부터 미군이 있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엮어 놓아 동인상을 받은 <꺼삐딴리>나, 운전 조수의 이야기인 <영 1234> <주봉> <충매화> 등은 일상성이 짙은 평범한 우리 주변을 소재로 한 소설류이다.

 이러한 두 가지 부류의 극단적인 대조적 경향을 보여 주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 대조적 소재의 선택에서 찾을 수 있는 점은 그의 소설 기법적 특징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 그가 지닌 체험의 성질을 항상 근거로 하고 있다.

 그 체험의 성질이 과거 직접 겪었던 일이라든가 현장에서 목도하였다든가 하는 직접적인 체험과, 다른 누구를 통한 구술이라든가 혹은 소설가 특유의 상상에 의한 것이라든가 하는 간접적 체험이 그것이다.

 누구나 소설가는 이 두 체험을 혼입해서 소설을 쓰는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이 두 체험이 소설의 질량을 다르게 하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먼저 <꺼삐딴 리>와 같은 인간의 생애와 민족적 역사의 접합 관계라든가 하는 파노라마적 전개의 양식은 과거의 직접적 체험에 의해 리얼리티를 얻은 것이고, <태백 산맥>과 같은 작품은 국토 건설대라는 특이한 집단의 경험을 듣고 쓴 간접적 체험의 소설이다. 그리고 이들 두 작품은 극단적인 대조적 양상을 보여준다. 즉, <꺼삐딴 리>는 인간의 역사적 기술이며 <태백 산맥>은 인간의 공간적 상관 관계를 그려 놓은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전관용 씨는 직접적 체험의 소재를 다루는 경우 대체로 인간의 생애적 역사나 혹은 사건적 전개를 보여 주고, 간접적 체험의 소재를 다룰 때는 인간 관계의 공간적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지닌 독특한 작가 정신에 뿌리박고 있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는 현장성 있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전통적 리얼리즘에 깊이 침몰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무엇이든지 확인하지 못하는 현실은 가장 미묘한 인간 관계처럼 애매성의 가치만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그의 <사수(射手)>에 나타나는 '공간과 시간'의 구도는 치밀한 리얼리즘의 구체적 물증을 제거시켜 버린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점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안전 장치를 푸는 쇠붙이 소리가 산골짜기의 정적 속에 음산하다.

나는 무심중 귓바퀴의 상처에 손이 갔다. 호도껍질처럼 까칠한 감촉이 손끝에 어린다. 지나간 조각조각의 단상들이 질서없이 한덩어리로 뭉겨져 엄습해 온다. B와, 경희와, 곰과, 공기총과, 걷잡을 수 없는 착잡한 감정이다.

 “겨누어, 총”

―<사수>

 평나무, 누럭나무, 재빼나무가 우거진 속 용왕당(龍王堂)이 버티고 있는 당산(堂山) 기슭에 감아붙어 갯밭에 오금을 괴고 조개껍질처럼 닥지닥지 조아붙은 마을 한 기슭으로 뒷주봉 나왕산(羅王山) 골짜기에 꼬리를 문 개울이 밀물을 함빡 삼켰다가 썰물에 구렁이처럼 갯벌로 꿈틀거리고 흘러내리는 것이 희미한 달빛에 비늘처럼 부서진다.

―<흑산도>

 <사수>의 경우와는 달리 <흑산도>는 배경 묘사의 치밀한 구도가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점을 알 수 있다. 죽음 앞에 선 사형수와 사수의 인간 관계로 인하여 백설이 덮인 황량한 계곡, 그곳은 어떤 형상성을 띤 것이 아니라, 단순한 계곡에 지나지 않고 있음에 반하여, <흑산도>는 그 흐르는 냇물과 썰물과 밀물과 나뭇가지 하나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대조적 기법의 사용을 통해서 그는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인가.

 영국의 여루 소설가 러머 월슨(Romer Wil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깨어 있는 시간에 공상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은, 이 공상의 세계로 이따금 찾아가는 것이 가져다 주는 슬픔이나 싸움에서 벗어난 근사한 휴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공생이나 슬픔에 몸부림치는 사람이 잠잘 수 없는 하룻밤을 침상에서 딩구는 대신 지금의 생활에서 벗어나 태양이 빛나는 이탈리아의 남빛 하늘 아래의 도시에 발을 내린다고 상상한다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결코 만나기로 작정되어 있지 않던 사람들, 이쪽에서 주입시킨 말이 아니라 이쪽의 사상이 아닌 사상에서 생긴 그들 스스로의 말을 걸어 오는 사람들이다.

―<All alone>

 상상은 현실과 다른 현실의 교량이다. 이 다리를 왕래하는 것이 소설가의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시에 있어서의 현상의 영원한 동결(凍結)과는 달리 진행하고 변모하는 인간 삶의 행적에 대한 상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서 독자는 펼쳐져 가는 활자와 이에 비례해 가는 상상의 폭과 길이로 해서 인간의 삶을 깨닫고 감동하고 느끼는 것이다.

 전광용 씨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군들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상상의 여울에 물들지 않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흑산도>의 '용바우'도 <태백산맥>의 '한 철' '형우' '영혜' '경은이' 그리고 '건설대의 모든 인물들', 또 <영 1234>의 '민현철', <크라운장(莊)>의 '문호', <죽음의 자세>의 '덕수'에 이르기까지 이 인간들은 한결같이 우리 주변의 가장 친근하고 소박하고 익숙한 인간들이다. 이들에게서 '이탈리아의 도시'를 상상하듯 눈을 감고 환영을 떠올릴 수는 없다. 이러한 인간군이야말로 그 성격적 특징과 삶의 양식에서 현실과 밀착되어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의미가 된다.

 얄팍한 감각적 대화를 통해 말초적 신경으로 전달되는 쾌감의 상상도 없고 묵직한 관념의 유추에서 흘러나온 사상의 분신도 없다.

 그러나, 이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극히 전형적 속성으로 해서 우리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출하게 된다.

 즉, 그의  '용바우'는 가장 전형적 어부이다. 이 어부는 어부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맺어지는 현실과 인간과의 인연으로 해서 숙명을 알게 되고, 그 숙명을 긍정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치를 체득하게 된다. '꺼삐딴 리'는 가장 전형적 속성이 강한 인간이다. 일제하에서 시작하여 소련군의 진주, 공산 체제하의 북한, 월남 이후 한국적 현실을 견디며 다시 미국으로 떠나가기까지 카멜레온적 철새로서, '살아가는 인간'인 것이다. 꺼삐딴 리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운 영혼도 내일의 무지개빛 꿈도 없고, 당면된 현실의 대응에만 골목하고 그것을 긍정해서 살아가는 처세의 엄청난 기술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을 만나는 동안 삶의 역정이 주는 고달픔과 비극의 애틋한 미학을 느끼게 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애정을 바닥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인정하지 않고는 내일이 성립될 수 없듯이, 태백 산맥의 골짜기에 들어가 병역 기피의 오명을 씻고 돌아올 때까지의 기나긴 역정 속에서도 오늘을 아는 지혜를 가진 '한 철'처럼 그의 소설의 인간군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의 철저한 전통적 리얼리즘의 작가 정신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그는 직접적 체험과 간접적 체험의 질량을 달리 평가하고, 그는 스스로 찾아 다니며 완전한 기억의 메모로써 현실을 그려내고자 하는 보수적 자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은 한국 소설 문학의 기초적 원천이 되는 '현실'이라는 극히 객관적 현상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의 소설이 미셀 제라파가 지적하듯이 사회와 개인의 소원한 관계에 흐르고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다시 더듬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사실 굿맨(TH. Goodman)의 '소설이란 사회에 대한 사적 체험'이라는 말이 정당한 것이 되어 가고 있지만 소설의 근본적 양상에서 너무나 벗어나 버린 소설 풍토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고 극명하다. 르포르타지식의 삽입적 에피소드라든가, 의식의 시간적 단절을 통한 구조 양식을 가진 것이라든가 하는 여러 기법상의 특성을 보여 주는 점도 있지만, 대체로 그의 소설 전체를 분석해 보면 전통적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극명한 구조 양식이 낡은 것이긴 하지만, 그의 소설의 특징과 잘 조화되어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백 산맥>은 이러한 구조가 얼마나 적절히 밀착되어 있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꺼삐딴 리>도 마찬가지이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꺼삐딴 리>

 리의 독백처럼 소설은 이렇듯 흘러온 것이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사건 중심적 전개 양식을 택한다는 점과 또 한 가지 그의 소설은 '있는 현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있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 전개할 때 가장 어울리는 구조 양식은 '무엇이 일어나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원리적 방식이다.

 따라서 인간의 비극이든지, 삶의 의식적 회의든지 그의 소설은 있는 것에 대한 고증적 미학(美學)을 건립하는 일이 되고 있다. 에드윈 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극적 소설에 있어서 일련의 사건과 작중 인물의 성격과의 조화는 아주 본질적인 것이어서  과장되었다고 오해받을 만한 설명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의 구조>

 이는 전광용 씨의 소설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그에 있어서 인물은 사건의 변이와 변형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바야흐로, 현장의 소설이라고 지적받는 점이 되듯이 어부의 소설은 어부가, 운전사의 소설은 운전사가 쓴 것과 같은 현장의 증언이 살아나게 하는 원동력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것을 통해 완전한 구조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광용 씨가 시도해 오는 일관성 있는 창작 태도의 핵심에는 항상 '현실을 보는 눈'의 객관적 표준성이 담겨 있다.

그것은 가벼운 새털처럼 반짝거리는 위트와 감각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결점도 있다. 그러나 이 반짝거리지 않는 원인은 간단하다. 그것은 현장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고전적 형질의 윤리 의식이 지배한다고 한다. 사실, 그의 소설에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나 욕망의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직접 발로 찾아 다니며 확인한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사건의 극적 확대를 암시만으로도 처리한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소설은 현실의 나신(裸身)이다.

 그것은 현실의 시작도 아니요, 끝도 아닌 그 한가운데 우뚝 세워진 나신 그대로다. 그의 소설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비극적 인물은 깊은 주름이 얼굴에 가 있으면서도, 웃고 서 있는 중년의 살아 있는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년의 몸짓을 통해서 내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깨닫게 되고, '지금'을 통해서 인생의 숙명과 동양적 인생관의 너그러움과 관용과 폭넓음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참다운 면목은 이러한 담담한 현실 감각과 차근차근한 문장의 세련된 객관성과 이지적 구도가 주는 안정감 위에 피어나는 '현장의 꽃'인 오늘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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