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盞) - 박용래
by 송화은율잔(盞) - 박용래
작가 : 박용래(1925-1982) 충남 부여 출생. 1945년 강경상업학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 「황토길」, 「땅」을 추천받아 등단. 1970년 『현대시학』사 제정 제1회 작품상을 수상.
그의 시세계가 지닌 특징은 자연의 정경과 시인의 정감을 조화시켜 토속적인 서정을 구현한다는 점에 있다. 일체의 인위적인 조작과 기교적인 언어를 배제한 채 근원적인 향토애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소박하고 맑은 심성이 근원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되, 그 정서를 시적으로 여과시켜 시어의 정수(精粹)만을 골라 형상화시키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시에서 언어의 군더더기를 일체 생략하고 시적 압축을 통해 섬세하고 간결한 함축미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집으로는 『싸락눈』(삼애사, 1969), 『강아지풀』(민음사, 1975), 『백발의 꽃대궁』(문학예술사, 1980), 『먼 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등이 있다.
< 감상의 길잡이 >
박용래의 시는 간결한 구도를 통해 여백의 미를 극대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의 시는 대체로 짧은 것이 특색이다. 5행에 불과한 이 시 역시 겉으로 드러난 의미보다는 행간(行間)의 진폭이 훨씬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진폭이 박용래 특유의 서정적 시공간을 만들어 내는 주된 요인의 하나다.
이 시는 하나의 연으로 되어 있지만, 의미상으로 볼 때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2행, 3․4행, 5행이 이루는 세 조각이 그것이다. 첫번째 부분인 1․2행에서는 시의 배경이 제시되고 있다. 시간은 가을이며, 공간은 화자의 집에 있는 뜰이다. 가을은 한참 무르익어 어린 나무에도 단풍을 들여 놓아 마치 산사자(山査子) 열매가 열린 것처럼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누구든 흠뻑 취할 수밖에 없는 선연한 가을의 정경이다.
3․4행은 시의 의미를 훨씬 더 정교하게 응축시켜 놓고 있다. 가을이 무르익은 뜰에서 화자는 벗과 함께 이별의 술잔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의 표시인 양 잔에는 술이 남실남실 넘쳐나고 있다. 사실 이별의 순간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단지 술잔에 가득 술을 부어 벗에 대한 자신의 넘치는 정과 이별의 안타까움을 대신할 따름인 것이다. 남실남실 넘치는 잔 속에 서로에 대한 애틋한 우정이 그렇게 넘쳐나는 순간, 해후(邂逅)도 별리(別離)도 더불어 멀어지고 두 벗에겐 그윽한 취기(醉氣)가 감돈다. 지금 그들은 술에 취하고 있다기보다 우정과 이별의 깊고 아픈 향취에 취하고 있는 것이다.
시어를 최소로 절약하여 시적 정황을 전달하고 있는 3․4행은 이 시의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이별의 정감은 겉으로 보기엔 팽창되는 듯 싶게 사그라들고 있지만 ―`해후도 별리도 더불어 멀어졌는데'란 시구에서 보듯―,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요동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마지막 5행에서 시인은 비약을 통해 앞 부분에서 고조된 감흥을 적절히 해소하며 여운의 효과를 내고 있다. 이 행에서는 지금까지 펼쳐진 시적 정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이라는 낯선 사물이 갑자기 등장한다. 시인이 의미의 비약을 노린 결과이다. 종소리는 그 자체로도 긴 여운을 남기며 멀리 퍼져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의 마지막 부분의 여운을 위해서라면 더없이 좋은 소재가 된다. 시인은 종이 시이소처럼 울린다고 표현한다. 종과 시이소는 둘 다 하나의 정점을 중심으로 반복해서 움직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점이 시인으로 하여금 종과 시이소를 연관짓게 했을 것이다.
박용래의 <잔>은 쉽게 읽히는 시이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영상과 여운을 남기는 시이다. 그 잔상(殘像)을 자꾸자꾸 곱씹다 보면 이 시에 형상화된 가을의 정취와 이별의 안타까움이 서서히 배어 나온다. [해설: 최동호]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