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동화(童話) / 본문 일부 및 해설 / 박문하
by 송화은율잃어버린 동화(童話) / 박문하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비 속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곳이다. 와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이제 새로 집을 세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 공사가 되어져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미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고적도 아니요,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 고구려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한 칸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울리어 주는 것은 비단 비 내리는 가을밤의 감상만은 아닌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에 나는 몹시 마음이 외로울 때나, 술을 마신 밤이면 혼자서 곧잘 이 곳을 찾아 왔었던 것이다. 밖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통금 시간이 임박해서도 이 초가 앞을 한 번 스쳐가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 이 초가집 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이 초가집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의 일로서, 그 때 나는 국민학교 1학년생이었다고 생각된다. 내 형제들은 3남 2녀가 되지만 모두가 그 때 중국 땅에 망명을 가서 생사를 모르던 때이다.
홀어머니는 막내아들인 나 혼자만을 데리고 남의 집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을 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님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두 달 동안을 병석에 앓아 눕게 되었다. 추운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우리 모자는 그야말로 기한에 주리고 떨게 되었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 딱한 꼴을 보다 못해서 나를 호떡 파는 곳에다가 취직을 시켜 주었다. 낮에는 주린 배를 움켜 잡고서 그래도 학교엘 나가고, 밤에는 호떡 상자를 메고 다니면서 밤늦게까지 호떡을 팔면 겨우 그 날의 밥벌이는 되었던 것이다.
<후략>
작자 : 박문하(朴文夏)
형식 : 경수필
성격 : 고백적. 회고적
제재 : 어린 시절 우연히 본 단란한 분위기의 초가집
주제 :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과 옛날의 추억
출전 : <약손>
화석 : 지질 시대에 동식물의 유체나 유적이 수성암 등의 암석 속에 남아 있는 것.
묵연 : 말 없이 잠잠한 모습
초옥 : 지붕을 이엉과 풀 따위로 이은 집.
임박 : 때가 닥 쳐옴.
연명 : 목숨을 겨우 이어감.
기한 : 배고픔과 추위
유복자 :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죽은 자식.
실조증 : 결핍증
탁류 : 흐려서 흐르는 물
나는 초가집보다는 ~ 거느리게 되었지마는 : 물질적인 풍요함과 유복자의 한을 잊을 만큼 외면적인 행복을 갖추게 되었지마는,
이따금씩 ~ 거리가 멀어져 가는 밤 : 가장 가까운 아내와의 심리적인 거리가 멀어져 가는 극도의 외로운 밤
한 편의 수필에는 지은이의 삶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용해되어 있다. 그것을 읽는 독자는 가장 고백적인 지은이의 내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 또한 박문하(朴文夏)라는 한 수필가의 삶의 편린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가난하고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조국의 운명을 보다 못하여 한 통의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고, 그의 형님과 누님은 독립군이 되어 싸우다 전사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지은이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로 태어나 호떡 장수 등을 하며 공부를 하여 의사가 되었다. 이러한 가정 환경에 의해서 지은이는 어린 시절에 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의 분위기를 맛본 적이 없었다.
이 수필은 그 때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 가난했던 시절에 단란한 한 가정을 보며 느꼈던 부러움과, 그리고 지금 자식마저 불의의 사고로 잃고 외로운 현실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은이의 처지가 나타나 있다.
하여간 이 작품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호떡을 팔려고 돌아다니다가 언뜻 들여다보게 된 한 가정의 단란한 분위기가 뼈에 사무치도록 부럽고도 그리웠던 작자는 외로울 때마다 그 집을 찾아갔으나 어느 날 헐려져 온 데 간 데 없어진 그 집을 보고는 더욱 큰 외로움에 빠지게 된다.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그 집의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는 한 편의 동화가 되어 작자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던 것인데, 이제 그 집이 헐려짐으로써 그만 잃어버린 동화가 되어버린 셈이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작자의 소망과 외로움이 독자로 하여금 애상감을 느끼게 한다. 참고로 작자의 삶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가난하고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조국의 운명을 비통해하며 자결하였고, 형님과 누님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호떡 장수 등을 하며 공부를 하여 의사가 되었다. 이 글에는 그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 외로운 현실을 영위하고 있는 작자의 처지가 나타나 있다.
박문하 (1917~1975)
의사이며, 수필가 호는 우하, 수필집으로는 '배꼽 없는 여인', '인생의 쌍화탕', ' 약손', '낙서인생' 등 다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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