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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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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1. 이스라엘의 건국사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침략사

 

1972 8 26일 시작된 제 20회 서독 뮌헨 올림픽이 진행되던 중, 9 5 TV의 중계를 지켜보던 세계 각국 국민들을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사건이 터졌다. 검은 복면으로 감싼 무장 게릴라가 올림픽 선수촌을 습격하여 이스라엘 선수 둘을 사살하고 아홉 명을 인질 삼아 경찰과 대치한 것이다. 그들은 '검은 9월단'이라는 가장 과격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의 전사들이었다. 평화의 제전은 순식간에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과 이스라엘 시온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증오와 투쟁의 무대로 돌변하였다. 게릴라들은 결국 모두 사살되고 말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더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인류 앞에 제기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대하여 이스라엘 공군은 9 8일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촌에 무차별 보복 폭격을 퍼부었다.

 

이스라엘 건국을 가져 온 '시온주의(Zionism)'가 싹튼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를 대혼란으로 몰아 넣은 드레퓌스 사건의 폭풍우 속에서였다. 1896년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프랑스 군중의 반 유태주의 폭동에 놀라 유태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유태인 언론인이 있었다. 그는 유럽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던 비엔나의 언론인 헤르즐(Teodor Herzl), 이 책에서 자신이 유태 민족주의자로 전향했음을 고백하면서, 유럽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자기들끼리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순수 유태 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의 헤르즐의 책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유태국가의 장소에 대해 검토한 끝에 유태인들이 2천 년 가까이 떠나 살았던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시온(Zion)은 유태교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로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뜻한다. 신앙심 깊은 유태인들의 메시아를 향한 열정, 성서가 일깨우는 정감들, 게다가 유태교를 등진 유태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는 민족적 전통들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약속의 땅이었던 것이다.

 

시온주의자들은 인종 차별의 철폐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혁명에 뛰어든 동유럽과 러시아의 유태인들과 달리 팔레스타인 땅을 사 이민을 갔다. 그러나 이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계 주민들의 권리를 무시했다. 그것은 유럽 밖의 영토를 자기네들 마음대로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땅'으로 여기고 있었던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유태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시온주의가 고개를 든 바로 그 때,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 역시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고 이것은 비록 시온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미 두 민족 사이에 던져진 크나큰 불행의 씨앗임에 분명했다.

 

1880년대에는 두 민족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중 유태인은 2 5천 명이었으며 민족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면서부터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데 열을 올려, 1914년에는 총인구 74만 가운데 유태인이 8 5천 명으로 늘어났다. 아랍인들은 경계심을 품고서 터키 의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터키의 부패한 관료들은 단지 형식적인 이주 제한 조치만을 취하면서 제 몫을 챙겼을 뿐이다. 이 같은 시점에서 터키가 독일의 편을 들어 제1차 세계 대전에 가담하게 되고 팔레스타인 땅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1915 10, 아랍인이 전쟁에 협력할 경우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소위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터키의 억압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메카의 수호자' 후세인은 1916 6 5일을 기하여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아랍의 왕임을 자처했다. 그의 아들 파이잘과 영국인 T.E. 로렌스가 이끈 멕두인(사막 유목인) 부대는 신화적인 전투 끝에 터키군을 궤멸시키고 다마스커스에 입성했다. 그런데 영국 외상 발포어는 1917년 미국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내려고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사이의 갈등은 더욱 확산되기에 이른다.

 

제국주의 열강은 전쟁이 끝난 뒤 통일 아랍 국가를 세우려는 아랍 국가들의 기대와 달리, 시리아와 레바논을 분리하여 이 두 나라를 프랑스가 신탁 통치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신탁 통치하기로 마음대로 결정해버렸다. 이렇게 해서 연합국은 터키가 지배했던 아랍 지역을 무려 20여 개의 식민지로 분할 점령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시리아 왕 파이잘을 공격하여 다마스커스를 점령했고 영국은 발포어 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반()시온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군의 비호를 받으며 이민을 계속한 유태인들은 1930년 대 히틀러의 박해가 시작되자, 홍수처럼 밀려들어 1936년에는 총인구 150만 가운데 28% 43만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효율성이 높은 농업 정착촌과 협동 조합, 각종 산업 시설과 금융기관, 노동 조합과 정당, 행정 조직들을 활발하게 건설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 체계를 확립해나갔다. 게다가 과격 시온주의자들은 비밀리에 군대 조직까지 만들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와 더불어 영국 정부에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여 테러를 가하였고, 영국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이와 같은 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끝에 유태인의 수를 제한하고 팔레스타인을 유태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도록 중재했으나 유태인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 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 사상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1945 3,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등 아랍 국가의 대표들이 카이로에 모여 아랍 연맹을 결성하고 아랍 민족의 상호 협력과 결속을 다짐했지만 분쟁에 휘말린 팔레스타인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다. 유태 비밀 군대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제한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고 테러와 습격, 맹목적인 보복이 난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지친 영국은 이 문제를 국제 연합에 떠넘겼고 1947 11월 국제 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국제 연합은 그 결정을 집행할 힘이 없었고 영국군은 무책임하게도 1948 5 15일을 기해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 투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고 양측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랍 게릴라의 기습과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의 잔혹한 보복 공격이 몇 달간 반복되었다.

 

1948 5 15, 영국군은 이 문제투성이의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것은 아랍 민족에게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고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의 연합군인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1차 중동전이 터진 것이다. 유태 군대는 훈련이 잘 되고 사기가 높은 데다가 시온주의에 헌신적이었으며 무기 구입과 지원병 모집, 수송과 군사 전술 등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반면 아랍 해방군은 전투 경험이 부족한 데다 장교들이 나태하고 부패한 탓으로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 합동 작전을 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시온주의자들은 우세한 입장에서 휴전 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 유태 국가의 수립을 기정 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랍 민족은 이스라엘을 외래 식민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영토 위에 세운 국가라고 생각했다. 요르단에 46, 이집트에 20, 레바논에 12, 시리아에 8만 등 거의 백 만 가까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침략자 이스라엘을 저주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배후에 미국의 검은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벤 구리온과 그가 속한 마피아 당의 행정부와 의회를 수립, 모든 유태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귀환법'을 제정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귀환 대열이 밀려들었다. 그 결과 전쟁 직전에 65만 유태인과 74만 아랍인이 거주하던 이스라엘의 영토에는 1956년에 이르러 167만의 유태인이 살게 되었고 아랍인은 겨우 2만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유 파동이 일어난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주장만이 판을 쳤고 아랍의 입장에 선 의견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사태는 한국이 '서방 세계'의 일원으로서 특히 외교 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 여론은 결코 이스라엘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물론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학살를 비롯하여 유태 민족이 2천 년 동안이나 극심한 인종 차별을 당한 민족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유태인이 그 같은 박해를 받아야 할 그 어떤 잘못도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며, 유태 민족이 모든 박해에 저항하여 평등한 민족적 권리를 찾거나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 국가를 세웠다. 그 팔레스타인 땅에 긴 시간 동안 자손을 퍼뜨리고 땅을 경작하면서 나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민족 공동체를 가꾸어 온 것은 아랍 민족이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네 종교의 메시아적 상상과 예언만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태인들은 어디까지나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와 고난에 대한 호소와 설득으로 협력을 구하지 않은 채 그 땅의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종교와 문화 전통을 지켜 온 눈물겨운 과거와 그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의 발전, 내게브 사막을 옥토로 가꾼 눈부신 업적과 나름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 아무리 몽매하고 그들의 정치 체제가 아무리 낙후한 것일지라도,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랍 민중이 나름의 민족 주체성에 눈 떠 그것을 수호하려는 열망을 가진 20세기 중반에 유태인이 휘두른 무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식민주의를 거부한 아랍 민족이 유독 이스라엘의 식민주의만을 이해하고 용납할 리는 만무하다.

 

, 시온주의는 유태 민족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을 무력으로 내쫓고 그 땅에 순수한 유태국가를 수립하려는 침략적 민족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를 세움으로써 수 천 년에 걸쳐 당해 온 박해와 불행을 종식시키겠다고 결심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그 불행을 떠넘기는 방법으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다면 나치의 유태인 박해 역시 전적으로 나쁜 짓이라고 단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식민국가 이스라엘이 밀물처럼 밀려든 이민자들을 먹여살리고 삼면을 포위한 아랍 국가들을 꺾어 자기의 존재를 기정 사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 유태인들이 보내 준 성금과 미국 정부의 차관,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의 배상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개입과 간섭을 대외 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던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이용했고 당연히 아랍 민족들의 반()시온주의 항쟁은 반미투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 일대 아랍 국가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통일 아랍 국가를 강하게 열망했던 아랍 민중은 이스라엘을 제국주의 첨병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어느 나라의 지도자이든 이스라엘과 타협할 경우 민중의 저항에 부딪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아랍 국가들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유태 국가의 토대를 더욱 튼튼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아랍 각국의 혁명 세력은 국내의 지배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활용하려 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진영 내부 갈등과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2차 중동 전쟁 이른바 수에즈 전쟁은 이런 사정을 뚜렷이 드러냈다. 1952 7월에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혁명 4주년을 맞이하여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수에즈 운하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그러자 격분한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과 비밀 협정을 맺어 수에즈 운하를 탈환하려고 계획했다. 1956 10 29, 이스라엘군은 갑자기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 운하로 진격했다. 다음날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이집트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 운하 입구의 도시 포트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 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승리,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를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 착오적인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미국이 막대한 경제 원조를 중동에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메꾸었다. 나세르는 전쟁에 지고서도 아랍의 영웅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건국 초기에 부딪친 난관은 주로 인접 국가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1964 1월의 아랍 정상회담의 결정에 따라 같은 해 5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로 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출현한함으로써 그 도전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아랍 연맹은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럽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PLO는 아랍 전역에 흩어진 난민들을 무장시켜 해방군을 조직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군주 국가인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정면 충돌이 두려워 PLO의 군대를 자기 영토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단지 사회주의 국가들과 이집트, 시리아만이 PLO를 지원했다. 지지부진한 PLO의 활동에 분개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몰래 소규모 테러 조직을 만들어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기습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난민촌을 공격했으며 이 같은 사태가 계속 확대심화되어갔다.

 

3차 중동 전쟁은 1967 6 5일에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6일 간의 전쟁에서 아랍 연맹은 또 다시 참패했고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PLO의 온건 노선에 분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를 비롯하여 수많은 급진적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아랍 세계의 수구(守舊) 집권층, 미국까지 그들의 공격 목표로 삼았다. 1968 7,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아라파트를 제3 PLO의장으로 선출했다. 1970 9월에 아랍 민족주의와 비동맹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가 암살됨으로써 PLO 는 더욱 불리한 정세에 직면하였다. , 사회주의로 기울었던 나세르와는 달리 후임 대통령 사다트는 국유사업체를 민영화하고 미국에 접근하는 등 우경화된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PFLP는 서방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하여 이집트와 요르단의 사막에서 폭파했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던 요르단 왕 후세인은 즉각 미제 전투기를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게릴라 섬멸 작전을 전개했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동족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1970 9월의 일이다. 이 같은 동족 상잔을 기억하기 위해 좌익 게릴라들은 검은 9월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뮌헨 올림픽 선수촌 기습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사다트는 제 3차 중동 전쟁의 참패를 설욕하고 시나이 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1973 10 6일에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그는 자기 군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아랍 민중의 정치적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전쟁은 석유 금수조치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전 세계적 긴급 문제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토후국 연방 등 페르시아 만 연안 여섯 나라는 석유의 공시 가격을 베럴 당 70% 인상했다. 이란을 제외한 다섯 나라는 석유 생산의 25%를 삭감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석유 자원을 무기 삼아 서방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러한 아랍의 힘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닉슨은 계속해서 하루 1천 톤씩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지만 아프리카와 유럽, 3세계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의 오른 팔 일본까지도 재빨리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사다트는 3주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75년 이후 15년 동안 35만 난민이 거주하는 레바논은 이스라엘 민병대와 게릴라의 군사 충돌로 인해 무정부 상태의 전쟁터로 변하였다. 사다트는 1979 3월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보증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한 대가로 시나이 반도를 되돌려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평화가 찾아들지 않았다. 사다트는 아랍 민족주의의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페르시아 만을 두고 이란과 미국이 벌인 군사 충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으로 일어난 걸프 전쟁 등 큼직한 사건 때문에 한동안 팔레스타인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듯이 보였다. 1971 1월 이슬람 승려 호메니를 앞세우고, 미국 정부와 석유 메니저의 앞잡이처럼 행동했던 팔레비를 몰아낸 이란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반미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이란 혁명 정부에 이를 갈며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을 지원했다. 그런데 그 전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심가 후세인은 미국 정부한테서 지원 받은 무기를 들고 쿠웨이트를 집어 삼켰다. 기르던 개한테 물린 꼴이 된 미국은 유엔 연합군을 이끌고 들어가 이라크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후세인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패전했지만 미국을 혐오하는 아랍 민중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보복이 두려워 자기 땅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내쫓은 아랍의 반동적 군주들은 다른 한 편으로는 이란과 같은 민족주의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나라안에서는 무자비한 독재 정치를 실시했다.

 

이 모든 비극은 본질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의 침략과 미국의 제국주의 간섭 정책에 대한 아랍 민중의 거부에서 비롯되었다. 아랍 민족의 바다 위에 뜬 유태인의 섬 이스라엘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지원 덕분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선지자가 예언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찾아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웠지만 팔레스타인에게는 수천 년 살아 온 고향이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운명과 그 땅에 정착한 시온주의자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박해가 박해를 낳고 불행이 불행을 부르며 증오가 증오를 일으키고 테러와 보복 학살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되는 수난의 땅 팔레스타인. 분명한 것은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과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의 자결권과 그리고 고향을 되찾으려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것뿐이다.

 

1993 9 13일 아라파트는 미국 워싱턴 뜰에 나타났다. 그는 여기서 이스라엘 총리인 이츠하크 라빈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이스라엘 정부가 이스라엘 점령지역인 가자 지구와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 회담에 서명한 것이다. 이 행사를 이끈 것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었고 미국 국무장관과 러시아 외무 장관이 증인 자격으로 서명했다.

 

아라파트, 암살을 피하려고 매일 잠자리를 옮기며 살아 온 이 혁명가는 이제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정치가로 변신한 것이다. 2천 년 전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라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유태인들은 이 협정을 통해 자기네가 세운 나라를 인정받은 셈이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고향 땅 한 귀퉁이에서 자치 정부를 세우도록 허락 받게 된 것이다.

 

이 평화 협정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국제 사회의 심각한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협정의 이끌어낸 사람은 노르웨이 외무 장관 요한 외르겐 홀스트였다. 그는 이스라엘과 해방 기구의 공식 평화 협상이 벽에 부딪치자 비밀스럽게 양 측 밀사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숙식을 함께 하며 회담을 중재했다. 반 세기가 넘게 목숨 걸고 싸운 두 진영 대표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협정 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정착촌을 만들어 이스라엘 영토를 만드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반 세기 이상 군사력으로 나라의 생존을 확보하려고 해 보았지만 중동 평화를 파괴하는 효과만 낳았을 뿐 수천 년 박해와 수십 년 전쟁에 시달린 유태인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력 충돌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해방 기구보다 더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더 큰 힘을 얻게 되자 이제는 대화 상대조차 잃어버릴 지경에 빠졌다. 해방기구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해방 기구도 비슷한 처지였다. 아라파트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져 외부의 군사 지원을 잃어버렸다. 걸프 전쟁 때 미국과 싸우는 이라크 지도자 후세인을 지지한 탓으로 인근 아랍 국가의 경제 원조마저 끊어졌다. 이렇게 되자 조직 내부에서 아라파트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세력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는 땅을 내주고 평화를 얻어보려는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과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자치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는 철수를 시작했고 해방 기구는 경찰 병력을 만들어 치안을 넘겨받았다. 이스라엘은 감옥 문을 열어 팔레스타인 정치범을 풀어주었고 수만 명에 이르는 추방당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과도 정부로 변신했고 이 협정을 두손들어 환영한 서방 선진국 정부들은 앞다투어 팔레스타인 재건을 돕기 위해 경제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주변 모든 아랍 국가와 평화 회담을 맺어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왔다거나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이 땅에 얽힌 문제가 너무나 복잡한 데다 그 동안 치른 희생이 너무나 컸고 쌓인 원한이 너무나 깊은 탓이다. 그래서 화해를 추구하는 라빈 정권과 팔레스타인 과도 정부가 과연 험난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장애물을 넘어 평화와 공존과 번영의 땅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은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과 팔레스타인의 회교 원리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상대방과 함께 사는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치 협정을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아라파트를 암살하겠다고 공공연히 협박한다.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과 민주 해방 전선 등 급진파는 PLO와는 별도로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벌써 이스라엘 점령지구 안에서 자치 협정에 반대하는 총파업과 시위를 벌였고 독자적으로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하기도 했다. 만약 자치 정부가 짧은 시간에 경제를 재건하고 치안을 확립하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면 이들 과격파가 득세하여 자치 협정이 무의미해지는 사태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 요소는 이스라엘 쪽에도 있다.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민병대를 만든 유태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1994 2 25일 새벽에 일어난 헤브론 사건이 그 예이다. 요르단 강 서쪽 헤브론의 한 이슬람 사원에서 한 유태인 정착민이 예배를 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마구 쏜 이 사건으로 50명이 넘게 숨지고 수백 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자치 협정의 문제접들이 노정되었고 이스라엘 정부가 정착민들이 가진 무기를 회수하는 등 몇 가지 조처를 취하여 사태가 진정되기는 했지만 과격 시온주의자들이 이런 사건을 벌일 가능성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 협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난날의 잘잘못은 뒤로 하고 지금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일단 군사력 행사를 절제함으로써 아랍 세계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슴 밑바닥에 쌓인 증오와 원한을 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릴 것이다. 그리고 유럽 기독교도들에게 수천 년간 박해와 수모를 당한 불행한 유태 민족이 과격 시온주의를 잠재우지 못한다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들과 화해하고 평화와 안식을 찾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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