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광수 소설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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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 1892 - ? , 춘원·春園)

 

· 평북 정주 생.

· 10세 때, 부모가 콜레라로 8일 사이에 차례로 사망하여 고아 됨

· 그 이듬해 동학의 이념에 감명을 받고 입도(入道), 종교 활동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침

· 동학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5년 상경,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도일(渡日) · 1907년 명치학원 중학부에 편입, 도산 안창호의 일본 동경 연설을 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명. 기독교의 성경도 접하여 청교도적인 생활을 지향한다.

· 이 무렵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에 공명하며 일본 작가의 작품을 애독하는 한편 홍명희의 영 향을 받아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당시 풍미하던 자연주의에 몰입.

· 1915년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입학.

· [청춘]에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등 단편 발표.

· 1917년 근대적인 형태의 계몽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 명성얻음.

·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 대학을 중퇴,

· 상해로 건너가 임정에서 활약, 안창호에게 영향.

· 귀국 후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 발표,커다란 물의를 일으킴.

· 1924년 [조선문단] 주재.

·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역임.

·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반 년 동안 수감, 병으로 보석

· 점차 친일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 ,

· 1939년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

· 1940년 가야마 미쓰로오(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

· 학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하며 다니기도 함.

· 단편 <무명>(1939)<원효대사>(1942) 등을 집필. 6.25때 납북.

· 광복 후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1949년 [반민특위-1948년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집행하 기 위해 제헌 국회가 설치한 특별 기관]에 회부

· 1950년 와병 중 7월 12일 북한에 의해 불법 납북됨.

· 작품 : <재생>(1924), <마의태자(麻衣太子)>(1926), <단종애사>(1929), <흙>(1932-1933), < 이순신>(1931), <유정(有情)>(1933), <사랑(1938)>

---  소설 <무정>, <개척자>, <사랑>

 

󰏐 이광수 문학 4기

󰆲 제1기 : 인도주의 계몽 사상기. 개성에 눈을 뜬 근대적 자아의식으로 개화, 계몽을 외침, 자녀 중심론과 부부 중심론을 통하여 유교적 전통과 인습에 반항하는 시기.( 무정, 개척자, 선도자 )

󰆳 제2기 : 민족성 개조 주장 -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모습과 결함을 발견, 그 내부적 요인을 비찬하는 데 주력 - 일본 민족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민족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친일 행위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부분임 ( 재생(1924), 혁명가의 아내, 사랑의 다각형, 흙(1932) )

󰆴 제3기 : 영적 구원을 모색하는 종교적 경향의 시기 ( 사랑, 이차돈의 사 )

󰆵 제4기 : 친일문학기 - 수양 동우회 사건(1937) 이후 일제에 협력,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는 등 친일행각을 계속함

 

󰏐 이광수의 친일의식

 

❶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대해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天皇御命)과 독법(讀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臣民)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다웁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❷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 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이었다. 조선인이 內地人과 차별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의 제거를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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