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론 / 묘사와 실험
by 송화은율묘사와 실험- 윤흥길론 / 천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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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의 한국문학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게 부각된 작가의 한 사람으로 윤흥길을 꼽을 수 있다. 생산량에 있어서 단연 앞설 정도로 정력적인 작가임을, 근래의 그의 일련의 작업들이 입증하고 있거니와 그의 문학이 매우 폭넓은 독자층을 포용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근래에 몇 가지 문학상들이 잇달아 그에게로 돌아가게 된 것도 이런 사실들과 깊이 관련되는 점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바야흐로 날개돋힌 듯 잘 팔리는 작가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획득한 그의 이러한 폭넓은 인기는 가령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기작가나 유행작가의 그것과 명백히 구별되야 할 성질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기작가나 유행작가가 항용 드러내기 쉬운 위태위태한 단명(短命)의 징후같은 것을 그의 문학에서는 조금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문학은 오히려 본래적인 미덕이 간직하기 마련인 듬직한 중량감을 빚어냄으로써 독자의 확고한 신뢰감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떠한 거센 풍파라도 능히 견뎌낼 뚜렷한 자신의 문학적 개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단명의 유행작가와 명백히 구별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독자의 일시적인 기호나 취향에 영합함이 없이 자신의 세계를 꾸준하게 천착 확대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른바 부박(浮薄)한 인기작가와도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그는 우선 치밀하고도 섬세한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문학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얼핏보기에 그다지 모험적이거나 실험적인 작가가 아닌 듯이 보인다. 이상(李箱) 같은 작가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무슨 두드러진 위트를 느끼기도 어렵고, 최인훈같은 작가에서 보게 된느 도도한 소피스티케이션의 흐름을 만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김승옥이나 최인호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재기활발한 어떤 환상적인 무드가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대개의 경우 일단 차분한 관조자의 자세를 취한다. 이는 그의 문장의 지배적인 톤이 요설이나 웅변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엄격하게 절제된 관조자의 그것이라는 사실과 긴밀히 관련되는 점이다. 확실히 그의 문자의 톤은, 그것이 펼쳐내는 작중의 액션 그 자체의 질료(質料)에 비하면 예외없이 한두 음계쯤 낮다. 말하자면 그의 문장의 톤은 언제나 작중현실의 액션이 빚어내는 탄력속에 말려 들어가는 법 없이 일정한 거리를 엄격하게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중의 액션의 질료와 그것을 펼쳐내는 그 문장의 톤 사이의 음계의 편차로 말미암아 그의 작중현실 안에서는 대개의 경우 일종의 아이러니가 빚어진다. 이러한 음계의 편차는 그의 작중의 분위기를 약간 흐릿하고 우중충한 것으로 빚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그가 펼쳐내는 작중현실은 일단 그 윤곽이 부각되기는 하면서도 어딘지 아련한 안개같은 것이 거기에 서려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독자는 처음 다소 당혹감을 의식하게도 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윤곽이 백일하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보다 어떤 신선한 여운을 느끼게도 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아이러니는, 특히 「황혼(黃昏)의 집」「장마」등과 같이 철없는 어린이의 시점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진술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에 있어서의 아이러니는 얼핏보기에 채만식의 「치숙(痴叔)」이나 손창섭의 「유실멍(流失夢)」등의 그것과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모두, 펼쳐지는 작중의 액션과 그것을 진술하는 내레이터의 톤 사이에 각기 일정한 음계의 편차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내레이터가 유식하고 진지한 작품 상황을 진술함으로써 빚어내는 「치숙」의 아이러닌, 희화적인 작중 상황을 오히려 심각하고 진지한 톤으로 진술함으로써 빚어지는 「유실몽」의 아이러니 역시 자기가 그 진상을 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이의 시점으로 어른의 세계를 진술하고 있는 윤흥길의 일련의 작품들에 있어서의 아이러니와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음계의 편차에서 연유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윤흥길의 아이러니는 「치숙」이나 「유실몽」의 경우처럼 그렇게 의도가 원색적으로 드러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점은 엄격하게 절제된 그의 관조자적인 문장의 톤과도 긴밀히 관련되는 점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아이러니는 윤흥길의 문학이 간직하는 매우 중요한 매력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묘미는 「황혼의 집」「몰매」「장마」「땔감」「기억 속의 들꽃」등과 같이 잔인하고 교활한 어른들의 세계를 순진한 어린이들의 시점으로 진술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에 있어서 뛰어나게 발휘되고 있거니와. 그것은 또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직선과 곡선」「무제(霧堤)」등과 같은 양식있는 지식인의 시선으로 밑바닥인생으로 전락한 시대현실의 소외자들을 관찰하고 있는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 한국의 어느 한 어촌에 상황을 설정하여 권력의 매카니즘 및 지식인의 윤리문제를 다분히 상징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묵시(默示)의 바다』와 같은 정통적인 삼인칭 소설의 경우에 있어서도 앞서 말한 바 내레이터의 톤과 액션 사이의 음계의 편차에서 연유되는 아이러니는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컨대(그는 표현대상을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치밀하고 정확한 묘사력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그 이상의 어떤 상징이나 은유에로 뻗어날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염상섭·박태원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실주의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칫하면 떨어지기 쉬운 단조로운 평판성(平板性) 및 상식적 안이성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도 있다 할 것이다.
『너 이런 거 먹어 본 적 있어?』
윤기 흐르는 흑갈색의 그것에서 먹음직스런 향기가 풍겼다.
『초콜릿이다. 아저씨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하면 이걸 너한테 몽땅 주겠다.』
나는 될 수 있는 데로 그 이상한 과자 위에 시선이 머물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꿀꺽꿀꺽 넘어가는 침을 어쩔 수가 없었다. 『뭐 조금도 부끄러워할 것 없다. 착한 아이는 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단다. 어떠냐, 대답하겠니? 네 대답 한 마디면 아저씨는 친구를 만나서 좋고, 너는 이 맛있는 초콜릿을 먹을 수 있어서 좋고……』
무엇 때문에 내가 망설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받아서 좋을 것인가, 아니면 받아서는 안될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해서였을까. 혹은 그런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나이의 시골애답게 모르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에 그랬을까. 확실한 것은 별로 기억에 없다. 아무튼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끌었던 것 같다.
『싫어?』사내가 재촉했다. 『싫단 말이지?』사내는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별 수 없구나. 착하게 굴면 이걸 꼭 너한테 주려고 했는데 이젠 할 수 없다. 나한테 필요없는 물건야. 자 봐라. 아깝지만 이렇게 내버리는 수밖에……』
실제로 사내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실제로 땅바닥에 던졌다. 던졌을 뿐만이 아니고 구두 뒤축으로 싹싹 밟아 뭉개어 버렸다. 내 표정을 흘끗 읽고 나서 그는 또 한 개를 내던졌다.
『난 네가 굉장히 똑똑한 앤 줄 알았는데……참 안됐구나.』
그는 또 한 개를 구둣발로 짓밟아 놓았다. 벌써 세 개째였다. 사내의 손안엔 이제 두 개의 과자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사내의 태도로 보아 나머지 두 개마저도 충분히 짓밟고 남을 사람이었다. 사내가 별안간 껄껄 웃었다.
『너 이녀석 우는구나.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애 꼬마야. 이제라도 늦진 않아. 잘 생각해 봐. 삼촌이 집에 다녀갔었니? 그게 언제지?』
어른의 비상한 수완을 나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진짜로 삼촌의 친구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막 시작할 때의 첫마디가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일단 얘기를 꺼낸 다음부터는 연 자새에 감긴 실처럼 전날 밤의 기억들이 술술 풀려나왔다.
이것은 그의 대표작인 「장마」중의 매우 탁월한 한 장면이거니와, 이 대문에서 우리는 우선 그 섬세하면서도 정확한 묘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한 범죄자(부역자)의 행적을 추궁하는 수사관과 그의 신문을 당하는 어린이 사이의 미묘한 심리적 역학관계가 그것의 직접적인 서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 두 사람의 섬세하고 정확한 동작과 표정의 묘사를 통하여 극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 장면은 물론 먹음직스런 향기가 풍기는 초콜릿을 사이에 두고 교활한 어른과 배고픈 어린이 사이에 벌이는 한 줄다리기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작자는 이 장면을 그런 구체적인 장면으로 묘사하는 데 그침으로써 그것이 그 이상의 어떤 복잡하고 추상적인 차원에로 문장의 흐름이 일탈할 수 있는 개연성을 엄격하게 봉쇄하고 있다. 차분히 가라앉은 문장의 톤에서 그런 추상적 이슈에 관한 하등의 언질도 우리는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과 관련하여 이 작품에 있어서의 시점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의 시점은 나이 어린 소년(내레이터인 <나>)의 그것으로 되어 있다. 작중의 모든 액션은 그 소년의 시선에 의하여 관찰되어진다. 따라서 작중의 모든 액션은 이 소년의 시선이 미칠 수 있는 한도 밖으로 일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점(視點)의 문제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 작품의 작중 현실안에 빚어지고 있는 시간과 지금 그것을 진술하고 있는 시간 사이에는 뚜렷한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내가 망설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받아서 좋을 것인가. 아니면 절대로 받아서는 안될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해서였을까. 혹은 그런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나이의 시골애답게 모르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에 그랬을까. 확실한 것은 별로 기억에 없다. 아무튼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끌었던 것 같다.』말하자면 내레이터인 <나>는 지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톤이 한결같이 술회적(述懷的)인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리하여 작중의 모든 액션이 철없는 어린이의 시점 안에 국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또 상당히 많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술회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중의 액션과 내레이터 사이에는 이중적인 간격, 즉 『소설의 이해』의 저자들이 말하는 바 <거리 distance>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김병익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사건이 스스로 말한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실증하고자>하는 작가일 수 있는 유력한 계기의 하나는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내레이터와 작중의 액션 사이의 이러한 이중적인 거리의 설정위에 이룩한 작품은 「장마」외에도 숱하게 많다. 「황혼(黃昏)의 집」, 「양(羊)」,「집」,「기억 속의 들꽃」등 어린이의 시점으로 진술되는 대개의 작품들이 모두 이런 방법론의 기초 위에 서 있거니와, 「아홉 컬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나 「무제(霧堤)」등과 같이 작주의 내레이터와 그 중심 인물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는 작품의 경우에 있어서나, 『묵시(默示)의 바다』와 같은 삼인칭소설에 있어서도 음계의 편차, 다시 말하면 일정한 거리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아무튼 여기 인용한 장면 그 자체는 그것이 지닌 가혹한 비극성과 관련되는 하등의 언질을 누설하는 법 없이 그 자체의 구체성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며, 더구나 작자의 의도는 이중적으로 노출의 개연성이 봉쇄당하고 있는 터이지만 그러나 총체적인 문맥 속에서 볼 때 이 장면은 더 없이 치열하고 가혹한 장면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증오와 살육과 밀고와 보복과 그리고 파괴와 굶주림 등등 6·25의 온갖 비극의 실체가 이 <먹음직스런> 초콜릿을 사이한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줄다리기의 장면 속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장면을 펼쳐내는 문장의 톤은 어디까지나 차분한 술회적인 그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작중의 액션의 치열성(熾烈性)에 비하면 그 문장의 톤은 기 치열성에 조금도 감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자 사이에는 음계의 편차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빚어진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이 작가의 한 문학적 특질이요 매력이다.
그가 한국 사실주의의 정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그 평판성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작중현실이 대개의 경우 짙은 상징적 분위기에 싸이게 된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된다. 말하자면 그는 일단 치밀하고 정확한 묘사가이면서도 자신의 작중 현실이 어떤 은유나 상징의 세계에로 고양(高揚)될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을 아울러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일관된 노력의 소산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그의 작품들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바 갖가지 상징적 장치(device)들이다.
가령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 있어서 밑바닥인생으로 전락한 한 소외자(권씨)가 끄리고 다니는 아홉 켤레의 구두가 그 좋은 예이다. 그는 애당초 현실과의 사이에 적절한 화해의 단서를 찾지 못한 소외자이다. 아이들에게는 제대로 먹여줄 만한 벌이가 없는 무능력한 아버지요, 임신한 아내에게는 분만의 위기를 해소시켜 줄 만한 입원비를 대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남편이다. 결국 현실의 거센 파도에 밀리고 밀려 서울하고도 강남의 어느 중학교 교사의 집에 세들어 사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그는 무슨 소요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전과자이기도 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철두철미한 적빈(赤貧) 그것뿐이다.
그러나 가혹한 가난 속에서도 그는 한가지 사실만은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다.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 그것이다. 주이진 현실과의 사이에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느니보다 애당초 그런 노력 조차를 외면하는, 그러한 노력을 차라리 일종의 타락으로 생각하는 그의 오만한 자존심 그것이다. 『이래 뵈도 나는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요.』 자기가 세들어 살고있는 집주인에게 토로한 이 말 속에서 그러한 권씨의 면모를 단적으로 엿보게 된다.
이러한 권씨의 이미지를 한결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적빈 속에서도 걸맞지 않게 끄리고 다니는 아홉 켤레의 구두 그것이다. 가난을 남루처럼 걸치고 다니는 그에게 있어서 그 아홉 켤레의 구두는 사실 분에 넘치는 사치요. 또 남루 그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런 장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소중하게 그것을 끄리고 다닌다. 가난이라는 이름의 남루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아홉 켤레의 구두(자신이 신고 있는 한 켤레를 제외한 모든 구두들)를 마침내 버리기에 이른다. 현실과의 온갖 참담한 부대낌을 겪고 난 연후의 일이다. 구걸이라도 하듯이 돈을 꾸어달라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했다가 거절당하고, 강도질을 해보려다가 실패하여 망신만 당하고, 차라리 자살을 하려다가 그것도 실패하고 돌아온 어느 날의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어진 현실과의 참담한 부대낌 끝에 어떤 깨달음을 얻은 연후의 일이다. 그 깨달음이란 주어진 현실을 오만하게 외면하고 겉돌게 아니라 그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그 구두들이 주인인 권씨의 소외자로서의 비뚤어진 자부심, 현실과의 대응관계 속에서의 패배를 합리화하려는 자신의, 지식인으로서의 허영심 등을 상징하는 장치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의 남루(가난)에 걸맞지 않은 그 구두들을 모두 다 버리고 자신에게 딱 알맞은 한 켤레만을 골랐을 때 그에게는 이제 비로소 주어진 자기 현실을 과부족 없이 받아들일 태세가 완비된 셈이다.
「무제(霧堤)」라는 작품에 있어서의 인쇄소의 유능한 식자공인 봉씨가 병적이리만큼 완고하게 되풀이하는, 식자공으로서의 실수 즉, 어떤 문장이든 그 문장의 주제가 될 만한 중심적인 주격어를 한결같이 <무제(霧堤)>라는 어휘로 일관성있게 바꿔치기해버리는 행위 역시 윤흥길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 장치 가운데의 두드러진 한 예이다. 이 작품의 내레이터인 내가, 그를 알게된 때부터 그를 자기 고부모와 동일인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실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나의 고모부와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 두 사람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바 분단의 비극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를 표상하는 두 존재라 할 수 있다. 우선 두 사람은 이산가족의 아픔의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고모부가 생활의 무능력자라는 점에서, 봉씨가 유능한 식자공으로서의 역량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자공으로서의 치명적인 약점(<무제>라는 오식을 완고하게 되풀이하는)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모두 시대현실에서 소외된 밑바닥인생들이다. 게다가 특히 그들은 자신들의 쓰라린 과거(이산가족의 아픔의 당사자로서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위인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과거의 아픔 속에 사로잡힌 나머지 당면한 현실에 대처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일종의 신경성질환의 소우자들이다. 고모부가 이북에 남기고 온 자기 아들에의 기억이 차츰 흐려져가는 사실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나, 봉씨가 완고하게 <무제>라는 오식을 되풀이함으로써 (실상은 병적인 증상으로 봐야 하겠지만) 당면한 식자공으로서의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동일한 병원체에서 연유한 양면성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무제>라는 완고한 환상에 들려있는, 분단시대의 풍랑에 의하여 파멸당한 난파선들이다.
윤흥길에 있어서의 이러한 상징적 장치(device)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나 「무제(霧堤)」에 있어서보다 「장마」의 경우에 있어서 훨씬 더 감동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이 「장마」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음산하고 신비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구렁이는 윤흥길의 문학이 획득한 가장 탁월한 상징적 장치의 실례이다. 그 구렁이는 이 작품에 있어서 한국적 한이 서린 작중의 짙은 토속적 분위기 속에 혼연일체로 용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가 치러야 했던 음산하고 저주스러운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명하게 표상하는 구체적 실체로도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작품이 6.25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그리되, 그것을 추상적 관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토속적 샤머니즘인 한국 농촌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6.25의 비극적 상황을 무슨 논리나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포착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심층의식적 근원적인 차원으로까지 파고든 자리에서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의식의 상층부와 샤머니즘이라는 이름의 의식의 저변을 하나의 소설적 공간 안에 포괄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두가지 요인들은 우리 시대의 문화적·문학적 조건에 있어서는 완전히 이율배반적인 것이요, 상극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율배반적인 두 요인을 하나의 소설적 공간안에 파탄없이 용해시킬 수 있게 한 결정적 장치가 바로 그 음산하고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한 구렁이라는 장치이다.
저주받은 사람이 죽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우리의 전래의 무속신앙은, 이 작품의 경우에 있어서는 결코 단순한 미신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빨치산이 되어 죽은 아들의 어머니인 할머니나, 국군으로 간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아야 했던 외할머니의 경우에 있어서는, 우연히 나타난 그 구렁이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닌 필연의 결과이며 미신이 아닌 확신이요 확증인 것이다. 그리고 가련한 이 두 노파의 한 맺힌 설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것은 저주로운 비극의 실체로서 우리들의 깊은 심금에 부딪쳐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로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 윤흥길은 정통적인 사실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도 의외로 지적인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승인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다분히 실험적 방법론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반영하는 작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염상섭·박태원의 계승자이면서도 이청준과 같은 지적·실험적인 작가로서의 면을 아울러 간직한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작가의 새로움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다만 그의 새로움이 그다지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그의 실험적인 일련의 작업의 밑바탕에 언제나 엄격하게 절제된 관조자로서의 자세가 확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일련의 실험들이 대개의 경우 파탄 없이 자신의 작중현실 속에 용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으로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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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까지 관조자이면서도 실험가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가진, 그리고 표현대상을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묘사력을 발휘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함축적 상징적인 차원에로 고양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비하는 작가로서의 윤흥길의 문학적 특질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작가의 문학적 소재나 주제의 측면에서 살펴볼 단계에 이르렀다.
『황혼(黃昏)의 집』,『아홉 결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등 세편의 단편집과 장편 『묵시(默示)의 바다』를 통해서 볼 때 윤흥길의 그 동안의 문학은 그 소재의 면에서 관심의 방향이 상당히 다채로운 작가라 할 수 있다.
초기에서부터 비교적 꾸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의 하나로 우선 가난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가령 그의 데뷔작인 「회색 면류관의 계절」에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도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병장을 에워싸고 있는 분위기는 물론 지루하고 단조로운 군대내의 일상의 흐름이다. 우중충한 비가 나리고, 지루한 일과가 계속되는 동안 박병장은 무위와 권태에 빠진다. 무지하고 심술궂은 상급자로부터의 시달림도 그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그런 그의 심정의 반동으로 동료들과 지구의 종말이니, 3차대전이니 하는 따위 의미한 잡담을 늘어놓아보지만 침울한 그의 마음은 가셔지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우울증을 한껏 농도짙은 것으로 만들게 한 것이 다름아닌 고향 누나로부터의 편지였던 것이다. 그것은 고향집의 찌든 가난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사연이었던 것이다. 회비가 밀려 등교정지를 당한 동생이 <공부보다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쪽지를 써놓고 행방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고향으로부터 날아온 이 찌든 가난의 소식에 접한 그는 그러나 결국 어찌할 수가 없다. 그저 우울한 마음이 한껏 뒤틀릴 뿐이다. 그런 심정 속에서 그는 동료와 무의미한 잡담을 늘어놓으며 신문을 뒤적인다. 신문에는 3천원의 현상금이 붙어있는 퀴즈문제가 실려 있다. 어쩌면 그 문제를 풀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관제엽서가 없다.
기지교회를 지나는데 안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소리는 자신의 가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소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그냥 그곳을 지나친다. 그리고 그 대신에 그는 동료와 함께 술집으로 빠져나와 술을 마신다. 마음은 우울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교회 앞을 지나다가 그는 망설인다. 들어갈까, 돌아설까. 교회 안을 기웃거려본다.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자 거기에 아버지의 영상이 겹친다. 줄레줄레 매달린 식구들을 거느리며, 찌든 가난 속에 허우적거리며 피를 흘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돌아서오는 길에 그는 중얼거린다.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면 그 때까지 당신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기는 <관제엽서를 쓰겠소>라고 대답하겠노라고.
대충 이러한 이야기가 꼼꼼한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서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무위와 우울 속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정신의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방황의 주된 유인이 되고 있는 것이 그 찌든 가난임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가난의 문제는 가령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나 「땔감」같은 작품에로 발전한다.
「땔감」에는 굶주림 못지 않게 두려운 추위를 막아주는 땔감과 관련되는 몇가지 에피소드가 제시되어 있다. 첫째 에피소드는 『남의 물건은 터럭 하나라도 건드리는 법이 아니다』라는 신조로 살아온 아버지가 어느 날 추위에 떠는 가족들을 그 추위로부터 막아주기 위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결국 <남의 물건을 건드리는> 행위를 하기에 이르는 이야기다. 땔감을 훔치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나>까지 그 일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발각이 나서 곤경에 처하게 되지만 어찌어찌 풀려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의 것은 좀더 나이든 소년이 된 <나> 자신이 역에서 석탄을 훔쳐내는 이야기인데 그로 인하여 아버지에게 혹독한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며 세 번째 것은 토탄을 사게 된 아버지의 실패담을 그리고 있다. 최선을 다해서 흥정을 하노라고 했는데, 정작 파보니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 적은 분량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들의 배후에는 6.25라는 비극적 상황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시국을 잘못 만나서> 생활의 무능력자로 전락하고 만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 비교적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이르러 가난의 문제가 <시국>이라는 이름의 객관적 조건에 의한 조명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가난의 문제를 시대현실이라는 문맥속에서 포착하기에 이르렀다. 밑바닥 인생들의 생태에 관한 천착. 산업사회가 빚어내기 마련인 제반 부조리의 고발, 나와 남들과의 상관관계 및 집단의 부당한 압력 앞에 대처해 나가야 할 개체로서의 윤리문제의 추구 등등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생근의 말을 빌자면 <개인과 사회의 역학> 관계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작가 윤흥길의 문학적 시야는 폭넓게 열려지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가령 조세희 같은 작가와 비슷한 일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사회에의 접근 방식은 조세희의 경우처럼 그렇게 시니컬하지 않다. 그는 일단 치밀하고도 엄격한 관조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 엄격하게 절제된 객관적 묘사가로서의 그의 입장은 이런 측면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엄격한 묘사가의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그의 시대현실에의 관심이 추상적 관념에로 일탈하는 것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일련의 사회참여문학이 자칫 드러내기 쉬운 생경한 관념, 추상적인 요설이나 웅변을 그의 문학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집단사회의 소외자로서의 밑바닥인생들의 생태에 대한 추구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한 집단사회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고발풍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집단사회의 부조리와 대결해 나가야 할 개인으로서의 윤리문제의 추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굶주림 못지 않게 가난한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인 추위를 견뎌내기 위하여 결국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행위로 발전하는 이야기를 그린 「땔감」이나, 악랄한 포주의 횡포 아래에서 차츰 파멸되어 가는 창녀들의 생태를 그린 「돛대도 아니 달고」등은 그의 첫 번째 노력의 소산이라 할 것이요, 둘째 사람들의 실없고 무책임한 장난이 한 젊은이를 투신자살로 몰고가게 한 「몰매」, 마을 사람들의 비겁한 이기심이 결국 죄없는 한 어린이를 속죄양으로 만들고마는 「양(羊)」제식훈련의 변천과정을 통하여 획일화되어가는 집단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고발하고 있는 「諸式訓練略史」, 분단시대의 비극의 당사자로서 파멸되어 가는 인간의 생태를 그린 「무제」등은 두 번째 노력의 소산이라 할 것이요, 평범한 한 인간을 엉뚱하게 영웅으로 조작해냄으로써 자신의 명리를 취하려는 어떤 권위의 횡포 앞에 도전하고 나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氷靑)과 深紅」, 집단사회의 횡포에 의하여 밑바닥인생으로 전락한 한 인간이 차츰 그 집단의 압력에 대결해나갈 자신의 윤리를 정립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연작) 등은 그의 세 번째 노력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분류가 다 그러하듯이 이런 그의 세 가지 노력들은 확적히 선을 긋듯이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결국 시대현실에의 그의 일련의 관심이 반영하는 다양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이러한 일련의 노력의 노력들은 때로 병행하기도 하고, 때로 중첩되기도 하면서 다양성을 드러내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작품들에서만 그의 시대현실에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따지자면 작자 자신의 어린 시절의 회상에서 연유된 듯한, 그리고 어린이의 시점으로 이룩되고 있는 「황혼의 집」,「기억 속의 들꽃」등과 같은 다분히 서정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 작가의 일관된 사회에의 관심의 반영을 느낄 수 있고 철저히 토속적 샤머니즘의 분위기 속에 상황을 설정한, 그리고 이 역시 어린시절의 회상에서 연유된 듯한 「장마」등에서도 시대현실에의 짙은 관심의 반영 및 고발풍자의 의지의 반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윤흥길의 문학에 일관하는 또 하나의 소중한 노력, 그것은 토속적 샤머니즘적 세계에 대한 추구, 한국적 한에 대한 꾸준한 추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실상 로고스적인 것이기보다는 파토스적인 것이요, 지적인 측면이기보다는 정서적 측면이며, 산문의 영역이기보다는 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산문문학의 자리에서 볼 때는 윤리적 주제적 측면이 아니라 풍속적 분위기적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국인의 에토스, 한국인의 심층의식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측면이다. 「정읍사(井邑詞)」이래의 한국서정시의 주조가 한의 가락으로 일관하여 왔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은 윤흥길의 문학적 분위기를 형성함에 있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대개의 경우 그의 작중현실에 아련한 서정성이 감돌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묘사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그의 문학에 어딘지 아련한 신비적 분위기가 감돌게 되는 것도,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라 하겠지만, 특히 이런 측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측면은 「황혼의 집」,「기억 속의 들꽃」,「장마」,「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등과 같은 작품에 있어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만, 「아홉 켤레의 구두롤 남은 사내」,「무제(霧堤)」등 업투데이트(up-to-date)한 명제와 관련되는 작품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묵시(默示)의 바다』등과 같은 그의 장편에 있어서도 작중현실의 결정적 배경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김동리나 황순원 등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찾을 수 있는 바 한국적인 한의 문학과 긴밀히 관계지어져 있다 할 것이다. 가령 「황혼의 집」에 있어서 술에 취한 날 저녁이면 언제나 서녘해를 바라보며 넋두리를 늘어놓는 자식 잃은 노파(경주네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가령 황순원의 일련의 단편에서 볼 수 있는 바 한적인 여인상의 모습을 느끼게 되는 것이며, 징그러운 구렁이 앞에서 거의 신들린 듯 축수를 하는 「장마」의 외할머니나 또 그녀의 그런 빈손으로 하여 그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김동리의 「무녀도」의 모화의 일면을 보게 되는 것이며, 이북에 두고온 아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밤새껏 애절한 오열에 잠기는 「무제」의 고모부나, 자신의 완고한 외로움 속에 칩거하는 식자공 봉씨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있어서의 허생원의 일면을 보게 되는 것이며, 저주스러운 자기운명을 견뎌내기 힘들어 항상 깜깜한 바다의 죽음에의 유혹에 시달려야 하는 『묵시(默示)의 바다』의 금순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으로 맺힌 황순원의 오작녀(「카인의 후예」)의 일면을 느끼기 어렵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윤흥길은 또 한국적 고유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한국현대소설의 주류라 할 수 있는 한적·인정적 소설의 흐름을 착실하게 이어받은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는 그러한 한적·인정적인 문학과 명백히 다른 면을 간직하고 있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령 앞서 말한 일련의 작품들에 있어서 한은 어디까지나 당대 현실의 시대적·역사적 조건에서 유리된 순수 추상으로서의 복고적인 자리에 기반을 둔 것인 데 반하여 윤흥길의 그것은 한결같이 당대 현실의 절박한 조건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가령 모화(「무녀도」)와 두 노파(「장마」)를 대비해 보거나, 허생원(「메밀꽃 필 무렵」)과 고모부나 봉씨(「무제」)를 비교해 볼 때 그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양자들 사이에는 분명 혈연적 유사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전자들이 당대 현실의 역사적 조건에서 일단 유리된 자리에 서식하는 인간상들인 데 반하여 후자들은 모두 우리 시대의 민족사적 비극과 긴밀히 관계지어져 있는 것이다. 모화나 두 노파가 다같이 신들린 존재들이라 할 수 있지만 전자가 식민지시대의 현실적 조건에서 일단 유리된 가공의 자리에 위치지워진 인물인 데 반하여 두 노파는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에 위치지워진 인물들이며, 허생원이나 고모부 및 봉씨가 다같이 쓸쓸하고 뒤틀린 분위기를 지닌 인간상들임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당대 현실에서 유리된 떠돌이 장돌뱅이인 데 반하여 후자들은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 치명적으로 말려들어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한국적인 한을 계승하되 그것을 당대현실의 조건과의 관련 속에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왕릉(王陵)과 주둔군(駐屯軍)」, 「야호(夜壺)」등의 작자 하근찬과 매우 비슷한 일면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양자 사이의 개성적 차이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윤흥길의 문학적 매력의 중요한 일면은 바로 이 점에서 연유되고 있다. 그의 문학에서 작자 자신의 시대현실에의 유다른 관심의 반영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령 카프계열의 문학에서와 같이 생경한 관념이나 추상적인 요설이나 웅변으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의 심층의식으로 부딪쳐오는 이유도, 물론 앞서 말한 여러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겠지만, 특히 이런 면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다지 새로운 것 같지 않은 그의 문학의 진정한 새로움은 바로 이 점에 있다 할 것이다. 「장마」가 거둔 뛰어난 성과도 바로 이런 측면과 긴밀히 관련된 탓이라 할 것이다.
토속적인 것과 당대 현실의 윤리, 샤머니즘적 분위기와 시대현실의 명제는 실상 한국현대소설에 있어서는 상호보완적인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평행선을 그어왔다. 그러한 이율배반적인 두 요인을 하나의 소설적 공간 속에 종합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라 할 것이다. 이 작업이야말로 한국현대소설이 감당해 나가야 할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본격적인 추구는 한정된 단편소설의 공간에서가 아니라, 장편소설의 보다 광활한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그의 최초의 장편 『묵시의 바다』는 매우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관한 본격적인 검토를 시도하기에는 이미 지면이 넘쳤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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