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의 생애
by 송화은율유치환 시인의 생애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시인. 호는 청마(靑馬). 경남 충무시 태평동에서 유생인 준수의 8남매중 2남으로 출생. 11세 때까지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그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도일. 토쿄 토요야마 중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운이 기울어 귀국,1926년 동래고등학교 5년에 편입.그듬해 졸업하고 연희전문문과에 입학했으나, 폐쇠적인 분위게에 불만,1년만에 중퇴했다. 1929년 시단을 풍미하던 정지용의 시에 감동,가형과 함께 고향에서 동인지 <생리(生理)>를 발간,1931년 <문예월간>제 2호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이후 사진관 경영,백화점 사원,학교 교사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에 전념, 1939년 12월에 첫 시집 <청마시초>를 간행했다. 이 시집에는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 <그리움> <일월>등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1940년 봄, 만주 하로빈 근교로 이주하여 농장을 관리했는데 , 제2시집 <생명의 시>에 수록된 가열한 시편들은 모두 이 만주에서의 체험에 의해 씌여진 것들이다. 1945년 10월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서 여중 교사가 되었다.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제 1회 시인상을 수상, 1947년 5월 , 그 동안에 쓴 시 <바위> <광야에 와서> <드디어 알리라> <수(首 )>등 59편을 모아 <생명의 시>를 발간했다. 1948년 9월 제3시집 <울릉도>를 발간했다. 1949년 5월 제 4시집 <청령일기>를 계속 펴내고,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자 육군 제3사단에 종군하였다. 이해에 제2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1년 9월에는 직접 목격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종군시집 <보병과 더불어>로 엮고, 1953년 고행으로 돌아가 수상록 <예루살램의 닭>을 발간했다. 1954년 경남 안의 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또 초대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이해 10월에 <청마시집>을 발간, 1955년 경주 고등등학교 교장에 취임. 1956년 제 1회 경북문화상 수상,195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고,그해 12월 <제9시집>을 발간했다. 1958년 제 5회 자유문학상 수상, 이해 12월에 <유치환시선>을 발간했다. 1959년 수상집 <동방의 느티>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발간, 경주고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대구로 이주했다. 1960년 12월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하고, 1961년 10월 경주 여중.고 교장취임. 1962년 제 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대구여고 교장으로 옮겼다. 1963년 수상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발간, 이듬해 경남여고 교장으로 옮겨서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발간,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6년 부산 남여상고 교장으로 취임,이해에 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간행. 1967년 2월 13일. 10여년 전에 쓴 시창으로 미리 알아차리기나 한 듯이 버스에치여 부산 촤천동 앞길에서 세상을 떴다. 향년 60세. 사후 오랜 연고지인 경주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는 불굴의 생명 의지를 노래한 남성적인 시인이었다. 40년 가까운 시작생활을 통하여 전 14권에 달하는 시집과 수상록을 발간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황성한 의욕에 불탔던 시인이나를 알 수 있다. 그의 시심 또한 줄기차서 일찍부터 대가의 풍격을 보여 주었다. 더러는 그의 시가 너무나 생경하고 소박하여 그야말로 현대시의 특징이라고나 할 기교를 전혀 도외시하면서 씌여졌기 때문에 논란도 없지 않았으나, 그의 대하와 같은 시심의 흐름과 사유의 깊이는 시의 지엽적인 표현에만 집착하기에는 너무나 건강했다. 따라서 그는 평생동안 뚜렸한 시적인 변모를 보임이 없이 한결 같은 토운으로 생활과 자연.애련과 의지, 허무와 신 등을 노래했는데, 이러한 그의 특성이 시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시가 바로 시인 자신의 인생과 직결되어 있었다는 데 연유한다.
즉 ‘한인간으로 인생을 살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한 바가, 따로 시적인 굴절을 겪지 않고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된 것’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시인인 것을 별로 달가와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려고 시도한 일 조차 있었다. ‘또한 염의도 없는 분뇨를 하듯 어찌 시인이 시를 낳으려고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참아서 능히 견딜 만하거든 아예 붓대를 들지 아니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불행을 하나라도 덜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생명의 시> 서문> ’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이 시인임을 적오도 시를 작위적으로 낳으려는 시인임을 부정했으나 그가 살아야 했던 시대는 수많은 시련을 그에게 안겨주어 마침내 한국 최대의 다작시인의 자리에 그를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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