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불기설화
by 송화은율원효불기설화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실려 있는 설화. 신라 십성(十聖)의 한 사람인 원효가 도인으로서 도달했던 매이지 않는 높은 경지에 관한 설화이다. ≪삼국유사≫는 〈행장 行狀〉·〈당승전 唐僧傳〉·〈향전 鄕傳〉 등을 인용하여 원효의 설화 7편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원효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산기를 일으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자리를 마련하여 해산하였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보통과 달랐으므로 ‘사라밤〔裟羅栗〕’이라 불렀다.
② 옛날 절을 주관하는 이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을 끼니로 주었는데, 이에 종이 불만을 품고 관가에 송사하였다. 관가에서 그 밤을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한 개가 바리 하나에 가득 찼다.
이를 보고 관리는 도리어 종 한 사람에게 밤 한 개씩만을 주도록 판결을 내렸다. 그 밤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③ 원효의 어머니가 일찍이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였다.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원효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여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을 깨쳤다.
④ 어느 날 원효가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대사께서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하신다.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궁리(宮吏)를 보내어 원효를 데려오게 하였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때마침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가 일부러 물 가운데 떨어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瑤石宮)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공주가 거처하고 있었다. 원효가 요석궁에 머무르게 된 뒤, 공주는 잉태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⑤ 원효는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였다. 광대가 춤추며 노는 큰 표주박을 우연히 얻어서 도구로 삼고 이름하여 ‘무애(無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화엄경≫의 게구(偈句)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는 무애를 가지고 〈무애가〉를 부르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음영(敎化吟詠)하고 다녔다. 이에 가난하고 몽매한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 한마디는 다 하게끔 되었으니, 원효가 끼친 교화는 참으로 컸다.
⑥ 원효는 바닷룡의 권유에 따라 노상(路上)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금강삼매경소 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썼다. 이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는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⑦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芬皇寺)에 안치하였다. 설총이 절을 하니 원효 상이 문득 돌아보았다. 소상은 그 이후 돌아보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宋高僧傳,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新羅佛敎說話硏究(黃浿江, 一志社,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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