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우리 공작원 / 해설 / 아바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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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우리 공작원'

 

전수용 이화영대 영문과 교수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의 작가로 잘 알려진 윌리엄 골딩은 91년 그레이엄 그린이 사망했을 때 독자들은 20세기 인간의 의식과 불안의 궁극적인 기록자로서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린은 가톨릭 교도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동정적이던 작가였다그는 이 조화되기 어려운 신념들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했으며20세기인들을 끊임없이 엄습하는 도덕적 모호성이 그를 혼란시킬 때 그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택했다우리가 흔히 그의 대표작으로 알고 있는 사건의 핵심」「사랑의 종말」「권력과 영광」「브라이튼 로크 등은 모두 진지한 도덕적 갈등을 다룬 심각한 작품이다그러나 그린은 탐정소설이나 스파이 소설류의 대중적 작품도 많이 썼고그로 인해 인기를 누렸던 작가다또 그런 광범위한 그의 활동영역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그를 20세기의 주요작가 반열에 올리는 것을 주저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뛰어난 구성력과 절제돼 있으면서도 생동감있는 언어 구사력을 가진기술적으로 완벽한 작가다해학과 기지와 아이러니 또한 그의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힘이다

 

아바나의 우리 공작원은 해학과 기지와 아이러니가 넘치는 스파이 소설류의 작품이다문제는 이 스파이 소설의 주인공 웜월드가 진짜 스파이가 아니라는 데 있다그는 아바나에 정착해 진공청소기 대리점을 하고 있는 영국인 소상인에 불과하다그에게는 무척이나 사랑했으나 그를 떠나버린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밀리라는 열여섯 살 난 딸이 가장 소중한 존재다그는 어느날 우연히 영국 정보국의 정보원으로 채용된다이것은 거의 억지로 그에게 부여된 임무였다그런데 마침 깜찍하고조숙하고당돌하면서도 엉뚱한 밀리는 아버지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승마를 하고 싶어한다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개인적 헌신에서만 삶의 의미를 느끼는 그는 그에게 강요된 공작원이라는 신분을 거꾸로 이용한다그는 우선 밀리가 승마연습을 할 수 있도록 컨트리클럽에 가입한다물론 비싼 가입비는 아바나의 상류 인사들을 접촉하기 위해서는 클럽에 가입해야 한다는 핑계로 영국 정보국에 부담시킨다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보조정보원들의 명단을 만들어 보고하고 그들의 급여와 공작비까지 받아낸 뒤 밀리를 스위스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내기 위해 저축한다

 

전시에 군 정보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그린은 실제로 정보원들이 가짜 정보원 명단을 만들어 급여와 공작금을 받아내며엉터리 정보를 보내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적당히 조작된 가짜 정보들을 보내던 그는 어느날 오리엔테의 밀림지대에서 쿠바정부(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쿠바 정부는 독재자 바티스타의 정부였으며얼마 후 이 정부는 피텔 카스트로에게 전복됐다)가 비밀리에 거대한 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제보를 하고는 무기 도면이라면서 자신이 늘 팔고 다니는 진공청소기를 확대한 도면을 보낸다영국 정보국은 약간의 의심을 가지면서도 기상천외한 음모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때문에 그에게 비서인 베아트리스와 무선통신원 루디를 보내 정보수집에 박차를 가하도록 한다동시에 그의 주변에서는 기이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그의 친구 하셀바하의 집이 수색당하고그에게 비밀무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그를 확인하기 위한 공중촬영 임무를 준 것으로 지목한 라울이라는 파일럿은 의문사한다또한 보조정보원으로 조작한 시푸엔테스라는 엔지니어는 저격당한다뿐만 아니라 그 자신은 독살의 위험을 겨우 모면하며그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하셀바하가 살해된다이 모든 일은 서로의 정보활동을 감시하고 있는 쿠바정부 및 소련 미국 독일 등의 정보국이 웜월드의 가짜정보가 진짜인줄 알고 개입해 일어난 일들이다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베아트리스와 함께 노력하던 웜월드는 친구인 하셀바하의 죽음에 자극받아 그를 살해한 카터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나는 나의 조국을 위해서는 살인을 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_누구를 위한 복지란 말인가_를 위해서는 살인을 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카터가 하셀바하를 죽였기때문에 그를 죽일 것이다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체제에 대한 개인의 우선권을 확인한다

 

카터를 죽인 뒤 영국으로 소환된 웜월드는 파직과 함께 징계를 각오하고 있었으나 의외로 정보원 훈련관이 되어 현지의 정보조직 운영방식에 대한 교습을 맡게 된다정보국은 자신의 체면과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 웜월드에 대한 자신들의 실수를 덮어버린 것이다정보국의 생리에 대한 그린의 냉소적 태도가 다시 한번 확인되는 대목이다아이러니를 더하는 것은 무기력한 소시민이지만 조직의 거대한 힘을 농담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웜월드에게 사랑을 느낀 베아트리스와의 결혼이 결정되는 것이다자신과 베아트리스와 밀리의 앞날을 걱정하는 웜월드 앞에서 베아트리스는 그가 앞으로는 지금까지 같이 미친 짓을 할 수 없으리라는 아쉬움을 여운으로 남긴다

 

사랑하는 가족의 앞날을 위해 공금을 횡령하는 `인간적인' 남자들을 수없이 보아온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고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지 모른다그러나 개인의 삶 속으로 엄습해 오는 체제의 힘그것이 만들어 놓은 그물망 속에서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사는 20세기의 인간들이데올로기라는 낯선 단어때문에 2천만명이나 되는 이들이 가족과 헤어져 사는 믿지 못할 현실을 가진 한국인들냉전체제 속에서 정보전쟁을 일삼고 권력의 균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위해 어마어마한 군비를 축적해 놓고 살아왔던 현대인들의 어이없고 부조리한 모습 앞에 그린은 `?'라는 도발적 질문을 제기한다이 모든 것보다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사는 것이 훨씬 마땅한 일이 아닐까 하는 그의 단순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더구나 그가 이 작품을 낸 시기가 냉전이 한창이던 50년대 말이었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작가의 혜안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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