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우리나라 의학계의 언어 순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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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의학계의 언어 순화 / 정 인 혁 (연세대 의학과)

 

1 머리말

다이 하드,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투문정션, 데몰리션 맨…… 요즈음 일부 영화 제목을 보면 영어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들이 많다. ‘벽력신장, 동방독응, 용쟁호투, 패왕별희와 같은 외국 영화 제목은 모두 한문을 우리말 소리로 적은 것이다. 외국말을 한글로 적었다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이 되지 않는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란 표현도 영어를 공부할 때 ‘a cup of coffee’ 한 잔의 커피라고 번역하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커피 한 잔 주시오’>라고 하지 한 잔의 커피 주시오라고 하지는 않는다. 의학계에서 쓰는 의학 용어와 표현 중에도 이와 같은 것이 많이 있다. 권격전환, 견양경해, 암소진전과 같은 용어는 이상한 중국 영화 제목과도 구별하기 어렵고 고장, 사고, 비극, 장비와 같이 다른 뜻이 먼저 떠오르는 용어도 있다. 이런 한자 용어들은 마치 씨름을 상박(相撲, 스모)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또 대부분 기록과 대화에서는 영어가 분별 없이 많이 쓰인다. 의학계에는 우리말을 쓰고 어려운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고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코, , 턱이라고 쓴 것을 비(), (), ()이라고 고치면서 학술 용어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 우리 의학 용어가 만들어진 배경과 현재 의학계에서 쓰고 있는 언어의 실태, 그리고 우리 용어가 가야 할 방향과 노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배경

우리나라에 서양 의학이 들어온 지 약 백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의학교육을 영어로 하였으나 교육의 효과를 높이고 짧은 기간에 더 많은 사람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영어 교과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여 1908-1909년에 대부분 우리말 교과서가 출간되었다. 그러나 곧 한일 병합으로 인하여 우리말을 발전시킬 기회를 잃게 되었고 대부분 전문인들은 일본말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학술 용어를 정리하려는 시도는 1949년 안과학회에서 학술어 초안 작성 위원을 선정하여 활동한 것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때 제안되었던 일부 용어를 일본 한자 용어와 비교해 보면 미모(眉毛)를 눈썹, 맥립종(麥粒腫)을 박알, 녹내장(綠內障)을 딴딴눈알, 안정피로(眼精疲勞)를 눈쉬고단 등과 같이 새롭게 만든 것이 있다. 전문 용어에 우리말을 쓰려던 첫 시도는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에 의해 날아가버렸다.

 

보건사회부는 1995년 세계 보건기구 분류 규정에 따라 한국 표준 질병상해 사인 통계 분류표를 작성하였다. 이것과 의료법이나 공문서에 통일된 의학 용어를 써야 할 당위성 때문에 1954년 심의위원 20명을 위촉하여 일부 의학 용어를 심의하였다. 그 후 정부에서는 우리나라 과학 기술 용어의 통일을 위하여 문교부 주관으로 1969년과 1978년에과학 기술 용어집을 펴냈으며 여기에는 의학편이 따로 있다. 여기서 용어 제정의 기본 방침을 보면 어려운 말을 지양하고 쉬운 우리말을 쓰며, 널리 쓰이며 간편하고 간명하고 쉽고 어감이 좋고 보편성이 있는 것을 골라 쓰며, 널리 쓰이는 관용어는 극히 불합리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부분 일본식 한자 용어로 원칙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한편 대한의학협회에서는 1977년과 1984년에의학 용어집을 펴냈다. 이것과 과학 기술 용어집의 위원이 서로 달랐던 탓에 두 용어집의 용어는 통일이 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 의학 용어는 일본식 한자말이 바탕이 되었다. 의학 용어집(1984) 머리에 ……용어 제정의 원칙이 다른 일본식 용어나 중국식 용어가 아무런 비판과 고려 없이 국내에 마구 들어와, 우리 의료계에 혼란을 일으켜…… 결함 많은 본 용어집의 보완 개선은 다음 선임될 위원들의 예지와 노고에 힘입으려 하며……라고 하였다. 일본식 한자 용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다듬는 작업은 후배들에게 미루었는데 이런 점은해부학 용어집(1978)이나정형외과학 용어집(1989)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근래 여러 학회에서 별도의 용어집을 펴냈지만 대부분 의협의학 용어집에서 해당 분야의 용어만 뽑은 것이 대부분이다.

 

대한해부학회에서는 1990해부학 용어집세번째 판을 내었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쓰던 어려운 한자말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고, 토박이말을 살려 쓰고, 우리말 용어를 많이 만들었다. 이것은 의학계 각 분야에 용어에 대한 관심과 자극을 주었다. 이 공로로 대한해부학회에서는 1992과학 기술 용어집의학 용어집의 용어를 통합하고 해부학회를 비롯한 각 학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13만 용어를 수록한 용어집을 발간하였다. 한 개념에 여러 용어를 쓰거나 일본식 한자말이 많아 혼동이 오는 용어가 많이 있으나 앞으로 이 용어집을 바탕으로 훌륭한 우리말 용어를 정착시킬 의지가 있음을 보였다. 최근에는 여러 학회에서 용어를 합리적이고 쉽게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

 

3 의학 교육에서 사용되는 언어

 

3-1 용어

 

최근 의학 용어를 쉽고 우리말답게 바꾸자는 바람이 일고 있으나 아직도 대부분 용어는 어려운 한자말로 되어 있어 의미 전달이 명확하게 되지 않고 소리도 비슷비슷한 것이 많아 혼동이 오는 것이 많이 있다. 한문을 쓰면 혼동을 피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용어를 다른 나라 글자로 구별해야 하고, 어려운 한자를 공부해야 하는 부담이 있고 소리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혼동이 생길 수 있는 용어로 콩팥을 뜻하는 신() 자가 들어가는 용어를 예로 들어본다. 콩팥과 관계 없는 다른 신(, , , , ) 자도 쓰인다. 다음의 예들을 보라 : 신석, 신암, 신주, 신낭, 신관, 신와, 신각, 신문, 신경, 신부, 신사, 신동, 신우, 신엽, 인공신, 위축신, 흔적신, 다낭신, 궁상신, 중복신, 유주신, 마제철신, 신질환, 신체위, 신박편, 신결석, 신결핵, 신산통, 신원주, 신발증, 신장애, 신분율, 신카벙클, 신형태반, 신형골반, 신성통풍.

 

또 다른 예로 의학 용어에 쓰인 한자 구와 관계 있는 용어를 보면 (상구, 치구, 구진), (이상구, 구순염), (상구, 위소구), (구토), (상구, 조거구), (후구, 반구, 구언어), (구충), (치구, 이구), (구회간질, 익돌구, 침구), (구음장애, 구조유전자), (불구), (구급차), (/귀두염), (구점법), (비구, 탈구), (구간실조) 등과 같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용어가 많아 소리가 같은 것도 있는 등 매우 혼동스러움을 알 수 있다. 한자로 표현된 영어 용어를 비교해 보면 (caruncle, colliculus, mons), (aditus, aperture, oral, ostium), (bulb, globose, spheroid) 등에서와 같이 약간씩 다른 개념으로 쓰인 용어가 한 가지 한자로 표현되어 있다.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예로 한 가지 개념이나 구조를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이 있다. 같은 의미로 쓰인 conjugate란 용어를 켤레, , 공액, 공동, 복합 등 전문 분야에 따라 다양하게 쓴 것이 있고, 한 구조에 사구체 근접부 장치, 방사구체 장치, 사구체 옆 장치 등과 같이 여러 용어를 써서 사람마다 선택해서 쓰게 했는데 한 가지로 통일이 되어야겠다.

 

3-2 교과서와 논문

그 동안 의학 분야에서 영어 책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근래 우리말 책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개인이 쓴 책도 있고, 학회가 중심이 되어 여러 교수가 일부분씩 맡아 쓴 책도 많다. 저자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일부 교과서는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표현도 우리말답지 않아 선뜻 이해되지 않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면 어느 교과서에는 몸통을 나타내는 평범한 용어를 몸통, 체간, 구간, 체부, 동체 등 다섯가지로 표현하였다. 일반적인 설명 중에도 유아를 앙와위(仰臥位, supine)로 눕히고 검측(檢側) 고관절은 90°굴곡, 슬관절은 완전 굴곡시킨 다음 술자의 중지(中指)는 대전자상에, 무지는 대퇴 내측…… 또는 '다량의 유연(流涎, salivation), 축동(縮瞳, constricted pupil)이 있을 때에는 parathion 중독을 의심한다' 등과 같은 기술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젖먹이를 반듯하게 눕히고 검사하는 쪽 엉치 관절은 90°굽히고, 무릎 관절은 완전히 굽힌 다음 검사하는 사람의 가운데손가락은 큰 대퇴돌기에, 엄지손가락은 넓적다리 안쪽……' 또는 '침을 많이 흘리고 눈동자가 작아졌을 때에는 파라티온 중독을 의심한다'라는 표현과 비교가 된다. 또 한 쪽도 안 되는 분량에 '양측농deaf 환자의 재활에'와 같이 농deaf을 세 번씩 되풀이하였다. 우리말만 써서 의미 전달이 명확하게 될 것 같지 않다면 그 용어를 바꾸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괄호 속에 영어나 한자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 너무나 많다. 어떤 용어에는 괄호안에 한자와 영어를 함께 써 한 줄에 용어 하나가 꽉 찬 곳도 있어 독서 능률을 크게 떨어뜨린다. 이런 점 때문에 학생들에게서 우리말 교과서보다 차라리 영어 책 읽기가 더 편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3-3 강의나 대화

의학계에서는 대화나 강의나 발표를 할 때 영어를 지나치게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어느 학생이 강의 내용을 적고 우리말로 하면 훨씬 알아듣기 쉽고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우리말로 고쳐 학생 잡지에 실은 부분을 예로 든다.

 

'routinely하는 procedure skip하는 수가 있다' '흔히 하는 절차를 건너 뛰는 수가 있다', 'abnormal pupil까지 있으면 mortality는 더 상승하는데 stroke후 일 년까지 survive하면 mortality normal population과 같이 된다' '눈동자가 정상이 아니면 사망률은 더 높아지고 중풍 후 일 년까지 생존하면 사망률은 정상인과 같아진다'.

 

이런 정도로 외국어 쓰는 것은 보통이며 심하게 말하면 토씨와 '하다'를 빼고 모두 영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외국에서 발전된 것도 우리가 소화를 해서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 것으로 이어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교육 과정에서 분별 없이 쓰이는 외국어는 교육의 효과뿐만 아니라 주체성의 문제도 함께 있다고 하겠다.

 

3-4 기록

병원에서는 대부분 기록을 영어로 하는데 손발이 멍멍하다, 손발이 시리다, 정신이 깜빡깜빡한다, 피부에 뭔가 덮인 것 같다, 욱신욱신 아프다 등과 같은 표현을 외국말로 어떻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이런 것을 모두 영어로 적었다는 데는 기록의 정확성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기록은 뒷날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되기도 한다. 교과서나 논문에서도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표현이 우리말답지 않다. 나중에 컴퓨터로 자료를 정리하거나 찾아볼 때 이런 점도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유길준 선생이 쓴 서유견문(1895) 중에서 필자가 읽을 수 있고 컴퓨터에 있는 한자가 있는 한 부분을 보면 '磨沙州 學問大家 毛氏 하야 其敎 하니 蓋 磨沙州 合衆國 文物主人이라 하니 鴻匠巨擘 輩出 …… 上林苑 其名 八禮老逸이라 하나니 其華美 景像 壯麗 排鋪 筆墨으로 形容하기 不能한지라 姑舍하거니와 其下'(조사는 현대어로 고쳤음)와 같다. 유길준 선생은 한문 실력이 뛰어났었으나 서양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한문으로만 표현할 수 없어 우리말과 섞어 적는다고 하였다. 이런 기술은 당시에는 격식을 차리지 않은 매우 앞선 것이었으나 지금은 번역을 해야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되었다. 요즈음 의학계에서 쓰는 기록이 100년 후 번역을 해야 읽을 수 있다면 우리 의학은 어떻게 이어서 발전할 수 있겠는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3-5 남북한 의학 용어 비교

최근 통일에 대한 부푼 꿈을 갖게 되었는데 북한의 의학 용어는 어떻게 다듬어지고 어떠한지 비교해 보고자 한다. 북한에서도 1966년 말다듬기 운동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와 비슷하게 일본식 한자말로 된 의학용어를 썼다. 김일성 교사에 의해 1966년 내각 직속 국어사정위원회와 사회과학원 국어사정지도처 및 언어학연구소 산하 18전문 용어 분과위원회를 동원하여 해당 부분 용어에 대한 말다듬기 연구 토론을 추진하고 그 내용을 매주 2-3회에 걸쳐 신문에 개재하여 독자들의 의견을 모아 학술 용어를 다듬었다. 의학 용어는 의약학 용어 분과위원회에서 다듬었다. 이런 어휘 정리 사업이 북한에서는 당의 중요한 정책으로 국가 주도로 시행되었다.

 

표준말과 문화어는 각각 서울과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였고 맞춤법에 차이가 있어 용어가 달라진 것이 있다. 비장 또는 지라를 북한에서는 기레라고 하는데 우리말 사전에 기레는 평안도 사투리라고 되어 있다. 맞춤법의 차이로 귓바퀴, 눈썹, , 요소를 북한에서는 귀바퀴, 눈섭, , 뇨소로 쓰지만 이런 용어를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우리몸의 부분이나 장기를 가리키는 눈, , 무릎, 콩팥, 입천장, 숫구멍 등 토박이말은 같이 쓰고 있다. 동맥, 정맥, 신경, , , , 판과 같이 한자 용어라도 오랫동안 사용하여 한자가 없이도 의미 전달이 명확하게 되는 용어와 음경, 질 등 바깥 생식 기관에 관한 용어도 남북한에서 같은 용어를 쓴다. 한자 용어를 북한에서 쉬운 말로 바꾸어 달라진 용어의 예를 들면 살균-균죽이기, 해열제-열내림약, 자창-찔린상처, 요실금-오줌새기, 소양성발진-가렴돋이, 백반증-흰무늬증, 폭주-눈알모임, 간반-검버섯, 담낭염-열주머니염, 실어증-말못하기증, 난청-가는귀먹기, 난소농양-알집고름집, 간경화증-간굳기증, 이명-귀울이, 융모-부들털 등 매우 많다. 한자를 읽는 소리의 표기는 남한은 영어, 북한은 러시아어 영향을 받아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보기:싸이토크롬-시토크롬, 브루셀라-브루쩨라, 스펙트럼-스펙트르, 디옵터-디옵트리, 뮤신-무친)

 

일부 용어만 비교해 보았지만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북한의 달라진 용어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고 일부 용어는 북한 것이 더 잘 이해가 될 것 같다. 통일이 된다면 용어의 차이에 다른 문제보다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쓰는 우리의 현실에 더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남북한의 언어 현상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북한의 언어와 표현방법이 표준말과 차이가 나서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표준말과 똑같아서 한 언어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형식, 의미, 용법이 다른 부분도 있으나 표준말과 문화어는 한 언어로 묶일 수 있음을 보였다. 대한해부학회에서 치골(恥骨)을 우리말로 두덩뼈라고 하였는데 마리를 잡아서 만든 용어가 같아진 것은 남북한 언어 감각이 같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4.의학 용어를 바람직하게 만드는 길

우리 의학 용어는 우리의 언어체계에 맞도록 쉽게 바꾸어 전문가와 일반인이 함께 널리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대한의학협회에서 펴낸 새 의학 용어집(1992)에도 우리나라 의학 용어를 아름답고, 쉽고, 간명하고, 듣기 좋고, 보편적인 우리말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아울러 의학 관계자뿐만 아니라 비전문 일반 국민도 자연스럽게 널리 같이 쓰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형외과학 용어집(1989)머리말에도 '이 용어집은 발판에 불과하며……과학성을 띠면서 우리의 언어 습관에 맞는 아름답고 정확한 용어가 제정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라고 하였다. 안과 학술 용어 시안(1992)의 원칙 중에도 용어는 한글 표기와 음성 전달 방법에 적합하도록 정비하고 체계적이고 통일성을 갖도록 한다고 하였다. 의학이 아닌 다른 분야,예를 들면 물리학 용어집(1988)에도 용어는 되도록 시대적 감각에 맞고 간명하고 이해가 쉽고 어감이 좋은 것으로 선택하고 우리 고유의 낱말을 되도록 많이 채택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여러 용어집의 머리말이나 용어 제정 원칙은 공통적으로 학술 용어는 쉽고 간명하고 아름다우며 우리 언어 체계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의학 용어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용어집들의 내용은 위에서 예를 들었듯이 아직도 그런 목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떻게 하면 그런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해부학 용어를 다듬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4-1.우리 토박이말이 있는 것을 찾아 쓴다.

어느 나라 말에든 토박이말과 외래말이 있다. 사전을 보면 토박이말보다 외래말이 더 많다. 그중 대부분은 한자말이며 실제로 쓰지 않는 말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에서는 토막이말이 바탕을 이룬다. 토막이말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달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어 그 뜻과 느낌이 바로 전달된다.

 

예를 들어 이개(耳介)를 귓바퀴, 천문(泉門)을 숫구멍, 좌창(座瘡)을 여드름, 편평췌를 납작사마귀, 해수(咳嗽)를 기침, 독두(禿頭)를 대머리, 비류(鼻瘤)를 딸기코, 이절(耳節)을 귀뾰루지라고 하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예로 용어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 들었을 때 이반사, 이신경통 등도 무슨 말인지 그 뜻이 잘 안겨오지 않으나 <()>를 우리말 <>로 바꾸어 귀반사, 귀신경통으로만 해도 뜻의 전달이 더 명확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학술 용어로 토박이말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입술이라고 하면 정의가 확실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쓰는 뜻과 의미에 혼동이 올 수 있으므로 구순(口脣)을 써야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입술은 입술 연지를 바르는 붉은 부분을 가리키나 의학에서는 입둘레근이 있는 부분을 포함한 더 넓은 부위를 가리킨다. 혀끝으로 입술 안쪽을 문지를 때 우들두들하게 느껴지는 부분까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구순은 입술을 뜻하는 한자말일 뿐이다. 뜻의 전달이 쉽고 분명하게 전해지는 말이 기억하기도 좋아 학술 용어로도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른 나라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영어에서도 lip을 라틴말 labium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어와 라틴말은 같은 소리글이지만 한문은 뜻글이기 때문에 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4-2 우리말의 쓰임과 잘 어울려 이해가 쉽게 되는 낱말을 선택한다.

새로운 개념이나 사실에 언제나 새로운 말을 만든다면 낱말 수가 매우 많아지기 때문에 모두 기억하기도 어려우며 우리는 계속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도 갖게 된다. 이럴 때 알고 있는 말을 사용하여 그 말의 은유적 의미를 통하여 그 개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해부학 용어에서 이러한 뜻에 따라 바꾼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Bulb라는 용어는 구()로 쓰였는데, 어원은 둥근 뿌리라는 뜻으로 의학에서는 여러 가지 부풀어 오른 부분에 사용한다. 이것을 속이 차서 단단한 느낌을 주는 것에는 <팽대>를 써서 두 용어로 분화시키기로 하였다. <망울>은 꽃망울, 눈망울처럼 쓰이고 홀소리가 바뀌어 멍울(멍우리, 젖멍울),몽올(몽오리), 몽어리 등과 같이 되어도 크기와 느낌은 둥글고 속이 찬 것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들었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모구(毛球)는 털망울,후구(嗅球)는 후각 망울과 같이 바꿨다. 이와 비슷한 다른 예를 들면 우리 몸 표면에 두두룩하게 솟은 부분을 <두덩>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손바닥의 엄지손가락 쪽의 두툼한 부분을 가리키는 무지구(拇指球)를 엄지두덩이라고 하였고, 눈꺼풀이 눈알을 덮었다 열었다 하는 피부의 주름이란 것에서부터 음경귀두를 덮는 피부를 가리키는 포피(抱皮)를 음경꺼풀이라고 다듬었다. 이런 용어는 한 번 들은 후 연상이 잘 되고 개념 파악이 더 쉽게 되리라 생각한다.

 

4-3 용어의 표현이나 비교 대상은 우리 문화에 바탕을 둔다

서양의 의학 용어가 오래전 처음 만들어질 때 그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관련지어 지은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서양과 우리는 문화와 여러 가지 환경이 서로 달라서 서양에서는 흔히 볼 수 있고, 들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머리뼈에서 후두골과 두정골 사이를 lambdoidal suture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 문자 람다(λ)와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을 일본과 중국에서는 사람 인()을 써서 인자 봉합이라고 하였다. 최근 일본에서는 라므다상봉합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시옷자가 있어 시옷자 봉합이라고 하였다. 이런 형태에 대한 용어 중에 piriform(배 모양)이란 것이 있다. 서양 배와 우리나라 배는 그 모양이 다른데 배 모양 또는 한자말로 이상(梨狀)이라고 하면 다른 모양을 가리키게 된다. 따라서 이와 관련 있는 용어 중에 piriform recess 이상 함요라고 한 것을 조롱박 오목으로 바꾸었다. 서양 배의 모양이 오히려 조롱박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예로 대뇌의 표면은 주름이 져서 둑처럼 솟은 부분과 그 사이에 깊은 홈을 이루는 부분이 있는데 예전에는 각각을 회() 및 구()라고 하였다. 회와 구는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다듬어진 말이 아니고 또 한 음절 글자여서 의미 전달이 명확하게 되지 않는다. 이것을 밭의 둑처럼 솟은 부분과 패인 부분에 견주어서 이랑과 고랑이라고 하여 의미 전달이 명확하고 개념 파악에도 도움을 받게 하였다.

 

4-4 어려운 한자말을 쉬운 우리말로 바꾼다

한자 용어는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것이 아니면 소리로 들었을 때 그 뜻이 명확하게 안겨오지 않는다. 이런 용어 중에 실마리가 바로 잡혀 있는 것은 쉬운 말로 바꾸기만 하면 알아듣기 쉬운 용어가 될 수 있다. 실마리란 이름을 지어 부르려는 구조나 현상의 특성 가운데서 그 이름을 짓는 계기로 삼는 특성을 말한다. 해부학 용어에서 습주는 주름기둥, 첩모선은 속눈썹샘, 비역은 코문턱 등으로 쉽게 풀었다. 임상 용어 중에도 의학 용어집에 있는 의주감(蟻走感)이란 용어는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을 말하는데 벌레느낌이라고만 해도 그 뜻을 연상하거나 기억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 같다. 또 구순윤상자청선 green line in lip이란 용어는 입술푸른선, 염전모(捻轉毛, twisted hair)는 꼬인털 등으로만 하여도 의미 전달이 더 잘 될 것 같다.

 

4-5 음절을 늘여 소리로 의미 전달이 분명하게 되도록 한다

용어가 한 음절로 되었거나 두 용어 이상이 합쳐질 때 글자의 생략으로 의미 전달이 분명하게 되지 않는 것은 음절을 늘이거나 생략된 말을 넣는 것이 명확할 때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판막’, ‘ 능선으로 한 음절을 보태어쓰면 정맥판은 정맥판막, 장골능은 장골능선으로 더 뜻이 명확해진다. 또 정맥이나 장골을 생략하고 이 판막은이나 그 능선 등과 같이 표현할 때도 혼동이 없게 된다. 둘 이상의 낱말이 합쳐질 때 일본식 용어에서는 생략되는 음절이 많다. 예를 들면 피절은 피부분절, 실주섬유는 뇌실주위섬유 등으로만 하여도 이해하기 쉬운 용어가 된다고 생각한다.

 

4-6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용어는 표현이 정확하게 되도록 한다

용어의 표현이 잘못된 것은 그 용어가 가리키는 구조나 개념을 이해하기 쉽도록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 해부학 용어에서 lymph node(림프 + 매듭)를 선택한 과정을 보기로 한다. 이 용어는 서기 전부터 lymph gland(림프 + )라고 썼었는데 1895년 처음 국제적으로 용어를 통일할 때 gland()란 용어가 이 구조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lymph node라고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200년 넘게 써오던 용어를 바꾸자는 데 반대 의견이 있어 비밀투표를 했는데 lymph gland 가 훨씬 많은 표를 얻어 채택되었다. 그런데 1955년 용어를 다듬을 때는 토론 없이 만장일치로 lymph node가 채택되었다. 이것에 따라 일본에서는 처음 임파선(淋巴腺)이라고 하였다가 임파절(淋巴節)로 바꾸었고 최근에는 일본말로 림파절(リンハ)로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림프절로 고쳤는데 아직도 임파선이 부었다 등과 같이 임파선이란 용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

 

재생 불량성 빈혈(aplastic anemia)과 악성 빈혈(pernicious anemia)을 보면 이름만 듣고는 악성 빈혈의 예후가 더 나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것이 재생 불량성 빈혈보다 예후가 더 좋기 때문에 용어를 다듬을 때 이런 점도 함께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앞으로 환자와 대화할 때 의학 용어를 쓸 기회가 많아질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고 혼동이 없는 용어를 만들도록 애써야 한다고 믿는다.

 

4-7 용어는 체계를 갖추어 혼동이 없고 기억이 쉽게 한다

국제 해부학 용어를 보면 같은 부위에 있는 구조는 arteria femoralis(대퇴동맥), vena femoralis(대퇴정맥), nervus femoralis(대퇴신경)와 같이 같은 부위에 있는 구조에 같은 용어를 쓴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일부 용어는 이러한 체계가 서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목에서는 같이 달리는 정맥과 동맥을 각각 vena jugularis arteria carotis라고 하여 국제 용어에서도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그것은 서양의 오랜 관습 때문인데 어원을 보면 jugularis는 멍에란 뜻이고, carotis는 동물에서 이 동맥을 누르면 의식을 잃기 때문에 질식시킨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어원을 무시하고 각각 경()정맥과 경동맥으로 체계를 맞추어 바꾸었다. 새 해부학 용어에서도 이것은 우리말로 arteria coronaris vena cardiaca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그 뜻에 따라 관상동맥(冠狀動脈)과 심장정맥(心臟靜脈)을 썼고, 새 해부학용어에서도 임상에서 널리 알려졌다는 이유로 관상동맥과 심장정맥을 썼다. 우리가 이제 새롭게 용어를 다듬는 마당에 이런 것은 모두 원칙과 체계에 맞게 심장동맥과 심장정맥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서양의 1000년 관습과 식민 통치의 찌꺼기로 잠깐 익숙해진 것은 전혀 의미가 다르며 더 좋게 바꾸는 것을 남이 한 후에 따라가지만 말고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고 믿는다.

 

언어 표현에서도 체계를 갖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국제 해부학 용어는 라틴 말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라틴 말의 뒤에서부터 순서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우리 용어에서도 이것을 본받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있다. 영어에서도 something wrong과 같이 꾸미는 낱말의 순서가 특별한 것이 있다. arteria brachialis superficialis arteria profunda brachii를 천상완동맥과 상완심동맥으로 옮겼었는데 천(얕은)과 심(깊은)은 각각 상완동맥을 꾸미므로 얕은 상완동맥과 깊은 상완동맥으로 말의 순서에 통일이 되도록 하였다.

 

4-8 서양 용어의 어원에 따라 우리말로 바꿀 때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용어는 새롭게 만든다

의학 용어는 한 번에 체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 속에서 하나씩 만들어졌기 때문에 옛날에 잘못 이해되었던 뜻에 바탕을 둔 용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팔의 내측(척골쪽)과 외측(요골쪽) 표면 쪽에서 올라가는 정맥을 각각 basilic vein cephalic vein이라고 하는데 일본에서 처음에는 이 용어의 어원대로 귀요(貴要)정맥과 두()정맥이라고 하였다가 이 정맥들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머리와도 관계가 없으므로 각각 척측피(尺側皮)정맥과 요측피정맥으로 새로 만들었다. 이것을 새 해부학용어에서는 각각 척골쪽피부정맥과 요골쪽피부정맥으로 다듬었다. 또 다른 예로 plantaris muscle은 발바닥근육이란 뜻인데 옛 용어와 일본에서는 족척근(足蹠筋)이라고 한다. 사람에서는 이 근육이 발바닥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장딴지에서 비스듬하게 달리기 때문에 장딴지경사근으로 고쳤는데 앞으로 장딴지빗근으로 다듬기로 하였다.

 

용어를 새로 만드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북한에서는 많은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새로 만든 용어가 많이 있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므로 참고가 될 듯하여 그중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용어를 새로 만들 때는 새롭게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용어의 개념을 이루는 징표들은 모두 실마리로 쓰일 수 있다. 북한에서 협심증을 다듬은 예를 보면 다음과 같이 실마리를 잡았다.

 

) 가슴을 아프게 조이는 감이 있다.

) 병이 발작하기 전에 심장살에 피공급이 적어지거나 심장살에 피수요가 일시적으 로 늘어 나는 데 상응하게 피공급이 되지 않는다.

) 동맥경화에 의하여 심장둘레동맥이나 그 가지 하나가 좁아진 결과로 일어난다.

 

여기에서 가)와 같은 병의 특징적인 증상을 실마리로 삼아 가슴, 조임, 아픔 등의 언어 표현 수단을 이용하여 가슴조임증 또는 가슴아픔증과 같이 다듬을 수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이 병이 발작할 때 생리적 변화를 실마리로 잡아 심장살, , 모자람, 공급, 부족 등을 언어표현 수단으로 삼아 심장살피모자람증’ ‘심장살피공급부족증과 같이 다듬을 수 있다. 또한 다)와 같이 병의 원인을 실마리로 잡으면 심장둘레동맥좁아짐증과 같이 다듬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토론을 거쳐 북한에서는 가슴조임증을 선택하였다.

 

4-9 용어는 간결하게 만든다

용어에 그것이 갖는 개념이나 구조의 특징을 모두 나타낼 수 없으며 일부 특징을 잘 나타내고, 그 용어가 다른 용어와 구별이 되면 간결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그중 의학 용어에 많이 쓰이는 모양, (), (), ()과 같은 말의 쓰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시계 바늘이 가는 반대 방향을 표현할 때, 시계 바늘 반대 방향, 더 나아가 시계 반대 방향이라고 해도 아무런 혼동이 없고 뜻의 전달에 무리가 없다. 어떤 사람은 시계에 방향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지만 용어는 너무 설명하듯 풀어쓰면 오히려 쓰기 불편하다. 한때 휴게소에서 파는 호도 과자에 호도가 들어 있지 않다고 호도 모양 과자로 하지 않으면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떠든 적이 있어 호도 모양 과자라고 하더니 이제는 호도 한 조각씩을 넣고 다시 호도 과자라고 한다. 호도 과자는 호도가 주된 성분이어서 그렇게 부를 수 있고, 호도 모양을 닮아 그렇게 부를 수도 있다고 하겠다. 처음에 호도로 만든 것을 호도 과자라고 했다면 나중에 나온 호도 모양의 과자는 구별을 하기 위하여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지만 호도로 만든 과자가 없었을 때는 모양만 닮은 과자도 호도 과자라고 할 수 있겠다. 세포 중에 문어발을 닮은 것이 있어 문어발 모양 세포라고 했다가 다시 문어발 세포로 다듬고 이제는 문어 세포로 다듬었다. 우리 몸에 문어 머리를 닮은 세포가 따로 없다면 혼동이 없는 한 간결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4-10 외국어의 표기

대부분 외국어는 교육부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다. 그러나 외국어를 우리말로 표기하면 윌 용어가 되므로 이것도 우리말답고 쓰기 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번 정착된 외국어는 외래어로서 우리말이 된 것이므로 그대로 쓰여야 한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독일식 발음을 하여 알레르기라고 하던 것을 영어를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알러지 또는 앨러지라고 쓰자고 한다. 에네르기가 에너지, 리파제가 라이페이스, 고뿌가 컵 등으로 바뀌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 라디오도 뢰이디오라고 할 것인가? 외국어와 외래어를 구별해 써야 할 것이다.

 

우리 몸에 피라밋이란 구조가 있는데 이것은 피라미드pyramid란 말에서 유래하였다. 용어는 간결해야 하는데 피라미드라고 하면 좀 풀어진 느낌이 들고, 피라미드가 무너졌다 또는 피라미드를 보았다보다는 대부분 사람이 피라미시(피라밋이) 무너졌다 또는 피라미슬(피라밋을)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을 어기고 간결하게 피라밋으로 정하였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가장 강한 영향을 주는 나라를 통해 외국어가 들어왔다. 일본을 통해 독일 외래어가 들어 온 적이 있고 최근에는 미국의 영향으로 오래전에 들여와 쓰던 외래어의 표기까지도 미국식 발음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요즈음 중국이 꿈틀거린다고 한문을 우리글의 일부로 쓰자는 소리도 들린다. 한번 정해진 용어는 우리 주위에 또 다른 강한 나라가 생겨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고 해도 자꾸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이다.

 

4-11 소설가의 의견

세계의 문학이 문학 관련 잡지이고 소설가들이 용어 다듬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해부학 용어를 다듬을 때 소설가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해부학에서 어떤 구조를 감고 돌아가는 것에 circumflex란 표현을 쓰는데 예전에는 이것을 회선(回旋)이라고 하였다. 회선을 넝쿨이 나무줄기를 감듯 한 쪽으로 감고 돌아간다는 뜻인데 이것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자는 데 용어 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설가가 회선 대신 엔굽이, 휘돌이 등을 제안하였다. 강이 굽어진 데서 물이 빙 돌아흐를 때 엔굽이 친다고 하며, 자동차가 고갯길을 돌아가거나 사람이 바위벽에 붙어 돌아갈 때 휘돌아간다는 말을 쓴다. 용어 위원들이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모두 낯설고 어색하여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보류하기로 하였다. 몇 달 후 보류했던 이 용어에 대해 다시 토의할 때는 많은 의원들이 휘돌이가 잘 어울린다고 하여 이 용어가 선택되어 전상완회선동맥이라고 하던 것을 앞상완휘돌이동맥으로 다듬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동안 위원들이 윌말에 많이 익숙해졌고 한번 들었던 말이기 때문에 기억에는 없어도 친숙한 말로 느껴졌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예로 여자의 바깥 생식 기관 앞쪽에 뼈가 만져지는 부분의 두두룩한 곳을 치구(恥丘)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바꾸기로 하였다. 소설가는 이것에 꽃두덩을 제안하였다. 옛부터 꽃은 여성의 상징으로 많이 쓰였는데 필자는 여성과 꽃이 모두 아름답다는 공통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흥 앞바다에 있는 꽃섬은 그곳의 바위가 여성의 바깥 생식기관과 비슷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하며, 요즈음 함값에 대응하여 신랑집에서 신부 친구들이 받는 돈을 꽃값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꽃두덩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용어라는 느낌이 들며, 이것에 따라 대음순과 소음순과 같은 생식 기관 용어도 큰꽃()술과 작은꽃()술 등으로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용어 위원들은 꽃두덩이란 말에 한바탕 웃고 모두 좋다고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여성 단체에서 반대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등 뒷걸음치는 위원이 점점 많아져 이것을 불두덩으로 바꾸었다. 불두덩은 원래 남자에서만 썼던 말 같으나 최근 사전에는 남녀 모두에서 쓰는 말로 되어 있다. 치구는 여자에만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불두덩도 적합한 용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또 여성에 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5 맺는 말

 

전문인들이 사회에 봉사하는 적극적 활동이 부족하고 집단의 이익이나 자신들의 수입에 관심이 많을수록 그 분야에서 쓰는 전문 언어는 비밀스럽고 전문적이라고 한다. 의학계에서는 어려운 한자용어나 외국어를 지나치게 쓰는 것은 의학계가 폐쇄적이고 소극적이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소득과 더불어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해졌고 많은 의학 용어도 전문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쓰는 언어가 되었다. 이제 우리 학술 용어도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도록 쉽고 우리말답게 다듬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이미 쓰고 있는 용어 중에 더 익숙한 용어를 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장래를 위해 우리말 의학 용어를 창조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언어의 민주화라고 말하고 싶다..<세계의 문학73>.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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