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by 송화은율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이 녹야원(鹿野苑)과 구시나(拘尸那)와 사성(舍城)과 마하보리(摩詞菩提)의 영탑(靈塔)이 모두 마가다국 경계 안에 있다. 이 파라나시국에는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가 같이 시행되고 있다. 마하보리사를 예방하는 것은 나의 평소부터의 숙원이기 때문에 무척 기쁘다. 이 기쁨을 감출 길 없어 미숙하나마 이 뜻을 시로 읊어 보았다.
보리사가 멀다고 근심할 것 없었는데
녹야원이 먼들 어찌하리요.
다만 멀고 험한 길이 근심이 되나
불어닥치는 악업(惡業)의 바람은 두렵지 않네.
여덟 개의 탑을 보기 어려움은
여러 차례의 큰 불에 타 버렸음이라
어찌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줄거나
오늘 아침부터 이 눈으로 똑똑히 보오리.
이 파라나시국에서 반 달을 걸어서 중천축의 국왕이 살고 있는 성에 도착하였다. 그 이름은 갈나급자(葛那及自)이다. 이 중천축국의 영토는 무척 넓고 백성이 많이 산다. 왕은 코끼리 백 마리를 가지고 있고, 그 밖에 큰 수령이 다 각기 3백 또는 2백 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 그 왕은 언제나 스스로 병마를 거느리고 싸움을 잘 하는데, 항상 주변에 있는 네 천축의 나라와 싸움을 하면 이 중천축의 국왕이 이겼다. 싸움에 진 나라는 코끼리도 적고 병력도 적어서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곧 강화하기를 청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휴전한다. 그리고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다.
의복과 언어, 풍속, 그리고 법은 다섯 천축국이 서로 비슷하다. 오직 남천축의 시골에 가면 백성들의 언어가 다른 곳과 차이가 있으나 벼슬아치들의 언어와 생활은 중천축국과 다른 데가 없다. 이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죄수의 목에 칼을 씌우거나, 형벌로서 몽둥이로 때리거나 또는 가두는 감옥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죄인에게는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릴 뿐 사형도 없다. 위로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냥한다고 매를 날리거나 엽견(獵犬)을 사용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길에는 도적이 많기는 하나 물건만 빼앗고는 즉시 풀어 보내고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즉시 물건 주기를 꺼려하면 몸에 해를 끼치기도 한다.
이 땅은 기후가 아주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볼 수 없다. 먹는 것은 오직 쌀 양식과 떡, 보릿가루, 우유 등이며 간장은 없고 소금을 상용한다. 흙으로 구워 만든 냄비에 밥을 익혀 먹지, 무쇠로 만든 가마솥은 없다. 백성에게는 별로 받아들이는 세나 용(庸)은 없고, 다만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에서 다섯 섬만 왕에게 바치면 왕이 직접 사람을 보내서 그 곡식을 운반해 가고, 토지 주인은 곡식을 바치기 위해 운반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 그 나라 땅에 사는 백성은 빈자(貧者)가 많고 부자는 적은 편이다. 왕이나 벼슬아치, 그리고 부자 백성은 전포(氈布)로 만든 옷 한 벌을 입고, 스스로 지어 입는 사람(중류 계급)은 한 가지만 입고, 가난한 사람은 반 조각만 몸에 걸친다. 여자도 역시 그렇다.
이 나라의 왕은 마냥 정아(政衙)에 앉아 있으면 수령과 백성들이 모두 와서 왕을 둘러싸고 그 주위에 둘러앉는다. 각기 어떤 일에 대하여 도리를 내세워서 논쟁이 일어나고 소송이 분분하여 비상히 요란하게 입씨름이 벌어져도 왕은 못 들은 척하고서 듣고도 꾸짖지 아니하다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면 왕이 천천히 판결을 내리는데, "너는 옳고, 너는 옳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면 왕이 내리는 한 마디로써 결정을 삼고 비록 불평이 있는 자도 다시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나라의 왕과 수령 등은 3보(寶)에 대하여 심히 공경하고 믿는다. 왕과 수령 등이 만약 스승 되는 중을 대하게 되면 땅바닥에 그대로 앉고, 평상(平床)에 앉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왕과 수령이 자기 집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갔다가 올 때에는, 그 가는 곳까지 스스로 자기가 앉았던 상자(狀子)를 가지고 자기 몸을 따라 오게 하여 그 곳에서도 자기가 전용하는 평상에 앉지, 다른 평상에는 앉지 않는다. 절이나 왕의 궁전은 모두 3층으로 지었다. 제일 밑의 층은 창고로 쓰고, 위에 있는 두 층은 사람이 거처하는데, 큰 수령들의 집도 이와 마찬가지다. 집은 모두 지붕이 평평하며 벽돌과 목재로 지어져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백성들의 집들은 초가집이다. 중국의 한옥(漢屋)과 같아서 빗물이 아래로 내려오도록 지었고, 또 단층들이다. (후략)
요점 정리
연대 : 신라 성덕왕(727)때
갈래 : 기행 수필
작자 : 혜초
구성 : 병렬식
전반부 - 순례자로서 성지 방문의 기쁨과 감격
중반부 - 천축국의 주변 정세와 법, 의복과 언어 및 풍속, 판결 방식
후반부 - 천축국의 삼보 공경, 주거 공간의 특징
성격 : 성지 순례기
출전 : 왕오천축국전
의의 :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 문학 사상 최초의 외국 기행문이며, 불교 유적 순례기로서도 최초이다.
줄거리 : 혜초는 중국 남쪽 광주(廣州)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들어간다. 먼저 나체의 나라를 구경하고 석가가 입멸(入滅)한 구시나국에 도착하여 그 곳의 풍물을 구경한다. 이어 파라나시국 등 인도의 각 지역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옛 소련의 국경 지대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파미르 고원 등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각 지역에 대한 정세와 풍물을 기록하였다.
내용 연구
이 녹야원(鹿野苑)[석가(釋迦)가 최초로 설법한 곳. 사슴이 많아 붙은 이름]과 구시나(拘尸那)와 사성(舍城)[왕사성(王舍城). 기원전 5세기까지 마가다국의 수도임. 불교 사상 최초의 정사(精舍)가 세워진 곳]과 마하보리[대각(大覺)의 뜻. 사찰(寺刹)이름]의 영탑(靈搭)이 모두 마가다국 경계 안에 있다. 이 파라나시국에는 대승[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의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불교의 한 유파. 이와는 상대적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은 소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같이 시행되고 있다. 마하보리사를 예방하는 것은 나의 평소부터의 숙원이었기 때문에 무척 기쁘다. 이 기쁨을 감출 길 없어 미숙하나마 이 뜻을 시로 읊어 보았다.[이 녹야원(綠野苑)∼읊어 보았다 : 작자의 평소의 숙원이던 파라나시국의 마하보리사를 방문한 개인적인 기쁨이 오언 율시로 잘 드러나 있다. 본문에 수록된 것은 오언 율시 5수 가운데 한 수이다.]
보리사가 멀다고 근심할 것 없었는데
녹야원이 먼들 어찌하리요.
다만 멀고 험한 길이 근심이 되나
불어닥치는 악업(惡業)[전세의 나쁜 행위]의 바람은 두렵지 않네.
여러 차례의 탑을 보기 어려움은 여러 차례의 큰 불에 타버렸음이라
어찌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줄거나
오늘 아침부터 이 눈으로 똑똑히 보오리. - 마하보리사 방문의 기쁨과 감격
이 파라나시국에서 반달을 걸어서 중천축의 국왕이 살고 있는 성에 도착하였다. 이 이름은 갈나급자(葛那及自)[현재의 카나우지. 당현장(唐玄奬)의 서역기(西域記)에는 곡녀성(曲女城)이라 했음.]이다. 이 중천축국의 영토는 무척 넓고 백성이 많이 산다. 왕은 코끼리 백 마리를 가지고 있고, 그밖에 큰 수령이 다 각기 3백 또는 2 백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 그 왕은 언제나 스스로 병마를 거느리고 싸움을 잘 하는데, 항상 주변에 있는 네 천축[중국에서 부르던 인도의 옛이름]의 나라와 싸움을 하면 이 중천축의 국왕이 이겼다. 싸움에 진 나라는 코끼리도 적고 병력도 적어서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곧 강화하기를 청하여 해마다 공물[종주국에 바치던 특산물]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휴전한다. 그리고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다. [이 파라나시국에서 ∼있다 : 중천축국의 국가 세력과 주변 국가의 상황을 표현하였다] - 중천축국의 세력과 주변국 정세
의복과 언어, 풍속, 그리고 법은 다섯 천축국이 서로 비슷하다. 오직 남천축의 시골에 가면 백성들의 언어가 다른곳과 차이가 있으나 벼슬아치들의 언어와 생활은 중천축국과 다른데가 없다. 이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죄수의 목에 칼을 씌우거나, 형벌로서 몽둥이로 때리거나 또는 가두는 감옥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죄인에게는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릴 뿐 사형도 없다. 위로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냥한다고 매를 날리거나 엽견(獵犬)[사냥하는 개]을 사용하는 일은 차지 않는다. 길에는 도적이 많기는 하나 물건만 빼앗고는 즉시 풀어 보내고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즉시 물건 주기를 꺼려하면 몸에 해를 끼치기도 한다.[의복과 언어, ∼끼치기도 한다 : 중천축국과 주변 국가의 풍속과 사회상이 드러나 있다.]
이 땅은 기후가 아주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볼 수 없다. 먹는 것은 오직 쌀 양식과 떡, 보릿가루, 우유 등이며 간장은 없고 소금을 상용한다. 흙으로 구워 만든 냄비에 밥을 익혀 먹지, 무쇠로 만든 가마솥은 없다. 백성에게는 별로 받아들이는 세나 용(庸)은 없고, 다만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에서 다섯 섬만 왕에게 바치면 왕이 직접 사람을 보내서 그 곡식을 운반해 가고, 토지 주인은 곡식을 바치기 위해 운반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 그 나라 땅에 사는 백성은 빈자(貧者)가 많고 부자는 적은 편이다. 왕이나 벼슬아치, 그리고 부자 백성은 전포(氈布)로 만든 옷 한 벌을 입고, 스스로 지어 입는 사람(중류 계급)은 한 가지만 입고, 가난한 사람은 반 조각만 몸에 걸친다. 여자도 역시 그렇다. - 다섯 천축국의 사회상과 풍속
이 나라의 왕은 마냥 정아(政衙)[왕이 나와서 조회를 하던 궁전]에 앉아 있으면 수령과 백성들이 모두 와서 왕을 둘러싸고 그 주위에 둘러앉는다. 각기 어떤 일에 대하여 도리를 내세워서 논쟁이 일어나고 소송이 분분하여 비상히 요란하게 입씨름이 벌어져도 왕은 못 들은 척하고서 듣고도 꾸짖지 아니하다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면 왕이 천천히 판결을 내리는데, "너는 옳고, 너는 옳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면 왕이 내리는 한 마디로써 결정을 삼고 비록 불평이 있는 자도 다시는 말을 하지 않는다. - 천축국왕의 판결 방식
이 나라의 왕과 수령 등은 3보(寶)[불(佛)·법(法)·승(僧)]에 대하여 심히 공경하고 믿는다. 왕과 수령 등이 만약 스승 되는 중을 대하게 되면 땅바닥에 그대로 앉고, 평상(平床)에 앉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왕과 수령이 자기 집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갔다가 올 때에는, 그 가는 곳까지 스스로 자기가 앉았던 상자(狀子)를 가지고 자기 몸을 따라 오게 하여 그 곳에서도 자기가 전용하는 평상에 앉지, 다른 평상에는 앉지 않는다. 절이나 왕의 궁전은 모두 3층으로 지었다. 제일 밑의 층은 창고로 쓰고, 위에 있는 두 층은 사람이 거처하는데, 큰 수령들의 집도 이와 마찬가지다. 집은 모두 지붕이 평평하며 벽돌과 목재로 지어져 있다. 그러나 그 밖의 백성들의 집들은 초가집이다. 중국의 한옥(漢屋)과 같아서 빗물이 아래로 내려오도록 지었고, 또 단층들이다. - 천축국의 삼보 공경과, 전용 의자 풍습, 건축물의 특징 (후략)
이해와 감상
신라의 승려 혜초가 이도 불적 순례(佛蹟巡禮)를 하던 중 견문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이 여행기는 마가다국 녹야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오도(悟道)했다는 부다가야의 마하보리사·중천축국·남천축국(지금의 데칸 고원), 그리고 북천축국으로 북상하여 캐시미르·간다라·토하라 각지를 둘러보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자리잡고 있는 구자(龜玆)에 도달하고, 기록도 여기서 끝난다.
이러한 긴 여행에서 불교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정세·지리·풍속·언어 및 여수(旅愁)까지 담고 있다. 또, 이 기록은 1200년 전 중국과 인도의 여로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리고 국문학사적인 면에서도 이것이 외국 기행문으로서 첫 작품이고, 풍물과 여정(旅情)을 노래한 오언 율시(五言律詩)5수가 수록되었다는 점 등도 중시되어야 하고, 단편적이나마 인도를 비롯한 중앙 아시아의 정세와 풍습을 알게 해 주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자료이다. 불교 유적 순례기로서 정세, 풍속 등이 담긴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으로 평가된다. 이 글은 그 중 파라나시국과 중천축국에서의 견문을 적은 기행 수필이다.
이해와 감상1
신라시대 승려 혜초(慧超)가 지은 인도 여행기. 1권. 필사본. 완질이 남아 있지 않고, 일부분만이 현존한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다.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현존본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현존본은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곳에 진기한 나체족(裸體族)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쿠시나가라(Kushin─ gara)에 대한 견문으로, 이곳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곳이며,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하였다.
다시 동쪽으로 여행하여 라자그리하(R─ jagrha, 王舍城)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 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靈鷲山)을 방문하였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大覺)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여 대각사(大覺寺)와 보리수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간다.
이곳에 이른바 사대영탑(四大靈塔)이 있다고 하였으며, 각각을 방문하였고, 또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도 방문하였다고 한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아잔타·엘로라 등은 방문한 흔적이 없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고 한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길기트(Gilgit)·페샤와르(Peshawar)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투카라(吐火羅)로 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Persia)를 지난다. 안국(安國)·조국(曹國)·석과국(石景國)·페르가나국(跋賀那國) 등은 방문하지 못한 채, 그 일대에서 수집한 이야기만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불교를 모르고 배화교(拜火敎)를 믿으며, 어머니와 자매도 아내로 맞는 등 진기한 풍속을 소개하였다.
또 바미안이나 카피스 등에서는 형제가 몇이건 공동으로 한 아내를 맞이한다고 기록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중국으로의 귀로를 잡아 동쪽으로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던 호밀국(胡蜜國)을 지나서 식야국(識匿國)을 거친 다음 총령(升嶺)을 지나 지금의 중국 영토인 갈반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이 ≪왕오천축국전≫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관한 서술이 지극히 간략하다. 어떤 곳은 지명이나 나라 이름 등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언어·풍속·정치 등 일반적인 언급도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사료적인 가치만 따지면 현장(玄乍)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나 법현(法顯)의 ≪불국기 佛國記≫ 등에 비하여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전술한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전술한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사료라는 점이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의상·습속·산물·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등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국적인 풍취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인도에는 감옥이나 사형제도가 없고, 죄를 지은 이는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였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은 무척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郎)에 의하여 그 저자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28년 독일학자 푹스(Fuchs,W.)에 의하여 독일어 번역이 나왔고, 1943년 최남선(崔南善)이 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널리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慧超(高柄翊, 三國의 高僧 8人, 新丘文化社, 1976), 慧超傳考(高楠順次郎, 遊方傳叢書 第一, 1915).(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혜초(惠超,)
704(성덕왕 3)∼787(원성왕 3). 신라시대의 승려. 밀교(密敎)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719년(성덕왕 18) 중국의 광주(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금강지는 당시 장안(長安)·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쳤는데, 이 때 혜초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로 가는 여행도 해로였는지 육로였는지 불분명하다. 그는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고, 카슈미르(Kashmir)·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였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였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도량을 열고 스승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이 때 금강지는 이 경전의 한역(漢譯)을 시작하였는데, 혜초는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에 금강지가 죽었으므로 이 사업은 중단되었고,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다시 인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금강지가 죽은 이후 혜초는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삼장으로부터 다시 이 경전의 강의를 받고,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다시 역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공은 이보다 수개월 전인 6월에 죽었기 때문에 이 연대에는 다소간의 문제가 있다.
오늘날 불교학계에서는 혜초와 불공의 경전번역을 1년 앞당겨서 단정하고 있다. 이 때 그는 불공의 6대제자 가운데 제2인자로 유촉(遺囑)을 받았다. 또, 그에 관해서는 ‘신라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 밀교의 법맥을 금강지―불공―혜초로 손꼽을 수 있다. 불공이 죽은 직후 동문·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스승의 장례에 대하여 황제가 베풀어준 하사(下賜)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또 스승이 세웠던 이 사찰을 존속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러 있다가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무르던 곳이며, 첫번째 제자인 함광(含光)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노년을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보내면서, 전에 필수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787년에 입적하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신라로 귀국한 흔적은 없다. 이미 신라에는 명랑(明朗)을 중심으로 하는 신인종(神印宗)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혜초가 공부한 것은 그와는 별도의 밀교였던 것으로 보이며, 불공과의 관련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정통밀교를 표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중국 유학승들이 인도에 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나란다(N─ landa)라는 불교대학에서 수학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 나란다에서 공부한 흔적도 없다.
따라서, 단순히 불적지(佛蹟地)를 참배하고 밀교를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밀교와 신라의 밀교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며, 그에 관한 기록이나 저술에서 언제나 ‘신라인’임이 강조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고국과 관련을 맺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혜초(高柄翊, 삼국의 고승, 신구문화사, 1976), 慧超傳考(高楠順次郎, 大日本佛敎全書遊方傳叢書 1, 1915).(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오천축국전 발견 경위
1908년 3월에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며 탐험가인 펠리오(Pelliot)가 중국 간쑤성 돈황(敦煌) 천불동(天佛洞)으로부터 값진 문화재 29상자를 입수하여 프랑스로 가져가 연구에 착수하여 정리, 조사하던 중 앞뒤가 잘려진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 하나를 발견했는데 제명 및 저자명도 없이 겨우 230줄에, 각 줄 30자 내외, 총 6,000여 글자에 불과한 글이었다. 그는 내용을 훑어보던 중 당나라의 승려 혜림(慧琳)이 지은 일체경음의(日切經音義)속에 들어 있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보이는 낱말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발견, 곧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없어진 줄로만 알고 있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임에 틀림없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혜초를 중국 승려로만 알았다가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스키에 의해 신라인이라는 것이 입증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절약본(節略本)이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여행기. 필사본. 1권 1책. 신라시대의 승려 혜초(慧超:704∼787)가 727년(성덕왕 26)에 지은 책이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 중국의 나옥진(羅玉振)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域)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때는 벌써 불타(佛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造寺設齋)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捨施)하는 독신자(篤信者)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가지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고전기행]
혜초 '왕오천축국전'
西域땅을 향수 달래며…어쩌면 成佛했을지도
중국 시안(西安)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여분을 서북쪽으로 날아 도착한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
모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명사산(鳴沙山) 동쪽 절벽에 둔황 막고굴(莫高窟)이 자리잡고 있었다. 1,000개의 부처상을 모시겠다는 신념으로 4세기부터 수많은 스님들이 석굴을 판 불토의 땅. 신라 혜초(慧超ㆍ704~787)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이역만리 이 곳에서 1,100여 년을 잠자고 있었다.
세계 유일의 8세기 인도ㆍ중앙아시아 기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이름만 전해오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실재가 밝혀졌다. 그가 은 3,000냥에 사들인 엄청난 양의 막고굴 유물에서 앞뒤가 잘린 두루마리 '왕오천축국전'필사본이 발견된 것이다. 당의 고승 혜림(737~820)이 자신의 저서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서 상ㆍ중ㆍ하로 나눠 내용을 전재했던 그 '왕오천축국전'이었다.
'항하(恒河ㆍ갠지스강) 북안에 3개의 큰 탑이 있다. 셋째 것은 가비야라국에 있는데, 이 곳에서 부처가 태어났다. 이곳에 무우수(無憂樹ㆍ마야 부인이 그 밑에서 고통 없이 부처님을 낳았다는 보리수)가 있다. 그러나 성은 이미 황폐해져 탑은 있으나 스님은 없고 백성도 없다.'(이하 왕오천축국전ㆍ한정섭 엮음ㆍ불교대학 교재편찬위원회 발행)
막고굴을 안내하던 이신(李新) 둔황문물연구소 부연구원이 장경동(藏經洞)이라 이름 붙은 제17호 굴 앞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조선족 2세로 한국기자를 만나 무척 반갑다고 좋아하던 그였다. "여기가 바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석굴입니다. 당 말기에 만들어진 이 곳에서 5만여 권의 불교 서적이 무더기로 발견됐지요. 지금은 중국 스님 소조상과 벽화만 남아 있습니다."
이 연구원의 설명을 들으며 '왕오천축국전'일부를 다시 읽어봤다. 원문은 230줄, 한 줄은 30자 내외, 총 6,000여 글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이다. 하지만 책에는 혜초가 723년부터 5년 여 동안 돌아본 당시 인도의 다섯 천축국과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의 종교 제례와 풍물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이 여섯 나라(대식국 안국 조국 등)는 모두 조로아스터교를 섬기며 불법을 알지 못한다.
풍속은 매우 고약하여 혼인을 서로 뒤섞어 하고,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맞아 들인다. 페르시아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 형제가 열 명이거나 다섯 명이거나 함께 하나의 아내를 맞이한다. 그리고 각기 하나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계가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람파카국으로부터 서쪽 산속으로 8일 동안을 가면 카피스국에 도착한다. 이 나라에서는 낙타 노새 양 말 포도 보리 밀 등이 생산된다. 이 나라 사람들도 삼보(三寶)를 공양한다.
그 곳 큰 성 안에 하나의 절이 있는데, 그 절에는 부처의 머리카락 뼈 사리 등이 보관되어 있다. 왕을 비롯하여 벼슬아치와 백성이 매일 공양한다. 이 나라에는 소승불교가 행해지고 있다.'
당시 당 수도였던 장안(長安ㆍ지금의 시안)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던 만큼 동서 무역에 대한 관찰이 꼼꼼하다. '그 나라(대식국ㆍ아라비아) 사람의 성질은 무역을 좋아하여 사자국(실론)까지 가서 여러 보물을 가져온다. 곤륜국까지도 가서 금을 무역해오고, 곧장 광저우(廣洲)까지 가서 능(엷은 비단) 견사(명주실) 솜을 무역해온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은 살생을 좋아하고 하느님을 섬기되 불법을 모른다.'
그러나 역시 몇 번이고 눈길이 가는 것은 혜초가 인도 남천축국의 여행길에 고향 땅 신라를 그리워하며 읊은 오언절구이다. 16세 때 중국 광저우로 건너가 평생을 불교 경전 연구에 바친 그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는 '왕오천축국전'을 쓰고 83세에 열반할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鷄林)으로 소식 전해줄까.'
향수를 달래며 5년여 기행을 마치고 지금의 신장(新疆) 자치구 쿠차(庫車)에 도착한 때가 727년 11월 상순이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말미에 "여기서 동쪽은 누구나 아는 중국 본토이니 더 기술하지 않겠다"고 썼다.
이 연구원이 말을 덧붙인다. "생각해 보세요.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한 뒤 목숨을 걸고 오랑캐 땅을 여행하던 광경을요.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한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강행군하던 약관의 스님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지지 않습니까?"
구도 여행을 마치고 서역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최초의 관문 양관(陽關)에 도착했을 때쯤 혜초는 어쩌면 성불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70세 때 중국의 명승 불공(不空ㆍ705~774)의 6대 제자 중 두 번째 제자가 된 것도 이 기행에서 얻은 깨달음때문이 아니었을까. 스님도 바라보았을 둔황의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자료 출처 : 둔황=글ㆍ사진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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