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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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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술


 

예술이란 무엇인가

 

(1) 예술의 정의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정의를 내렸지만 아직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정의는 없다. 그 이유는 예술 또한 시대적, 사회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 모습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서 합의할 수 있는 예술의 공통성이 없지는 않다.

 

예술은 우선 인간의 활동이다. 아름답고 장대한 자연은 신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예술에서는 제외된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이라고 해서 모두 예술은 아니다. 두 번째, 예술은 구체적, 감성적 형상을 매개로 한 활동이다.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는 활동은 철학이지 예술일 수 없다. 세 번째, 예술은 인간에게 감동을 줄 것을 목표로 하는 활동이다. 무감동한 행위는 예술일 수 없다. 하지만 감동을 주는 계기가 꼭 아름다움일 필요는 없다. 예컨대 비극적인 것, 추한 것, 숭고한 것, 선한 것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감동을 줄 수 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나치의 잔혹한 공습 장면을 그렸지만 그것은 20세기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꼽힌다. 끝으로 모든 인간의 행위가 다 그러하듯이 예술도 사회적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구체적, 감성적 형상을 매개로 해서 인간에게 감동을 줄 것을 목표로 행해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라 말할 수 있다.

 

(2) 예술의 기원

 

예술은 언제 어떻게 발생했고,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옛날에는 신이 내려준 능력이나 계시로 예술이 탄생했다는 식의 형이상학적 설명을 했지만 많은 예술사가들의 연구로 오늘날에는 예술의 기원에 대해 어느 정도 과학적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예술의 발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계기에 의한 것이었다.

 

 유희로서의 예술

원시인이라고 해서 유희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냥이 없을 때, 채집하러 나가지 않을 때의 무료한 시간을 이용하는 지혜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예술을 낳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노동으로서의 예술

그러나 유희로서의 예술은 예술의 기원으로서는 부차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생존이 절박했던 원시인들에게 유희에 할당될 만큼 여가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역할은 노동 속에서의 필요였다. 오늘날 원시 부족들의 수렵무나 전쟁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은 노동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노동 과정을 묘사하고 노동 과정에 뒤따르는 피로를 덜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했다는 견해다.

 

 

 주술로서의 예술

예술은 단지 노동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에 대한 원시인들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예술의 주술적 측면이다. '가상'을 통해 '현실'의 소망을 이루고자 했던 원시인들의 소박한 희망이 춤과 노래, 회화와 같은 주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 예술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현대로 들어올수록 예술은 점점 유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생활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출발에서부터 예술은 인간의 절박한 삶의 문제, 즉 먹고 마시고 생활해야 하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예술과 인간의 삶에 대한 시각들

 

(1)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시각-순수 예술론

 

예술은 인간의 활동 중에서도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 예술가는 번득이는 영감과 훌륭한 예술적 자질을 통해서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낸다. 이러한 예술의 창조성은 근본적으로 예술의 자율성에 기반을 둠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예술이 예술로서의 순수함을 잃고 정치적 목적의 도구가 되면 예술이 아니라 단지 선전물이 될 뿐이다.

 

예술은 예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예술과 사회의 연관성, 특히 예술과 정치의 관련을 부정하고 예술의 독창성, 창조성을 옹호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프랑스의 문예학자 쿠쟁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미학* 이론을 근거로 예술은 미()에 예술가에 대한 순수한 관심에 의존하는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악의 꽃>으로 유명한 시인 보들레르 또한 이러한 주장을 했다.

 

순수 예술론은 나름대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예술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나는 종교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를 대신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였다. 종교와 자본주의의 공통점은, 물론 전자는 신에 대한 찬미의 도구였던 반면, 후자는 돈을 위한 도구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예술을 철저히 도구로 본다는 점이었다

 

 

(2) 예술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시각-참여 예술론

 

예술은 다른 모든 인간의 활동처럼 사회적 상황의 소산이다. 예술가 또한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술은 오히려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있다.

 

사회와 무관한 순수 예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예술 또한 사회 상황의 산물이라는 견해다. 이 시각은 예술가도 한 명의 사회인이며 예술 활동 역시 하나의 사회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와 무관한 순수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역사 의식 부재를 변명하는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술은 주어진 사회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3) 예술(Art)의 어원를 통해서 본 참여 예술론

 

고대 그리스 시대에 예술은 하나의 기술로 이해되었다. 예술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나 라틴어 아르스(ars), 독일어(Kunst) 등은 예술이란 뜻 외에 기술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예술은 순수한 독자적 의미로서보다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고대에는 인간 도야의 수단으로서, 중세에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4) 예술에 대한 바람직한 시각

 

순수 예술론은 다른 활동과 구별되는 예술의 자율적 성격을 옹호하고, 예술의 논리에 입각한 발전을 추구했다는 데 장점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폐해는 예술의 수준 자체가 저하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예술의 가치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 예술론의 단점은 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이 사회 현실에 대한 도피로까지 연장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모순과 억압이 존재하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 현실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뿐이다. 이 경우 순수 예술은 순수라는 미명하에 그 현실을 옹호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참여 예술론은 지적한다. 결국 완전한 순수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참여 예술론의 장점이다. 그러나 참여 예술론이 예술을 하나의 도구로 이해하고 그 자율성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면 이는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예술의 질적 저하를 낳게 된다. 깊은 성찰과 훌륭한 형식을 갖춘 예술 작품이라도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조야한 참여 예술 작품보다 그 가치가 못하다는 식의 평가를 받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예술도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참여 예술론의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완전히 순수한 예술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순수 예술론의 주장도 올바르다. 예술은 사회적 활동이기는 하나 다른 사회적 활동과는 다른 자신의 특징을 가지며, 더욱이 정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참여 예술론이 극단화하면 '정치적 선전 도구로서의 예술'이 나타나고 순수 예술론이 극단화하면 '예술 지상주의'가 나타난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인간을 위한 예술'이라는 시각일 것이다. 이 시각은 예술의 사회적 성격과 자율성을 동시에 추구한다. 예술은 사회적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서도 가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술 활동 자체도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가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참여와 순수 사이의 갈등

 

(1) 친일 문학과 카프 문학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이를 세우고 색 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이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 구절은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에 나오는 것이다. 이 감칠맛 나는 구절을 읽다가 문득 그가 이 글을 쓰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돌이켜 보면 의혹이 떠오른다. 아니 그 어렵던 일제 시대에 이런 글을 쓰고 또 읽고서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필경 총독부와 손을 잡고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이런 생활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순수 문학이 가장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다.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묘사해야 한다는 순수 문학의 주장은 이 경우에는 반대로 모순된 현실에 대한 도피를 조장하는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본격적인 '친일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지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찬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 극단적인 경우는 이른바 친일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과서에 올라와 있는 이름 높은 문학가들이 친일 문학에 앞장섰던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해방 이후 순수와 참여의 대립이 있을 때마다 좌익에 대해 예술의 독자성을 옹호하면서 순수 문학을 옹호했던 서정주 시인의 다음 시는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송정오장 송가(宋井伍長 頌歌)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갔다가 오겠습니다"/웃으며 가드니/새와 같이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마쓰이 히데오/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대원/귀국대원/……/장하도다/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한결 다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매일신보 1944. 12. 9>

 

 

 

서정주 시인만이 아니라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이효석, 유치진, 정비석, 모윤숙, 최정희, 조연현 등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문단을 지배해 온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내몰았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친일 문학가들이 좌익과의 대결에서는 한결같이 문학이 정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놀라운 변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일제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주의를 택했던 경향 문학가들, 이른바 카프 문학가들은 공공연히 예술의 도구화를 주장했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

 

박영희는 "문예의 전 목적은 작품을 선전 삐라화하는 데 있다. 선전물이 아닌 문학은 프로 문예가 아니요, 프로 문예가 아닌 모든 문예는 문예가 아니다"라고 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이 또한 편향된 시각임은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오늘날까지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카프 문학은 거의 없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충실했으면서도 높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던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같은 작품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국 이들은 예술을 단순한 정치적 도구로만 이해했을 뿐 예술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채플린과 피카소

 

채플린과 피카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지만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훌륭한 예술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채플린은 <독재자>에서 자신과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독재자 히틀러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모던 타임스>에서는 대공황 당시 미국의 사회상, 자본주의의 모순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풍자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채플린을 아인시타인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러한 두 가지 기준은 '인간을 위한 예술'이라는 하나의 전망으로 모아진다. 첫째,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노동하고 사랑하고 고뇌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술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예술은 반사회적이 되고 예술 지상주의가 된다. 둘째, 예술은 바로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인간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현실에 참여하는 것만이 예술의 목적이 된다면 조야한 정치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신문 기사를 읽는 편이 훨씬 낫다. 물론 이 두 경우 모두 인간이라는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을 위한 예술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랫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이 인간을 위해서 예술 활동을 해 왔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사실을 보다 분명히 깨닫고 예술 작품을 평가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가치 있게 활용하는 눈을 기르는 것이라 하겠다.

 

<용어 설명>

 

* 예술을 위한 예술 : 예술을 위한 예술'의 뜻은, 예술에는 미의 실현 이외의 목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이미 칸트에 의해서 미의 자율성에 대한 미학 이론으로 정립된 바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의 미적 창조를 지상의 목적으로 삼으며 인생의 여러 가치를 전부 여기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예술의 본질을 미에 한정시킨다. 예술이 인간의 높은 정신 생활에 속하는 것으로 진지한 미의 탐구를 통해 문화 창조에 참여하고자 하는 한 '어떤 시대의 특정한 사상적 권위나 도덕 또는 일시적 정치 권력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지배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뜻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다.

 

* 칸트의 미학 : 칸트는 예술이 주는 독특한 쾌락을 감각적 쾌락이나 도덕적 선 내지 도구적 선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미적인 쾌'라는 말로 설명했다. 미적인 쾌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며 그 자체만을 위해 추구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순수 예술론은 나름대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예술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나는 종교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를 대신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였다. 종교와 자본주의의 공통점은, 물론 전자는 신에 대한 찬미의 도구였던 반면, 후자는 돈을 위한 도구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예술을 철저히 도구로 본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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