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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반월(詠半月)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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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반월(詠半月)

誰斷崑山玉 수단곤산옥

裁成織女梳 재성직녀소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愁擲壁空虛 수척벽공허

누가 곤륜산옥을 잘라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직녀는 견우님 떠나신 뒤에

시름하며 허공에 던져 두었네

요점 정리

지은이 : 황진이

형식 : 오언절구

배경 : 한밤중

운자 : 소, 허

성격 : 서정적, 비유적, 설화적

주제 : 님을 그리워함. 이별의 슬픔과 고통

특징 : 반달과 견우 직녀의 설화를 소재로 한 문학적 비유가 뛰어남

내용 연구

 

誰斷崑山玉 수단곤산옥

裁成織女梳 재성직녀소 - '반달= 곤산의 옥으로 만든 직녀의 빗'이라는 뛰어난 비유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愁擲壁空虛 수척벽공허 - 보아 줄 임이 없는 여성의 심리를 '빗을 내던졌다'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적절히 표현함

누가 곤륜산옥을 잘라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직녀는 견우님 떠나신 뒤에

시름하며 허공에 던져 두었네

곤륜산(崑崙山) : 중국 전설상의 높은 산. 중국의 서쪽에 있으며, 옥(玉)이 난다고 한다. 전국(戰國) 시대 말기부터는 서왕모(西王母)가 살며 불사(不死)의 물이 흐른다고 믿어졌다.

직녀(織女) : 견우직녀 설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이해와 감상

허공에 뜬 반달을 보며 님을 그리는 심정을 직녀에 빗대어 읊조리고 있다. 직녀는 칠월 칠석 날 오작교를 만들어 일 년에 딱 한 번 만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견우 직녀 설화의 여자 주인공이다. 하늘에 뜬 반달을 허공에 버린 빗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 빗은 견우가 떠나자 직녀가 버린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직녀는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고 난 후 자신을 예쁘게 단장할 이유와 희망을 잃어 버린 것이다.

심화 자료

황진이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다. 중종 때의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다. 따라서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 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 : 정교하게 공작함)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황진이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다.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에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 (珍本)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청산은 내뜻이요〉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근화악부 槿花樂府≫와 ≪대동풍아 大東風雅≫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 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 ≪대동풍아≫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는다.

특히 초장은 ≪근화악부≫에서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라 되어 있다. ≪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 ≪대동풍아≫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고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다. 그리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湮滅 :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錦溪筆談, 松都紀異, 於于野譚, 李朝女流文學 및 宮中風俗의 硏究(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0), 歷代時調全書(沈載完, 世宗文化社, 1972), 黃眞伊와 許蘭雪軒(金東旭, 現代文學 9, 1955), 黃眞伊의 詩와 韓國詩의 本質(趙雲濟, 月刊文學 32, 197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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