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염상섭 소설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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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廉想涉, 1897-1963, 횡보·橫步, 본명 상섭(尙燮))

 

· 보성중학, 일본 경응대 문과 수학

·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단활동 시작 --- 󰃫 <폐허> 중 ‘☞’ ‘리얼리즘’

· 이듬해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적 고뇌를 그린 <표본실의 청개구리> 발표.

·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학예부장 등 언론계에 있으면서 명필을 얻음.

· 특히 <삼대>(1931, 조선일보 연재)는 당시 사회현실의 문제와 지적 분위기를 정면으로 묘사 한 대표작.

· 경향 : 서울 중류층, 지식인, 예술가 등의 생활에서 소설적 제재를 많이 취함.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30년대 이후에는 장편을 씀.

· 40년간 장편 28편, 단편 150편, 평론 101편, 수필 30편 발표

· 1963년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타계

 작가 횡보 염상섭지묘·묘비(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 내)

--- 소설<두 파산(破産)>, <만세 전(萬歲 前)>, <삼대(三代)>, <괴짜 문인들>

 

󰏐 [횡보문학 100주년] 한국 근대소설의 아버지

 

소설의 발생이 근대 국가의 태동과 보조를 나란히 하였음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처럼 소설은 문맹 상태를 지양하고 문명 세계를 확보해 나간다. 소설은 정의, 평등, 인권 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정신활동이다.

 

문학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볼 때 횡보의 소설만큼 근대문학의 내실을 수미일관하게 자각, 장악해간 실례는 달리 찾기 어렵다. 횡보는 초기작에서부터 [개인]의 사회성을 고통스럽게 부각함으로써 그의 방대한 작품량과 묵직한 주제의식의 단서를 유감없이 토로했다. 그의 독보성은 바로 이 [근대성]을 누구보다 철두철미하게 자각한 현실파지력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횡보의 그런 [근대성] 확보는 그의 작품세계를 다채롭게 열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내연하고 있는 한국 현실의 온갖 다급한 화두들이 그의 소설에서 이미 다루어졌다. 식민지 주민의 고뇌와 뒤틀린 시각,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많은 암약과 보수주의자들의 끈질긴 내것 챙기기 근성, [너만 죽어라]식의 동족상잔의 참담한 아귀다툼 등을 횡보는 남보다 먼저 제기함으로써 [야만세계]의 극복을 우울하게 천착한 것이다. 요컨대 횡보는 우리 현실의 [야만성]을 미주알 고주알 캐어묻는 작업에 혼신의 정력을 다바친 불세출의 작가였다. 횡보의 소설에 드리운 이런 대의를 간과해 버리면 지리멸렬하고 시끌벅적한 시장바닥 같은 [현실]만 오롯이 떠오른다. 일반 독자들이 횡보의 작품과멀어진 것도 실은 이런 비합리의 수렁이 짓누르는 무게 때문임은 자명하다.

 

횡보 소설의 미덕은 워낙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 늑장 좋은 횡보문체의 확립과 (2) 여성 화자의 자기 정체성 과시가 그것이다.

 

거의 수집가적 집념으로 우리말을 한껏 끌어 모으고 그것들을 풍요롭게 구사한 횡보의 만연체 스타일의 문체가 산문의 바람직한 질량을 툭박지게 부풀려 놓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학사적인 맥락에서 정산하며 읽을 때 횡보 문체의 이런 성과는 작지 않고 그 영향이 지금도 한국 소설 일반에 합류하고 있음을 손쉽게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이다.

 

흔히 통속 취향이라고 무시하거나 오독하고 있는 대목이 횡보 소설에서의 여성 화자이다. 횡보소설들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 작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소설들과 비교해보아도 그의 여성 화자들은 단연 개성적이고 그 능동적 역할이 압도적으로 군림한다. 여성을 사물시할 때여성은 설 자리를 잃고 권선징악형의 대중소설만 맹위를 떨치게 된다. 여성의 지위는 [근대성]의 한 바로미터이다. 횡보소설에는 성녀도 어머니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성성이 힘차게 그 소임을 떠맡고 있다.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우리의 근대소설을 개척하고, 적어도 그 지향점을 어느 정도까지는 완성시킨 작가가 횡보이다. 따라서 횡보가 종횡무진으로 휘두른 현실비판적 시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가 고군분투한 [주체적 개인]의 형상화는 [근대성]의 실물찾기 바로 그것이었다. <김원우․소설가>

발행일 : 97년 08월 06일

 

 

󰏐 제목 : [염상섭동상] 김영중 조각--임현기 글…30일 제막

 

가을 벤치에 앉아 작품을 구상하는 소설가 염상섭.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소설로 꼽히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의 작가인 횡보 염상섭의 동상이 작가의 출생지 근처인 서울 종묘공원에 들어선다. 입상이나 흉상, 또는 문학비 형태로 세워지는 기존의 동상과는 달 리 공원벤치에 앉은 작가의 모습을 담아 서울의 새 명소로 떠오르고 있 다. 전신 조각상이 앉아있는 벤치에는 빈 공간을 두어 작가와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시간의 간격을 뛰어 넘어 그와 함께 [무언의 문학토 론]을 벌일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원로조각가 김영중씨가 제작했고 작가의 작품세계를 담 은 글은 서예가 임현기씨가 썼다. 30일 오후 3시에 열리는 개막식에는 김영수 문체부장관과 서기원 문학의해 조직위원장 등 문단인사들이 참가, 작가를 기린다.

[조선일보] 96년 10월 26일

 

 

󰏐 [염상섭 일화] 동네 문패 살피며 등장인물 구상

 

횡보 염상섭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을 마친 작가였다. 그는 서울 중산층의 풍속과 의식, 토박이 서울말씨를 창작의 텃밭으로 삼았다. 그는 문학으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작 자기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신 외상 술집을 확보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사를 자주 했는데 집을 옮긴 2~3일 후에는 으레 외상 선술집을 마련해 내셨다. 돈과는 거리가 멀어도 점잖은 용모가 주효했나 보다. 새벽녘에는 혼자 선술집에서 해장하시기가 적적하다고 파출소의 숙직 경관들을 불러들이곤 하셨다.].

93년 타계한 장남 재용씨가 생전에 부친을 회상하면서 쓴 글의 한 대목이다. 횡보라는 호는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비뚤고 바르지 않아 친구들이 붙여 준 것.

 

[한 번은 만취가 되어 파고다 공원에서 쓰러져 코를 고는데 누가옷을 벗겨가 추워 오그리다 못해 정신이 번쩍 나서 일어나 보니 내의뿐이라 화가 나서 뛴 것이 마포강]이라고 횡보 자신이 털어놓은 적도 있다.

 

지난 63년 3월14일 직장암으로 별세하기 직전에도 부인 김영옥(87)씨가 정종을 숟가락에 떠서 입안에 넣어 주었다. 당대의 [문호이자 주호]였던 그는 술내를 풍기며 숨을 거두었다.

 

횡보는 그 주량 못지 않게 집필량도 엄청났다. 장편만 무려 28편이었고, 단편 1백50편, 평론 1백1편, 수필 30편 등을 남겼으나, 장편소설[삼대]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

 

횡보는 연재가 끝난 뒤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선뜻 출판하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의 가난은 바로 그처럼 꼿꼿한 성품이 자초한 것이었다. 그는 [밥을 굶어도 평생에 남에게 머리를 굽혀 가며 구직 운동이라곤 하여 본 일이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횡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동네 문패를 하나씩 살피면서 그 이름의 항렬도 따져 볼 정도로 꼼꼼하게 작업했다. 우리말에 대한 애착과 함께 그는 소설 공간의 현실성 확보를 지향했다.

 

그는 문학 지망생들을 향한 산문에서 [첫째, 말과 글을 배울 것이요, 둘째, 소설을 지향하거든 사실주의를 탐구하고 여기에 철저하라]고권유했다.

 

서라벌예대의 학장 시절에는 강의 한 달 만에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강의를 그만둔 그였다.

 

올해가 횡보 탄생 1백주년이라고 하지만 한국 문단은 아직도 제대로 된 [염상섭 문학전집]을 갖고 있지 않다. 수많은 문학상이 존재하지만 여태껏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80년대 말 민음사에서 전 13권 분량의 전집을 기획, 일부를 의욕적으로 출간했다가 일반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중도 하차했다. 문단에선 창작과 비평사에서 문고본으로 내놓은 [삼대]와 [만세전](정해렴 교열)을 정본으로 인정한다.

현재 횡보의 유족으로는 부인, 차남과 2녀가 있고, 부인은 맏며느리 김귀순씨와 함께 서울 구파발 기자촌에 살고 있다.<박해현기자>

발행일 : 97년 07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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