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엘리엇 시인 / T.S. 엘리어트

by 송화은율
반응형

 

엘리엇(Eliot, Thomas Stearns, 1888~1965)

 

· 미국 출생의 영국 시인, 비평가

· 1913년 이해 영국에 거주, 귀화함

· 하바드 대 철학과 졸업

· 1920년 자신이 편집하고 창간한 평론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다 1차 대전 후의 지성의 혼란을 노래한 장시 <황무지(荒蕪地)>를 내어 큰 반향을 부름

· 만년에 문명의 비평으로 옮아 투철한 이성으로 카돌리시즘에 의한 질서의 회복을 주장하는 수다한 평론을 씀

·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 황무지」의 T.S 엘리엇…「몰개성의 시학」

 

미국 미네소타대는 지난 56년 4월30일 한 시인의 강연회를 위해 대학 전용 축구장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이날 모인 청중은 1만5천여명에 달했다. 강연회의 주인공은 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시인 T.S 엘리엇(1888~1965). 그는 이날을회상하며 “거대한 투우장으로 들어가는 투우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강연모습은 서구문학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문인들에게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한 사람만을 고르라면 바로 엘리엇이 선택될가능성이 가장 높다. 금세기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그의 시 「황무지」 때문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왔다······.

 

5부 4백33행으로 이뤄진 「황무지」는 딱 떨어지게 해석되는 시가 아니다. 1차대전 후의 <시대적 환멸과 허무사상>을 노래한 시라고 하는가 하면 <현대문명의 불모성>을 노래한 시라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불교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엘리엇 자신은 이같은 해석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쓴 시>에 불과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같은 다면성을 갖춘 「황무지」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지난 22년 출판된 후 새로운 시의 대명사로 통해왔다. 다양한 인용과 다채로운어법등을 통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기법의 시세계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대학 창립자이자 목사였으며 엘리엇은 엄격한 가풍 속에 방종과 쾌락을 멀리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로 자라났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그는 철학에 빠져들어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그는 1908년부터 런던에서 머물렀는데 미모의 무용수 비비언 헤이우드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의 정신질환으로 결혼생활은 불행하기만 했다. 그는 1917년부터 9년간 로이드 은행 행원으로 일하면서 격무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큰 비약을 했다. 1920년 최초의 비평선집 「신성한 숲」을 펴내 비평가로서 위치를 확립했다. 여기서 그는 시란 시인의 개성을 떠난 독자적인 생명체라는 「개성 배제의 시론」과 시인의 감성은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돼야 한다는 「객관적 상관물」이론을 펼쳤는데 이는 이후 구미비평계를 휩쓴 「신비평」의 기초가 됐다.

 

엘리엇은 출판편집인으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그는 문예지 「크라이테리언」의 편집책임자로서 로렌스, 조이스, 헉슬리 등의 글을 실었으며 대형출판사 「페이버」사의 편집이사로서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했다. 한편 그는 극작가로도 활약해 「성당의 살인」 「가족의 재회」 등의 시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엇 문학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였다. 그는 8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 43년 장시 「네 사중주」를 출간했다. 영문학계에서는 엘리엇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것은 「황무지」이지만 그를 대표하는 걸작은 「네 사중주」로 보고 있다. 초기 시의 난해성을 극복하고 통일된 구조와 안정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원숙한 작품이라는 것. 엘리엇에게 노벨문학상수상을 안겨준것도「네사중주」였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는 잇따르는 상훈(賞勳)속에 비서였던 39세 연하의 발레리 플레처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