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의 ‘삼대(三代)’ 해설
by 송화은율염상섭의 ‘삼대(三代)’ 해설
출전 ; <조선 일보>, 1931년 1월 - 9월)
작가 : 염상섭
등장인물
조의관 : 조씨 가문의 가장. 완고한 봉건 의식의 소유자 재산을 노린 후취 수원집 일당에 의해 독살당함.
조상훈 : 조의관의 아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열렬한 기독교 신자이자 개화주의자. 축첩과 노름을 일삼는 위선적 인물.
조덕기 : 조상훈의 아들. 일본 유학생.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상과 행동에 반감을 가진 계급운동의 심정적 동조자. 진보적 자유주의자
김병화 : 덕기의 중학동창이자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
홍경애. 필순. 창훈. 수원집 등.
줄거리
대지주인 조부 조의관은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 족보를 사들일 정도로 명분과 형식에 얽매인 구세대의 전형이고, 아버지 상훈은 신문물을 받아 들였으나, 이중 생활에 빠지고 재산을 탕진하는 과도기적 인간형이다.
아들 덕기는 선량한 인간성의 소유자이나, 조부와 아버지의 부조리 속에서 재산을 지켜 나가는 일에 한정되어 적극성을 잃은 우유부단한 인간형으로 그려진다.
덕기의 조부 조의관은 고루한 봉건 의식의 소유자이다. 어렵사리 모은 거액의 재산으로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받들고, 가문의 명예를 키워나가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삼는다. 칠순 노인이면서 부인과 사별 후 서른을 갓 넘긴 수원댁을 후취로 들여 네 살박이 딸까지 두고 있다. 조의관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아들 조상훈이다. 맏아들이며서도 집안일을 안중에 없고 오로지 교회사업에 골몰해 집안의 돈을 바깥으로 빼돌리는 데만 혈안이 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더구나 조의관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봉제사를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 숭배라고 반대하고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아들보다도 손자인 덕기에서 더 큰 믿음을 가진다. 집안의 모든 일도 손자인 덕기와 의논해서 결정하고, 자신이 죽고 난 후 재산 관리도 덕기에게 일임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덕기의 부친인 조상훈은 위선자다. 미국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에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요, 교회 장로인 그는 교회를 통한 사회 운동과 교육 사업에 큰 뜻을 품고 집안의 재산으로 그런 사업에 직접 투자하기도 하고 민족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실생활은 구린내는 축첩과 노름, 그리고 술로 얼룩진 만신창이 난봉꾼의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살피던 운동가의 딸인 홍경애와 관계를 맺어 아이까지 낳고도 무책임하게 내동댕이치는가하면, 당대의 오입쟁이들이 출입하는 매당집이란 곳엘 드나들면서 나이 어린 여자들과 불륜의 관계에 빠진다.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다른 신세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친구 김병화처럼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병화가 하는 일에 심정적으로 동조를 하기는 해도 그 자신은 법과를 마쳐 판사나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자신의 그런 꿈이 가끔 운동가인 병화의 조소를 받아도 크게 개의하지 않는다. 병화는 목사인 아버지와 사상 대리으로 가출해서 이곳저곳 떠돌면서 기식하는 형편이지만 자신의 뜻은 절대 굽히지 않는 반면, 덕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정면 충돌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세대를 달리하는 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을 이해하고 동정하기도 한다.
잠재되어 있던 조씨 가문의 불화와 암투가 정면에 드러난 것은 조부의 임종을 앞두고 생긴 재산 분배 과정에서였다. 조의관의 후취인 수원집과 그를 조의관에게 소개해준 최참봉 등은 재산을 가로챌 욕심으로 유서 변조를 계획하고 조의관을 독살한다.
의사들의 배설물 검사로 비소 중독이 판명되자 상훈은 더 명확한 사이인 규명을 위해 사체 부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범인 찾기도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나 손자 덕기가 나타나 수원집 일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재산 관리권은 덕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상훈은 법적 상속자인 자신을 건너뛰고 아들인 덕기에게 그 권리가 넘어가지 유서와 토지문서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한편, 상훈에게 농락당하고 아이까지 낳은 후 버림받았던 홍경애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술집 여급으로 나가면서 생계를 꾸러가지만 해외의 독립 운동가인 이우삼과 연계를 가지면서 그를 뒤에서 도우는 역할을 한다. 경애는 과거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병화와 자주 만나는 사이에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조그마한 잡화상으로 경영하며 경찰의 눈을 속이지만 그것이 다른 운동가인 장훈 일파들의 오해를 사게 되어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한편, 이우삼이 국내를 다녀간 뒤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친다. 비밀 조직인 장훈일파는 물론, 가게를 운영하며 경찰의 눈을 피해 있던 병화와 경애도 검거된다.
그리고 덕기도 병화에게 자금을 대주었다는 혐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장훈은 비밀 유지를 위해 코카인으로 음독 자살을 한다. 장훈의 자살로 갑자기 조사가 미궁에 빠지자 연행되거나 검거되었던 사람들은 다 풀려 나오게 된다. 가짜 형사를 등장시켜 금고와 문서를 훔쳐냈던 상훈도 결국 훈방 조치로 풀려난다. 덕기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공백을 느끼면서 이제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얹힌 조씨 가문의 유업을 어떻게 이끌나갈 것인가 망연해한다.
해설
이 작품은 당대의 사회사를 한 가문의 삼대기를 통해서 보여준 한국소설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가족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일반적인 가족사 소설은 시대순으로 기술되는 것이나 이 작품은 세 세대간의 대립을 공존시켜 놓았다. 작가는 조씨 3대를 토하여 3,1운동이 끝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대단한 파노라마적 기법으로 그려보인다. 부의 주변에 서식하는 기생적 인물들의 타락상과 구세대의 시대착오적이고 위선적인 삶에 날카로운 비판으로 던지면서, 덕기와 병화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에 시대적 과제 해결의 희망을 걸고 있는 이 소설은 염상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인정받는다. 삼대에는 두 갈래의 삶이 존재한다. 하나는 조의관 부자가 실현하는 현실추수적인 소비적인 삶이고, 또 하나는 김병화와 필순을 통해 보여지는 현실 반체제 지향적인 이념적인 삶의 양상이다.
삼대는 한국 신문학사를 통해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30년대 서울의 이름난 만석군 조씨 일가를 무대로 하여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이 삼대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어떻게 몰락하고 어떤 의식을 지니며, 당시 청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가를 사실적인 수법으로 파헤쳐 인간 심리를 미묘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1931년 11월 13일부터 32년 11월 12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화과」는 사실상 「삼대」의 속편이다. 등장 인물만 바꿔 삼대의 몰락을 역전시키려한 작품이다.
(주제) 변모해 가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의 삼대에 걸친 가치 의식의 변모와 갈등
(경향) 사실주의적
(구성) 전 42장
(갈래) 장편 소설
참고
임헌영 외(1991), 한국문학명작사전, 한길사. 66 - 69 면에서 전재(轉載)함.
염살섭 소설의 담론구조 - <삼대>의 담론체게
Ⅰ. 소설의 언어와 담론
한국근대소설사에서 廉想涉이 차지하는위치는 확고한 바 있다. 그리고 염상섭의 소설 나아가 문학에 대한 연구도 대단히 활발하고 그 성과 도한 매우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방법론에서는 偏向性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염상섭에 대한 연구로는 ① 작가론적인 연구, ②정신사를 포함하는 주제론적인 연구 중심의 작품론, ③ 기법적인 연구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염상섭소설의 언어에 대한 연구는 문체론적인 측면에서 행해진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을 뿐이다. 즉, 이인모, 정한모, 오현봉, 구인환, 김우종, 이상억, 김정자 등의 연구가 있고, 염상섭의 다른 측면을 언급하는 가운데 文體的인 특성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는 정도이다.
염상섭의 다른 연구가 정당한 가치를 나타내자면 그의 문학의 언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다른 방법론의 연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小說의 언어를 연구하는 방법론의 반성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소설이 언어를 媒材(medium)로 한다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문학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언어의 어떠한 측면에 중점이 놓이느냐 하는 초점은 달라진다. 기왕의 연구들은 주로 언어의 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설의 언어 혹은 문학의 언어를 대상적인 것으로 볼 경우 언어와 언어의 사용주체인 인간의 분리를 초래한다. 또는 발생적인 관점에서 염상섭 문체의 근원을 추적한 한 연구가 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심리학과 연관되는 연구로서 방법론적인 확실성이 확립되지 못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은 作家-作品-讀者의 상호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학현상으로 존재한다. 특히 소설에서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話者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화자의 개입은 이야기를 듣는 受話者를 요구하게 된다. 또한 작중인물들 사이에도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구조의 측면이나 문학적인 실천의 측면에서나 기호론적인 성격을 띠는 담론구조를 이룬다. 이는 문학현상 속에 인간이 주체로서 관여하는 면모이다. 소설의 언어를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는 방법론은 나름대로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지만 한계도 아울러 지닌다. 그 한계라는 것은 살아 있는 언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다룸으로써 언어의 실상에 멀어진다는 추상성의 지적이다.
언어에 주체가 개입됨으로써 언어는 대상적인 성격을 벗어나 談論(discours)의 차원으로 전환된다. 소설의 언어는 이러한 담론구조의 일종이다. 다라서 소설의 언어를 논의하는 방식도 이러한 담론차원의 것이라야 한다. 이는 방법론이 대상의 속성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청에도 관련된다. 염상섭소설의 언어를 담론의 차원에서 살펴보려는 이유는 결국 살아 있는 문학언어의 면모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에서 문학의 언어와 언어학에서 대상으로 하는 언어의 성격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는 부수적 결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염상섭소설의 성격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며, 리얼리즘소설의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는 <三代>를 대상으로 하여 담론의 특성을 분석해 보고, 담론의 구조가 드러내는 소설적인 의미를 추적해 보기로 한다.
Ⅱ. 눈치와 작가의 개입
언어의 수행은 근본적으로 대화적인 성격을 띤다. 대화는 발화주체와 수신자가 전제된다. 이 수신자는 발화주체의 여러 조건을 제약한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언어가 수행되는 장에서 일방적인 전달이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獨白조차도 내적으로 분화된 두 자아 사이의 대화라 할 수 있다. 대화적인 관계와 통로가 정상적으로 조정되지 않을 경우, 發話者는 상대방에 대해 매우 강한 의식을 작동시키지 않을 수 없다. 즉, 상대방의 언어적인 코드에 자신을 조정해 가지 않으면 대화를 이루어 낼 수 없다. 언어수행의 주체가 주체로서의 일방적인 역할을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脫中心化現象이 언어적으로 드러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주체가 대상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또는 자신의 주도권 일부를 상대방에게 위임해야 한다. 이는 가치의 間接化와 연관된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교환가치의 지배를 받는 근대적인 인간관계의 특징을 드러내는 言語樣相이기도 하다. 이는 대상의 객관적인 제시를 지향하는 경향과 함께 근대소설 언어의 한 특징이다.
소설의 언어는 흔히 지적되듯이 서술과 묘사와 대화로 이루어진다. 소설의 이러한 언어요소는 시대의 영향을 따라 강조되는 국면이 달라진다. 說話性이 강조되던 시대에는 서술이 근본양상을 이루었다면, 근대로 내려오면서 서술보다는 묘사와 대화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대상의 객관적인 제시에 역점을 두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개입하면 사실성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술(telling)보다는 描寫(showing)의 방법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언어로 대상을 파악한다는 데서는 엄격한 의미의 모방(mimesis)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들 수 있다. 이는 언어수행의 一次元性과 사물의 다차원성에서 빚어지는 결과인데 결국 미메시스라는 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언어에 대한 이런 경직된 생각은 미국의 新批評과 시카고학파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소설의 언어는 그렇게 순정한 것도 단일한 것도 아니다 작가의 개입도 그 나름대로 소설언어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중인물의 언어가 상대방에 대한 눈치를 드러내는 예와 작가의 직접적인 개입의 예를 보기로 한다. <三代> 전편을 통하여 ‘눈치’란 말은 자주 나온다. 이 말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상대방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의 형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에 ‘타인’의 시각에 연결되고, 따라서 이중적인 목소리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일반적인 談論의 특성이기도 하다. 우성 <三代>의 첫머리를 보기로 한다.
덕기는 안마루에서 내일 가지고 갈 새 금침을 아범을 시켜서 꾸리게 하고 축대 위에 섰으려니까 사랑에서 조부가 뒷짐을 지고 들어오며 덕기를 보고, “얘 누가 찾아왔나보다 그 누구냐? 대가리 꼴하고······ 친구를 잘 사괴야 하는 거야. 친구라고 찾아온다는 것이 모두 그따위뿐이냐?”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못마땅하다는 잔소리를 하다가, 아범이 꾸리는 이불로 시선을 돌리며 놀란 듯이, “얘얘 그게 뭐냐? 그게 무슨 이불이냐?”하며 가서 만져보다가, “당치않은! 삼동주 이불이 다 뭐냐? 주속이란 내 낫세나 되어야 몸에 걸치는 거야. 가외 저런 것을 공부하는 애가 외국으로 끌고 나가서 더럽혀 버릴 테란 말이냐? 사람의 지각머리가······”하며 부엌 속에 쪽치고 섰는 손주 며느리를 쏘아본다.
덕기는 조부의 꾸지람이 다른 데로 옮아간 틈을 타서 사랑으로 빠져나왔다. 머리가 덥수룩하고 꼴이 말이 아니라는 조부의 말눈치로 보아서 김병화가 온 것이 짐작되었다.
위 인용에서 중심적인 서술의 대상은 덕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덕기와관련된 내용 혹은 정보는 여러 대상으로 옮겨가는 조부의 시각을 통해 드러난다. 우선 조부의 시선은 덕기에게 향한다. 그러다가 간접적인 방식으로 덕기의 친구에게 옮겨지고, 다시 아범, 덕기, 손주며느리에게로 시선이 이동한다. 이러한 바쁜 시선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조부의 언어는 獨白的으로 되어 있다. 덕기의 친구에 대한 언급이나 덕기가 가지고 가려고 준비하는 이불에 대한 언급에 아무도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독백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된다. 이는 앞에서 말한 受話者의 역할이 無化된 양상이다. 그리고 조부의 언술대상에 대한 판단은 일방적인 듯하면서 이중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대가리 꼴하고······”하는 것은 덕기의 친구에 대한 언급이면서 동시에 덕기를 지향하는 언술이다. 또한 “사람이 지각머리가······”하는 부분은 아범, 덕기, 손자며느리 세 사람을 동시에 지향하는 것이다. 삼동주 이불을 외국으로 가지고 나가겠다는 덕기나 그것을 그대로 容認하는 덕기의 아내나 그것을 꾸리는 아범 모두가 ‘지각머리가 없는 인물’이 된다.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는 조부의 시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시각이 동시에 모든 인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타인에 의해 성격이 규정되는 인물들이며, 조부의 시각은 多重的인 것이 된다. 그만큼 인간관계가 간접화된 것이라는 점을 암시받을 수 있다. 대화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獨白的인 언어의 역할로 인해 간접화된 인간관계를 드러낸다.
간접화된 인간관계는 눈치로 나타난다. 덕기가 병화의 출현을 알게 되는 것은 조부의 ‘말눈치’를 통해서이다. 이 대목의 눈치는 直說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예들을 보면 정당한 대화관계라기보다는 눈치로 표상되는 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다음의 인용이 그러한 예가 된다.
그 동안 몇 달 사는 데도 식량 이외에는 날돈으로 대준 게 없으니 자연 흐지부지 다 쓰기도 하였지마는 어쨌든 하는 말이 괘씸하였다. 또 그것은 고사하고 딸자식은 꼭 내 자식이란 법도 없고 내 자식이라 하여도 없었던 셈만 치자는 말을 들을 제 트집을 잡을 말이 없어서 한 말이라 하기로 이것이 사람의 탈을 쓴 놈의 말인가 하고 어이가 없어 말이 아니 나왔다. 대자바기만큼 싸워야 소용이 없었다. 남은 것은 단돈 삼백원이요, 그 이튿날부터는 상훈이가 발그림자도 아니하게 되었다.
조상훈에 대한 홍경애의 관계가 드러난 부분인데, 타인에 대한 多角的인 연관이 말투를 통해 나타나 있다. 조상훈이 홍경애를 대하는 태도와 그에 대한 홍경애의 반응이 ‘말’에 대한 반응으로 전환되어 표현된다. 조상훈이 홍경애와 관게하여 낳은 딸에 대해 조상훈의 부정적인 생각이 말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에 대한 홍경애의 반응은 말에 대한 반응이 되고 간접적인 언어양상이다. 타인에 대한 반응은 타인의 말에 대한 반응이다. 결국 홍경애의 의식은 타인에 의해, 타인의 말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간접화된 人間像을 엿볼 수 있는 언어양상이다.
소설에서 作家의 개입이 타부시되는 것은 단편의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라 해야 옳다. 장편소설의 언어는 그렇게 단일한 언어라고 하기 어렵다. 언어의 多樣性을 소설의 특성으로 지적하는 바흐찐의 논지를 따른다면 장편소설에서 작가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소설은······ 언어의 내적 분화, 즉 언어의 사회적 다양성과 그 안에 존재하는 음성의 다양성을 진정한 소설적 산문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언어적인 多樣性은 종류의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그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의 介入이 이루어질 소지가 마련된다. 전체로서의 소설을 구성하는 문체구성적 단위체의 기본유형 속에 이미 작가개입의 가능성은 드러난다. 바흐찐이 말하는 小說言語의 기본 유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ⅰ) 작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학적·예술적 서술 및 그 변형들
ⅱ) 다양한 형태의 일상구어체 서술의 樣式化(skaz)
ⅲ) 半文學的이고, 글로 쓰여진 일상적인 이야기(편지, 일기 등의) 여러 가지 형식들의 양식
ⅳ) 작가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비예술적 문예언어(윤리적·철학적·과학적 진술이라든가 수사학적·인종학적 묘사, 비망록 등)
ⅴ) 작중인물들의 문체론적으로 개별화된 話法들
소설언어의 이러한 類型論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작가의 개입여부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대>의 경우 작가의 全知的 視點이 다수 활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 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지 않고 작가가 직접개입하는 예를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예가 그것이다.
덕기는 가슴이 뻐근하면서도 후련한 것을 깨달으면서 그 발기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필자는 여기에 조씨집 재산이 어떻게 분배되었는가를 잠간 공개할 필요가 있다.
귀순이(수원집 소생) 오십석/수원집 이백석/ 덕희(덕기 누이) 오십석/ 덕희모(며느리) 백석/ 덕기처 오십석/ 상훈 삼백석/ 덕기 천오백석/ 창훈 현금 오백원/ 최참봉 현금 삼백원
이것은 물론 대략 쳐서 그렇다는 것이니, 그 중에 수원집 한 사람몫이 이백석 같은 것은 실상, 상훈이의 삼백석의 거의 삼갑절 폭이나 될 것이요, 또 덕기의 천오백석이라는 것도 나머지는 다 쓸어 맡긴 것이니 실상은 이천 석까지는 못가도 천 칠팔백 석은 될 것이다.
이 인용문은 전지적 시점에서 作中人物의 행동을 서술하다가 작가 廉想涉이 직접 개입하여 사실을 나열하고 있다. ‘필자는’으로 시작되는 부분 이하 재산분배의 목록을 제시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이러한 작가의 개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다. “사실 자체의 힘을 이용하여 진실이라는 이름 밑에 자행되는 허위성(환상적 열매, 허황한 기준)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분재기의 제시와 그 제시 방법이다.” 소설이 근본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은 사실을 떠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의 지적이다. 작가가 직접 介入하여 사실을 드러낸 다음에 작중인물은 다시 진실을 향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論證하고 있다. 이는 장편소설이 단지 허구를 만드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의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장편소설에서 작가의 개입은 소설의 예술적인 효과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說話性을 살려 주제의 깊이를 확보하게 해 주는 작용을 하기도 하며, 사실을 제시하여 소설언어의 기능을 확대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객관적인 서술을 함으로써 사실을 허구로 보도록 해 온 소설적인 인식의 패러다임을 뒤집음으로써 허구를 다시 사실로 보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작가개입의 언어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장황한 설명이나 讀者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하는, ‘현명한 독자는 우리가 앞에서 주인공이 이러저러했다는 것을 기억하리라’하는 식의 개입은 기능적이기 어렵다. 작가의 개입이 통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작가의 개입을 아무 조건 없이 기능적이지 못하다는 식의 설명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설언어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소설장르의 언어적 특징을 도외시하는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작가의 개입은 채만식의 경우에도 발견되는 요소이며 그 기능은 肯定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이미 앞 절에서 설명한 바 있다.
Ⅲ. 단일언어의 대화화 : 편지
문학의 다른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소설의 언어는 구체성을 띠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별다른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술의 언어가 抽象的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언어가 구체화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언어가 대화화되면서 다중적인 시각을 획득함을 의미한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라든지 인물의 성격화를 통한 구체화도 고려사항이 된다. 그러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언어가 어떠한 양상으로 소설 속에서 살아 있는 언어가 되느냐 하는 문제에 연관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일언어 혹은 절대성을 띠는 언어가 탈중심화되는 경우를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소설 속의 언어가 일상언어의 맥락에 연관되어 그 패러다임으로 다시 정리됨을 뜻한다.
‘편지’의 경우, 일차적으로 半文學的이고 일상적인 이야기의 한 형태이다. 편지는 전달의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단일한 목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되 상대방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獨白的(monologic)인 것이면서 이중적인 목소리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일기와 달리 대상이 상정됨으로써 내재적인 對話의 성격을 아울러 띠게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지는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의 思想 혹은 삶의 태도를 무리없이 비판하기에 적합한 樣式이다. 그리고 동일한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달리 다른 인물에 대한 언급이 자유롭다. 이는 언어적인 전달의 통로가 간접화되는 데서 가능해지는 편지의 담론적 특징이다.
<삼대>의 경우, 서울 중산층의 한 전형인 덕기와 社會主義者 병화 사이의 계층의식이나 思想이 편지를 통하여 나타난다. 이는 필순이라는 인물을 중간에 두고 오가는 편지 속에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에서 그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A) 자네에게 충실한 친구임을 알려 두려 신용을 단단히 보여주러 왔었네마는 필순양을 만나고 가는 것만은 왔던 보람이 있는 것 같으이. 그러나 실없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아니이 웃으며 이 글을 쓰지는 못하는 것일세. 내가 없어지면 자네가 담배를 굶을 듯하기에 내 ‘밴또’ 값을 두고 가네······ 일전에 실없는 말로만 하였지만 참 정말 필순양이 공부할 의향이면 기별만 하게. 어떻게 도리는 있을 것이니.
(B) 우리는 다만 그의 부모가 원하는 대로 맡겨 둘 것이요 그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을 열어 주도록 하는 이외에 남의 생활에 간섭할 것이 아닐세. 인생에 대한 경험이 없는 어린애를 자기의 뒤틀린 환경에서 얻은 경험이나 사상이나 습관 속에 몰아넣으려는 것은 죄악이요, 모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청춘의 꿈은 그것이 꿈이라 해서 경멸하여서는 아니 될 걸세.
(C) 만일 나의 이 의견과 이 관찰이 옳다면 그리고 자네가 정말 필순양을 누이동생같이 사랑한다면 자네의 인생관이나 자네의 사회관 속에 들어와서 자네생활을 생활하라고 강제하여서는 아니 될 것일세. 그것은 너무나 극단이요, 자기만을 살리는 이기적 충동이요 남의 생명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일세. 그가 그대로 자란 뒤에 자주적·자발적으로 자네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상관 없지만 지금부터 서둘러서 피어날 꽃에 찬서리를 맞쳐 떨어뜨려 버린다면 그것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꿈을 구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일세.
위 인용의 (A)(B)는 조덕기가 일본에 건너가서 김병화에게 보낸 편지이며, (C)는 김병화의 답장이다. 편지의 내용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그 이전에 言語的인 전달의 국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편지는 내용과 함께 누가 읽는가 하는 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전달의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자살자의 편지는 그 자신에게는 유서가 될 수 있으며, 애인에게는 결별의 告知가 될 수도 있고, 수사관에게는 자살의 물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필순은 김병화에게는 理念的인 계숭자 역할이 기대되는 대상이며, 조덕기에게는 부르조아적인 아량을 드러내도록 하는 媒介役割을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상을 드러내는 역할과 부르조아의식의 구현대상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필순의 양면성이 조덕기가 김병화에게 보낸 편지를 필순이 몰래 읽게 되는 데서 드러난다. 조덕기가 김병화에게 보낸 편지를 김병화가 직접 읽는 것과는 달리 일단 간접화된 전달의 양태를 띠게 된다. 따라서 동일한 사태에 대한 세 가지 시각-조병기, 김병화, 필순-이 동시에 드러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다중화된 시각을 통하여, 필순이 공부할 의향이 있다면 공부하도록 해주겠다는 필순에 대한 조덕기의 관심이 표명되기도 하고, 필순이 그러한 제안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한 김병화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행해지기도 한다. ‘자기의 뒤틀린 환경에서 얻은 경험이나 사상이나 습관 속에 몰아넣으려는 것은 죄악이요 비극’이라는, 김병화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편지형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소설에서 사상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하는 직접성에서 자유로운 비판을 가하는 방식으로 편지라는 전달방식이 효과적으로 이용된 것이다. 필순을 ‘누이동생처럼’ 생각한다는 언표와 人生觀과 社會觀의 ‘강제’ 사이의 괴리를 제삼자-필순-앞에 제시함으로써 필순의 의식을 촉발하는 형식이 바로 몰래 읽는 편지의 담론형식적인 힘인 셈이다.
편지형식의 談論樣相에 대해서는 통시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Ⅳ. 대화와 서술의 관계
<삼대>의 談論 특징 중 하나는 대화와 서술이 규칙적으로 교차한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소설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어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대화를 일단 제시한 다음에 작가의 전지적인 시점으로 서술을 덧붙이는 것이 <삼대>에 나타나는 담론의 한 특징이다. 이는 타인의 말을 제시함으로써 二重的인 목소리가 가능하게 해 놓은 다음 다시 “話者의 치ㅗ종적인 의미상의 판단의 표현으로서의 직선적이고 직접적으로 그 대상 자체를 지향하는 말”로 만듦으로써 단일언어적으로 전환된다. 작가가 多重的인 시각을 마련하면서도 단일언어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면모이다. 이는 전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는 면모로서 작가의 관점이 일관성을 띠게 되고, 따라서 언어는 집중화되는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다음과 같은 對話의 예를 보기로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대루 내버려 두시면 어떻게 합니까?”
덕기는 말을 꺼내기가 거북한 것을 억지로 부리를 땄다.
“내버려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니? 내 처지도 처지요, 제가 발광을 하고 떨어져 나간 것을······”
“말눈치가 그렇지 않은가 보던데요. 어쩼든 아버지 체면만 생각하시고 거기 달린 두 사람 세 사람을
희생해 버리시고 마는 것은 아무리 아버니께서 하신 일이라도 저는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덕기는 당돌히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네가 참견할 것 아니야!”하고 부친을 소리를 친다.
“제가 참견할 것도 아닙니다마는 처음 일이고 나중 일이고 모두 아버님 책임이 아닙니까? 그 책임을
하시렵니까?”
아들은 대드는 수작이다.
“책임이 내가 무슨 책임이란 말이냐? 어쨌든 네가 쥐뿔나게 나설 일이 아니야!”
부친은 또 불쾌히 핀잔을 주었다. 학교이야기를 할 때까지는 덕기의 비위를 거슬르지 않고 어루만져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지금은 그것도 잊어버리고 전대로의 까닭모를 못마땅한 생각이 머
리를 든 것이다.
여기서는 언어전달의 일방성이 드러난다. 서로 말을 주고 받을 뿐이지 어떠한 타혐이나 의견의 일치를 이루어내는 것도 아니고, 談論을 경정하는 시각이 일정한 방향으로 조정되어 있다. 즉, 부친의 의식에 아들 덕기의 의식이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고 만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他人의 視線’이 개재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作中人物 조상훈의 성격적인 단순성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성격의 단순함만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해 오는 아들에게 기존의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는 언어적인 절대성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과 같은 예에서는, 發話者와 受話者의 관계가 앞에서처럼 부자간의 대화지만,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삼사천 원은 누가 삼사천 원 썼다던?”
영감은 아들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실상 그 삼사천 원이란 돈이 족보 박이는 데 직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조씨로 무후(無後)한 집의 계통을 이어서 일문일족이 끼려 한 즉 군식구가 늘며는 양반의 진국이 묽어질까보아 반대를 하는 축들이 많으니까 그 입들을 씻기 위하여 쓴 것이다. 하기 때문에 난봉자식이 난봉핀 돈액수를 줄이듯이 이 영감도 실상은 한 천 원 썼다고 하는 것이다. 중감의 협잡배는 이런 약점을 노리고 울겨쓰는 것이지만 이 영감으로서 성한 돈 가지고 이런 병신구실 해보기는 처음이다.
“그야 얼마를 쓰셨던지요. 그런 돈을 좀 유리하게 쓰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재하자 유구무언’의 시대는 지났다 하더라도 노친 앞이라 공손했으나 속은 달았다.
“어떻게 유리하게 쓰란 말이냐? 너같이 오륙천 원씩 학교에 디밀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자식 유인하는 것이 유리하게 쓰는 방법이냐?”
아까부터 상훈이의 말이 하롯가에 앉아서 폭발탄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아서 위태위태하더니 겨우 간정되려던 영감의 감정에 또 불을 붙여 놓고 말았다.
이러한 언어의 驅使法은 일단 二重的인 목소리를 지향하는 일면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타자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談論의 양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담론의 양식문제는 작가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말하는 방식이 곧 사상이라는 전제에서 그러하다. 이는 보다 깊은 해석을 요하는 문제이다. 골드만이 분석한 문체와 사상의 관계론에 의한다면, 법복귀족들의 어법은 불균형이 특징인데, 데카르트의 談論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균제된 것이라면 파스칼의 경우는 “이 우주의 무한한 침묵이 나를 전율케 한다”는 것으로 대표된다는 것이다. 이 불균형이 장세니즘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염상섭의 경우, 소설 전체를 통해서는 多聲的인 목소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특히 대화를 통해 잘 드러나는 면모이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의 保守主義的인 世界觀은 조의관과 손자 덕기 사이의 거리(distance)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고 조의관이 끝까지 지키려는 사당과 금고 열쇠로 표상되는 ‘핏줄보다 강한 돈’으로 표상된다.
조의관에게는 평생 오입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을사조약 한창통에 그때 돈 이만 냥 지금 돈으로 사백 원을 내놓고 사십여세에 옥관자를 붙인 것이다······또 하나는 육년 전에 상배하고 수원집을 들여앉힌 것이니 돈은 여간 이만 냥으로 언론이 아니나 그 대신 귀순이를 낳고 또 여든 다섯에 죽을 때는 열 다섯 먹은 아들을 두게 될지 모르는 터인즉 그다지 비싼 오입이 아니나 맨 나중에 하는 오입이 이번 대동보소를 맡은 것인데 이번에는 좀 단단히 걸려서 이만 냥의 열곱 이십만 냥이나 쓴 것이다······(돈 주고 양반을 사!) 이것이 상훈에게는 일종의 굴욕이었다.
금고와 사당으로 표상되는 보수주의는 조의관과 이념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덕기에게 대물림이 된다. 조의관이 죽게 되는 마당에서 덕기는 다음과 같은 獨白을 한다.
······ 내 일생에 하지 않으면 안될 가장 중대한 일은 이 금고 여닫는 것과 사당 문을 여닫는 것 두 가지밖에 없단 말인가? 마치 간수가 감방문을 여닫듯이.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러한 보수주의를 형상화한 언어가 單一言語性을 드러내고 있다는 특징이다. 앞의 인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전지적인 설명으로 조의관의 내력이 서술된다든지, 보수주의의 대물림이 독백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언어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명제의 설명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성적인 목소리를 제시하는 것은 그의 작법이고 그것을 단일논리적으로 수렴시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의관과 조덕기의 의식에 대한 담론적인 드러남이 증명해 준다.
자연과학의 인식태도와 다른 인문사회과학의 인식태도는 主·客同一性(ㄴubject-object identity)에 그 특징이 드러난다.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포함하며, 대상이 주체의 의식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염상섭의 경우는(특히 <삼대>) 담론의 특성으로 본다면 대상과의 거리를 철저히 유지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포괄하는 형국이다. 달리 말하자면 주·객 동일성을 드러내는 소설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대상을 철저히 고립시켜 객관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小說論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의 의식과 주인공의 의식을 일치시키고 그 의식이 당시 사회의 集團意識이라는 점을 제시한 데에서는 리얼리즘의 높은 수준에 이른 것이라 해야 한다.
Ⅴ. 인물의 성격과 담론구조
<삼대>는 매우 복잡한 인물의 구성을 보여주는데,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것 중의 하나는 덕기와 병화의 관계이다. 첫 장이 ‘두 친구’로 되어 있어서 작품의 제목과 함께 R.바르트가 설정하는 主題化의 함축적 약호 역할을 한다. 두 친구의 談論을 살며봄으로써 소설의 언어가 인물의 성격과 어떠한 관계에 놓이는가를 보기로 한다.
“야아 그렇지 않아도 저녁 먹고 내가 가려고 하였었네.”
덕기는 이틀만에 만나는 이 친구를, 더욱이 내일이면 작별하고 만터이니만티 반갑게 맞았다.
“자네같은 뿌르조아가 내게까지! 자네가 작별하러 다닐 데는 적어도 조선은행 총재나······”
병화는 부옇게 먼지가 앉은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딱 버티고 서서 이렇게 비꼬는 수작을 하고서는 껄걸 웃어버린다.
“만나는 족족 그렇게 짓궂이 한마디씩 비꼬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나? 그 성미를 좀 버리게.”
덕기는 병화가 뿌르조아 뿌르조아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먹을 게 있는 것은 다행하다고 속으로 생각지 않는게 아니나 시대가 시대이니만치 그런 소리가 - 더구나 비꼬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위 인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 두 인물의 어법이 사뭇 다르다. 덕기의 어법이 안정되어 있는 단일한 목소리라면(인용문에 한함) 병화의 어법은 패러디화되어 있어서 二重的인 목소리의 담론이 된다. 덕기가 김병화를 대하는 태도가 우정어린 단일성을 띤 것이라면, 김병화가 덕기를 대하는 태도나 말씨는 ‘비꼬는 소리’이다. 이는 친구로서의 자아와 이념분자로서의 자아가 내적인 갈등을 빚고 있는 데 대한 담론적 표현이다. “타인의 말 속에 定住한 두 번째 목소리는 여기에서 자신의 원래 주인과 적대적으로 충돌하며 그 주인이 정반대의 목적을 ㅜ이해 봉사하게끔 한다!” 이는 성격의 단일성과 복합성이라는 대립의 관계로 연계된다. 편지에서도 그러한 면은 찾아진다. 또한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도 덕기의 안정성 지향의 성격은 잘 드러난다. “덕기는 살림을 맡은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벌써 찜증부터 났다.” 덕기의 찜증은 책임은 걸머졌어도 자기 힘으로는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한 無力感은 모친, 부친을 불쌍하게 보는 의식으로 작용하고, 병화가 부럽게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안정성은 센티멘탈리즘에 가까운 감정상태로 가라앉는데, 덕기의 독백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 특징이다.
- 필순이를 ‘제이 홍경애’를 만들 수는 없다!
덕기는 속으로 뇌었다.
- 필순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덕기는 어느덧 자기 눈에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았다.
이러한 안정성은 금방 센티멘탈리즘을 드러낸다. 안정감이 보수주의와 연계되고 가족적 사고를 드러내는 예이다. 이에 비하면 김병화의 성격은 進步主義的인데 그것은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당시 시대적인 정신과 연관이 있다. 병화의 어법은 덕기와의 대화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부친과 妥協하고 집으로 드러가라는 덕기의 권유를 들은 김병화는 발끈한다. 그리고 그 어투는 야유적인 패러디 풍이다.
“하여간 정말 우정에는 이용이라는 것은 없네. 더구나 동지애(同志愛)면야!”
병화는 무슨 생각에 팔려 있다가 한 마디 내놓는다.
“소위 동지애 - 동지의 우정이란 점으로는 자네가 불만일지 모르네만, 어쨌든 자네만 괴로운 것은 아닐세······”
덕기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런 건 뿌르조아의 호사스런 고통 - 호강스런 센티멘탈이겠지.”
병화는 또 비꼰다.
“자네같은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선 우리 집안 - 삼대가 사는 우리 집안 속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걸세······”
“그러니까 자네 할아버지나 아버지께 타협할 수도 있듯이 나더러도 타협 타협하네그려? 그야 상속받을 것도 있으니까”하고 병화는 또 시달려 준다.
동지애에 ‘이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김병화의 단일한 시각과 타협을 강조하는 덕기의 시각이 대립되어 있다. 이처럼 인물이 단순히 대립을 이룬다면 그것은 성격의 경직성을 드러내는 외에 달리 소설적인 기능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덕기의 고민을 ‘부르조아의 호사스런 고통’이라든지 ‘호강스런 센티멘탈’로 비꼬는 데서 관점이 복합적인 것이 된다. 또한 타협의 조건을 ‘상속’에 연관시킴으로써 단순한 대립이 복합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즉, 김병화 - 덕기 편에서는 타인 - 의 시각으로 조덕기의 행위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념으로 돈을 평가하는 시각을 담론의 구조 속에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물의 성격과 담론의 양상은 대응관계에 놓인다. 단순한 성격의 단일언어성과 그것에 대한 비판의 역할을 하는 복합성의 담론은 인물의 또다른 성격을 드러내 준다. 이처럼 인물의 성격과 담론의 양상은 상관성을 지니는 것이고 이는 소설의 리얼리티를 언어예술의 측면에서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Ⅵ. 사상과 담론의 양상
文學에서 思想을 논하는 경우, 특히 소설의 경우에는 사상이 소설의 텍스트밖에 다로 존재하는 것처럼 논의되곤 한다. 이는 소설이 산문으로 쓰여진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소설을 사상전달의 媒介體로 보아 예술적인 속성을 몰각하게 하는 결과를 빚기 쉽다. 소설은 사상의 해설서도 아니고 인생의 지침을 주기 위한 교과서도 아니다. 소설은 장르적인 성격상 사회, 역사, 철학과 밀착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소설이 半藝術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적인 자율성을 지니지 않는 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사상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에 문제로 제기된다.
소설에서 사상은 주인공의 이미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관념 자체’가 아니라 ‘관념의 인간’이다. “주인공의 이미지는 관념의 이미지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고 관념의 이미지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관념 속에서 그리고 관념을 통하여 주인공을 보고, 주인공 속에서 그리고 주인공을 통하여 관념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사상)은 談論의 형식을 통해 드러난다.
<삼대>에서는 조의관과 그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변조를 보이는 덕기의 사상과, 김병화, 피혁 등과 연결되는 장훈의 사상이 대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의관의 사상은 ‘평생의 오입 몇 가지로’로 집약된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인용한 바와 마찬가지로 ‘사당과 금고’를 지키는 일이다. 족보 있는 집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家産을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식민지 한국의 특수성과 결부된 근대의 면모이다. 단지 자유경쟁에 의한 자본의 축적과 그 자본을 지켜나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家族主義를 수용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대리만족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서울 중산층 보수주의로 규정하는 논지는 여러 차례 거듭된 바 있다.
앞에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중산층 보수주의가 작가의 서술로 되어 있으며, 작가가 맨얼굴을 드러내면서 직접 개입하는 談論形態를 띤다는 것은 음미를 요하는 사항이다. 조의관은 아들 조상훈을 건너뛰어 손자 덕기에게 가산을 물려주려 한다. 그러할 무렵 덕기의 진학이 문제된다. 덕기가 부친 조상훈의 곁에 있어야 종교가로서 돈에 대한 관심을 덜 갖고 아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선 조상훈의 태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談論의 차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덕기를 꼭 붙들어 앉혀서 수원집이나 기타 일문 일족의 간섭이나 농간을 막게 하고 한편으로는 덕기를 자기 손에 쥐고 조종해 나가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고 생각한 것이요 도 그러자면 아무리 부자간이라 하여도 지금까지와는 태도를 고치어서 비위를 맞추어 주고 살살 달래고 벗으러져 나가지 않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부자간도 서로 이용하고 서로 이해타산으로 살아 나가는 것쯤 된다. 돈 - 그 돈도 아직 손에 들어온 돈은 아니나 돈 앞에는 아들에게도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돈을 媒介로 한 간접화된 가치가 부자간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어떻게 훼손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예라 한다면 이는 단순한 파악이다. 가치의 間接化가 왜 단일한 시각으로 그리고 전지적인 서술로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바흐찐의 지적대로 이러한 형태의 담론에서 작가의 말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작가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작가의 사상과 작중인물의 世界觀이 일원적으로 통합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전지적인 서술로 말하는 내용이나 작중인물의 의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사상)이 어떠한 양태의 談論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와 다른 하나의 사상은 김병화, 피혁 등의 사상과 연계되는 장훈의 그것이다. 장훈이 코카인을 먹고 죽음에 임박하여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獨白形式의 언어 속에 그러한 사상의 한 면을 보게 된다.
- 지금 죽어? 그러나 그 뒤에는? ······
이런 생각을 하다가 못생긴 생각도 한다고 혼자 나무랐다. 쓸데 없는 당면한 일은 생각이 안 나고 쓸데 없는 죽음 뒤의 일을 무엇하자고 생각하는가 하고 혼자 화를 버럭 내었다.
- 내가 지금 죽기로 비겁하다고 치소를 받을 리는 없는 일이다.
고 또 다시 생각하였다.
- 당장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죽은 것은 아니다. 몇 십 명의 숨은 동지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들 개인이나 그들의 가족을 고통과 불행에서 건져 주려는 따위의 희생적 정신이란 것은 미안하나마 내게 없다. 나는 다만 조그만 시험관 하나를 주검으로 지킬 따름이나 그 시험관은 자기네 일의 결정적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요, 지금 이 시각도 몇몇 우수한 과학적 두뇌를 가진 동지들이 머리를 싸매고 모여앉아서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 연구와 시험도 미구 불원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이것을 주검으로 지켜 주는 것이 지금 와서는 나의 맡은 책임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 주검은 값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관의 결과를 못 보는 것만은 천추의 유한이다. 하지만 그 역시 내 눈으로 보자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벌써 각오하였던 것이 아닌가······
위의 인용은 죽음을 앞둔 사회주의자 장훈의 독백이다. 독백이란 점에서는 객체화된 단일시각의 언어이다. 달리 말하자면 언어의 絶對性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상대화되는 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남의 평가 ‘비겁하다고 치소를 받을 리는 없다’는 데서 가능해진다. 또한 자신의 죽음을 역사의 시험관을 지키는 의미로 해석하는 데서는 철학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이란 의미를 띤다는 점에서는 절대성의 언어이다. 이념분자의 지향은 상대적인 價値觀에 의존하는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절대성의 언어가 소설 <三代>안에서 상대적·다성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돈의 위력에 기대어 상대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다른 작중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의식을 작가의 윤리적·종교적 가정으로서 그리고 작품의 내용적 테마로 긍정한다고 새로운 유형의 소설구조가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는 지적은 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타인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 곧 새로운 小說構造의 창조일 수 없다는 것은 소설이 단지 소설내적인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小說外的인 텍스트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소설이 이루어진다는 점의 지적이다. 소설의 담론이 자율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소설외적인 요인의 영향을 수용하여 相關性을 띤다는 지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사상은 단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거나 작가의 주의나 주장일 수 없다. 소설의 思想은 담론의 형태 혹은 구조와 상관성을 띠면서 언어적으로 文體化되는 것이다.
Ⅶ. 소설의 담론구조와 그 해석
소설의 언어는 다른 장르의 언어와 달리 다양한 형태의 문체화로 이루어진 담론 체계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지향하는 것은 단일한 시각의 독백적인 대상의 파악이 아니라 대화적인 시각의 多聲的인 의미의 발굴이다. 이는 지향점의 하나일 따름이지 모든 소설이 그렇다거나 그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삼대>는 談論이 이중적인 목소리를 드러내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단일한 목소리에 의해 해설됨으로써 대화적인 속성이 제약을 받고 있다. 이러한 대화적인 성격을 장야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검토는 곧 언어 외적인 요인을 작품내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가 된다. 소설은 단순한 의미의 ‘언어의 構造體’일 수 없다는 데서 소설내적인 텍스트와 소설외적인 텍스트의 상호작용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를 다른 말로는 텍스트상호성(intertextuality)이라 한다. 식민지 한국의 근대성이 어떠한 양상의 것이었는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의 구조 혹은 집단의식이 검토되어야 한다. 당시의 가능의식이란 측면에서는 이념분자들의 談論構造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소설의 언어를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은 언어학의 범위를 뛰어넘는 일이다. 그것은 M. 바흐찐이 말하는 사회언어학 혹은 메타언어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학(소설)을 대상적인 존재로 놔두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주체로서의 인간이 능동적으로 텍스트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배제된 문학은 물격화를 면키 어렵다. 문학이 비인간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방식의 하나는 문학의 存在樣態와 거기 사용되는 언어의 양상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언어, 인간의 기호론적인 실천의 국면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탐구는 소설의 내적 조건인 담론의 양상과 외적 조건인 사회를 統合的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것은 바흐찐의 지적대로 “추상적인 형식주의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주의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은 언어 속에서 하나가 되므로, 언어는 사회적인 현상, 언어적 살의 모든 영역들과 모든 계기들 속에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 음성의 형상으로부터 형상이 지닌 의미의 가장 抽象的 계층들에 이르기까지 - 이해된다.
소설을 談論 次元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담론의 통시적인 구조에 대한 고려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소설의 다른 요소들 인물, 敍事構造, 시공간 등과 맺는 관계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토속어의 의미기능도 차원을 달리 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언어학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언어학과 문학이 만나는 가능성의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장을 최종적 대상으로 하는 言語學의 영역이 개방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시도해 본 연구는 소설의 일반적인 패러다임에 적합한 방법론인가 하는 데 대한 검토가 있어야 그 의미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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