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염상섭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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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의 작품 세계
 한국 산문문학의 정화

 

 

한국에 있어서의 신문학의 성격 내지 틀질은 근대사상의 바탕을둔 개화사상과 세기말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가 염 상섭의 문학이나 그 생활을 이해하려는 데 잇어서도 당시 근대사회의 특수성과 일반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특히 실중·비판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전체성과 생리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부분성을 반드시 삼안하면서 문학사적인 관점으로 작품이나 생활을 살펴야 한다. 상섭 문학이 우리의 전통 산문을 계승하고 이를 발전시킨 문학의 정화 라고 볼 때 더욱 그렇다.

서구의 근대 리얼리즘을 자기 문학의 바탕으로 받아들인 상섭은 출발에서부터 자기 문학의 사명감과 한계점을 확실히 했다. '나의 문학은 한국 문학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밑거름이 돼야 한다'   는 이념 밑에서 생성된 그의 문학은 틀림없이 우리 문학의 밑돌이 되어 준 것이다.

 상섭은 가공적인 인위성을 거부하고 사회나 인간을 그 모습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복잡한 현실을 미화하거나 호도하려 하지 않고 이를 사회적 진실감으로 받아들여 형상화하기에 전심했다. 인간의 고뇌를 값진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갈등의 사회를 질서화하려 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섭은 갈등과 고뇌의 생태를 거짓없이 파악하여 정직히 기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섭의 작가적 태도는 근대사회의 주류며 핵심적인 문제들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었고, 자기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소화 시킬 수 있었다. 상섭은 근대 사회의 특성을 도시에서 발견했고, 생활의 바탕을 개인에게 두었다. 근대 사회의 주역들을 소시민이었다. 그들은 기호늬 인격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섭의 소설은 이들의 생활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밀감을 준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상섭은 인생과 사회를 종합적인고 전면적인 입장에서 관찰했고, 사회성 위에서 기록했다. 그의 문학이 폭넓은 근대 문학적 특성을 내포한 리얼리즘 성(性) 근대 도시 문학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섭 문학은 전형적인 사회성 문학이 되었고, 풍자적 전통성을 내포한 민족 문학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게 되었다. 이 근대성 리얼리즘 문학의 가능성이야말로 그의 문체와 함께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충분한 힘이 되어 주고 있다. 그 문체적 특징은 정통 산문의 계승을 가능케 했고, 기록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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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섭은 우리의 근대 문학과 삶을 같이한 작가다. 그는 성실한 소시민이었으며 신념의 근대 지성인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의 성격은 내성적인 동시에 이론적이며 현실적이었다. 꼬장꼬장했고 주도면밀했으며 자율성을 그 바탕으로 한 주체적 심상의 소유자였다. 가난과 비탄 속에서도 신념대로 살면서 현실에 참여했고, 불의에 단호히 저항했다. 야적(野的) 생활, 바로 그것이었다. 술과 붓, 원고지와 더불어 줄곧 서울에서 살다 간 그의 육십 평생은 철저한 휴머니스트의 자세였으며 도시 소시민으로서의 서민 생활이었다.

상섭의 본명은 상섭(尙燮)이었고 그의 필명(筆名)은 상섭(想涉)이었으며 자(字)는 주상(周相), 호(號)는 횡보(橫步)였다. 주로 상섭(想涉)으로 행세했다.

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필운대와  야조현 중턱에 있는 고가였으나 소격동 종친 부옥에서 자랐다. 그는 나라의 비운을 똑똑히 목도하면서 성장했다. 고종이 양위조서를 발표하던 날 전조(銓曹)에서 울려퍼지던 총소리도 들었고, 민  충정공의 자결에 의분하며 '피가 흘러 대가 되고……'로 시작되는 추도가도 형님들을 따라 불렀으며, 의병들의 붉은 깃발도 어린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것이다. 이는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에 겪은 비통이었다. 상섭은 조부 인식의 앞에 꿇어앉아 댕기를 늘어뜨리고 《동몽선습》을 외고 있었으며 머리가 늘 개운치 못한 침통한 아이였다. 그는 생래의 근시였던 것이다.

상섭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이듬해(1907) 수송동에 있던 관립(官立)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로부터 시작한 학창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소학교를 두 번이나 옮기었고, 중학교에 네 번이나 전학해야 했으며, 대학은 예과에서 중퇴해야 했으니 말이다. 일찍이 그에게 싹튼 반일 감정은 그의 생활을 역경으로 몰고 갔고, 생활의 곤궁은 우울한 성격을 조성시키면서 반항적인 기질만 키워 갔다. 이 첫 행동이 관립 학교의 등교 거부였다. 보성 소·중학교에서의 손 병희, 최 린, 엄 주관 선생들의 가르침은 그를 민족·애국 사상에 투철한 항일 청년이 되게 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지식에 목말라 했던 상섭은 일본으로 건너갈 결심을 했다.

상섭이 일본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1911,9,10) 공교롭게도 메이지 천황의 장례일이었다. 일본말을 전혀 배우기를 거부했던 반일 청년 상섭은 현해탄을 건너면서부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다음해 봄에야 사사부중학에 전입했으나 학자금의 곤란으로 계속 전전하면서 세이가쿠인 , 쿄오토부립 제이중학을 거쳐 1917년 봄에는 케이오대학 사학과를 지망하고 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학창생활은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외롭고 고생스런 역경의 시절이기는 했으나 폭넓게 독서할 수 있었고, 객지의 생활에서 고향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은 비록 체계적이고 알찬 것은 못 되었다 하더라고 전체에 자기를 발견할 구 있었고 앞으로 생활에 보탬이 되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고색창연한 쿄오토에서의 중학 생활은 문학에 눈을 뜨게 했고, 옛것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게 했다. 한편 저들을 알면 알수록 우리 것을 찾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 갔으니 태어난 서울과 자라난 쿄오토는 잊을 수 없는 그의 마음의 고향인 동시에 생활의 바탕이 되었다.

상섭은 오오사카에서 3.1만세를 맞게 되었다. 그는 텐노오지 공원에서 시위를 하다가(1919.3.6) 체포되어 감옥 생활도 오륙 개월했다. 쓰루가에서는 첫 신문기자 생활도 했고, 요코하마에서는 인쇄 직공 생활도 했다. 고생스런 일본에서의 학창생활을 청산한 상섭은 귀국(1920.1) 하여 동아일보 창간 멤버가 되어 정경부 기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대학은 중퇴한 채 청년 상섭은 실제 사뢰인으로 직업 전선에 나선 것이다. 그 후 상섭은 오산학교 교사,《동명》지 편집, 시대일보 사회부장직을 전전하면서 문예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동인지《폐허이후》도 편집했으며 소설도 열 대여섯 편이나 썼으니  이제는 당당한 문이 명사가 된 셈이요, 중견 신문인으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이에 상섭은 야심을 품고 일본에 다시 건너갈 결심을 했다. 1926년 1월의 그의 재도일은 중요한 뜻을 지니기는 하지만 별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실의에 빠져 야윈 몸으로 2년 만에 돌아온 상섭은 곧 결혼을 했다.(1929.5)그는 만혼이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상섭은 점차적으로 술도 덜하게 되고 직장에도 충실하게 되었다. 창작에도 전념하게 되니 1931년에는 대푶작 〈삼대〉를 집필하게 되었다. 그의 왕성한 창작력을 최대한 발휘한 시기도 이때로부터 사오년 사이다. 따라서 상섭 문학의 원류를 형성하는 3부작 〈삼대〉〈무화과〉〈백구〉가 이 때 형성된 것이다. 그가 1936년 만주로 떠나기까지 줄곧 붓을 놓지 않았고 신문 연재 장편 소설을 의무감을 갖고 썼던 생활과는 대조적으로 만주 신경·안동에서의 생활은 비록 유복하기는 했으나 절필을 했으니 이 십 년 동안 만이 그의 생애 중 문필과 단절된 시기였다.

광복과 더불어 귀국한 상섭은 다시 신문 편집일을 보게 되었다.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도와 공명을 모토로 시론을 펴는 한편 민족 문화 수립을 단호히 주창하며 문단 제일선에 나서면서 자기의 여생을 이 국가와 내 문학에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였으니 일제하에 보여 준 그의 투철한 항일 정신은 해방된 조국에서 철저한 반공 사상으로 바뀌면서 애국을 다짐했다. 6·25가 발발하자 상섭은 곧 해군에 들어가 전쟁에 참여했다. 노년기에 접어든 상섭에게는 군대 생활이 힘겨운 것이었으나 그가 수복 후 병고의 몸임에도 매일 칠팔 십 매의 원고를 쓰는 무서운 정력가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가 신념의 화신인 것을 가히 알만하다.

상섭은 만년에 네 부문의 떳떳한 상을 탔으니 이는 우리가 그에게 준 최대의 찬사였고, 그에게는영광이었다. 첫째 서울시 문화상, 둘째 자유문학상, 셋째 예술원 공로상, 넷째 3·1문화상, 이 밖에 1962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서훈 받았으나 와병 중이어서 나가지 못했다. 상섭은 1963 3월 14일 상오 9시, 성북동 자택에서 향년 67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병명은 직장암이었다. 그의 유택은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원에 마련되어 있다.

 

 

3

상섭은 500여 편의 글을 남겼다. 소설이 180여 편, 평론 100여 편, 수필 50여 편, 그 밖에 시 1편과 기타 잡문으로 되어 있다. 상섭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소설이지만 평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사실 상섭은 평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상섭은 1920년대 초에는 대표적인 평론가 이기도 했다. 그의 평론은 시대 정신이 투철했으며, 날카로운 관찰력과 비판력을 지녔기 때문에 논리가 정연했다. 당시 황무지였던 문학 이론에 특히 기여한 바 크다. 더욱 그의 프로 문학과의 대결시에 빚어졌던 논쟁에서의 민족 문학 이론은 논리가 정연하고 자시 주장이 분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삼은 물론 우리 문예 이론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상섭은 150여 편의 단편을 썼으나 그 본령은 장편 소설이었다. 그는 삼십여 편의 장편을 갖고 있다. 작가적 기질로나 작품적 기법으로 보아서는 상섭은 훌륭한 장편 소설가인 것이다. 상섭은 단편 소설은 상섭다운 스타일은 이루고 있지만, 단일한 인상에 단일한 구성과 주제란 입장에서 보면 그의 장편 소설 정도의 길이를 유지하고 있는 작품 수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는 그의 작가적 체질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초기의 상섭 문학은 이론과 실제가 병행하고 있었다. 이때의 작품은 사회와 개인의 적응 관계가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사회성이 강조된 나머지 작품적 기법이 소홀히 다뤄졌다. 그러나 미숙한 대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회 관찰을 중요시하는 사회성 문학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즉 암담하고 침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개인의 생활을 통하여 받아들였고 외래적인 요소를 체질화하거나 개성화하지는 못하였으나 개인의 적응관계를 충분히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섭의 일차적인 노력은 폭넓은 사회 관찰을 가능케 하였다. 너와 나의 개인적인 문제나 생활을 떠나 단체나 집단의 대립과 갈등을 문제 삼았고 개인의 고뇌를 통한 생활의 연구가 계속되면서 보다 심도 깊게 인간의 문제들을 작품에 부조시킬 수 있었다. 민족과 민족의 문제나 사회와 종교의 순수성 문제가 등장하고 계급과 계급의 마찰이 문제시되며 애욕과 윤리 문제가 다뤄지면서 상섭 문학은 명실공히 리얼리즘 문학으로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장편 소설들이다. 그 중에서도 〈삼대〉를 비롯한 1930년대의 장편과 광복 후에 〈취우〉를 비롯한 1950년대의 삼부 대하 장편 소설 군이다. 이들은 상섭 문학의 핵심적인 작품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 문학에서도  주류에 속하는 소설들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기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전성기의 작품들이라는 점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모을 충분한 이유를 지닌다.

상섭이 본격적으로 장편에 손을 대기 시작한 시기는 1927년 <사랑과 죄>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이다. 상섭의 대표작 <삼대>는 오늘날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다각적인 면에서 찾아지겠지만 그의 작가 정신이 유감 없이 발휘된 작품이라는 데 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탁월한 세계관이 아니라 자기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탁월하게 작품에 형상화하는 데 있다. 상섭이 그 보수적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폭넓게 식민지 시대의 현실을 깊은 통찰력으로 갈등의 핵심을 포착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세계를 보는 방식이 남보다 탁월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특히 테러리스트의 묘사는 한국 소설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정평이다. 작자는 또한 정통적 생활 양식을 통하여 민족적 긍지를 보이는 데 성공하였으니 자기화한 외래적인 요소는 모방적 흔적을 좀처럼 발견할 수 없게 했다. <만세전>이나 <삼대>의 문장의 특성은 작가 특유의 지루함 속에 숨어 있는 부정·비판 정신의 표현 양식이었다.

<삼대>는 작가의 심모 원대(深謀遠大)한 계획 아래 씌여진 연속체적 대장편 소설로 상섭 문학의 대동맥이며 요체가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실상 삼부작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제 1 부가 <삼대>이고 제 2 부는 상섭 소설에서 최장편인 <무화과>이며 제 3부는 <백구>라는 소설이다 .이 세 작품은 계속해서(1931.1∼1933.3) 집필되었으며 모두 신문 연재 소설이다. <삼대>에는 조(祖)·부(父)·자(子)의 세대가 공존하면서 각기 다른 정신 체계를 보여 주고 있기는 하지만 중심세대는 할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유교 사상 체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 따라서 개화·개량주의자 아들의 세계는 빛을 못 보고 파멸해 이르는 과도기 체계 내지 역사적 공간에 끼어든 희생 세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정신 상태, 여기서 이미 비극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 의관의 임종과 함께 <삼대>는 끝을 내고 작자는 제 2 부인 <무화과>에서 덕기의 세대를 현실감 있게 펼치려 했고 제 3 부인 <백구>에서는 세삼 세대를 이상의 세계로 상징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조 의관의 임종과 함께 구시대는 물러가고 그의 아들 조 상훈의 개화시대란 교량적 세대를 거쳐 손자인 조 덕기에 이르러 그 집념어린 조 의관의 자산은 파산에 이르고 만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청산의 세대에서 성장의 세대로 <무화과>의 자기 파탄의 세대를 거쳐 이상의 세대인 <백구>에 도달해 보자는 작자의 깊은 통찰력과 왕성한 상상력을 유리는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상섭의 세대인 덕기 대(代)가 불안·초조·방황의 현실 세계로 상징되고, <백구>의 박영식 세대가 이상 세계로 나타나면서 영광·평화·사랑의 세계로 상징화된 것은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공감력을 갖게 한다. 그 이상계는 사랑의 광장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보다 사랑이 강조된 일은 없다. 이것은 상섭의 이상계가 사랑으로 장식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삼대> 군의 삼부작이 일제 시대의 사회상을 구현한 상섭의 대표작이라면 <취우> 군의 삼부작은 해방에서 6·25동란, 그리고 그 후의 우리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상섭 문학의 진수라 할 것이다. 여기서도 그 작품 관계를 좀 살펴보면 <취우>의 전편인 <난류>는 해방 직후의 혼란한 사회가 리얼하게 주체성 있게 묘사되어 있고, <취우><새울림>에서는 공산치하에서의 공포스런 서울 피신 생활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면서 부산 피난살이가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생활로 그려지고 있다. 그 속편 <비평선>은 중단되기는 했으나 건설도상의 전후 생활을 보이면서 반공 이념을 강조하고 문란해 가는 윤리 문제에 보다 역점을 두었다.

상섭 소설에서도 인간의 남녀 애증 문제를 중점적으로 취급한 일련의 장·단편 소설들이 있으나 모두 부부애를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도 인물의 성격 중심의 갈등을 정치(精緻)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복잡하고 골머리 아픈 삶으로 그 주축을 삼고 있다. 따라서 화려하고 달콤한 공상의 세계가 배제된 비사건 중심의 연애 소설이 되고 만 것이다. '재미있다'는 소설의 영역에서 벗어난 상섭의 연애 소설은 또한 독자들과는 거리가 멀어진 소설이 되고 말았다.

상섭 소설에 등장하는 작중 인물은 크게 삼분시킬 수 있으니 첫째 긍정적 인물, 둘째 부정적 인물, 셋째 구시대 인물 등이 그것이다. 긍정적 인물의 전형성은 울분·고뇌·조화로 표현되는데 당시의 청년 기질을 대표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형태가 있으니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사회주의 운동에 동조하고 과거의 인습을 참연히 파기하여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관찰하지만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못하는 사유형과, 가난과 박해 속에서도 시대와 사회의 주류를 따라서 이상을 펴보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인 행동형이 그것이다. 부정적인 인물들은 작자의 저항감을 대변하고 있는데 그 첫째가 일제의 지배 세력에 대하여 거부적 자세를 취한다는 점이다. 그 예로 일본 경찰에 대한 활동이 사건마다 끼어 들고 일인들의 악랄하고 간악한 성격이 기회 있을 적마다 암시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는 친일파군에 대한 심한 조소와 매도이다. 셋째는 경박한 신여성들에 대한 경멸감이 유감 없이 노출되는 데서 감지할 수 있다. 구 시대의 인물군은 정산적(精算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모두 자연사-병사하고 말게 된다. 그 삶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겠다는 뜻일 게다.

상섭 소설은 시간성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동일한 구성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현재성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묘사되고 미래가 배제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인물의 성격이 개성적이며 전형적으로 부조되도록 발단·전개·절정·대단원이 산만·복잡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배경적 분위기를 항상 근대 도시의 특성이나 나타내듯이 '움직임'으로 파악되어져 있고 밤과 낮의 의미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것도 그의 암시적 구성법에 의하여 교묘하게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상섭만큼 기교가 바위처럼 생리화되어 있는 작가도 드물다고 하겠다. 그의 기교는 몰아적 객관성에 있다. 육체적으로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섬세하고 면밀한 신경과 성실한 눈은 다른 작가에서 볼 수 없는 그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상섭 문학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들이 지적하는 상섭 소설의 약점은 첫째 주제의 빈곤성, 둘째 구성이 버성기고 산만하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셋째 지루하고 난삽한 문장 때문에 읽혀지지가 않으며, 넷째 작중 인물은 정열이 없고 이지적이어서 공감력이 약하다. 다섯째 소재의 빈약성, 여섯째 문학에 대한 자세가 고루하며 문체는 만연체의 전형이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에 비해 상섭 문학을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첫째 산문 정신에 투철한 관찰과 비판, 둘째  한 시대의 전형을 창조하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으며, 셋째 무기교의 기교적인 문학, 넷째 확고한 신념의 작가. 다섯째 자기 문체의 형성-완전한 산문 묘사체, 여섯째 풍부한 어휘와 자기 사회 언어의 완벽한 재생이라고 맞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섭 문학이나 생활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첫째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 둘째 민족 문학, 셋째 사실주의 문학, 넷째 현실주의 문학, 다섯째 절충주의 문학, 여섯째 사회성 도시문학 등으로 불리어 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요즈음 가장 강력한 주장은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이라는 견해이다. 이에 따라 종래 자연주의라는 견해는 수정되기 시작했고 상섭 문학 속의 자연주의적인 속성의 약점이 강조·지적되었다. 그 예로 과학 정신의 결여가 지적되면서 사회성이 강조되어 상섭 문학은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정통이란 정의로 낙착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생활에 있어서의 첫째 보수주의자, 둘째 점진적 개량주의자. 셋째 소시민적 서민 넷째 휴머니스트, 다섯째 민족주의자, 여섯째 철저한 개인주의자·자유주의자, 일곱째 항일·반공주의자 등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모든 항목이 다 일단의 긍정점을 지니고 있으니 이의 총화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다시 상섭 문학에 대한 극단덕인 긍정적 태도와 극단적인 부정적 태도를 들어 참고에 긍하고자 한다.

상섭은 한국 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소설가였고 그 문학은 한국 산문 문학의 정통이며 저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이다. 한국적인 여러 상황 속에서 자기가 선택한 몇 개의 전형을 통해서 당시 한국 사회가 부딪고 있는 정신사적, 문화사적 변화의 중요한 측면을 관찰함으로써 한국 소설의 새로운 전통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긍정론의 이론에 기우는 평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김치수·김현·김병익 등을 들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부정적 이론을 제공하는 편에 서는 이는 이어녕·김우종·윤병로 등을 일단 지적할 수 있다. 그 중 이 어녕의 발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상섭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구상적인 면밖에 더듬을 수 없는 촉각에 의하여 감득된 부분의 내용이다. 시류적인 영상을 단순한 풍경으로만 응시하고 거기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역할만을 연구하고 분석하기 때문에 리얼리티의 밀도가 너무나 희박하다. 30∼40년의 틀을 가지고 자꾸 찍어만 내는 국화빵 같은 소설이다.'

라고 비난한 바 있으며 또 상섭의 몰과학성을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한 장면에서 꼬집은 적도 있다.

 


4

먼저 독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만세전>과 <삼대>의 상관 관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삼대>의 폭넓은 세계는 <만세전>에서 그가 직감적으로 파악한 한국 현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세전>에서 되풀이 강조되는 것은 식민지 치하의 한국 현실은 생성이 금지되고 변모만이 행해지는 무덤과 같다는 인식이다. <삼대>는 그러한 무덤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며, 토해진 울분을 심화시켜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본다. <삼대>의 소설로써의 흥미는 각 세대의 반응에 있다. 그것도 한 가족사를 통해서 말해지고 있어 현실에 굳게 뿌리박고 있음을 본다.

<만세전>의 원제는 <묘지(墓地)>였다. 이 작품은 일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작자의 객관적인 사회 관찰을 통하여 부조리한 식민지하의 현실과 지식인의 울분을 유감없이 그려낸 작품으로 전근대사회의 참모습을 비판적으로 축도(縮圖)하면서 일제의 악랄한 침략적 음모와 유교 사상에 젖은 불합리한 가족제도와 비뚤어진 사고 방식을 올곧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사유가 극(極)한 일본 유학생으로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학기말 시험도 뒤로 미룬 채 덤덤한 기분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이 귀국길에서 겪는 '나'의 생활 체험을 작자는 관찰력 있게 기록하고 있다. 침식당하는 조국의 숨막힐 만큼 어둡고 딱한 현실에 울분하기도 하여, 저항감을 가져 보기도 하나 '나'는 조국의 현실 상황을 결국 공동 묘지로 인식하고 만다. '구더기가 들끓는 묘지!' 이것이 그 당시의 전기적(傳奇的)인 기초 위에 세워진 기행적(紀行的) 사실이지만, 배경적  분위기는 시대성이 잘 노정되게끔 설정되어 있어서 모질게 몰아치는 바람과 서울의 겨울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식민지하의 서울은 차고 냉연하고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 <만세전>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함께 초기의 상섭 작품 세계를 명실공히 대표하고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상섭의 처녀작은 아니다. 이전에 그는 <암야(闇夜))>란 단편을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암야>는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표본실의 청개구리>보다 늦게 활자화되었다. 그리고 상섭이 처음 문학 활동을 하기는 1919년 3월부터이니 《삼광(三光)》을 통한 비평 활동이 그것이다. 당시의 비평문은 주로 김환, 황석우, 유지영 등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고, 자성적 수상이 중심이었으나 관심 있던 문제들은 사회 제반에 나타난 정치 문화의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비평 활동은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면서 정지되고 소설 쪽으로 그의 붓은 기울기 시작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우리 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작품이라고 지칭당하면서 일약 유명해졌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결점을 지적당하여 그 가치를 덜고 있다. 비과학성에 구성마저 산만하고 어사(語辭)가 구투이며 인물의 성격 형성이 미숙하고 '나'와 광인 '김창억'과 의 관계가 모호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한 자세에서 해부하고 진열하려는 의도만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른바 현실고를 반영한 최초의 작품으로서 현실의 병적인 암흑면을 예리한 이성의 눈으로 더듬어간 작품으로 상섭 문학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는 소설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해방 직후의 혼란의 와중을 배경으로 한 <해방의 아들>의 원제목은 <첫걸음>이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해방 후 첫 작품인 이 소설에서도 상섭의 동포애와 휴머니티를 볼 수 있다. 친일파 조준식에 대한 끊임없는 설득과 애련성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저지른 잘못을 한없이 후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우리의 처지가 이 작품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일제 사회와 해방 사회를 맥락지어 주는 교량적 역할도 되지만 눈물겨운 감격이 오히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한편 해방 직후의 혼란 사회를 통하여 변모되어 가는 두 여인상을 부조한 <두 파산>은 정신적인 파산자 '김옥임'과 물질적인 파산자 '정례 모(母)'를 놓고 작자는 우리 사회의 배금사상을 풍자하고 있다.

6·25 사변이 훑고 간 흔적-전쟁을 치른 우리 사회는 윤리면에서 크게 병들기 시작했다. 애정 윤리는 무질서·퇴폐화했고, 부패·부정 그리고 사기와 난투는 퇴영적인 사회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뜻있는 이는 절망과 개탄에 빠져 지쳐 있었다. <절곡(絶穀)>에서 보여 주는 '영탁 영감'의 단식 투쟁도 일종의 이와 같은 안간힘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와 가정에 대하여 극단적인 질시가 낳은 인간의 최후 통첩의 형식이 바로 이 <절곡>의 상황인 것이다. <얼룩진 시대 풍경>에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극한 상황에서의 애정이 그래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만, 고부간의 갈등 속에서 처참히 희생당하는 준식과 아이들이나, <절곡>의 상황에서 죽어가는 딸과 속수무책인 마님의 위력과 며느리의 안타까움은 정말 우리 사회가 낳은 모순이며 그 모순 속에 희생당하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상섭의 말년의 관심의 대상은 인간들이 극한 상황-윤리·정치·경제·사상면-에서 어떻게 더 이상 인간다움을 지탱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인간성의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취급한 부부애와 성윤리가 다 그렇다.

이렇게 보아올 때 상섭은 전형적인 산문가였고 부정정신에 바탕을 둔 야적 인간이었으며, 평범한 도시의 생활인이기도 했다. 상섭 문학은 여태까지의 긍정적 문학을 파기하고 부정적 문학·야적 문학을 형성한 데 그 의의가 있으며 전통성을 계승하고 외래적 요소를 수용하여 개성화한 자기 문학을 보임으로써 한국적 근대 리얼리즘 문학을 형성하고 도시성 사회 문학을 이루는 동시에 반동적으로 자기 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한국 기록 문학의 신기원을 보일 수 있었다. 개성적인 관찰을 통하여서는 전통적 문체를 이어받아 자기적인 문체를 형성했는데, 이는 그의 문학적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이 문체로 말미암아 그의 기교도 돋보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상섭 문학은 국문학상으로 전대의 야적 기록 문학을 이어받은 정통 산문 문학이며 그 정화이자, 부정적 사회관으로 일제에 저항한 민족 문학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섭 문학은 국문학상에서 긍정 문학으리 부정 문학으로 변질시켰고, 여적문학에서 야적 문학으로 본래의 문학 정신으로 한국 문학을 돌림으로써 한국 근대 문학의 특징을 지음으로써 그 문학적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상섭은 훌륭한 관찰자로 남는 동시에 한국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대열에 낄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문학은 그와 함께 우리 근대 문학의 바탕이 되고, 토대가 되어 찬란한 내일의 한국 문학을 낳게 될 밑거름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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