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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함양박씨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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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함양박씨전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열녀는 두 사내를 섬기지 않는다."

고 하였다. 이는 <시경>의 '백주'편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국대전에서는 '다시 시집 간 여자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고 하였다. 이 법을 어찌 저 모든 평민들을 위해서 만들었겠는가? (이 법은 벼슬을 하려는 양반들에게만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시작된 이래 4백년 동안 백성들은 오래오래 교화(敎化)에 젖어 버렸다. 그래서 여자들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집안의 높낮음도 가리지 않으면서, 절개를 지키지 않는 과부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드디어 풍속이 되었으니, 옛날 이른바 '열녀'가 이제는 과부에게 있게 되었다.

밭집의 젊은 아낙네나 뒷골목의 청상과부들을 부모가 억지로 다시 시집 보내려는 것도 아니고 자손의 벼슬길이 막히는 것도 아니건만, 그들은 "과부의 몸을 지키며 늙어 가는 것만으로는 수절했다고 말할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광명한 햇빛을 스스로 꺼버리고 남편을 따라 저승길 걷기를 바란다. 불·물에 몸을 던지거나 독주를 마시며 끈으로 목을 졸라매면서도 마치 극락이라도 밟는 것처럼 여긴다. 그들이 열렬하기는 열렬하지만 어찌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겠는가?

옛날 어떤 형제가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어는 사람의 벼슬길을 막으려고 하면서 그 어머니에게 의논드렸다. 그 어머니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그의 벼슬길을 막느냐?"

하고 묻자 그 아들이,

"그의 선조에 과부가 있었는데 바깥 여론이 몹시 시끄럽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규방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아들이

"풍문(風聞)으로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말하였다.

"바람은 소리만 나지 형태가 없다. 눈으로 살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아도 얻을 수가 없다. 공중에서 일어나 만물을 흔들리게 하니 어찌 이따위 형편없는 일을 가지고 남을 흔들리게 한단 말이냐? 게다가 너희들도 과부의 자식이니, 과부의 지식으로서 어찌 과부를 논할 수 있겠느냐?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게 있다."

어머니가 품속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보이면서 물었다.

" 이 돈에 윤곽이 있느냐? "

"없습니다"

"그럼 글자는 있느냐?"

"글자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게 바로 네 어미가 죽음을 참게 한 부적이다. 내가 이 돈을 십 년 동안이나 문질러서 다 닳아 없어진 거다.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정욕은 혈기에 심어졌으며 사상은 고독에서 살며 슬픔도 지극하단다. 그런데 혈기는 때를 따라 왕성한 즉 어찌 과부라고 해서 정욕이 없겠느냐?

가물가물한 등잔불이 내 그림자를 조문하는 것처럼 고독한 밤에는 새벽도 더디 오더구나. 처마 끝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질 때나 창가에 비치는 달이 흰빛을 흘리는 밤 나뭇잎 하나가 뜰에 흩날릴 때나 외기러기가 먼 하늘에서 우는 밤, 멀리서 닭 우는 소리도 없고 어린 종년은 코를 깊이 고는 밤, 가물가물 졸음도 오지 않는 그런 깊은 밤에 내가 누구에게 고충을 하소연하겠느냐? 내가 그때마다 이 동전을 꺼내어 굴리기 시작했단다.

방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둥근 놈이 잘 달리다가도, 모퉁이를 만나면 그만 멈추었지. 그러면 내가 이놈을 찾아서 다시 굴렸는데, 밤마다 대여섯 번씩 굴리고 나면 하늘이 밝아지곤 했단다. 십 년 지나는 동안에 그 동전을 굴리는 숫자가 줄어들었고 다시 십 년 뒤에는 닷새 밤을 걸러 한 번 굴리게 되었지. 혈기가 이미 쇠약해진 뒤부터야 이 동전을 다시 굴리지 않게 되었단다. 그런 데도 이 동전을 열 겹이나 사서 이십 년 되는 오늘까지 간직한 까닭은 그 공을 잊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야. 가끔은 이 동전을 보면서 스스로 깨우치기도 한단다."

이 말을 마치면서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껴안고 울었다. 군자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야말로 '열녀'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였다. 아아 슬프다. 이처럼 괴롭게 절개를 지킨 과부들이 그 당시에 드러나지 않고 그 이름조차 인멸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어째서인가? 과부가 절개를 지키는 것은 온 나라 누구 나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 번 죽지 않고서는 과부의 집에서 뛰어난 절개가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안의(安義)고을을 다스리기 시작한 그 이듬해인 계축년(1793) 몇 월 며칠이었다. 밤이 장차 샐 즈음에 내가 어렴풋이 잠 깨어들으니 청사 앞에서 몇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드렸다. 그러다가 슬퍼 탄식하는 소리도 드렸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데도 내 잠을 깨울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제야 소리를 높여

"닭이 울었느냐?"

하고 물었더니.,곁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벌써 서너 번이나 울었습니다."

"바깥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통인(通引 : 심부름꾼) 박상효의 조카딸이 함양으로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되었습니다. 오늘 지아비의 삼년상이 끝나자 바로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 집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서 구해 달라고 하지만 상효가 오늘 숙직 당번이므로 황공해 하면서 맘대로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빨리 가보라'고 명령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함양 과부가 살아났느냐?"

고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묻자,

"벌써 죽었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서글프게 탄식하면서

"아아 열렬하구나. 이 사람이여. "

하고는 여러 아전들을 불러다 물었다.

"함양에 열녀가 났는데, 그가 본래는 안의 사람이라고 했지. 그 여자의 나이가 올해 몇 살이며 함양 누구의 집으로 시집을 갔었느냐? 어릴 때부터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너희들 가운데 잘 아는 사람이 있느냐?"

여러 아전들이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박씨의 집안은 대대로 이 고을 아전이었는데 그 아비의 이름은 상일(相一)이었습니다. 그가 일찍이 죽은 뒤로는 이 외동딸만 남았는데 그 어미도 또한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할아비. 할미의 손에서 자라났는데 효도를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열아홉이 되자 함양 임술증에게 시집와서 아내가 되었지요. 술증도 또한 대대로 함양의 아전이었는데 평소에 몸이 여위고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한 번 초례(醮禮)를 치르고 돌아간 지 반 년이 채 모 되어 죽었습니다. 박씨는 그 남편의 초상을 치르면서 예법대로 다하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에도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고을의 친척과 이웃들 가운데 그 어진 태도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정말 그 행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한 늙은 아전이 감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 여자가 시집가기 몇 달 전에 어는 사람이 말하길 '술증의 병이 골수에 들어 살 길이 없는데 어찌 혼인날을 물리지 않느냐'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할아비와 할미가 그 여자에게 가만히 알렸더니, 그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답니다. 혼인날이 다가와 색시의 집에서 사람을 보내어 술증을 보니 술증이 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폐병으로 기침을 했습니다. 마치 버섯이 서 있고 그림자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답니다.

색시 집에서 매우 두려워하며 다른 중매쟁이를 부르려 했더니, 그 여자가 얼굴빛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지난번에 바느질한 옷은 누구의 몸에 맞게 한 것이며 또 누구의 옷이라고 불렀지요? 저는 처음 바느질한 옷을 지키고 싶어요' 그 집에서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원래 잡았던 혼인날에 사위를 맞아들였습니다. 비는 비록 혼인을 했다지만 사실은 빈 옷을 지켰을 뿐이랍니다."

얼마 뒤에 함양 군수 윤광석이 밤중에 기이한 꿈을 꾸고 감격하여 '열부전'을 지었다. 산청 현감 이면제도 또한 그를 위하여 전을 지어주었다. 거창에 사는 신도향도 문장을 하는 선비였는데, 박씨를 위하여 그 절의(節義)를 서술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한결같았으니 어찌 스스로 "나처럼 나이 어린 과부가 세상에 오래 머문다면 길이길이 친척에게 동정이나 받을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망령된 생각을 면치 못할 테니, 빨리 이 몸이 없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랴?

아아, 슬프다. 그가 처음 상복을 입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장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고 장사를 끝낸 뒤에도 죽음을 참은 것은 소상(小祥)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상을 끝낸 뒤에도 죽음을 참은 것은 대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상도 다 끝나서 상기(喪期)를 마치자, 지아비가 죽은 것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 그 처음의 뜻을 이루었다. 어찌 열부가 아니랴?

요점 정리

연대 : 조선 정조

작자 : 박지원

형식 : 한문 소설, 단편 소설

성격 : 풍자적

주제 : 개가(改嫁) 금지의 반대

내용 연구

초례(醮禮) : 전통적으로 치르는 혼례식.

청상과부(靑孀寡婦) : 젊어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자. 상부(孀婦).

수절(守節) : ① 절의(節義)를 지킴. ② 정절을 지킴. 여기서는 ②임.

규방(閨房) :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

대상(大祥) : 사람이 죽은 지 두 돌만에 지내는 제사.

소상(小祥) :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이해와 감상

수필체의 한문소설로 내용(內容)은 봉건사회의 형식적인 도덕의 그릇됨을 폭로하고 과부의 위장된 절개를 비웃은 것으로 당시의 사회적 인습을 비판한 작품이다. 작가는 박씨가 젊은 과부로서 오래 이 세상에 머문다면 친척들의 연민을 받고 또 이웃 사람들의 망령된 생각도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상기가 끝날 때 기다려 지아비가 죽은 그날 그 시각에 죽음으로써 그 처음의 뜻을 이룬 점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작자가 이 글을 쓴 동기는 박씨의 열을 이 세상에 드러내가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함양 군수 윤광석 등 3명이 '박씨전'을 썼기 때문이다. 작가는 박씨와 같은 행위를 두고 열을 지키기에 얼마나 피눈물나는 극기가 필요한가를 그 반대의 경우를 들어 그 지나침을 풍자한 것이다.

개가를 금지(禁止)해서 평범한 여인들까지 자살(自殺)을 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일찍 과부가 된 한 여인이 깊은 고독과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동정을 굴리면서 아들 형제를 입신시킨 이야기를 삽화로 넣어 수절의 어려움을 밝히고, 이와 같은 어려움을 넘긴 이야말로 진정한 열녀라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박씨의 순절을 완곡히 비판하면서 그러한 행위가 만연하는 사회풍조, 나아가 과부의 개가를 금지시킨 사회제도에까지 비판이 확대되고 있는 이 작품은 삽화를 넣으면서 설명과 문답으로 간결하고 실감있게 표현한 작가 만년의 글이다.

심화 자료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조선 정조 때 박지원 ( 朴趾源 )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 ≪연암집 燕巖集≫ 연상각선본(烟湘閣選本)에 실려 있다. 작자가 안의현감(安義縣監)에 재직하던 때인 1793년(정조 17) 이후에 쓴 것으로 풍자성을 지닌 열전체(列傳體)의 변체(變體)이다.

통인 ( 通引 ) 박상효(朴相孝)의 조카딸인 박씨는 대대로 현리(縣吏)를 지낸 하차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릴 때부터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효도가 극진하였다. 19세에 함양의 아전 임술증(林述曾)에게 시집갔다. 술증이 본디 병이 있어 성례한 지 반년이 못 되어 죽었다.

박씨는 예를 다하여 초상을 치른 뒤에 며느리의 도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기다가 남편의 대상 ( 大祥 )날에 약을 먹고 죽었다. 박씨는 정혼한 뒤에 술증의 병이 깊음을 알았으나 성혼을 하였다. 초례를 치렀을 뿐 끝내 빈 옷만 지킨 셈이었다.

박지원은 박씨가 젊은 과부로서 오래 이 세상에 머문다면 친척들의 연민을 받고 또 이웃사람들의 망령된 생각도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상기(喪期)가 끝날 때를 기다려 지아비가 죽은 그날 그 시각에 죽음으로써 그 처음의 뜻을 이룬 점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이 글을 쓴 동기는 박씨의 열(烈)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 등 3명이 〈박씨전〉을 썼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박씨와 같은 행위를 두고 열을 지키기에 얼마나 피눈물나는 극기(克己)가 필요한가를 그 반대의 경우를 들어 그 지나침을 풍자한 것이다.

개가한 이의 자손을 정직(正職)에 서용하지 말라고 한 국전(國典)은 서민을 위하여 마련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귀천을 막론하고 과부로 절개를 지킴은 물론, 나아가 농가·위항(委巷 : 여염)의 여인들까지 더러더러 물불에 몸을 던지고 독약을 먹고 목을 매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박지원은 일찍 과부가 된 한 여인이 깊은 고독과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동전(銅錢)을 굴리면서 아들 형제를 입신시킨 이야기를 삽화로 넣어 수절의 어려움을 밝히있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넘긴 이야말로 진정한 열녀라 이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박씨의 순절을 완곡히 비판하면서 그러한 행위가 만연하는 사회풍조, 나아가 과부의 개가를 금지시킨 사회제도에까지 비판이 확대되고 있는 이 작품은, 삽화를 넣으면서 설명과 문답으로 간결하고 실감있게 표현하였다.

≪참고문헌≫ 燕巖集, 燕巖小說硏究(李家源, 乙酉文化社, 1965).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결혼 관련 자료

개가

출가한 여자가 이별 또는 망부(亡夫)로 인하여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일로 재가(再嫁) 또는 재초(再醮)라고도 한다. 재혼은 남녀 모두 자유였으나 고려 말에 주자학의 도입과 더불어 사대부(士大夫)집 과부의 수절이 강요되었고, 1477년(성종 8)에 이르러서 부녀자의 재가가 금지되었다. 이처럼 재혼에 있어 여자만을 문제삼은 것은 남자 중심의 유교적 도덕관에 의한 것이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재가금지제도는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렸지만, 개가를 기피하던 관습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혼인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 행위 또는 부부관계에 있는 상태로 혼인은 당사자의 성적 ·심리적 ·경제적인 결합을 뜻하는 중요한 행위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사회의 기초적 구성단위인 가정 ·가족을 형성하는 단서가 되며, 나아가서는 종족보존의 중요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가 어떤 형태로든지 혼인을 승인하고 이에 법적 규제를 하는데, 형태는 각 사회의 경제적 ·종교적 ·민족적 요소에 따라 다르다.

한국의 혼인제도의 역사적 형태를, 누구의 의사가 혼인성립의 요소가 되느냐에 따라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① 남자의 의사만으로 성립되는 혼인으로 약탈혼(掠奪婚)을 들 수 있다. 약탈혼은 한 종족이 부근의 타종족과 싸워 남자를 참살하고 여자를 약탈하여 처로 삼으므로, 여자나 그 부모의 의사는 무시되었다. 발해에 약탈혼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단지 혼인과정에서 여자를 훔쳐가는 형식을 취한 것이므로 엄격히 약탈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에는 처첩(妻妾)의 약탈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과부약탈의 습속이 있었지만, 이것은 발해의 혼속(婚俗)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과녀(寡女)재가금지제도 등에서 연유한 것이다.

② 여자의 부형(父兄)의 의사와 남자 또는 그의 부모의 의사에 의하여 성립되는 대낙혼(代諾婚)인 부권혼(父權婚)을 들 수 있다. 노역혼(勞役婚)·매매혼과 같은 유상혼(有償婚)과 증여혼(贈與婚) 등이 포함된다. 동옥저에서 매매혼의 혼속이 엿보이며, 유상혼과 유사한 혼속으로 예부혼(민며느리혼)과 예서혼(豫絳婚) 및 솔서혼(率絳婚) 등을 들 수 있다. 예부혼제도는 빈민계급에서 행하여져, 동옥저에서 연원한 듯하며 조선시대까지 전승되었다. 예서혼제도는 기록상으로는 고려시대부터이지만, 그 이전에도 예부혼과 같이 존재하였다. 주로 상류계급에서 행하여졌으며, 조선시대까지 전승되었다. 본래 예서혼은 봉사혼(노역혼)의 유풍이며, 예부혼은 매매혼의 유풍이다.

그러나 고려의 대원공녀정책(對元貢女政策)과 조선의 왕가간택(王家揀擇)에 따른 처녀금혼의 부산물인 듯하며, 일부 사람들에게만 행하여졌다. 데릴사위제도(솔서혼)는 고구려 때 발견할 수 있으며, 17세기경까지 보편적인 혼인형태였다. 솔서혼은 고대의 모권확립(母權確立)에 연유한 것이며, 빈곤한 자가 재물 대신 노동력을 제공함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권시대로 추이되는 고구려에 솔서혼이 있었던 것은 모권시대의 한 유풍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부권시대가 정착된 후, 일종의 봉사혼(노역혼)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솔서혼에는 가난한 남편이 여가(女家)에서 평생 노역에 종사하는 채노적(債奴的)인 경우와, 어느 기간만 이주하는 서류귀가혼(絳留歸家婚)의 형태가 있었다.

한국의 솔서혼속은 일부 무산계급에서는 채노적 성질을 띤 것이었으나 일반적으로 서류귀가혼이었으며, 이 혼속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한국 고유의 혼인습속이었다. 이 제도는 중국의 영향으로 1435년(세종 17)에 채택된 친영제도(親迎制度)와 절충되어, 처가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다음날이나 3일째에 신부를 부가(夫家)로 데려오는 반친영제(半親迎制)로 변하였다.

③ 당사자의 혼인의사의 합치로써 성립하는 쌍방행위적 혼인이며, 공낙혼(共諾婚)이라고도 한다. 남녀가 대등한 입장에서 혼인을 체결하는 현대문명국가의 혼인방식이다. 조선시대의 혼인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家)의 계속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사자의 의견보다 주혼자(主婚者)의 의견이 더욱 중요하였다. 이 관습은 조선 민사령에 의하여 일제강점기 초에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그 후 1917년 4월 조선 고등법원의 판결로써 당사자의 의사와 주혼자의 의사를 동렬에 놓았으며, 1923년 7월 신고혼주의(申告婚主義)의 채용으로 당사자 본인이 자기 의사로 신고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호주나 부모는 동의권자의 지위로 물러섰다.

그러나 혼인동의는 혼인당사자의 연령 여하를 불문하고 얻어야 하였으며, 이것은 민법 성립시까지 계속 법으로서 효력이 있었다. 이 제도는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과거에는 자녀가, 농지를 가진 부모의 부양을 받는 처지에 있었을 뿐 아니라, 어려서 혼인하였으므로 부모의 혼인동의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녀가 생계독립을 할 수 있을 때에 결혼하게 되고, 그렇게 되려면 연령도 상당히 많게 되므로, 부모도 옛날처럼 자녀의 혼인을 좌우할 수 없고 도리어 자녀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유럽의 개인주의사상은 혼인개념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래서 혼인은 가본위(家本位)에서 당사자본위로 바뀌었다.

인류학상

어느 사회에서나 남녀의 단순한 성적 결합과 혼인은 구별되며, 근대사회에서는 국가기관 ·교회 등에 등록함으로써 혼인의 법적 절차가 완료되고, 정식부부로서 공인받게 된다. 문자가 없었던 미개사회에서도 신랑이 신부의 값을 치르는 등, 결혼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방법이 있다. 개인은 결혼함으로써 새 가족을 형성하고 자손을 남기게 되므로 결혼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결혼과정

① 결혼 전의 성관계 : 아이들이 어른들의 생활을 일찍 아는 개방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성(性)에 흥미를 가지는 시기가 빠르다. 멜라네시아의 트로브리안드섬에서는 실제의 성생활이 남자 10∼12세, 여자 6∼8세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혼전교섭이 자유로운 사회의 처녀들은 그것을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하며, 임신이 신부로서의 가치를 감소시키는 사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자는 애인이 많을수록 매력적이라고 생각되는 데 반해, 여자는 결혼상대자로서 결격사유가 되는 경우가 많아 양친의 엄격한 감시를 받는다. 어느 쪽이든 혼전의 성관계는 배우자 선택의 시험적인 단계라 생각되며, 그것이 결혼으로 발전하는 일이 많다.

② 구애(求愛) 방법 : 예의를 무시해도 좋은 축제(祝祭) 등이 남녀교제를 촉진시키는 일이 있다. 고대 일본에서는 보름밤 축제 때 남녀가 자유로이 성교섭을 가질 수 있는 풍습이 있었고, 미크로네시아의 트럭섬에서는 남자가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처녀의 집에 가서 그것을 벽에 찔러 넣는다. 처녀는 막대기의 조각(彫刻)을 만져보고 누구인지를 알아 마음에 드는 상대이면 살며시 집을 나온다. 안데스의 인디오들은 남녀가 싸우듯이 상대방을 때리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깨물거나 하는데, 이 사랑싸움의 기간은 1∼3개월이나 계속된다고 하며, 그 후에 청혼하게 된다. 트로브리안드섬에서는 어린아이 때의 철없는 성의 장난이 차차 성장하여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마을에 몇 개의 젊은이 숙소가 있고, 그 곳에서 나이찬 몇 쌍의 남녀들이 밤을 지낸다. 그들은 상대편이 정해져 있고, 남의 정사(情事)를 엿보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③ 혼인의 성립 : 어떠한 경우에도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며, 한 쌍의 부부는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대의 가족이나 친척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여러 지역에서는 결혼의 절차로 남녀간에 재물을 교환한다. 성장한 여성은 그 가족의 훌륭한 노동력이므로 신부를 대가 없이 데려올 수 없다. 동아프리카의 소를 사육하는 누엘족은 현재는 소가 부족하여 대폭 감소되었으나, 전에는 신부 1인당 소 40마리로 정해져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다호메족은 결혼식 이튿날 아침에 신부가 처녀가 아님이 판명되면, 신부의 가족은 신부대가의 일부를 반환하는 풍습이 있다. 신부대가를 치르는 대신 신랑이 일정기간 신부 집에 살면서 일을 해주는 경우를, 노역혼(勞役婚) 또는 봉사혼(奉仕婚)이라 한다. 반대로 신부측이 지참금(持參金)을 가지고 가는 풍습은 유럽에서 널리 볼 수 있는데, 인도의 상층계급에서 특히 심하다.

④ 결혼식 : 결혼식은 종교적 ·의례적인 색채를 띠는 행사와 친척이나 마을사람들에게 베푸는 피로연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세계적 종교에 의하여 거행되는 것에서부터, 신랑이 신부에게 허리띠 하나를 주는 간단한 의식까지 포함된다. 대체로 부계사회에서는 결혼식도 비교적 정성을 들여 거행하는 데 반하여, 모계사회에서 결혼식은 중요시되지 않는다. 신랑은 아기의 출생에 참여하는 역할밖에 없으므로, 부부관계도 매우 불안정하고 이혼도 쉽다. 신부의 처녀성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결혼식 때 그 검사를 하는 풍습도 있다.

⑤ 약탈혼 ·도피혼 : 신부값을 지급할 능력이 없는 경우 등에 비상수단으로 행하는 약탈혼이 있다. 이는 신랑측 젊은이들이나 신부측 처녀들 간의 의례적인 행사이거나, 신부가 수치심을 나타내는 형식적인 저항인 경우도 있다.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족은 신부가 상대방이 마음에 든 경우에도 신랑이 강제로 데려가려 할 때, 발로 차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한다고 한다. 도피혼은 결혼이 주위의 찬동을 얻지 못하거나 사회의 규칙에 반하는 경우에 행하여진다. 이러한 결혼은 나중에 정식절차를 밟아 정당한 혼인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게 된다. 조선시대에 과부를 야밤에 자루에 넣어 먼 곳에 가 사는 것을 묵인하는 풍습도 약탈혼 ·도피혼의 일종이다.

⑥ 혼인 후의 정조의무 : 결혼 전에 자유로운 성생활을 하던 사람도 혼인하면 부부간의 정조가 요구되는 것이 보통이나, 이 경우에도 남자에 대하여 관대한 것이 일반적이다. 손님의 접대 또는 우정을 깊게 하기 위해 대처(貸妻)나 처의 교환을 행하는 일이 있다. 에스키모족은 장기간 여행을 떠날 때, 자기의 처를 친구나 이웃남자에게 빌려 준다. 또한 멀리서 온 손님의 잠자리에 주인의 처를 들게 하는 것이 최대의 환대이다. 처를 교환한 남자들은 평생 형제처럼 지낸다.

혼인의 형태

혼인의 형태를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부일처혼 : 문명사회의 원칙으로 되어 있는 1남 1녀의 혼인이다. 한 쌍의 남녀와 그 아이들은 인간사회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집단인 핵가족을 형성한다.

② 일부다처혼 : 1인의 남편이 여러 명의 처를 거느리는 혼인이다. 남녀의 출생률은 거의 비슷하므로, 남녀 평균수명의 차이나 큰 전쟁으로 남녀수에 큰 차이가 생길 때에만 가능하다. 보통의 상태에서는 연장자나 부유한 사람만이 많은 처를 맞을 수 있을 뿐이다. 이 혼인형태는 남성의 성적 욕구보다는 노동력을 강화하려는 경제적 요인이 크다. 제2·제3의 처들도 정식혼인에 의한 처이며 단순한 애인과는 구별된다. 복수의 별도의 집에서 각자의 아이들과 살며, 제1의 처는 제2·제3의 처들에게 일을 지시하는 등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

③ 일처다부혼 : 이 형태는 매우 드물다. 과거에 남인도의 토다족은 딸을 낳으면 죽였으므로 여자가 적어 1인의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렸다. 남편들은 형제인 경우가 많았으며, 여자가 어느 남자와 결혼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남편의 동생을 포함한 모든 동생들의 처가 되었다.

④ 다부다처혼 : 이 결혼형태도 매우 드문데, 19세기에 영국정부가 여아살해를 금지하자 토다족은, 형제가 1인의 처를 공유하던 풍습을 수인의 처를 공유하도록 변경시켰다. 그러나 가족형태를 수반하는 참다운 군혼(群婚)은 예외적인 것이었고, 군혼이라고 보고된 시베리아의 추크치족이나 호주의 디에리족 등의 경우도 개인적 부부관계가 어느 특정집단 전체에 확대되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⑤ 혼인 후의 거주에 의한 분류 : 결혼한 신혼부부가 어디에서 사는가에 따라, ㉠ 남가거주혼 ㉡ 처가거주혼 ㉢ 선택거주혼(신혼부부가 어느 한쪽의 양친과 함께 또는 그 집의 근처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것) ㉣ 독립거주혼 ㉤ 외숙가(外叔家)거주혼 ㉥ 양가거주혼 ㉦ 방문혼(訪問婚:밤에만 남편이 처를 방문하는 방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배우관계

혼인의 배우 관계의 특징을 살펴본다.

① 근친상간(近親相姦)의 금기:어느 사회나 가족 내의 혼인을 인정하는 예는 없다. 고대 이집트제국이나 하와이의 왕족 및 신라 왕족간에 형제자매혼인이 행하여진 것은 그들의 혈통을 유지하려는 특수한 예외였고, 일반 민중의 풍습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근친간의 결혼 ·성교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근친상간의 금기는 실제의 피의 농도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 예를 들면 같은 사촌이라도 평행 사촌은 자기의 형제자매와 같이 기피하는 경우가 많으나, 교차 사촌은 바람직한 배우자로 여기는 예가 많다.

② 교차 사촌간의 혼인 : 교차 사촌과의 혼인을 바람직한 우선혼인으로 치고, 그들이 혼인하도록 하고 있는 사회는 상당히 많다. 교차 사촌에는 남자 아버지의 자매(고모)의 딸(고종 사촌)과, 어머니 형제자매의 딸(외종 사촌 또는 이종 사촌)이 있다. 그 어느 쪽도 우선적 배우자가 되는 경우는 대칭적 또는 양면적 교차 사촌혼이고, 그 중 한쪽과의 혼인은 바람직하나 다른 한쪽은 금지 또는 불찬성되는 경우는 비대칭 또는 일면적 교차혼이다. 일면적 교차혼 중에는 외종 사촌누이와의 혼인을 우선혼인으로 하는 예가 고종 사촌누이보다 훨씬 많다.

③ 교환혼 : 한 쌍의 형제자매와 또 한 쌍의 형제자매가 혼인하는 일도 흔하다. 이것은 신부대가 및 기타의 귀찮은 절차를 줄일 수 있고, 재산의 분할을 방지하는 등 실제상의 이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④ 레비레이트혼과 소로레이트혼 : 넓은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레비레이트혼은 남편을 잃은 여자가 남편의 동생 ·조카나 아들(다른 여자가 낳은 아들)과 결혼하는 것이다. 소로레이트혼은 반대로 남자가 처의 동생(처제) 또는 조카를 제2·제3의 처로 삼는 경우이다.

혼인의 역사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혼인은 일부일처제이고, 신분 ·재산도 가부장제적 형태이다. 19세기 중엽까지는 이와 같은 형태가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다고 믿었다. 1861년 스위스의 J.바흐호펜이 《모권론(母權論)》에서 원시시대에는 난교적(亂交的) 성관계와 모권제가 행하여졌다고 기술한 것을 계기로, 유럽과 미국의 많은 학자들이 혼인=가족이라는 진화의 도식을 발표하였다.

특히 미국의 L.H.모건의 저서 《고대사회》(1877)는 난교 → 집단혼 → 대우혼(對偶婚) → 일부일처제의 역사적 발전도식을 밝혀,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래 핀란드의 F.웨스터마크, 호주의 W.슈미트, 영국의 B.말리노프스키 등이 원시시대에도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었다고 주장한 뒤로, 오늘날에는 원시시대의 난교제나 집단혼을 부정하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부부만이 성을 독점하지 않고, 성이 공동체 성원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이를 모건은 ‘프나르아혼’이라 하여 집단혼의 1형식이라 보았으나 실제로는 성의 공유였다. 형제형 일처다부제나 자매형 일부다처제의 복혼형태와, 그 수반현상인 레비레이트혼이나 소로레이트혼이라는 선호적(選好的) 재혼형식도 이성적 공유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성적 공유형태는 궁극적으로는 부족이라는 혈연공동체성원의 고유한 권리이며, 비록 부부라도 공유자들의 성적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같은 부족의 남자에 대처하는 관습도 쉽게 성립할 수 있었다.

원시시대의 혼인에는 혼인이 사회의 독자적 구성단위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본질적 특성도 있는데, 이는 특히 씨족사회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부부는 외혼제의 규제에 의해서 별개의 씨족에 속하고 아이들도 그 일방의 씨족에 귀속되었다. 원시시대의 초기부터 후기까지에는 거주규제에 따라 혼인형태가 남가거주제 ·처가거주제 등 여러 가지로 변천하였다. 그것은 친족을 지역으로 집결시키는 작용을 하였고, 원시혈연공동체의 형태를 규정하는 유력한 요인도 되었다. 우선 원시인이 방랑하면서 사냥 ·식물채집에 종사하던 초기에는 같은 무리 내에서 혼인하였으므로, 혼사(婚舍)가 어디냐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친족을 부계와 모계로 구별할 필요도 없었고, 근친간 금기의 범위도 부계 ·모계의 쌍계제였다. 그러나 근친간 금기의 법위 확대로 내부에서의 구혼이 어려워지고, 다른 무리와의 우호강화를 꾀하기 시작하면서 차차 외혼형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남가거주제였던 것이 농경이 시작된 뒤부터는 다른 거주규제를 유발하게 되었다.

농경은 종래의 식물채집과 같이 여자들의 노동이었다. 그것은 풍부한 식량을 부단히 공급하는 일이었으므로, 남자들의 불안정한 수렵보다 훨씬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딸을 시집보내는 것보다 데릴사위를 유리하게 생각하였으나, 남자는 새 상황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데릴사위가 되기를 꺼렸으므로, 방혼(訪婚)이 생겼다. 아이는 모의 집단에 속하였고, 남편 또는 아버지는 단지 밤에 찾아오는 방문객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여자노동의 우위성이 일반적으로 승인되자, 처가거주혼의 관습이 생겨 모권제가 최성기를 맞았다. 농경의 중요성이 결정적이 되자 남자도 수렵보다 농경에 종사하게 되었고, 괭이 ·쟁기 등을 쓰던 농경이 소나 말 등의 가축을 사용하는 단계로 발전하자 체력이 강한 남자의 노동이 여자의 노동보다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남가거주혼과 함께 부계제가 채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과도적 현상으로서 몇몇 민족에서는 성년남자가 외삼촌 집에 가서 살며 처를 맞는 외가거주혼이, 다음의 과정을 거쳐 행하여졌다. 모계제하에서 부자(父子)는 다른 씨족이므로 상속에서 제외되며, 아버지 재산은 아버지 자매의 아들(생질)에 상속되었다. 재산을 친자(親子)에게 주려면 아들이 성년에 달하여도 그대로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생질(고종 사촌)과 혼인을 시키는 교차 사촌혼이 행하여졌다. 이는 외가거주제에 위반되는 일이나 태어난 아들은 어머니 형제(외삼촌)의 정규상속인이고 외삼촌이 그의 조부의 상속인이므로, 위법성이 조각(阻却)된다. 이는 실제에 있어서 부계적 상속이다. 이것이 관습화하면 남가거주제 ·부계상속제가 동시에 관습적 질서가 되어, 모권제는 끝나고 부권제가 탄생한다. 더구나 모계적 씨족상속제 대신 사적(私的) 세습재산제도가 확립되어 가부장제가족이 사회의 기초적 단위로서 등장한다. 모권제가 부권제로 바뀌기까지는 민족에 따라 여러 관습의 경과가 있었다. 일정기간 남편이 처가에서 동거한 후 처자를 데리고 자기 씨족으로 돌아오는 처가 ·남가거주혼, 남편이 처가에 살며 일하는 노역혼, 신랑이 신부측에 일정한 재물을 지급하는 일 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문명사회의 가부장제는 위의 과정을 거쳐 성립하였고, 당초에는 남편이 절대적으로 처를 지배하였다. 부유한 남자는 여러 처를 마음대로 구할 수 있었고, 처는 남편의 노예와 다름없는 지위에 있었다. 그 때문에 부유층에서는 딸을 시집보낼 때 지참금을 주어 보냄으로써, 정처(正妻)로서의 지위와 아들의 적자(嫡子)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려고 애썼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일부일처제 기원이지만, 실제로는 남편의 학대를 제한하려는 미봉책에 불과하였고 항상 첩이나 매음(賣淫)제도가 병존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남녀평등사상이 대두하고, 현대의 문명국가에서는 남녀평등의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어 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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