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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대위법 / 해설 / 헉슬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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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대위법 / 헉슬리

 

이 작품은 헉슬리 생애의 최대 걸작일 뿐 아니라, 20세기 소설의 대표작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비록 그의 후기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다소의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있으나. 아무튼 이 작품은 《크로움 엘로우》에서 시작하여 《익살춤》, 《시시한 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장편소설과 또한 이와 같은 시기에 씌어진 다른 많은 단편들 속에 넘쳐 흐르는 날카로운 풍자와 냉소적이며 회의적이고 파괴적인 인생관이 이 한 권에 집대성된 대표작이며, 헉슬리라는 작가의 20세기 소설에 있어서의 의의를 전하고 그의 소설 방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이 소설은 이른바 〈관념 소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 소설이란 어떤 관념을 대표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여기서는 사건의 전개라든가 이야기의 줄거리가 문제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사건이라도 여기에 얽힌 무수한 관념들이 이야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가지의 관념을 소유자의 눈을 통해 관찰함으로써 일상적인 현실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재를 파악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필립이 그의 노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피카달리 서커스에서 체어링 크로스까지의 산책에서만도 한 권의 책을 엮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소설에서 종래의 정통 소설에서 보는 바와 같은 뚜렷한 이야기의 줄거리나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개성을 소유한 인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 작품에서도 특히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은 없으나. 대체로 중심이 되는 것은 청년에서 장년기에 걸치는 연령의 사람들, 즉 작가인 필립 퀄즈와 그의 아내 엘리너, 엘리네의 남동생 월터 비들레이크, 그와 동거하고 있는 박복한 유부녀 마아저리, 월터가 몸이 달아 쫓아  다니는 전후파 기질의 젊은 과부 루시 탠터마운트, 어머니에 대한 순정어린 사랑이 그녀의 재혼으로 깨어져 허무적 인생관에 빠진 스팬드럴, 과학자의 조수로 일하는 공산주의자 일리지, D. H. 로렌스를 모델로 했다는 램피언과 그의 아내 메어리, 미들튼 머어리를 그렸다고 하는 《문학 세계》지의 주간 데니스 버얼랩, 우익 결사〈영국 자유인 연맹〉의 수령 에버라아드 웨블리 등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그들보다 하나 위의 세대에 속하는 인물로는 저명한 화가로 평생 엽색 행각을 계속해 온 존 비들레이크, 불행한 결혼 생활에서 도피처를 철학과 종교에서 구한 그의 세 번째 아내 제네트, 무능한 주제에 제법 그럴듯한 인물로 돋보이고 일생 동안 헛수고만 해 오는 필립의 부친 시드니 퀄즈 씨 재치 있고 영리한 그의 아내 레이첼, 과학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귀족 과학자 에드워드 텐터마운트 경, 사교 부인인 그의 아내 헐다, 텐터마운트 가의 주인으로 에드워드 형이자 폐인에 가까운 후작 등이 있고, 하나 아래의 세대로는 필립 아들 필이 있다.

이들 작중 인물을 이야기의 줄거리와 함께 다시 정리하면 다섯 개의 집안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화가 존 비들레이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 엘리너와 아들 월터.

둘째, 작가 필립 퀄즈와 그의 아내 엘리너 비들레이크와 아들 필

셋째, 과학자 에드워드 텐터마운트 경과 그의 아내 힐다와 딸 루우시, 그리고 그의 형 노후작.

넷째, 무직자인 스팬드럴과 그의 모친 및 의부.

다섯째, 부르조와 출신의 아내를 얻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화가 겸 작가 램피언이다.

이들 외에 이 다섯 가족과는 관계가 없는 독신자가 둘 있다. 앞서 말한 위선자 버얼랩과 그의 정부 비어트리스, 그리고 공산주의자 일리지, 파시스트 에버라아드 웨블리, 그 외에는 십여 명에 달하는 보조역과 교양 있는 상류층 사교 인사들이다.

이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들레이크 가에서는 늙고 병든 엽색가 존 노인이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그 엽색가적 기질을 잃고 평소 버려둔 채 돌보지 않던 아내에게로 돌아와 피난처를 구한다. 그녀는 환멸의 결혼 생활에서 철학적 명상으로 도피한 여자이다. 작가인 월터는 주정뱅이 폭력배 남편으로부터 뺏아낸 유부녀와 동거하고 있으나 이미 순수한 이상주의의 열은 식은 지 오래고 루우시 탠터마운트와는 육욕으로 맺어져 있다.

둘째, 엘리너는 남편 빌립 퀄즈가 냉담한 것에 대해 고민한다. 필립은 헉슬리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탁월한 이지의 소유자이나, 불가능한 소재를 사용하여 소설을 써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는 주위의 사회를, 그런 시대를 체념적으로 지그시 견디고 있다. 그는 사물에 대한 설명, 이해는 가능하면서도 그 해결을 구하지 못하여 세계 각처를 방랑하며 희망 없는 탐색을 계속한다. 그는 처남 월터가 정부 마아저리로 견디고 있듯이 처자로 견디고 있다 몰리 덱서질로와는 구체적 진전을 보지 못했으나 성적 관심이 있었고, 그와는 대조적인 반지성적인 지성인 램피언과 깊이 맺어져 있다.

셋째, 탠터마운트 가에서는 신의 문제로 종일 고심하고 있는 노후작과 그의 동생인 대학자 에드워드 경에게서 스토이시즘을 볼 수 있다. 에드워드는 학구적 열정에 의해서 겨우 자살을 면할 수 있었으므로 그의 학구열은 절망적인 메니어[狂]의 상태이다. 노(老) 비들레이크의 정부인 에드워드 경 부인은 그 지위를 믿고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있다. 딸 루우시는 무기력한 향락에 몸을 맡기고 있으며 그녀의 자유와 회의의 비결은 돈이다.

램피언 부처를 제외하고는 이 모든 인물들이 헉슬리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의 필치로 야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는 인물의 회화적 묘사가 두드러진다. 앞서 말한 피 소년의 가정교사 풀크스 양은 열심히 필의 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촌각을 아껴서 아담 스미스의《국부론》과 씨름하는 학구파이면서도 다른 한편 그런 고전의 명작이 즐비하게 꽂힌 그녀의 서가 뒤로 탐정소설을 감추어 두고 남몰래 탐독하고 있다. 공산주의 유물론자인 일리지는 평소 매우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는 급진파이면서도 막상 우익 결사 수령 에버라아드를 죽이는 단계에 가서는 손발리 덜덜 떨려 무력하기 짝이 없고 오리려 평소 무위도식하던 무능한 청년 스팬드럴의 결연하고 민첩한 실행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다. 월터는 문예지에 있어서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강력한 항의를 하기로 결심하고 나타났으면서도 주필 버얼랩 앞에서는 봉급 인상의 서두도 꺼내지 못하고 용두사미가 되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거의 모든 인물에 대해서 열거할 수 있겠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희화화가 심한 것은 버얼랩과 시드니 퀄즈 씨다. 버얼랩은 문예지의 주필로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정신주의의 가면을 쓰고 특히 여성 족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논문을 무수히 발표하면서도 그 여성 독자들을 그 특유의 순수하고 능란한 솜씨로 차례차례 유혹한다. 시드니 퀄즈는 풍채가 좋고 대학 시절에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 쓸모가 없는 인물로, 그래도 제법 훌륭한 인물로 보이려는 집착을 못 버리고 시종 참담한 노력을 기울이는 패잔자에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 철저한 폭로적 희화화는 비참할 정도이다. 그는 젊어서는 유망한 청년으로, 머리 좋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얻었으나, 그 후 사업이 실패하고 정치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농지의 관리도 여의치 않고, 하는 일마다 실패한 끝에 만년에는 저술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자료 정리를 한다는 명목으로 방대한 카드 케이스를 사들이고, 타이프라이터는 세 대나 구비하고, 귀중한 착상을 기록하기 위하여 거창한 녹음기를 사들여 놓지만,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크로스워드 문제 풀이와, 저술을 위해서 고용한 여비서와 아내의 눈을 피해 정사를 벌이는 것뿐이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민주주의의 역사에 관한 전무 후무의 대저술을 기획하고 있다고 으스대는 인물이다. 필립 컬즈의 묘사에서도 희화화는 여전하다. 부모가 오랜 해외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필을 현관에서 서성거리며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긴장한 나머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다. 풀크스양이 다급해서 그를 데리고 화장실에 간 사이 부모가 탄 자동차가 도착한다. 이것은 정신을 압도하는 육체의 우위성을 말하며, 인간도 결국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동물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차질이 생기고 만다는 일종의 인간 야유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는 데 실망한 아내에게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필립은 말한다. 그리고 모든 야단법석이 싫은 그는 아무도 모르게 돌아오는 것이 최선의 귀가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으로 귀가의 차선책으로는 그렇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귀가의 차선책으로는 그렇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아는 체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들과 가정 교사가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는 독자의 눈에는 그 사실을 모르는 필립이 그럴듯한 지식인적인 논평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우스꽝스럽게만 비친다. 작중인물 중 회의파 지식인의 대표이며 헉슬리 자신의 투영이라고도 하는 필립을 그런 어색한 입장에 세워 놓고 득의만면해서 빗나간 발언을 하게 하는 데에 헉슬리 특유의 냉소가 있다.

희화화는 인물 묘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 지식을 동원한 회화적 묘사가 자주 눈에 띈다. 예를 들면 바이올리니스트가 악기로 연주하는 장면이 그렇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팽팽하게 뻗친 양의 창자 위로 송진 먹인 말털을 대고 비벼댄다〉(2장)고 매우 자연과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호화로운 탠터마운트 저택의 홀에서 연주되는 바하의 조곡이 3층의 에드워드 경의 실험실에까지 울려 올라가는 대목을 〈그 흔들리는 공기는 에드워드 경의 고막을 울렸다. 맞물린 퇴골과 침골과 등골이 작동하게 되어 타원형 창의 막을 자극해서 귓속의 액체에 미세한 파동을 일으켰다. 털이 난 청각 말초신경이 거친 바다의 해초처럼 떨리며, 보이지 않는 무수한 기적이 뇌수에 일어났다 에드워드 경은 황홀해서 "바하다"하고 속삭였다.〉(3장).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서 헉슬리는 이런 식으로 도처에서 각분야의 전문 용어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램피언 부처는 이 소설 속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의 로렌스 부처가 헉슬리와 대조적인 인물로, 그에게 없는 자질을 가진 인간으로서 헉슬리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매우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바와 같이, 소설 속에서도 필립 컬즈는 끊임없이 램피언에게 마음이 끌리고 그에게서 중대한 암시를 받고 있다. 인도에서는 귀국하는 도중 선상에서 〈귀국하자마자 곧 그 친구를 만나러 가야지〉(14)장 하고 생각한다든가 필립의 노트에서 엿보는 램피언론에 〈그의 의견은 생활로써 경험한 의견이고, 나의 것은 생각에만 그친 의견이라는 점이다.〉(26)장 라고 하는가 하면, 램피언에 대해서만은 희화적 묘사가 보이지 않는 데서 로오렌스에 대한 헉슬리의 경의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로렌스를 보고 램피언을 그린 헉슬리는 또한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객관화하여 필립을 그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아내는 그의 지성에 대해서 "자신이 느껴 보지도 못한 감정이다, 휩쓸리지 않으려고 경계하고 있는 본능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민감하고 포괄적이고 편재적인 지성"이라 말하고 있으며, 필립 자신은 아메바를 닮은 자신의 성질을 지적하며, "냉소가이면서 또한 신비주의자였고 인도주의자이면서 또한 경멸적인 인간혐오주의자이기도 했다"고 하며, 〈그의 본성인 유동성〉이니 〈지적 호기심의 차갑고 무관심한 흐름〉을 말하기도 한다. 필립은 헉슬리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이 작품의 구성을 보면 전 37장이며 2장에서 거의 전부의 인물을 탠터마운트 저택에서 개최된 음악회에 참석시킴으로써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월터가 이 파티에 가려고 마아저리와 다투고 나가는 1장부터 12장까지가 이 하룻밤의 이야기이며 13장에 가서야 비로소 그 다음날 옮아간다. 이하 수법상으로 두드러진 특색을 몇 가지 살펴본다.

〈필립 퀄즈의 노트에서〉라는 제목의 장이 22장을 필두로 26장, 29장에 가끔 나타나고 있는데, 이 기교가 이 작품 중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필립 퀄즈는 지식적 회의파의 작가로 아내 엘리너가 "언제고 당신이,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어려움을 만나서 극복하고 마침내 안정된다, 고 하는 단순하고 솔직한 소설을 하나 써주었으면 싶다"고 하지만, 자기는 그런 소설은 도저히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필립이 그때그때의 감상이나 앞으로 쓰려고 생각하는 소설의 계획 등을 기입해 둔 것이 곧 이 〈노트〉인데, 필립은 곧 헉슬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 노트 속에는 이따금 《연애대위법》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주해 역할을 하는 구절이 나온다. 소설 속에 그 소설 자체에 대한 주해가 나오는 셈이다. 22장에서 필립은 앞으로 쓰고자 하는 소설의 복안을 기록하고 있다. 〈소설가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라. ……자기가 쓰고 있는 것과 소설의 일부를 작품 중의 작가를 통해 말한다면 테마의 변주가 될 수도 있다.……작중 작가의 작품 속에 제 2의 작가를 등장시켜서……무한히 계속한다. 마치 퀘이커오우츠의 광고에서 퀘이커 교도가 상자를 들고 있고, 그 상자에는 다른 퀘이커 교도가 상자를 들고 있고 또 그 상자에는……〉 이 부분의 이미지 자체가 영원히 해결이란 없는 인생을 암시하고 있어 매우 헉슬리적이며 이 작품 자체에 대한 유력한 주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독자는 특히 〈노트〉 부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노트와 관련해서 작품 구성의 특이한 점은 〈대위법〉이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체를 음악의 구성에서 본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 〈노트〉부분에 기록된 주해를 통해 살펴본다. 22장에 〈소설의 음악화〉라는 말로 시작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 베토벤을 예로 들어 모듈레이션, 바리에이션의 효과를 설명한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몇몇의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거나 죽거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다―서로 다른 인물들이 같은 문제를 푸는 것이다. 혹은 거꾸로 유사한 인물들이 다른 문제와 직면한다.〉 이 말을 단서로 〈동일한 테마의 여러 가지 바리에이션〉의 예를 들면, 존 비들레이크와 힐다 탠터마운트, 월터 비들레이크와 루우시, 엘리너와 에버라아드 웨블리, 시드니 퀄즈와 그의 비서 글래디즈, 버얼랩과 그의 하숙집 주인인 노처녀 비어트리스, 필립과 몰리 덱서질로 라는 몇 쌍의 애욕도(圖)의 전개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유사한 장면이나 묘사의 반복이 대단히 많다. 편지를 비서에게 구술시키는 장면으로, 13장에서는 버얼랩이, 20장에서는 퀄즈 씨가, 32장에서는 웨블리가 각각 등장하고, 죽음의 장면 역시 35장에서는 어린 필이, 33장에서는 웨블리가,  마지막 장에서는 스팬드럴이 전연 악상을 달리 해서 몇 번인가 되풀이되고 있다. 작은 장면까지 생각해 본다면, 1장에서는 월터가 잘 하면 오늘 밤 미국의 잡지사에 원고를 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희박한 구실을 내세우며 외출을 합리화하려고 애쓰는 데 비해, 최종장에서는 실제로 미국 잡지사에서 원고를 사러 왔다고 득의만면해서 휘파람을 부는 버얼랩의 모습이 보인다. 첫장의 마아저리의 임신이 궁상맞은 데 비해 31장의 글래디즈의 임신 담판은 용감무쌍해서 대조적이다. 전문적인 음악 지식을 가지고 조사한다면 이밖에도 여러 가지 음악적 구성의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의식의 흐름〉 수법도 교묘히 도입되어 효과를 거두고 있다. 조이스의 《율리시즈》(1922), 울프의 《댈러웨이부인》(1925), 《등대로》(1927)등, 이 계통의 문제 소설이 이미 발표되어 있었으나, 헉슬리는 이들의 실험적인 수법을 외면 묘사의 사이사이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용했으므로 무심코 읽어내려가기 쉬어나 그러한 내면 묘사의 혼입율은 상당히 높은 것 같다.

또한 영화적 수법도 상당히 활용되고 있다. 5장에서 에드워드 경 부인과 존 비들레이크가 마아저리를 화제에 올리자 곧 장면이 바뀌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마아저리의 모습이 나타난다든가, 5장 끝에 가서 엘리너가 화제에 오르자 곧 6장에서는 엘리너가 있는 인도가 무대가 된다. 8장 끝에서 스비사의 식당에서 메어리가 눈을 감고 지난날을 생각하자 9장에서는 돌연 젊은 시절의 메어리와 마아크 램피언이 처음 만나던 광경이 나타난다. 이런 연상의 방법을 발전시켜 가면 여자의 꽁무니를 좇아 다니는 남자에게서 언제나 수컷을 몸의 일부에 달고 다니는 어류의 암컷을 연상하게 된다. 푸르스름한 잇몸과 혀가 드러나 보이는 여자의 입에서 입을 쩍 벌린 악어에게 먹이를 주는 인도로 장면이 전환된다. 램피언이 현대 문명을 논하고 석탄과 철의 중압에 짓눌린 노동자가 있다고 말하면 장면은 에드워드 경이라는 노과학자가 석탄의 사용량을 논하고 석탄에 모여드는 인간들은 석화한 썩은 고기에 모여드는 구더기 같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그러자 그 다음의 레스토랑 장면에서는 보들레르 썩은 고기에 대한 시가 인용된다. 이런 연상이나 유비(類比) 혹은 대조의 방법은 동일한 테마의 바리에이선을 말하는 〈소설의 음악화〉와도 통한다.

  과학적 진리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하고 다양한 잡물이 섞여 있는 현실을 헉슬리는 〈전면적 진실(whole truth)〉이라고 부르며, 예술은 〈일면적 진실〉이 아닌 이 〈전면적 진실〉을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의 주변에 있는 확고부동한 것으로 보이는 사실의 세계도 관습이라는 기만적인 〈명백성obviousness)〉을 띠고 있을 뿐이라고 하여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헉슬리는, 과학의 줄자[尺]로써도 더듬을 수 없는 현실의 심연의 밑바닥을 파헤치기 위해서 그의 모든 지력을 다해서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18세기이래 꽃피어 온 근대 문학의 꽃이라 할 소설이 어느 극한에 다다른 현대에 있어, 20세기 소설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 지식인층의 적나라한 풍자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1894년 7월 26일 남부 영국 서어리 주 고달밍에 있는 차터하우스(Chaterhouse)교 구내에서 레너드 헉슬리(Leonard Huxley,1830∼1930)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줄리어 프란시스 아놀드(Julia Frances Arnold)이다.

그의 가문에는 유명한 학자, 문인이 많다. 조부인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sly, 1825∼95)는 19세기의 대표적인 생물학자였고, 형 줄리언 소렐 헉슬리(Julian Sorrell Huxly) 역시 저명한 생물학자로서 유네스코의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콘힐 매거진(The Cornhill Magazine)》지의 주필로서 수필가 겸 시인이었고, 외가로는 럭비 공립 학교 교장으로 유명한 교육가 토머스 아놀드(Thomas Arnold, 1795∼1842)가 증조부이고, 19세기의 명상 시인인 매튜 아놀드(Mattew Arnold, 1822∼88)는 그의 대백부요, 영문학자인 토머스(Thomas, 1823∼1900)는 그의 조부이다. 그리고 《아미엘의 일기》를 번역한 여류 소설가 험프리 워드 부인(Mrs. Humphry Ward, 1851∼1920)은 그의 이모가 된다. 후일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과학자적 태도와 시에 대한 편호는 이러한 조상의 문화적 유산을 이어받고 그 감화를 받았음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헉슬리는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지적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소설가, 평론가로서 지적 흥미의 범위가 넓기로는 20세기 굴지의 작가요, 백과사전적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14세 때 이튼교에 입학해서 장래 의사가 되고 또한 생물학을 전공하여 조부와 형의 뒤를 이으려고 했으나 2년 후 심한 각막염에 걸려 2, 3개월 내에 거의 실명하다시피했다. 할 수 없이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안질을 치료하면서, 점자로 독서도 하고 악보 읽는 법을 배우고, 타이프라이터도 익혔다. 한쪽 눈이 확대경을 사용하면 독서할 수 있을 만큼 시력이 회복된 20세 때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과학자가 되는 꿈을 버리고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재학 중 런던에서 처음으로 로렌스(D.H.Lawrence)와 만났다. 로렌스의 설득에 매혹되어 플로리다에 공상적인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계획에 참여할 것을 승낙했으나 이 계획은 결국 유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싹튼 두 사람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고, 로렌스는 헉슬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16년 그는 B.A. 학위를 받고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면서 신체시 운동에 참가하여 첫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The Burning Wheel)》를 청년시인의 시집 《모험자들(Adventure All)》의 7집으로 간행하고, 이어서 시집 《요나, 1917년의 크리스머스》, 《청춘의 패배》,《레다(Leda and Other Poems)》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 주목을 받았다. 1919년 런던의 《아테니엄(The Atheneaum)》지의 편집원으로 일하면서, 각종 비평을 담당했다. 당시의 주간은 머리(J.M.Murry)로 유능한 신진 작가들이 거의 다 그 산하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헉슬리는 머리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한 듯,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에서 머리를 그렸다는 벌랩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신랄하다.

또한 소설 부문에서도 단편집 《연옥(Limbo)》, 《콘힐 매거진》지에 실렸던 것들은 모은 《인생 우환(Mortal Coils)》, 최초의 장편소설 《크로움 옐로우(Crome Yellow)》, 《익살 춤(Antic Hay)을 발표하여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 같은 작품에서 헉슬리는 두뇌만 발달한 현대 문명의 불안을 방향 잃은 유한 지식인의 생활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으며, 합리주의 사상과 낙천적 진보 사상에 대한 전후 지식인에 공통된 파괴적인 회의가 짙다.

1923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거처를 옮겨 1930년까지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며 매년 새로운 시, 단편소설, 평론을 발표하여 그 풍부한 학식과 왕성한 지적 흥미로 인해 전후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이색적인 작가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시사한 책》,《연애대위법》, 평론집《인간 연구》, 《네가 원하는 바를 하라》, 《문학에 있어서의 비속성》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인도, 인도지나 말레이지나 등 동양을 여행하고 여행기 《길을 따라서》,《익살맞은 빌라도》를 썼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헉슬리의 사상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사상적 전환의 싹은 《훌륭한 신세계》에서 트기 시작하여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인간관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두 가지 논문 《네가 원하는 바를 하라》와《문학에 있어서의 비속성》을 중심으로 <완전한 인간>의 이상을 더듬으면 아래와 같다.

  인간은 아메바에서 기원한 하나의 생물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의 존재를 직관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다. 생물학의 일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육체를 가진 생물에 불과한 인간과, 철학·과학·예술 등 찬란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정신을 가진 인간과의 사이에는 놀라운 거리가 있으며 커다란 모순이 가로놓여 있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인간이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한몸에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마천루의 거주인과도 같아서 마음만 바뀌면 단숨에 2, 3층을 오르내리듯 무섭도록 정신적일 수도 있고 또 무서울이만큼 육체적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과거의 정신 존중주의 철학이 인간을 정신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육체를 무시하고 학대함으로써 신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현실의 인간의 복잡 미묘함 앞에 굴복하고 안이한 세계로 도피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구와 실패의 삶이다. 인간에게는 정신과 더불어 육체가 있으며, 이성과 더불어 본능이 있다.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는 양자가 가치에 고하가 있을 수 없을 뿐더러 강력함에 있어서는 차라리 육체가 본능보다 더하다. 이런 사실을 억지로 무시하고 정신과 이성 쪽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하려고 함은 지적인 사대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며,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한 생각이므로 인간의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인간의 올바른 삶은 모순되고 대립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모두 한 가지로 받아들이고 하나하나를 완전히 살리는 것이며,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헉슬리는 자신을 <생의 찬미자>라 했고, 또한 모순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비고전주의적 자연주의 작가>라고도 칭했다. <생의 찬미자>에 대해서 그는 《네가 원하는 바를 하라》는 평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의 찬미자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발휘하는 것--내부의 영혼의 일체를 바쳐서 멋대로 사는 것을 목적한다. 그는 자의식과 지성의 과잉을 직감과 본능적 내장적(內臟的) 생활의 과잉으로써 균형잡으려 한다. 그는, 지나친 사색의 악영향은 지나친 행동의 악영향으로, 지나친 고독은 지나친 사교로, 지나친 향락은 지나친 금욕으로 치료하려고 하는 과잉의 균형을 터득한 자이며, 때로는 실증주의자가 되고, 때로는 신비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조소적인 회의자가 되고, 어떤 때는 열렬한 신앙가가 되기도 한다. 명랑한 때도 있고 심각한 때도 있다. 병든 파스칼적 기분에 사로잡히면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들뜬 기분을 가라앉힌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는 의식에 나타나는 대로 그 어느 자아도 그 순간의 자아로 받아들이는 자인 것이다.

헉슬리는 그런 <생의 찬미자>들이 한 시대를 휩쓸었던 엘리자베드 여왕 시대의 에섹스 백작, 마로우, 던, 엘리자베드 여왕, 셰익스피어, 로우리 등이 그토록 세련되었으면서도 그토록 야성적이며, 그토록 관능적이면서도 그토록 정신적이었고, 그토록 행동주의적이면서도 그토록 사색적이었고, 그토록 종교적이면서도 그토록 풍자적일 수 있었음에 놀라며,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타고난 다양성을 모조리 드러내 놓고 완전하게 살아간 그들이 터득하고 있었던 과잉된 극단 상호간의 아슬아슬한 균형의 묘기에 찬탄을 금하지 못한다.

정신과 육체, 이성과 본능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려는 그의 태도는 곧 자연 과학자의 태도이다. 사실, 헉슬리 자신이 《목적과 수단》이라는 평론에서 <나는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하나 단지 외부에서 실지 채집하는 박물학자적인 태도로 임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신과 육체를 동등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연과학적 인간관에는 가치의식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 개인의 사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하나의 사리에 대해서 작용하려 들면 곧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시대의 상식이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 있을 때는 모든 사실은 평등하다는 입장에 서서 사실대로만 그려내어도 그 편향을 고발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적극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경우 자연 과학적 태도는 곧 모럴리스트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는 자연과학자적인 헉슬리의 대사회적 주장이 그에게 아무런 자기 모순을 주지 않고 모럴리스트적 의의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정세는 점차 험악해 하고 전쟁의 위기가 다가옴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 헉슬리도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1934년 그는 BBC를 통해 <전쟁의 잔학성>에 대해 강연하고, 이듬해에는 전쟁의 위기에 대비해 파리에서 개최된 문화 옹호 국제 대회에도 참석하며, 7천 명이 서명 가입한 <평화 서약 동맹>의 발기인으로 활약한다.

뭇솔리니가 이디오피아를 침략하자, 이탈리아 제재의 논의가 시끄럽던 1936년에는 《현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What Are You Going To Do)》라는 팜플렛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예증하여 절대적인 폭력 부정의 입장을 취했으며, 가진 나라가 주창해서 국제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자원의 공평한 재분배를 시작하고, 영토·경제·금융에 있어 각국이 만족할 만한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선으로만 대한다면 마지막에는 상대방도 선의로 답한다는 사상이 있다.

1937년 그는 평론 《목적과 수단》을 발표해서 인간 고래의 이상과 우리의 현상 및 이상 접근의 수단을 15개의 장으로 나누어 철저하게 논한다. 14장 <신념>의 장을 중심으로 그의 새로운 인간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존재는 사고의 함수이다. 우리의 현재의 상태는 우리의 종래의 사고의 결과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의 인생관 세계관에 따라 살고 있으며 아무런 형이상학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것은 어떤 형이상학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 중 택일하는 것뿐이다. 자연과학적 세계관만 옳다 하여 일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과연 옳은 선택이라 할 수는 없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시대에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유행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하면 일체의 규범이 붕괴되고 아무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다. 인간은 거기서 무한한 행방감을 느꼈다. 그러나 결국 완전히 무의미한 인생을 견디어낸 인간은 없다. 학자나 예술가 등, 창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일체의 것을 무의미로 돌렸다 해도 그들의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국가라든가 계급이라든가 각자에게 의미 있는 대상을 곧 발견해서 거기에 몰두함으로써 사는 보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전히 무의미한 세계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다. 자연과학적 지식이란 실재의 일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부분의 추상일 뿐 결코 실재의 전체적인 파악이 아니다. 그리하여 육체와 정신, 본능과 이성 등 인간이 지닌 모순된 여러 가지 요소를 병렬적으로 취급하여 각각을 각자의 입장에서 시인하려고 했던, 이른바 일체의 가치관을 배제한 자연과학적 인간관을 버리고, 자유와 정의와 우애가 넘치는 항구적인 평화의 세계야말로 인간의 영구불변하는 이상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해서,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서 사랑과 동정과 이해를 인간 최고의 가치로 하는 도덕 체계를 형성하여, 최고의 가치를 조장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그것을 저해하는 것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종교적 윤리적인 인간관에 도달한다. 그가 중세의 신비 종교, 인도교,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요는 자타를 하나로 묶는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를 직관하고, 자기를 초월하여 사랑과 동정과 이해를 실천한 옛 성자의 생애를 동경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래의 그의 인간관에 있어 이원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던 정신과 육체, 이성과 본능은 새로이 형성된 도덕 체계 속에 각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육체적 본능적인 것은 그런 도덕 생활에 에너지를 공급하며, 정신적 이성적인 것도 그 에너지가 일정한 목적을 향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시기 이후의 그의 작품은 평론은 물론  소설, 수필, 전기 모두가 이런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목적과 수단》은 이런 입장에서의 사회 개조론이며, 《회색 옷의 고승(Gray Eminence)》은 17세기 프랑스의 고승 조지프 신부의 전기이며 《영원의 철학》은 신비 종교의 성자들의 어록이며, 《주제와 변주곡》은 과거의 사상가. 예술가에 대한 이런 입장에서의 검토이며, 《루던의 악마》는 17세기 프랑스의 수녀원에 일어났던 이상한 사건의 기록이다. 또한 《수많은 여름이 지나고》,《시간은 정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원숭이와 본질》등의 소설은 사상적 전환을 거친 후의 그의 경향을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헉슬리의 인간관이 이지적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절실하게 감정적으로 뒷받침이 되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스럽다. 후기의 신비 사상이 분석적 비판적 지성을 타고난 헉슬리의 몸에 어느 정도 밴 사상이었는가도 의문스럽고, 또한 육체와 본능을 강조한 전기의 자연과학적 인간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의심이 간다. 자질로나 교양으로나 헉슬리만큼 육체적인 것, 본능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결코 파토스적일 수 없었던 헉슬리의 로고스적 체질이었다. 그는 《인간 연구》에서 자기 자신에 관하여 <나는 원래 사물을 생각하기를 즐기는 기질로, 관념이나 사상에는 흥미가 있으나 실제적인 활동은 싫어하는 편이므로, 고래의 학자들의 망령에 둘러싸여 있으면 나는 늘 마음이 편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는 체질적으로 시적인 인생의 방관자였다. 헉슬리의 이러한 면모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연애대위법》의 필립 퀄즈이다. 그는 헉슬리가 자기 자신을 투영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는 인물이다.

필립 퀄즈는 무엇보다도 매우 지성적이다.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의 지성은 <예민하고 포괄적이며 편재적인 지성>이다. 그 지성의 힘으로 그는 자신과 매우 거리가 먼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 대해서도 그 발생 이유와 진행과정, 진행의 양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해는 대상 속에 자신을 던져 넣어 애환을 함께 하는 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관자적이며 분석적이고 냉철하다. 그러므로 지적으로는 저작, 소화, 설명, 정리가 가능하나, 그것으로 그치고, 상호 작용하는 인간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 여러 가지 것이 그의 눈앞을 지나간다. 그는 팔짱을 끼고 그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술하고 체계를 세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그것들은 지나가 버리고 그는 여전한 그로서 남아 있다. 이 같은 자기 자신을 그는 아메바에 비유한다. 아메바는 먹이를 발견하면 그 주위로 흘러가서 그것을 흡수하고 동화한다. 그리고 동화한 후에는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또 다른 새로운 먹이를 찾아 흐느적거리며 흘러간다. 자기는 그와 같이 그때그때 읽고 있는 책이나 접촉하고 있는 친구에 따라 풍자가가 되기도 하고 신비가가 되었다가는 인도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혹은 경멸적인 인간기피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어느 것도 그의 참모습이 아니다. 그의 친구들은 이러한 그를 가리켜 "떠돌아다니며 정착할 줄 모르는 인생의 방관자"라고 평한다. 참으로 그는 인생의 나그네요, 방관자이다. 따라서 그는 고독하다. 결코 자신을 남에게 베푸는 법이 없기 때문에 고독하다. 그는 밀폐된 세계다. 그는 마이크 램피언과 같이 강렬한 전인적인 삶을 상상하기도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으로 이해된 삶으로, 관념과 현실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것을 그는 절감한다.

이러한 필립의 인생 태도가 곧 <실제 행동을 싫어하는> 헉슬리의 태도라고 본다면, 그가 대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모럴리스트의 입장에 섰을 때 사회주의가 아닌 신비주의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신비주의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으로, 실천 행동과는 거리가 있어도 아무에게도 변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 역시 관념적 피상적인 것이었던 것 같다. 1954년 그는 스스로 메스카린이라는 일종의 마약의 실험체가 되어 그 복용 경험을 기록, 《지각의 문(Doors of perception)》을 발표했다. 그가 메스카린의 힘을 빌어 신비한 경험을 직접 체험하려고 시도한 것은 종교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의 관계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직가의 문》 이후의 작품으로는 장편 《천재와 여신》,《섬(The Island)》, 평론 《지성에의 포학(The Tyranny over the Mind)》등이 있으며, 1963년 11월 22일, 안질의 치료를 위해 1938년 이래 정주한 캘리포니아 남부의 헐리웃 교외의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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