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by 송화은율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강 만 길
무엇이 역사가 되는가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대단히 어려운 물음에 아주 쉽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 사회의 지난날에 일어난 사실들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그 사실들에 관해 적어 놓은 기록들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흔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날의 인간 사회에서 일어난 사실이 모두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쉬운 예를 들면, 김 총각과 박 처녀가 결혼한 사실은 역사가 될 수 없고, 한글이 만들어진 사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 등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소한 일,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은 역사가 될 수 없고, 거대한 사실, 한 번만 일어나는 사실만이 역사가 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고려 시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인 일식과 월식은 모두 역사로 기록되었으면서도 금속 활자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된 사실은 역사로 기록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우리는 지금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를 누가 몇 년에 처음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고 있다. 일식과 월식은 자연 현상이면서도 하늘이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경고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역사가 되었고, 목판본이나 목활자 인쇄술이 금속 활자로 넘어가는 중요성이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로 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또 역사라는 것은 지난날의 인간 사회에서 일어난 사실 중에서 누군가에 의해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되어 뽑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을 뽑는 사람은 기록을 담당한 사람 곧 역사가라 할 수 있으며, 뽑혀진 사실이란 곧 역사책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 남은 사실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란 결국 기록에 남은 것이며, 기록에 남지 않은 것은 역사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일식과 월식은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역사로서 기록에 남지 않게 되었다. 금속 활자의 발견은 그 중요성을 안 뒷날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최초로 발명한 사람과 정확한 연대는 모른 채 고려 말기의 중요한 역사로 추가 기록된 것이다.
'지난날의 인간 사회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실들 중에서 누군가에 의해 기록해 둘 만한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되어 기록된 것이 역사다' 하고 생각해 보면, 여기에 몇 가지 되씹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는 '기록해 둘 만한 중요한 사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 중에서 기록해 둘 만한 중요한 사실을 가려내는 사람의 생각과 처지'의 문제이다.
먼저, '무엇이 기록해 둘 만한 중요한 문제인가, 기록해 둘 만하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아주 쉽게 말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참고가 될 만한 일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역사책에 남아 있는 사실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참고가 될 만한 일들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참고가 될 만한 일과 될 만하지 않은 일을 가려내는 일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또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는 일식과 월식이 정치를 잘못한 왕이나 관리들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의 표시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한글이 만들어진 사실은 조선 시대에 역사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고 한글은 언문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언문이 국문으로 되었고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의는 높아져만 갔다.
'무엇이 역사가 되는가' 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일식·월식과 같이 사람의 지혜나 생각이 아직 얕았을 때만 참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참고가 될 만한 사실이 역사가 되며, 한글 창제와 같이 그 의미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점 더 높아질 수 있는 사실들이 계속 역사로서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의미는 달라지는가
지난날의 인간 사회에서 일어난 사실들 가운데 지금까지도 역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지혜가 발달해도 언제나 중요하고 참고될 만한 사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뜻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지고 확대되는 사실들이라 일단 생각했다.
고려 금속 활자의 경우는 이미 예로 들었지만 상감 청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상감 청자의 제작법을 누가 언제 처음으로 발명했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나 연대가 비록 기록되지는 않았다 해도 당시의 귀족 사회에서도 상감 청자의 우수성은 인정되었고 따라서 귀하게 취급되었다.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제조법도 전수되지 않았으나, 근대 사회로 넘어온 후에는 우수성과 독창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져서 고려 시대에 상감 청자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고, 그것을 다시 만들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후세에까지 중요하고 참고될 만한 것으로 남을 사실, 뜻이 점점 높아지고 확대되는 사실이 역사로 기록되는 것이라 했지만, 또 경우에 따라서는 뜻이 높아지고 확대될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는 역사도 많다. 지난날 부정적으로 해석된 역사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긍정적인 역사로 평가되는 것이다.
1894년에 전라도에서 전봉준이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정부군 및 일본군과 싸운 사실은 당연히 역사로서 기록되었지만, 맨 처음 그것은 동학란으로 불리었다. 동학이라는 혹세 무민하는 종교를 믿는 무리들이, 정부가 그의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고 또 이 종교를 탄압한 데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란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며, 이 경우 동학란의 의미는 하나의 종교적인 반란에 불과한 것이다.
대한 제국 시기와 일제 식만지 시기까지 계속 동학란으로 불린 이 역사적 사건은 해방 후에는 동학 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동학 교도들이 일으킨 일이기는 하지만 그 행위가 반란이 아니라 혁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란이 혁명으로 바뀐 것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두고 그 해석이 전혀 달라졌음을 말한다. 전봉준 등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바뀐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 같은 사건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이렇게 바뀐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두말할 것 없이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봉준 등의 행동이 반란으로 규정된 시대는 나라의 주권이 왕에게 있고 정권이 양반 계급에게만 독점되어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행동은 반역 또는 반란으로 보여졌고 또 그렇게 성격지워졌으며, 일제 시대도 본질적으로 같은 시대였으므로 계속 동학란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시대 사정이 달라졌다. 백성이나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가 되는 민주주의의 시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양반 계급이나 군주의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민의 권리를 높이거나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만들려 한 모든 행동은 정당하게 되고 또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행동으로 평가되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 사정의 변화에 따라, 전봉준 등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반란이 혁명으로 바뀌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자연히 그 주체 세력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 갔다. '동학란을 혁명으로 볼 경우 동학 교도의 혁명으로만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동학 교도만으로 그 거대한 혁명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학 사상에 과연 혁명성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동학 혁명으로 볼 것이 아니라 농민 혁명이나 농민 전쟁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많아졌고, 아예 '갑오 농민 혁명' 혹은 '갑오 농민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져 가고 있다. 1894년에 전봉준 등이 일으킨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동학란에서 갑오 농민 혁명으로까지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같은 역사적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얼마나 크게 변화될 수 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모든 역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의미가 달라질 수 없는 역사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역사로서 위치를 잃어 간다. 그래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는, 더 높아지고 확대될 수 있는 역사만이 영원한 역사로 남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어느 쪽으로 변해 가는가
'역사는 변한다'는 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역사가 변한다는 말은 하나의 체제, 하나의 시대 상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일이 지나면 반드시 변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앞의 동학란의 경우와 같이 지난 날에 일어났던 어떤 역사적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계속 변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적 상황 및 역사가 가지는 의미가 계속 변하기 마련이라면 이 '역사가 변해 가는 방향이 어느 쪽인가', '인간의 역사는 결국 어느 곳으로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해 없이 역사 자체를 올바르게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역사가 결국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철학자들이 나름대로 대답을 내놓았다. 종말론적인 해답도 있었고 발전론적인 해답도 있어 왔지만, 지금까지의 인류 사회가 지향해 온 역사의 길은 인간들이 살기에 한층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길이었으며, 그것은 또 많은 우여 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이루어져 왔다고 생각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인류의 역사는 모든 인간들이 정치적인 속박에서 점점 벗어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이란 곧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 말했다. 역사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인간의 수가 점점 많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과 귀족들만이 정치적 자유를 누렸지만, 근대 사회로 오면서 그 정치적 자유가 시민 계급에까지 확대되었고, 현대 사회로 오면서는 노동자·농민층에게까지 실질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인류 사회의 이상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더 확대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인류 역사가 나아갈 방향이기도 하다. 인간이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은 곧 스스로 권력을 가지는 길이며,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는 인간이 많아지는 길, 즉 인민 주권주의가 확대되는 길이 곧 역사가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또한 인간의 역사는 경제적으로 빈부의 차가 적어지는 길로 발전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소수의 귀족층만이 재부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피지배층의 생활은 처참했다. 조선 시대에도 양반 지배층의 생활과 일반 농민의 생활 사이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차이가 있었다. 근대 사회로 내려오면서 자산 계급과 서민 대중 사이의 생활 양식은 어느 정도 접근해 갔으나 소유한 재부의 차이는 여전히 크다. 그러나 재부의 편중을 억제하고 사회적 평등을 촉진하는 운동과 정책이 계속 추진되고 있으며, 그것이 바른 역사의 길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도 더 발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 계급적 차이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발전해 왔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그렇게 엄격했던 신분제가 폐지되어 종이나 하인 등 신분 제도에 의해 차별받던 계층이 없어졌고,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도 엄존했던 백정 계급이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만민 평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정치적 지위나 재부의 소유 정도에 따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등은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경제적 불균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또 생각하고 표현하는 자유, 즉 사상의 자유가 꾸준히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지구가 도는 것임을, 만민이 평등함을, 권력은 국민의 것이어야 함을, 재부가 만민의 것임을 남보다 먼저 말했다가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무리 무서운 권력도 뿌리 깊은 인습도 인간의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를 계속 누를 수는 없었다. 사상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가진 의미는 시대에 따라, 또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 말했다. 따라서, 역사의 변화에 일정한 방향이 없으면 인간 사회는 그야말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갈 수밖에 없으며, 역사의 의미가 바뀌는 데 일정한 기준이 없으면 역사의 해석이야말로 귀걸이, 코걸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길, 역사적 심판, 역사적 진리란 말이 있을 수 없으며 역사학 자체도 남아날 수 없다.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역사를 분석해 온 역사학은 역사의 변화에 일정한 방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방향은 크게 말해서 인간이 정치적인 속박을 벗어나는 길, 경제적인 불평등을 극복하는 길, 사회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 사상의 자유를 넓혀가는 길이라 말하고 있다.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들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인간의 정치적 자유, 경제적 균등, 사회적 평등, 사상적 자유를 이루어나가는 데 궁극적으로 합치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합치되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며 거슬리는 사실은 반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보는 직접적인, 그러면서도 쉬운 방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강만길/고려 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고려 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상업의 역사』,『분단 시대의 역사 인식』，『한국 근대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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