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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국전(女容國傳)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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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국전(女容國傳)

여용국이란, 여자 얼굴의 나라라는 뜻이다. 여용국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 이를 둘러싸고 열 여섯 개의 위성국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여용국의 예쁜 효장황제의 염대를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 염대의 이름은 능허대, 별호는 경대다. 곧 위성국들은 황제의 화장대를 관장하는 것이다. 동원청의 자는 명경(거울), 호는 감선생이다. 그의 둥근 얼굴에 맑은 기상과 광채는 사람을 비추었다. 언제나 황제의 좌우에 있었고, 혹시 황제의 얼굴이 단정하지 못하거나 의관이 바르지 못하면 반드시 간하여 경계하게 했다. 그래서 황제는 늘 귀중하게 여겨 잠시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거울밑에 열 다섯 명의 신하가 있었다.

소부 : 백광, 호치장군 : 양수, 소군도독 : 관정, 무위장군 : 포세, 전전지휘사 : 포엄, 참군교위 : 마령, 형부시랑 : 방취, 총융사 : 윤안, 안무사 : 백원, 도지휘사 : 납용, 평장군 : 섭강, 도어사 : 차연, 전장군 : 소쾌, 후장군 : 소진 이 열 다섯 화장 용구가 그것이다.

이들은 각기 재주를 다하여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고, 황제 역시 정성을 다하여 잘 다스렸다. 황제는 언제 닭이 울면 일어나서는 모든 신하들을 화장대인 능허대 위에 모았다. 먼저 승상인 등원청(거울)을 부른 다음, 차례로 열 다섯 신하를 불렀다. 신하들은 부름에 응하여 차례대로 능허대인 화장대 위에 나와 각기 소임을 다하였으므로, 여인 얼굴의 나라는 크게 다스려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으며, 나라의 법도와 법령이 잘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보는 이마다 황제의 정치를 칭찬하고, 또 이 소문을 들은 사람치고 찾아 뵙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생각이 점점 교만해져서 편안하게 노는 데만 정신을 팔게 되었다. 나라의 정치는저절로 잘 되는 줄 믿었고, 마음이 게을러져서 아침마다 거행되던 화장대우의 조회까지 돌보지 않았다. 다시는 국정을 의논하지 않게 되니 승상인 거울도 집에 들어 박혀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가끔 수군도독인 관정(세수대야)을 부르고, 전장군 소쾌라 부르는 참빗을 불러 의논하는 것이 고작이고, 연지와 분으로 꾸미려 하지 않아서 주연(연지)·백광(분) 등 모든 신하는 일시에 물러가 그들의 소임을 다하지 않았다.

몇 달이 못 가서 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사방에서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도둑의 괴수는 구리공, 살갗에 붙는 때였다. 그는 먼저 광이산인 귀를 점령하고 스스로 흑면대왕이라 일컫고 검은 전포에다 검은 깃발을 날리며 점차 내지로 침입하여 열흘도 채 되지 않아서 오악인 이마와 턱·코와 양쪽 광대뼈를 전부 함락시켰다.

승상인 거울은 매일처럼 걱정을 했지만 오랫동안 황제에게 나아가 뵈읍지 못했으므로 감히 갑자기 임대하여 여쭙지 못했다.

이러는 동안 사방에서 매일같이 도적이 창궐하여 드디어 승양이라는 이가 흑두산이라 불리는 머리에 버글거렸고, 모송인 솜털은 아미산인 눈썹으로 침입했으며, 황염인 이똥은 배석산인 이를 함락시켜 나라의 운명은 극히 위태롭게 되었다.

황제는 어느날 신기가 불편하여 거울인 동승상을 초치했다.

 

승상은 지체없이 아뢰었다.

"오늘 나라의 정세가 이처럼 어지러워져서 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났으나 신 등은 이들을 쳐서 쫓아내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는 승상인 거울을 데리고 화장대인 능허대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지방마다 황폐해져서 흑두산에는 잡목이 어지럽게 자랐고, 이란 놈의 무리가 사방에 흩어져서 수풀 사이사이에 버글거리고, 다섯 개의 멧부리에는 구리공이라는 신하가 검은 깃발, 검은 전포를 휘날리며 갑옷처럼 때를 뒤집어 쓴 군사를 이끌고 도처에다 산채를 구축하고 있지 않는가? 뿐만이 아니었다. 백석산 앞뒤에는 황염의 대군이 극성하여 곡구산 (입)으로부터 적순관(입술) 안에 이르기까지 다 그놈들이 차지한 바가 되어 있었다. 황제는 크게 근심이 되어 승상인 동원청을 돌아보며 이들을 토벌할 계책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이 때, 능허대 밑에서 두 사람이 뛰어 들어오면 소리를 질렀다. "소장 등이 흑두산을 공격하여 이란 놈들을 잡아 오겠습니다."

모두 돌아보니 앞에 오는 사람은 얼굴이 붉고 몸이 굽었으니, 이는 전장군 참빗이요, 뒤에선 사람은 누런 얼굴에 모가 났으니 후장군 빗치개이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참빗을 선봉장으로 삼고, 빗치개를 후군으로 하여서 군사를 일으켰다. 참빗은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흑두산으로 올라가 급습하자 슬양의 무리들은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저마다 앞을 다투어 달아나되, 혹은 광이산으로 도망하고, 흑은 임금의 뒤통수인 상림원 동산 숲 속에 숨는 등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참빗은 결국 한 놈도 생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빗치개가 일진의 점두군(빗)을 거느리고 토벌 작전에 나섰다. 앞으로 긁고 뒤로 훑으면서 슬양의 무리들을 모조리 생포해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두 장수에게 각각 상을 내리고, 슬양의 무리들을 모두 빗집인 첩향성에 몰아 넣고 죽였다. 이리하여 흑두산은 평정이 되었다. 납용(납기름)으로 흑두산 앞쪽을 진압하게 하고, 차연(비녀)을 시켜 흑두산 후면을 진압 하게 하여 싸움의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는 때의 무리인 구리공을 소탕할 차례가 되었다. 여럿이 전략을 의논하는 가운데 동승상 거울이 말했다.

"신이 생각하옵건데, 구리공의 무리가 매우 창궐하여 제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옛날 회음후가 용저를 쳐부순 작전이나, 또 지백이 진양을 친 계책을 쓰지 않고는 격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신하 가운데에서 수군도독관정이 수전에 능하오니 그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좇아 곧 세수대야를 수군대도독으로 삼고, 포엄(물수건)을 전군교위로 삼아 마령(비누)을 거기에 딸려서 먼저 구리공의 본거지인 대채를 공격하게 했다. 구리공은 있는 힘을 다하여 맞섰지만 마침내는 기진맥진하여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다시 포세(수건)가 잔당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돌아왔다. 황제는 크게 기뻤고 마음까지 상쾌해졌다. 포세가 상주하는 대로 3군에 각각 상을 내렸다. 그런 다음에 다시 윤안(곤지)과 방취(향료)에게 명을 내려 이마·코·턱, 그리고 양쪽광대뼈 등 오악의 경계를 지키게 하고, 다시 주연으로 하여금 왕의 뒷동산인 상림원을 지키게 하고, 백광을 시켜 5악의 네 경내를 지키게 하고, 뒤로는 광이산, 아래로는 함이산(턱)에 이르기까지 경계하도록 하였다. 이 때 한 장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 소쾌(참빗)나 관정은 모두 소임을 다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소장만은 혼자 힘을 쓰지 못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아미산을 토벌하여 모송의 무리를 치게 하여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바라보니 이는 평장군 섭강(족집게)이 아닌가, 아미산으로 쳐들어가서 모송을 모조리 뽑아 버리겠노라 한다. 황제가 허락하자, 그는 전포와 철갑을 몸에 두르고, 손에는 쌍점창을 비껴 잡고 눈을 부릅뜬 채 급히 아미산을 쳤다. 모송들은 간담이 떨어지고 혼백이 빠져서, 감히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섭강이 크게 적을 무찌르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다시 또 한 장수가 내달으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소장은 저 황염(이똥)을 토벌하여 백석산성을 평정하고자 하오."

 

여럿이 바라보니 이는 호치장군 양수(칫솔)이다. 황제는 곧 허락했다. 그는 명을 받들고 출전했다. 흰 전포를 입고 은투구에 이화장을 꼬나잡고 일지군을 거느리고 나가는데, 길쭊한 허리하며 풍부한 상체에 예리한 아랫도리 등, 위풍도 당당하여 정말 큰 공을 올릴 장수의 모습이었다. 양수의 군대는 먼저 곡구산으로 들어가 적순관 안의 작은 길을 따라서 급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염의 무리들은 성이 험하고 견고한 것을 믿고 쉽사리 항복하려 들지 않았다. 성밖은 일거에 쓸어 버릴 수 있었지만 성을 넘어 공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멀리서 싸움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떼의 수군에게 명을 내려 양수 부대의 싸움을 돕게 했다. 수군이 먼저 산성을 쓸고 뒤를 이어서 양수의 칫솔군이 공략을 하자, 물은 이 사이를 넘어 성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똥의 무리들은 양면 공격을 받아가며 항전하였으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여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로써 백석산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황제는 그제서야 능허대 위에 올라 사방을 관망하였다. 강산은 옛날의 화려함을 회복하고, 땅덩어리는 번쩍번쩍 광택이 나며 전날의 기상을 완전히 되찾은 것 같았다. 이어서 논공행상이 거행되었다. 황제는 기쁜 마음으로 여러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을 불러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리고 벼슬을 높였다. 주연은 화국공으로 봉하고 윤안은 이경후로 봉했다. 그리고 향료 방취를 상산후로 삼았다.

"소장이 만일 수군을 독려하여 구리공을 무찌르지 않았던들 주연·백광 등이 공을 세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오나 지금 이 사람의 공로는 두 장수의 아래에 있사오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오니까?"

 

황제는 비로소 깨닫고, 이에 관정에게 치사하고 복성공으로 삼았다. 이어서 마령은 도성후로, 양수는 백양후로, 납용은 도평후, 차연은운성후, 섭강은 칠성후로 각기 봉하고, 잔치와 가무를 벌이게 하였다. 열 다섯 장수들은 모두 황제의 은덕에 감격하여 각기 맡은 바 직책에 부지런하여 이후로부터는 나라가 태평하게 되었다.

 

요점 정리

연대 : 조선 후기

작자 : 안정복

형식 : 한문 소설, 화장도구를 의인화한 가전

성격 : 풍자적,

이해와 감상

조선 후기에 안정복 ( 安鼎福 )이 지은 한문소설. 화장도구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으로, ‘ 효장황제장대기공록(孝莊皇帝粧臺紀功錄) ’ 이라고도 한다. 작자의 문집인 ≪ 순암집 順菴集 ≫ 의 〈 부부 覆 螺 〉 에 실려 있다.

 

원작자는 알 수 없고, 이 원본은 안정복이 지은 것으로 그 중 ‘ 이경 ’ · ‘ 복셩 ’ 등의 난역(難譯)의 한글을 그대로 둔 것으로 보아서 당초에 한글본을 안정복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용국(여자얼굴)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 열다섯이나 되는 위성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효장황제(단정한 얼굴)의 경대에 관한 일을 맡았다. 동원청(거울)은 늘 황제의 좌우에 있어서 황제의 얼굴이 얌전하지 않거나 의관이 단정하지 못하면 반드시 말씀을 드려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 아래에는 열다섯 신하가 있는데, 태부 주련(연지), 소부 백광(분), 호치장군 양수(양치), 수군도독 관정(세수), 무위장군 포세(수건), 전전지휘사 포엄(휘건), 참군교위 마령(비누), 형부시랑 방취(육향), 총융사 윤안(곤지), 안무사 백원(면분), 도지휘사 납용(납유), 평장군 섭강(족집게), 도어사 차연(비녀), 전장군 소쾌(빗), 후장군 소진(참빗) 등이었다.

황제는 늘 이들의 도움으로 여용국을 잘 다스렸으나, 나라가 태평하자 점차 교만하고 안일해져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도적들의 괴수는 구리공(때)인데 이들은 먼저 광이산(귀)을 점령하고, 나중에는 오악산(이마 · 턱 · 코 · 좌우 광대뼈)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슬양(이)은 흑두산(머리)에 웅거하고 모송(잡털)은 아미산(눈썹)에 침입하였다.

이에 전후장군 소쾌(빗)와 소진(참빗)이 나가 슬양(이)을 잡고, 수전을 잘하는 관청(세수)이 나가 구리공(때)을 섬멸하고, 섭강(족집게)이 나가 모송(잡털)을 잡았다. 그러자 황제는 이들을 크게 상주고, 나라는 다시 아름답게 되었다.

이 작품은 화장도구를 의인화한 가전으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치세에 힘쓰면 나라가 태평하나 안일하면 나라가 어지러움을 풍유하고 있다. ≪ 참고문헌 ≫ 順菴集, 李朝漢文小說選(李家源 校注, 敎學社, 198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안정복(安鼎福)

 

1712(숙종 38) ∼ 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 · 실학자.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 · 한산병은(漢山病隱) · 우이자(虞夷子) · 상헌(橡軒). 제천(提川) 출신.

 

시망(時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우(瑞羽)이고, 아버지는 증 오위도총부부총관 극(極)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익령(益齡)의 딸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가 문〕

 

고려조에 태조를 도와 가문을 연 안방걸(安邦傑)로부터 대대로 중앙의 고급관료를 지냈으나 안정복의 가까운 선조에 이르러 영락하였다. 즉 그의 고조 시성(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 신행(信行)은 그 보다도 못한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으며, 조부대에 이르면 남인의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더욱 영락한 환경으로 전락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또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일생을 처사(處士)로 지낸 부친 극의 입지에 따라 오랜 동안 정주지가 일정하지도 않아 늦게 학문을 시작하였다. 즉 10세가 되어서야 ≪ 소학 ≫ 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친 · 외가의 족적인 범위 내에서 학문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무주(茂朱) 적상산에 들어가자 그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편 외가인 전남 영광에도 부친과 함께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외가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관계로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안정복은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李氏)가 역사에 대한 식견이 깊었다고 회고하였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 복거하던 그의 일가는 1735년 조부의 사망으로 이듬해 고향인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慶安面 德谷里 : 현재 광주군 경안면 덕곡리, 일명 텃골)에 정주하였다. 텃골로 돌아온 그는 ‘ 순암(順菴) ’ 이라는 소옥(小屋)을 짓고 학문 생활에 몰입하였다.

그는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 이외에 음양(陰陽) · 성력(星曆) · 의약(醫藥) · 복서 ( 卜筮 ) 등의 기술학(技術學)과 손자 ( 孫子 ) · 오자(吳子) 등의 병서, 불교 · 노자(老子) 등의 이단사상, 그리고 패승(稗乘) · 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 때문에 방술가(方術家)라는 비칭을 듣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였다.

〔생애 및 저술〕

 

1737년에는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 치통도 治統圖 ≫ 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 도통도 道統圖 ≫ 를 지었다. 이듬해는 ≪ 치현보 治縣譜 ≫ 를 저술했으며, 이어 동약 ( 洞約 )의 모체라 할 수 있는 ≪ 향사법 鄕社法 ≫ 을 지었다.

그 뒤 1740년 29세에는 그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 하학지남 下學持南 ≫ 상 · 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그가 온 정렬을 기울여 저술했던 관계로 말년에 이 책을 펴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 정전설 井田說 ≫ 을 내 놓았고,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 내범 內範 ≫ 을 짓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유형원(柳馨遠)의 ≪ 반계수록 磻溪隨錄 ≫ 을 입수하였다. 이는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자들과의 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1775년에 〈 반계연보 磻溪年譜 〉 를 찬하였다.

1746년에는 광주 안산면 성촌리(安山面 星村里 : 현재 안산시 성포동)에 거주하던 이익(李瀷)을 처음 찾아 문인이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연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익과의 만남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이익의 문인들을 이 때부터 알게 되었다.

윤동규 ( 尹東奎 ) · 이병휴 ( 李秉休 ) 등은 동료나 선배로서 권철신 ( 權哲身 ) · 이기양(李基讓) · 이가환(李家煥) · 황덕일 ( 黃德壹 ) · 황덕길 ( 黃德吉 ) 등은 후학 또는 제자로서 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느 정도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35세라는 장년기를 가학(家學)으로 보낸 탓에 여기에서 형성된 자기 나름의 학문체계(學問體系)와 사유구조(思惟構造)는 성호를 비롯한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에서도 쉽게 변화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그가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인 것도 이러한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749년 문음 ( 門蔭 )직인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해 이듬해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고, 1752년에는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해는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자신의 건강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해 1756년 〈 이리동약 二里洞約 〉 을 짓고, 이듬해 이를 바탕으로 ≪ 임관정요 臨官政要 ≫ 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애를 대표하는 ≪ 동사강목 東史綱目 ≫ 을 1759년 48세라는 중년기에 일단 완성하였다. 그리고 계속해 1767년에는 ≪ 열조통기 列朝通紀 ≫ 를 저술하는 한편, 1753에는 스승 이익의 저술인 ≪ 도동록 道東錄 ≫ 을 ≪ 이자수어 李子粹語 ≫ 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1762년에는 이익이 일생 정열을 바쳐 저술한 ≪ 성호사설 星湖僿說 ≫ 의 목차 · 내용 등을 첨삭, 정리한 ≪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 을 편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 갔으며, 이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1772년부터 1775년까지 세자익위사의 익찬 ( 翊贊 )과 위솔(衛率) 등이 되어 세손(뒤에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세손이 성리학에 대해 질문하자 ‘ 이이 ( 李珥 )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 근본이 있으므로 이황의 학설을 좇는다. ’ 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1776년에는 충청도의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 자신이 쌓아온 성리학자로서의 경학지식(經學知識)을 마음껏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수행한 주요 치적은 동약(洞約) · 향약(鄕約) · 향사례 ( 鄕射禮 )의 실시, 방역소(防役所)의 설치, 사마소 ( 司馬所 )의 복설 등이다.

이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 의빈부도사(義貧府都事) ·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 등을 역임한 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으로 보냈다.

그는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라는 청사(廳舍)를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평시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여택재는 그 뒤 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다시 정부의 도움으로 재건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말년에는 정주학 이외의 이단사상(異端思想)의 배척에 앞장섰다.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도전이 사회문제로 다가오자 1785년(정조 9)에 ≪ 천학고 天學考 ≫ 와 ≪ 천학문답 天學問答 ≫ 을 저술해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는 곧 현실세계의 명분론적(名分論的)인 위계질서의 옹호이며, 이러한 사상은 일체의 반질서적인 사상이 담긴 도교나 불교, 심지어는 양명학까지도 부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보수적인 사회사상은 당시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독주의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생전 노론 천하인 1790년에 종2품인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랐다. 사후인 1801년에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 ( 僻派 )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아 정2품의 자헌대부 ( 資憲大夫 )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성호학파의 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관료로서 현달(顯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직생활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듯하다. 부친의 평생 처사 생활로 종답(宗沓)을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한 사실은 그의 생활이 어떠했던 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문 사상〕

 

그는 18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변화기에 살면서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적인 측면의 고양과 서구문물 가운데, 특히 천주교 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가 이익을 만나기 전인 1746년까지는 자신의 학문적인 경지를 스스로 형성해 갔던 일개 선비에 불과하였다.

스스로 학문 연마과정에서 이룩한 ≪ 임관정요 ≫ 와 ≪ 하학지납 ≫ 은 그의 초기 사상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전자는 뒷날 유형원의 ≪ 반계수록 ≫ 의 영향과 이익의 견해로 보완되었지만 중심 사상은 청년기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임관정요 ≫ 는 후대 정약용(丁若鏞)의 ≪ 목민심서 牧民心書 ≫ 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 하학지남 ≫ 은 주자의 ≪ 소학 ≫ 을 모방한 것으로 저술의 기본이념은 ‘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 이라고 밝히면서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의 이기논쟁을 직 · 간접으로 반박하였다. 1744년에 접한 유형원의 ≪ 반계수록 ≫ 은 그의 학문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현실의 개혁문제 관심을 경주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그가 스스로 이익을 직접 찾게 되었다고 이해된다.

 

1746년 이익을 방문해 그의 문인이 되면서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 무렵 이익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운집하였다. 특히 안정복과 깊은 교류관계를 가진 사람은 인천에 살던 윤동규와 충청도에 거주했던 이익의 조카인 이병휴 및 경기 안산의 이익의 자인 이맹휴(李孟休), 그리고 이인섭(李寅燮) · 이구환(李九煥)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경기 남부와 근기와 충청도에 거주했고, 전통적으로는 퇴계학통을 이었다. 이들은 영남남인들과도 교류를 유지했는데, 이상정(李象靖)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익의 문인이 된 뒤 그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역사학에 대한 시각, 그리고 서구사상의 접촉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이 1715년경에 쓴 ≪ 사칠신편 四七新編 ≫ 을 이 때 접한 그는 이 책을 보고 성리학에 대한 자신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리학을 논할 때는 이익의 견해를 바탕으로 퇴계와 정주로의 계제적인 이론의 근원성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였다.

한편, 역사학은 유형원의 ≪ 동사강목범례 東史綱目凡例 ≫ 를 효시로 하여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된 ≪ 동사강목 ≫ 은 유형원 → 이익 → 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그가 ≪ 반계수록 ≫ 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더욱 자세하게 배운 결과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익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깊이와 폭을 더했고, 이에 자신의 학문은 더욱 견고해져 나름의 경험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 동사강목 ≫ 은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이 죽은 뒤부터 그는 자신이 이익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료와 후학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표방하였다.

말년에 이르면서 정치권은 정적인 노론의 전권시대로 접어들었고,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도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전통적인 정주학의 가치관의 쇠미를 드러내면서 사상적인 갈등을 보였다. 이에 그는 이단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참여를 통해 행동으로도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의 ≪ 천학고 ≫ 와 ≪ 천학문답 ≫ 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 · 권철신 등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이단성을 경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리의 이단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지간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 ( 權日身 )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낸 것도 이러한 측면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의 역사상의 위치는 정주학의 전통이 내재적으로 발전되는 과정과 대외적인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근대 사상의 전개가 요구되는 과도기에 해당된다.

〔평 가〕

 

그는 이 시기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남인(近畿南人)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그는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인 실천보다는 학문적 ·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공헌이 더욱 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인 성과는 많은 저술로 나타났는데, 위에서 언급한 저술 외에 ≪ 잡동산이 雜同散異 ≫ 나 ≪ 史論 ≫ 등은 일정한 형식을 갖춰 정리된 저술은 아니더라도 그의 경학관이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그의 저술은 여러 기록에 따라 일정하지 않아 정확한 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20여 편 이상으로 파악된다.

≪ 참고문헌 ≫ 正祖實錄, 順菴文集, 星湖文集, 邵南文集, 貞山雜著, 順菴 安鼎福硏究(沈 齡 俊, 一志社, 1985), 東史綱目硏究(姜世求, 民族文化社, 1994), 順菴 安鼎福의 學問과 思想硏究(姜世求, 혜안, 1996), 安鼎福의 天學論考(李元淳, 이해남화갑기념 사학논총, 1970), 順菴 安鼎福의 生涯와 思想(李求鎔, 江原大學論文集 6, 1972), 安鼎福의 下學指南考(尹南漢, 人文科學 7-8, 1973), 愼後聃 · 安鼎福의 西學批判에 관한 硏究(崔東熙, 高麗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76), 順菴 安鼎福의 鄕村自衛論硏究(潘允洪, 軍史 5,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2), 安鼎福의 列朝通紀에 대한 一考察(金世潤, 釜山女大史學 3, 1985), 順菴 安鼎福의 朝鮮時代認識-列朝通紀의 史論을 中心으로-(金世潤, 釜山女大史學 4, 1986), 順菴 安鼎福의 社會思想(韓相權, 韓國史論 17, 서울대, 1987), 朝鮮後期 廣州와 水原地方의 鄕約(上)-安鼎福의 二里洞約과 禹夏英의 鄕約說을 中心으로-(畿甸文化 5, 1989), 安鼎福(黃元九, 韓國市民講座 6, 一潮閣, 1990), 광주안씨 고문서해제(안승준, 古文書集成 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女容國平亂記

 

조선 후기 산문작품. 지은이와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화장도구를 다루는 여인을 효장황제(孝莊皇帝)라 일컫고, 얼굴 단장하는 일을 나라 다스리는 일에 비유하여 써내려간 의인체 우화문학이다.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와 같은 계열의 규방수필문학에 속하며 고려 말의 가전체소설과 조선시대의 몽유록 등과 그 맥이 닿는다. 효장황제가 잠시 게으른 틈을 타서 구리공(垢裏公;얼굴의 때)·슬양(蝨痒;머릿니)·황염(黃染;이의 똥)·모송(눈썹부분의 잔털) 등이 여용국(女容國;얼굴)을 침략하였다. 이에 소쾌(梳快;얼레빗)·소진(梳眞;참빗)·유진(油眞;참기름)·섭강(족집게)·관청(세숫물)·말연[磨零;비누]·양숙(楊叔;양칫대) 등이 적당들을 모두 토벌한다. 그리고 여용국이 평정된 뒤 방취(芳臭;육향)·백광(白光;분)·백원(白圓:면분)·윤안(潤顔;곤지)·주연(朱鉛;연지)·차연(釵延;비녀)·사영(絲纓;모시실) 등으로 인하여 다시 나라 안이 태평해진다는 이야기이다. 박순녀(출처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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