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by 송화은율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을지문덕(乙支文德)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기공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그대의 신기(神奇)한 책략(策略)은 하늘의 이치(理致)를 다했고,
오묘(奧妙)한 계획(計劃)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전쟁(戰爭)에 이겨서 그 공(功) 이미 높으니,
만족(滿足)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요점 정리
작자 : 을지문덕
형식 : 오언 고시
성격 : 풍자시
표현 : 대구법, 억양법, 반어법
압운 : 상성 '紙' 운인 理, 止
주제 : 적장 우중문 조롱과 적장의 오판 유도, 적장에 대한 조롱과 야유
구성 :
기 |
신기한 계책 칭찬 |
승 |
오묘한 꾀 칭찬 |
전 |
전쟁의 공 칭찬 |
결 |
군대 철수 요구 |
의의 :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한시
내용 연구
신책구천문/묘산궁지리
기구와 승구로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신기한 '그대의 계책'과 '기묘한 꾀'가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를 통달하였다고 함은 적장을 달래기 위한 과찬이다. 이의 속뜻은 그 정도의 계책은 이미 간파를 하고 있다는 을지문덕의 자신감이 풍기는 표현이다.
전승기공고
전구이다. 기구, 승구와 같은 거짓 찬양이다. 즉 싸움에 이겨 그대의 공이 한껏 높았다고 하여 적장 우중문에 대한 야유와 조롱거리를 마련한 셈이다.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하루에 7번이나 패한 이후, 이 한시를 보낸 것은 그 패배가 거짓이었음을 암시하여 적장으로 하여금 앞으로 수나라의 승리는 없을 것임을 경고한 내용이다.
지족원운지
결구로 을지문덕의 강한 자신감이 함축된 주제행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구절인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지족불욕, 지지불태)'를 암암리에 인용한 대목이다. 이는 곧 전쟁을 끝낼 것을 권유하는 문구 같지만 그 속뜻은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함축성이 있는 경고문이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구려의 명장(名將) 을지문덕이 수(隋)나라의 30만 대군을 맞아 살수에서 싸울 때에 적장(敵將)인 우중문(于仲文)에게 조롱조(嘲弄調)로 지어 보낸 시이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는 대구(對句)로 되어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우중문의 신기(神奇)한 책략과 기묘한 계획을 잔뜩 칭찬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그보다 훨씬 낫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을지문덕은 하루에 7번을 싸워 거짓 패하면서 적군을 평양성 북쪽 30리 지점까지 유인하여 크게 이겼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중문에게 보낸 것이므로, 전구(轉句)에 쓰인 '旣(이미)'라는 글자에는 이제 더 이상 이길 기회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가 짙게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고는 만약 싸움을 그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결구(結句)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규보는 그의 '백운소설' 서두에서 이 시를 가리켜 '구법(句法)이 기고하여 아름답게 꾸미려는 투가 없으니, 후세의 맥빠진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해와 감상1
고구려 영양왕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지은 한시.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 고체의 단형시(短形詩)이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 이 시의 제작경위가 기록되어 있으며, 제목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므로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또는 ‘유수장우중문(遺隋將于仲文)’이라고도 한다.
≪동문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선집(詩選集)에는 오언절구 속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 염법(簾法 : 평칙법)으로 보아 절구라고는 할 수 없으며, 특히 근체시(近體詩)가 완성된 것이 당대(唐代)이고 보면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으므로, 오언고시에 넣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원시는 다음과 같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헤고 교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었네. 싸움에 이겨 공이 하마 높았으니 만족하고 이만 그쳐 주게나(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이 가운데서 결구의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에서 ‘云(운)’을 ‘實(실)’자로 풀이하는 사례도 있어 왔으나 이것은 뜻이 없는 ‘助(조)’자로 보아야 옳다.
유득공(柳得恭)은 ≪영재집 那齋集≫에서 을지문덕을 평하기를 ‘문무가 구미(具美)한 진재사(眞才士)’라 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는 ≪백운소설≫에서 이 시를 평하여 ‘구법(句法)이 기고(奇古)하고 굳센 기상이 있는 작품’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白雲小說, 東文選.(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시와 절구
구분 |
고시 |
절구 |
개념 |
고체시라고도 함 육조 시대 이전의 한시 근체시 이전의 모든 시 |
4구로 이루어진 근체시의 한 형태 |
종류 |
오언고시, 칠언고시 |
오언 절구, 칠언 절구 |
특징 |
근체시에 비해 자유로운 형태 한 편의 구 수에 제한이 없음 평측과 압운에 일정한 규칙이 없음 |
근체시 중 최소의 시 형태 평측과 압운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 기승전결의 구성을 취함 |
작품 |
태평송, 영고석 |
편찬집 '만수당인절구' |
심화 자료
을지문덕
고구려 명장으로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이 113만 여의 수륙양군(水陸兩軍)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자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 적군의 허실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거짓 패배를 가장하여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라는 희롱의 시를 보냈다.
우중문이 비로소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닫고 지친 군사로 회군(回軍)하자, 을지문덕은 살수(薩水:淸川江)에서 수나라의 후군(後軍)을 무찔러 대승하였다(薩水大捷).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살수대첩
612년(영양왕 23) 고구려가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침공을 격퇴하고 대승리를 거둔 싸움으로 수(隋)나라가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있을 때, 고구려는 통일된 중국의 세력이 반드시 동쪽으로 신장(伸長)해 올 것을 예견하여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영양왕은 598년 말갈족(靺鞨族)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요서(遼西)지방을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략상의 요지를 선점(先占)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당시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려다가 갑작스러운 천변지이(天變地異)로 이를 중지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 때 고구려는 수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금의 몽골지방에 있던 돌궐(突厥)과 상통(相通)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수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다.
수양제는 612년 1월 113만 38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 중의 수군(水軍)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大同江)으로 쳐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대패(大敗)하였다. 한편 양제가 친히 거느린 육군의 1개 부대는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초조한 수군(隋軍)은 별동대(別動隊) 30만 5000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평양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압록강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깊숙이 쳐들어왔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군에게 거짓 항복하여 적진(敵陣)에 들어가 그들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고 돌아온 뒤 그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침입한 수군의 대장인 우중문(于仲文)에게 1편의 시(詩)를 지어 보내 그의 어리석음을 비꼬았다. 수군은 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다시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감행하였다. 살수싸움에서 수군이 크게 패하여 살아 돌아간 자는 몇 천명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한다. 수양제는 중국의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많은 물자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이점만을 믿었으나, 거리가 멀어 군량(軍糧) 공급이 곤란할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또 고구려의 장병(將兵)이 모두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강병(强兵)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요새가 험고(險固)하여 쉽사리 공취(攻取)할 수 없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수양제는 수륙(水陸)양면에서 모두 패전했으므로 부득이 철군했는데, 이듬해에도 다시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저항은 여전히 견고하여 그 중의 요동성(遼東城)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가 왔으므로 서둘러 철퇴하였다. 수양제는 반란을 평정하고 제3차 고구려원정 길에 나섰다가 다시 실패하여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우중문
수나라 양제 때의 장군, 우문술과 함께 고구려 침략군 30만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을지문덕에서 패하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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