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가
by 송화은율어부가
이런 (인간세상) 속에 근심 걱정할 것 없으니 어부의 생활이로다.
한 척의 조그마한 배를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띄워 놓고
인간 세상의 일을 다 잊었으니 세월 가는 줄을 모르겠도다.
(아래로) 굽어보니 천 길이나 되는 푸른 물, 돌아보니 겹겹이 쌓인 푸른 산
열 길이나 되는 속세의 띠끌(어수선한 세상사)은 얼마나 가리워졌는가
강호에 밝은 달이 밝게 비치니 더욱 무심하구나.
연잎에 밥을 싸고 버들가지에 잡은 물고기를 꿰어서,
갈대와 억세풀이 우거진 곳에 배를 대어 묶어 두니,
이런 자연의 참된 재미를 어느 분이 아실까.
산봉우리에 한가로운 구름이 피어나고(일어나고) 물 위에는 갈매기가 날고 있네.
아무런 사심없이 다정한 것은 이 두 가지뿐이로다.
한평생의 시름을 잊어 버리고 너희들과 더불어 지내리라.
서울을 돌아보니 궁궐(임금님 계신 곳)이 천 리로구나.
고깃배에 누워 있은들 (나랏일을) 잊은 적이 있으랴.
두어라, 나의 걱정할 일이로다. 세상을 건져낼 현인이 없겠느냐?
요점 정리
지은이 : 이현보
연대 : 조선 중종 때
갈래 : 평시조, 연시조
성격 : 강호한정가, 자연친화적
제재 : 어부의 생활
주제 : 자연을 벗하는 풍류적인 생활, 자연에 은거하는 어부의 생활
화자의 정서와 태도 :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태도
표현 : 한자어가 많고, 정경 묘사가 구체적이지 않고 관념적임
의의 - 효종 2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영향을 끼쳤다.
기타 - “어부가(漁父歌)”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12장으로 된 장가와 10장으로 된 단가로 전해져 왔는데, 이현보가 이를 개작(改作)하여 9장의 장가, 5장의 단가로 만들었다.
내용 연구
1장 |
자연에 묻혀 살기를 소망 - 세상사를 잊은 어부의 한가로운 생활 |
2장 |
자연에 몰입하는 심정을 그림 - 속세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유유자적한 삶 |
3장 |
자연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이 적음을 탄식 |
4장 |
한가롭게 지내고 싶은 소망을 그림 - 자연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추구함 |
5장 |
세상에 대한 근심과 염려 |
어부가 지문
이듕에 : 인간 생활, 이 세상, 속세
일엽-편주(一葉片舟) : 한 척의 조그마한 배
만경파 : 넓은 바다
인세 : 인간세상의 일, 홍진
니젯거니 : 잊었으니
천심녹수 : 천 길이나 되는 푸른 물
만첩청산 : 겹겹이 둘러 싸인 푸른 산
십장홍진 : 열 길이나 되는 속세의 티끌
언매나 : 얼마나
월백하거든 : 달이 밝게 비치니
더옥 무심하얘라 : 세속적 욕심에 관심이 없는 화자의 모습
청하에 : 연잎에
바블 : 밥을
녹류 : 푸른 버들까지
노적화총 : 갈대와 억새풀이 가득한 곳
일반청의미 : 자연의 참된 의미
산두 : 산봉우리
한운 : 한가로운 구름
백구 : 갈매기
무심 : 아무 욕심이 없음
다정하니 : 다정한 것은
두 거시로다 : 두 가지로다
너 : 한운과 백구(의인법)
조차 : 따라
노로리라 : 놀리라
일생에 ~ 노로리라 : 물아일체의 경지
장안 : 서울(한양)
북궐 : 궁궐
어주 : 고기잡이 배
니즌 스치 : 잊은 적이
이시랴 : 있으랴
안니라 : 아니라
제세현 : 세상을 구제할 만한
어주에 누어신들 니즌 스치 이시랴 : 다른 장과는 달리 세속에 관심을 드러내 보여 상충된 모습이 보인다. 화자는 나라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현실 세계와 자연 친화 사이의 내적 갈등을 넘어 사대부 도리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자연 속에 있으면서 현실을 지향하는 내면 의식
이해와 감상
어부가(漁父歌)는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어부가'를 개작한 것으로 '어부단가'라고도 불리우며, 우리 선인들의 요산요수의 운치있는 생활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자연을 벗하며 고기잡이를 하는 한가한 삶에서 당시 양반 계급의 풍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서 아무리 자연 속에서 은둔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대한 관심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제5장의 초장과 중장에 "장안을 도라보니 북궐이 천리로다. 어주에 누어신들 니즌 스치 이시랴"라는 말에서 작자의 세상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 또한 문학 작품이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작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조선 중기에 이현보(李賢輔)가 지은 시가. 단가 5장과 장가 9장으로, ≪농암집 聾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가 그 당시에 얻은 ≪악장가사≫의 〈어부가〉 12장과 다른 〈어부가〉 10장이 말이 많고 순서적이지 못하고 혹 중첩이 있음(語多不倫或重疊)이 옮겨 쓰는 과정에서 사실과 다르게 전해진 것으로 판단하고, 전자는 3장을 제거하여 9장으로 장가(長歌)를 지어 읊을 수 있게 하였고, 후자는 축약하여 단가(短歌) 5결(价 : 곡을 이르는 말)로 짓고 엽(葉)을 하여 창(昌)으로 부를 수 있게 하였다.
전반적으로 ≪악장가사≫의 〈어부가〉 12장에서 보이는 많은 한글토를 생략하였고, ‘지곡총 지곡총 어嗜와 어嗜와’를 ‘지곡총 지곡총 어사와’로 축약하였다. 또한 일부 행들을 다른 시어로 바꾸기도 하고, 다른 장들의 시행을 다시 엮기도 하였다.
제1장 제4행의 ‘의선어부(倚船漁父)ㅣ 일견(一肩)이 고(高)로다’를 비롯한, 제3장의 제4행, 제4장의 제3행, 제6장의 제4행, 제7장의 제1·2·4행 등은 새로 바꾼 것들이다. 제2장의 제4행, 제4장의 제4행, 제6장의 제1·2·3행, 제7장의 제3행, 제8장의 제4행, 제9장의 제1·2·3·4행들은 ≪악장가사≫〈어부가〉의 다른 장의 행들을 각각 옮겨 놓고 있다.
≪악장가사≫〈어부가〉는 다른 〈어부가〉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개작 동기를 실현하여, 순서화와 중첩의 삭제에서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윤선도(尹善道)는 ‘소리가 서로 응하지 않고 말뜻이 잘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대개 옛 글을 모으는 데에 얽매였던 관계로 옹색해지는 결함을 면하지 못했다’(音響不相應 意不甚備 盖拘集古 故不免於有局促之缺)고 평하였다.
≪참고문헌≫ 聾巖集, 孤山遺稿, 朝鮮詩歌史綱(趙潤濟, 을유문화사, 1937). 高麗末·李朝初의 漁父歌(李佑成, 論文集 9집, 성균관대학교, 1964), 漁父歌攷(崔東元, 人文論叢 24집, 부산대학교, 1983), 漁父歌의 表象性 硏究(呂基鉉,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漁父歌系 詩歌硏究(宋靜淑,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일찍이 고려 때부터 전하여 오던 것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개작(改作)한 것이다. 여기 실은 작품은 어부 단가 5장(漁父短歌五章) 가운데 세 수인데, 농암의 어부가는 한자어가 많고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결점을 지녔으며, 정경의 묘사도 관념적이다. 후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영향을 준다.
생업을 떠나 자연을 벗하며 고기잡이 하는 풍류객으로서의 어부의 생활을 그린 이 작품은, 우리 선인들이 예부터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운치 있는 생활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 속에 묻혀 은일(隱逸)을 즐겼을망정 마음 속에는 인간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니, ‘人世(인세)를 다 니젯더니’와 ‘니즌 스치 이시랴’라 한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것으로 애국 충정을 나타낸 것이다. 정경의 묘사나 생활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나타냄이 없이 ‘千尋綠水(천심녹수), 萬疊靑山(만첩청산)’과 같이 상투적인 용어를 구사하여 관념적으로 어부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심화 자료
이현보(李賢輔)
1467(세조 13)∼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靈翁). 예안 출신. 참찬 흠(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 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效嚬歌〉·〈농암가 聾巖歌〉·〈생일가 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참고문헌≫ 聾巖集, 聾巖先生年譜, 聾巖의 詩歌觀(柳增善, 詩文學 4, 195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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