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안수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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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민족의식과 윤리성

신동한

 

 

 

작가 안수길은 해방 전에는 만주에 머무르면서 문학 활동을 계속하였다. 당시의 만주에는 국내의 망명객과 독립지사 등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고 또 농촌 출신의 이민들이 삶의 길을 찾아 만주 곳곳에서 개간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1935년 《조선문단》지에 단편 <적십자병원장> 콩트 <붉은 목도리>가 함께 당선된 후 해방에 이르도록 당시 만주에서 발간되던 한글 신문인 만선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줄기차게 작품 발표를 해 나갔다. 그 무렵 만선일보에는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옮겨 온 수많은 작가, 시인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편집국장으로 염상섭을 비롯하여 박팔양, 김조규, 김만선, 송지영, 이석훈, 손소희, 윤금숙 등 쟁쟁한 국내 문인들이 모여 마치 망명 문단을 형성하는 느낌마저 주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작가 안수길은 누구보다도 문학에 대한 집념과 의욕을 불태워 1943년에는 첫 창작집 《북원》울 꾸며냈다. 당시의 국내 문단은 이미 동아일보, 조선의 양대 신문이 강제 폐간되고 《문장》 《인문평론》 등의 문예지도 없어진 채 일문으로 작품을 싣는 친일 문예지 《국민문학》만이 나오고 있던 암흑의 시대였다.

 

이러한 어두운 시절에 한글의 작품집이, 그것도 투철한 민족의식을 내세우는 내용을 담고 책이 되어 나왔다는 것은 문학사적인 입장에서도 특기되어야 할 일이다.

 

작품집 《북원》에는 12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작품 내용은 대부분이 만주의 농촌을 무대로 한 겨레들의 생활상을 리얼하면서도 스케일이 큰 필치와 구성으로 엮어 나가고 있다.

 

작품집 《북원》을 내놓은 후 그는 1944년에 만선일보에 1년여에 걸쳐 장편 <북향보>를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작품으로 만주 개척민의 끈질긴 농촌 생활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 나간 작품이다.

 

이렇게 해방 직전 건강이 약화되어 병상에 있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함남 흥남에서 내려와 3년여의 요양 생활을 하느라 그 사이에는 작품 집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건강을 회복하자 1948년에 월남하여 서울에 자리잡은 후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처음 쓴 작품이 1949년에 발표한 단편 <여수(旅愁)>다. 그후 계속하여 <밀회> 〈범속〉 <취국(翠菊)>등의 여러 단편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뛰어나게 치밀한 구성으로 필치에 있어서도 더욱 정채의 빛을 띠고 있으며, 또 두드러진 특색은 작가의 관심이 과거의 농촌에서 이제는 도시로 그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는 사이에 6.25사변을 겪어 나가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단편 <제삼인간형>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는 <제삼인간형>을 통해 6.25를 겪어 나가는 지식인의 고민상을 여실히 그려놓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사변을 통한 세 가지 인간형을 그리는 가운데서 작가 스스로를 투영시키면서 가장 전형적인 인산상을 꾸며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54년에  해방 후로는 처음의 작품집인 《제삼인간형》에 수록되고 1955년에는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면서 여러 권의 작품집을 꾸며내기도 했다. 《초련필담》(1955년) 《풍차》(1963년) 《벼》(1965년) 등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작품 세계는 도시 소시민의 생활에 비쳐지는 명암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집을 꾸며낸 후에 발표된 작품들에는 <서장> <IRAQ에서 온 불온문서> <효수> <꿰매입은 양복바지> 등이 있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지난날보다 두드러지게 사회적인 관심에 역점을 두는 무거운 문제 의식을 작품 위에 크게 반영시키고 있다.

 

한편 안수길의 작품 계열에서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작가에 비겨 월등하게 많은 장편 작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장편 <북간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내세워질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 문학의 뛰어난 역작으로 높이 평가되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한말에서 광복에 이르는 동안의 민족적 운명을 북간도를 배경으로 웅혼하게 그려나간 작품 <북간도>는 안수길 문학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로망으로 문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는 <북간도> 외에도 수많은 장편을 쓰고 있다. <화환> <제이의 청춘> <부교> <생각하는 갈대> <백야> <유성> <내일은 풍우> <창을 남으로> <황진이> <성천강> 등이 그의 주요 장편이고 또 절필이 되고 만 미완의 두 장편 <동맥>과 <이화에 월백하고>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장편 <성천강>은 그의 대표작인 <북간도>와 쌍벽을 이룰만한 역작으로 1968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5년여에 걸쳐 집필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개화기에서 3.1운동에 이르는 격동기를 겪어 나가는 한 지식인을 그의 출신인 함경도를 중심으로 그리는 가운데 당시의 사회상을 가장 뛰어나게 작품화한 것이다.

 

작가 안수길은 출발에서부터 투철한 민족의식과 또 격렬한 현실과의 대결에서 스스로의 문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어느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토로하고 있다.

 

맨 처음 문제 의식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다. 문학이 무척 좋아서 읽고 써 보고 열중하는 사이에 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사느냐를 더듬어 찾는 것이 나의 작품을 뚫고 있는 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나에게 있어서 작품은 어떻게 사느냐를 탐구하는 도정(道程)이 된다.

 

이와 같은 말과 같이 그의 문학은 언제나 어떻게 사느냐 하는 현실 대결의 윤리 의식의 모색 가운데에서 형성되어 나온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살아나가는 길, 즉 윤리의 세계를 현실과의 강렬한 대결 가운데 찾으려 애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가장 구체적인 애정 문제나 또 시국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작가의 어떻게 사느냐 하는 윤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가장 비근한 작품의 예로 중편 <사루비아 핀 정원>과 <귀심(歸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작품은 작가 안수길의 작품 활동에서는 후자에 속하는 것들이다. 또 그만큼 원숙하고 안정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사루비아 핀 정원>에 나오는 최지애와 정영주의 부부관계는 비정상의 것이다. 즉 전남편인 은행원과 사별한 후 하숙하고 있던 10년 연하의 학생이었던 정영주와 우연한 기회에 맺어진 데서 그 생활은 평탄치 않은 출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또 등장하는 최지애의 여학교 선배인 순임이의 남편인 화가 지세훈과의 묘한 관계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연상의 아내에 반발하여 방탕한 애정 편력을 계속하는 정영주는 최지애를 더욱 곤경에 빠뜨린다. 즉 지애의 여학교 선배이며 지세훈 화백의 아내인 순임이의 사촌 여동생인 애련이와 정영주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질투와 애정이 교차하는 남녀 관계를 작가는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이냐 하는 데 대한 인간의 고민상을 구체적이면서도 여실하게 보여준다.

 

자칫하면 불륜의 탈선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이와 같은 복잡한 애정 관계를 그려 나가는 데 있어서도 작가는 가장 건전한 윤리성을 보여준다. 즉 정영주는 애련이 곁을 떠나는 데서 자살미수 끝에 그 동안의 과오를 회개하고 아내인 최지애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당신과 나와의 생활을 늘 파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이 생활에서 하루 바삐 떠나려고 했어요. 그러나 이런 생활에서 떠나는 방법이 여배우나 여대 출신과 새 결혼을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글렀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소. 애련이에게서 편지를 받고 수면제를 먹은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소. 만약 약을 먹은 후 이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한 채 죽어버렸을 것이요, 나와 당신은 떳떳한 부부요. 왜 내가 당신하고의 생활을 그늘진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일에 끈기를 잃고 의욕을 잃었던 것이요. 그러나 지금은 내가 오직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것, 내가 종래의 게으르고 무력한 생활에서 빠져나가 전에 가졌던 꿋꿋한 청년으로 돌아가는 길은 우리의 부부생활이 그늘진 것이라는 관념을 깨어 버리는 데 그 출발점이 있다고 생각하오. 그 다음에는 손을 맞잡고 생활에 부딪치는 겨요. 지애! 지난 일을 용서해 주오……

 

이같은 참회의 고백이 여실하게 말해주듯이 정영주의 방황은 끝나고 최지애와의 새 출발을 기약한다.

한편 지세훈 화백이 그림에 새로운 의욕을 보이는 계기가 되어준 최지애와의 관계는 지애의 다음과 같은 편지로써 결말을 짓는다.

 

'사루비아' 핀 정원에서 순임 언니를 소중히 여기면서, 그런 가운데서 예술을 찾아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복잡했던 애정 관계는 원만히 해결되고 모두가 행복의 길을 되찾게 된다. 여기에서 작가의 건전하면서도 굳건한 윤리성의 뒷받침을 역력하게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애정소설로 <사루비아 핀 정원>은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편 <귀심>은 지난 1972년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려 한창 활기를 띠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이 중편이 수록된 작가 안수길의 마지막 창작집 《망명시인》의 서문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편 <귀심>은 적십자 회담이 시작될 무렵의 소산으로 한 가정의 남북 가족 관계를 생각해 본 것이다.

 

작가의 말 그대로 여기에는 해방 후 월남하여 재혼한 염세훈의 아들 재호와 딸 재숙이와 재희가 등장한다. 재호와 재숙이는 모두 성장하여 혼기에 다다라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나이에 들어 있다. 여기에 그 상대로 재호에게는 김선주라는 아가씨가, 재숙이에게는 신명준이라는 총각이 나타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신명준의 아버지는 납치되어 홀어머니 밑에 자랐고, 김선주의 아버지는 사변의 혼란통에 월북하여 역시 소식을 모르고 지낸다. 여기에서 난색을 보이는 사람은 염세훈의 재혼한 아내다.

 

그녀는 남북 적십자 회담을 떠들고 이산 가족의 상봉을 운운하게 되자 다른 사람과는 달리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다. 서로 헤어진 남편의 전부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딸과 아들에 대한 결혼 상대자의 비슷한 환경에 대해서도 몹시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 회담으로 그와 같은 불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뜨거운 이해로 해소될 것이라는 주변의 설득으로 아들, 딸의 결혼은 별탈 없이 진행되어 나간다. 국토 분단이 빚어 놓은 이산 가족의 아픔과 함께 젊은 세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작품 <귀심>은 구체적인 작품의 형상화를 통해 뚜렷이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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