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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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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워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유태인 대학살 그 자체는 비극이다. 유태인을 멸종시키고자 했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재앙이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인간은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은 아우슈비츠에서는 신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신의 존재까지 부정되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타부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타자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누군가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은 없고, 그러면 그것은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모든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역사의 '블랙홀'이 되어야 하는가?

유대인은 물론 역사가의 절박한 과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역사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trauma)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억압된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 대해 직접 말할 수 없을 때,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현실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역사보다 우회하여 비틀어 보여줄 수 있는 영화가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사실의 '노예'가 되는 역사가는 비극적인 과거를 비극적인 역사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허구화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소설가나 영화제작자는 비극적인 내용을 희극적인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있을 수 없고 단지 절대 악만이 존재하는 아우슈비츠에서 인생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은 아우슈비츠 문제를 주제로 해서 <인생은 아름다워>(이탈리아, 1999년 작, Roberto Begnini 감독, 주연)라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베니니 감독의 탁월함은 비극적인 사건을 희극적인 영화로 만들어 냄으로써 홀로코스트의 진실성을 훼손하지 않고 미학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극적인 과거를 희극화 하는 것은 영화에서만 가능할 뿐 역사에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종래의 역사학은 과거와 역사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역사서술의 내용과 형식을 자유롭게 결합시킴으로써 과거를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화 할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재현하고자 하는 사실의 내용에 따라 역사서술의 구성 형식이 자동적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했던 역사가들에게 역사서술의 구성 형식이 오히려 사실의 내용을 규정한다는 메타(meta)역사적 성찰은 불필요했다. 아우슈비츠는 그 자체가 비극적 사실이니 때문에 역사가들은 당연히 그것을 비극적 역사로 서술했다.

이에 대해 포스트모던 역사이론은 역사가는 과거라는 원재료를 가지고 역사라는 제품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솜씨를 발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우쳐 주었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역사이론가인 헤이든 화이트(H. White)에 따르면, 역사서술의 네러티브에서 '이야기(story)''플롯(plot)'은 구별되어야 한다. storyhistory가 되는 것은 플롯구성을 통해서이며, 이 과정에서 역사가의 상상력의 개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플롯구성을 통해서 이야기를 꾸민다는 점에서 역사가와 소설가 혹은 영화제작자는 같은 위치에 있다. 하지만 역사가는 실제 일어났던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는 점에서 소설가 혹은 영화제작자와 다르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그 이야기들 가운데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서 어떤 플롯으로 일관된 이야기 구조를 가진 네러티브를 구성하느냐는 전적으로 역사가의 자유이다. 이러한 역사가의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포스트모던 역사이론은 역사서술의 허구성을 주장했을 뿐이며, 일어난 역사의 사실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역사가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을 특정 플롯구조의 구성요소로 코드화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기 때문에 비극과 희극을 넘나들면서 역사를 끊임없이 다시 쓸 수 있다.

 

다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로 돌아와서 이 영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우슈비츠라는 대재앙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계속 삶을 영위해야 한다. 우리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희망을 우리는 저버릴 수 없다. 그래서 베니니 감독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이야기를 희극으로 만들어 내고자 했는지 모른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간단하지만 어려운 얘기를 하고자 한다. 동화처럼 슬프고 놀라우며 행복이 담긴 이야기이다." 동화는 이 영화를 아름답게 치장했고, 우화는 이 영화를 희극적으로 그려냈다. 영화 속의 주인공 '귀도'라는 인물은 동화적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현실에서는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이지만, 공주와 사랑을 나누는 왕자라는 꿈을 가진 젊은이이고, 영화는 이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실현시켜 주었다. 아우슈비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삶을 계속해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기 위해서 진정 필요한 것은 위와 같은 동화이다. 그래서 오늘날 동화책을 읽지 않는 우리는 그 대신에 영화를 보면서 인생의 삭막함과 황량함을 극복하고자 한다.

 

베니니 이전에 어느 누구도 아우슈비츠를 동화적인 네러티브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풀 수 없는 문제를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 인생 그 자체가 수수께끼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갖고 고민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이것을 우화적으로 그렸다. 귀도의 수수께끼는 아들 조수아에게 수용소의 존재를 숨기고 가족을 살릴 방도를 찾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생체 실험을 할 대상을 선별하는 임무를 가진 독일인 의사 레싱은 친구가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기 때문에 고뇌하며 괴로워했다. 이 두 사람 모두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보는 우리는 전자에게서는 비극적인 절박함을 그리고 후자에게서는 희극적인 절박함을 느낀다. 이런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다. 베니니는 이런 인간 삶의 부조리를 우화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인생의 허무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 슬픈 현실 앞에서 눈물이 아니라 웃음을 자아낸다.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웃음이란 무엇인가?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수도사는 인간에게 웃음을 금지시키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했다. 웃음은 인간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묘약이며 인간의 닫힌 마음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에, 근엄한 지배권력은 현실의 모순을 비틀음으로써 촉발시키는 풍자적인 웃음을 금지시킨다. 그럼에도 베니니는 살벌한 수용소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간 삶의 아름다움을 처절하게 희망했다.

 

베니니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각본을 썼을 뿐 아니라 감독이자 주연이다. 그의 영화는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희화화함으로써 정치적 함의를 사장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면 <인생은 아름다워>는 홀로코스트 문제를 탈정치화 한 영화인가? 베니니가 아우슈비츠라는 극단의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웃음을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던 이유는, 홀로코스트를 희극화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치라는 악마적인 절대권력에 맞서서 연약한 한 인간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영화에 나온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는 그의 저항 전략이 무엇인지를 시사했다.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부르면, 이미 나는 그 곳에 없습니다. 난 누구입니까?" 답은 침묵이다. 침묵이란 무엇인가? 있는 데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에 반유태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했던 숙부가 등장한다. 그에게 귀도는 묻는다.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느냐고? 숙부는 대답한다. "침묵만큼 더 큰 저항은 없다". 과연 그럴까?

 

나치주의자들은 귀도 가족을 수용소로 끌고 와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억압했다. 하지만 나치주의자의 그러한 의도는 성공했는가? 나치주의자들에게 귀도는 그 권력에 순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침묵으로 저항했다. 그와 그의 아들 조수아에게 수용소 현실은 없었고, 그것은 단지 게임이었을 뿐이다. 결국 귀도는 나치의 광기적 권력에 침묵으로 대항해서 아들 조수아를 지켰고, 조수아는 아버지가 말했던 대로 게임의 승자가 되어 진짜 탱크에 탐승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악랄하고 철저한 나치 권력도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인생을 아름다워>는 인간의 휴머니즘을 지키기 위한 영화이다. 영화 <박하사탕>을 만든 이창동 감독의 화두도 '삶은 아름답다'이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삶은 결코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았다. 유태인에게 '아우슈비츠'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광주'가 있다. 아우슈비츠를 비극적 플롯구성으로 역사화 하는 것보다 희극적 플롯구성으로 역사화 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 필자는 아우슈비츠를 희극적으로 구성했던 베니니의 영화에서 유럽인의 역사적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박하사탕>을 넘어서 이른바 '광주사태'를 희극적으로 그릴 수 있는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그 영화 보는 날을 고대한다.

<김기봉(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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