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생전(沈生傳)
by 송화은율심생전(沈生傳)
심생은 서울의 양반이다. 약관의 나이에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풍정이 넘쳤다.
어느 날 운종가에 나가 임금님의 거동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건장한 여종이 자주색 명주 보자기로 한 처녀를 덮어씌워 등에 업고, 머리를 땋은 여종은 주홍색 비단신을 들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어림짐작으로 보자기 안의 몸을 재어보니 어린 여자 아이는 아니었다. 드디어 심생은 바짝 붙어 뒤를 쫓았다. 멀찍이 따르다가 소매로 스치며 지나가기도 하면서 눈은 한 순간도 그 보자기를 떠나지 않았다. 걸음이 소광통교(서울의 지명)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앞에서 일어나 자주색 보자기를 반이나 들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녀가 나타나는데 복숭아 빛 발그레한 뺨에 버들가지 같은 가는 눈썹,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 연지분이 몹시 고와 설핏 보아도 절색이었다.
처녀도 보자기 속에서 어렴풋하게 아름다운 소년이 쪽빛 두루마기에 초립을 쓰고, 좌우 이쪽저쪽으로 따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추파(秋波)를 들어 보자기 밖의 소년을 한참 주시하던 중에 보자기가 걷히고 버들 같은 눈과 별과 같은 눈동자 네 개가 부딪쳤다.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보자기를 당겨 다시 덮어쓰고 자리를 떴다.
심생이 어찌 그대로 놓치겠는가! 곧장 뒤를 쫓아갔다. 소공주동(서울의 지명) 홍살문 안에 이르러 처녀는 중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심생은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배회하다가 이웃 노파를 붙들고 자세히 알아보았다. 늙어서 은퇴한 호조 계사(회계원)의 집이요. 딸 하나만을 두었고, 나이는 열 예닐곱이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는 등등. 처녀가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노파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회칠한 담이 하나 나올 거유. 담 안에 작은 집이 한 채 있는데 바로 처자가 거처하는 곳이라우."
노파의 말을 듣고 난 심생은 아무리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 다가오자 집에서 거짓말을 꾸며 댔다.
"서당 친구가 저랑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하니 오늘 밤부터 가불게요."
드디어 인정(人定)이 되기를 기다려 그 집으로 가서 담을 넘었다. 초승달이 어스름 빛을 드리운 창밖에는 꽃과 나무들이 제법 아담하게 가꾸어져 있고, 창호지에 비치는 등불은 아주 환하였다. 벽에 등을 대고 처마 밑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방 안에는 여종 둘이 함께 있었다. 처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언문 소설을 읽는 중이었는데 꾀꼬리 새끼가 우는 듯 낭랑하게 들려왔다.
삼경 무렵, 여종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처녀는 그제야 "훅!" 등불을 끄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무슨 고민이라도 하는 듯 몸을 뒤척거렸다. 심생은 잠이 들 리도 없었고 숨을 낼 수도 없었다. 새벽종이 울릴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담을 타고 나왔다.
그로부터 일과로 날이 저물면 가서 파루가 치면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한 지 스무날이 되었어도 심생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처녀는 처음에는 소설도 읽고 바느질도 하며, 한밤에 등불이 꺼지면 잠도 잤으나,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예니레를 넘기자 "몸이 편치 않다."라고 말하고 겨우 초경(初更)인데도 베개를 베고 누워서는 자주 손을 던져 벽을 쳤고, 긴 한숨 짧은 탄식이 창을 넘어 들려왔다.
하루하루 밤을 보낼 적마다 심해지던 스무날째 저녁, 처녀는 홀연히 마루 뒤쪽으로 나와서 벽을 따라 돌아 심생이 앉아 있는 장소에 이르렀다. 심생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쑥 일어나 처녀를 잡았다. 처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소광통교에서 만났던 분이 맞지요? 소녀는 도련님이 여기를 찾아오신 지 벌써 스무날인 것을 잘 알아요. 저를 잡지 마세요. 소리를 지르기만 하면 다시는 여기를 나가지 못해요. 저를 놓아주시면 제가 틀림없이 이 문을 열어 맞이할 거예요. 어서 저를 놓아요."
심생은 곧이듣고 뒤로 물러서서 기다렸다. 처녀는 다시 빙 돌아서 방에 들어갔고, 그 다음에 여종을 불러 분부하였다.
"어머니한테 가서 큰 주석 자물쇠를 달래서 갖고 오너라. 밤이 아주 캄캄하여 겁이 난다."
여종이 안방으로 가더니 오래지 않아 자물쇠를 갖고 왔다. 처녀는 드디어 약속한 뒷문에다 문고리를 아주 분명하게 걸고 손으로 자물쇠를 채우되 일부러 "철거덕!" 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바로 등잔불을 껐다. 정적에 쌓여 잠이 깊이 든 듯했으나 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략)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옥
갈래 : 고전소설, 전(傳)
성격 : 비극적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조선 시대, 종로
구성 :
발단 : 심생이 종로로 어가 행렬을 구경하러 갔다가 보자기에 싸여 계집종에게 업혀 가는 소녀를 보고 따라감. 회오리 바람이 불어 젖혀진 보자기 틈으로 소녀의 얼굴을 보았고, 눈이 마주쳤지만 소녀는 다시 보자기로 가리고 집으로 돌아감. 심생은 소녀를 따라가 그녀의 집 이웃 노파에게 그녀에 대해 물어 신상을 알아냄.
전개 : 심생은 소녀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그녀의 방 밖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돌아감. 소녀는 심생이 매일 밤 방 앞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고민함. 스무 날째 되는 날 소녀는 방을 나와 심생에게 갔고, 심생은 소녀를 붙잡았으며, 소녀는 거짓말을 하여 심생을 단념하게 하려 함.
위기 : 심생은 변함없이 스무 날 동안 문밖에서 기다렸고, 서른 날째 소녀는 심생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감. 소녀는 부모님을 설득해 허락을 받고 심생과 부부의 인연을 맺음.
절정·결말 : 심생은 자신의 가족들 몰래 소녀를 만났으나 결국 가족들이 알게 되어 북한산으로 가게 됨. 소녀가 심생이 머무는 선방으로 편지를 보내와 자신의 죽음을 알림. 심생은 실의하여 문과를 포기하고 무인으로 살다 요절함. 매화외사(梅花外史)의 평
제재 :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사랑
주제 : 신분제의 속박으로 인한 남녀의 비극적 사랑/신분제의 속박으로 인해 양반의 자제인 심생과 중인층 처녀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남. /신분의 차이로 인한 남녀의 비극적 사랑
줄거리 : 어느날 심생이 운종가(雲從街)에서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계집종에게 업혀가는 한 여자를 보았다. 아름다움에 반해 따라가 보니 중인의 딸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밤마다 그녀의 집 담을 넘어가기를 20일 동안 계속했으나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심생의 진실된 사랑을 안 처녀는 심생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이고 자신의 부모를 설득시킨 뒤, 동침했다. 그뒤 심생은 밤마다 그녀를 찾았고 이를 눈치챈 심생의 부모는 절에 들어가 공부하도록 했다. 부모의 명을 거스를 수가 없어 절방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그녀가 보낸 유서(遺書)를 받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편지를 읽고 심생도 슬픔에 싸여 일찍 죽고 만다는 내용이다.
의의 : 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으나 작품 결말에 그려진 심생의 죽음은 인상적이다. 또 주인공 여자는 춘정(春情)에 들뜬 심생을 슬기롭게 거절하기도 하고, 자신의 뚜렷한 주관으로 사랑을 받아들이기도 하며, 신분 때문에 겪은 불우한 현실을 토로함으로써 자신도 떳떳한 개체적(個體的) 인간임을 선언하기도 한다. 이같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이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이는 여성상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회상을 짙게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옥은 〈이언 俚諺〉에서 당대 여성의 섬세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포호처전 捕虎妻傳〉에 나오는 숯장사의 아내에게서도 이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생규장전 李生窺墻傳〉 또는 〈춘향전〉을 연결시켜주는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징 :
①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 덧붙음
② 혼사 장애 모티프가 나타남
해제 : 양반가 자제인 심생과 중인 계층인 소녀 간의,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크게 심생과 소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전반부와 심생의 사랑에 대한 매화외사(작가)의 평이 담긴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자유연애 사상, 여성 의식의 성장, 신분 질서의 동요, 중인층의 성장 등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함께 엿볼 수 있는 작품
출전 : 김려(金 : 1766~1822)가 편찬한 〈담정총서 潭庭叢書〉
내용 연구
(전략)
마침내 안방으로 가더니 부모님을 모시고 왔다. 소녀의 부모는 심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녀가 말했다.
“놀라지 마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제 나이 열일곱, 그동안 문밖에 나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하온데, 지난달 처음으로 집을 나서 임금님의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이었지요. 소광통교에 이르렀을 때, 불어온 바람에 보자기가 걷혀 올라가 마침 초립을 쓴 낭군과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답니다. 그 날 밤부터 그분이 매일 밤 오셔서 뒷문 아래 숨어 기다시신 게 오늘로 이미 서른 날이 되었어요. 비가 와도 오고 추워도 오고 문을 잠가 거절해도 또한 오셨습니다.[심생의 적극적 구애 태도]
이 일을 어이할까 오랫동안 이러저리 헤아려 보았사온데, 만일 소문이 밖으로 퍼져 이웃에서 알게 된다면, 저녁에 들어와 새벽에 나간 것을 누군들 낭군이 그저 창밖의 벽에 기대어 있기만 했다고 여기겠어요? 실은 아무 일이 없었건만 저는 추악한 이름을 뒤집어쓰고 개에게 물린 꿩 신세가 되겠지요.
저분은 사대부 가문의 낭군으로, 한창 나이에 혈기를 진정하지 못하고 벌과 나비가 꽃을 탐하는 것만 알아 바람과 이슬 맞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니 얼마 못 가 병이 들지 않겠습니까? 병들면 필시 일어나지 못할 터이니 그리된다면 소녀의 손으로 해한 것은 아니오나 결국 소녀가 해한 꼴이 되겠지요. 남들이 모르는 일이라 하여도 언젠가는 하늘이 제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게다가 소녀는 중인 집안의 계집에 지나지 않아요. 절세의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니요, 물고기가 숨고 꽃이 부끄러워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도 아니지요. 그렇건만 낭군은 못난 솔개를 송골매라 여기고 이처럼 제게 지극 지성을 다하시니, 이러한데도 낭군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늘이 소녀를 미워하고 분명 복을 내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소녀는 뜻을 굳혔사옵니다. 아버지, 어머니, 부디 걱정하지 마세요. 아아! 부모님은 늙어 가시는 데 자식이라곤 저 하나뿐이니, 사위를 맞아 그 사위가 살아 계실 적엔 봉양을 다하고 돌아가신 뒤엔 제사를 모셔 준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으나 이것도 하늘의 뜻입니다. 더 말해 무엇하겠어요?”
부모는 묵묵히 할 말이 없었고[둘 사이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함] 심생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심생은 잠시 후 소녀와 함께 있게 되었으니, 목마르게 원하던 일[혼인하는 일]이었으므로 그 기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심생은 그날 밤 저녁에 가 새벽에 돌아오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집에 혼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심생의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행동] 소녀의 집은 본래 부유해서[중인층의 경제적 성장을 보여주는 시대상] 심생을 위해 화려한 옷[소녀의 부모에게는 사위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고, 심생에게는 혼인 사실이 드러날 수 있으므로 감추어야 하는 대상임]을 많이 장만해 주었다. 그러나 심생은 집에서 이상하게 볼까 봐 그 옷을 입지 못했다.[심생의 소극적이고 우유부단 태도로 결국을 혼인을 비극적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된다.]
심생은 비밀을 깊이 감추었지만, 심생의 집에서는 심생이 밤마다 밖으로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심생은 산사에 가서 공부에 전념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심생은 불만스러웠으나 집에서 다그치고 친구들이 이끌자 책을 싸 짊어 메고 북한산성으로 올라갔다. [가족들이 심생의 행동을 의심하여 심생을 북한산성으로 보내 공부하게 했고, 이는 심생과 소녀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 심생의 적극적인 행동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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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
결혼 후 |
심생 |
교제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자세를 보임 |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고, 부모에게 소녀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채 소녀를 버려두고 떠남. |
소녀 |
교제에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 |
부모를 설득하여 심생을 사위로받아들이게 하고, 심생을 남편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하고자 함. |
등장인물을 통해본 사회상 |
자유연애사상, 여성 의식의 성장, 신분질서의 동요, 중인층의 경제적 성장 |
선방에 머문 지 한 달이 가까워 올 즈음, 어떤 이가 찾아와 소녀가 쓴 한글 편지를 전했다. 뜯어보니 이별을 알리는 유서였다. 소녀는 이미 죽었던 것이다[심생과 소녀의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 그 편지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봄추위가 매서운데 산사에서 공부는 잘 되시는지요? 저는 낭군을 잊을 날이 없답니다.
낭군이 가신 뒤 우연히 병을 얻었습니다[신분적 차이 때문에 사랑을 잃고 병을 얻었음을 알 수 있음]. 병이 깊어져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으니, 이제 죽게 될 듯하옵니다. 저처럼 박명한 사람이 살아 무엇하겠는지요. 다만 세 가지 큰 한이 남아 있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저는 무남독녀인지라 부모님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자라났지요. 부모님은 장차 데릴사위를 얻어 늘그막에 의지하려는 생각을 가지셨어요. 하온데 뜻하지 않게 좋은 일에 마[호사다마(好事多魔) :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되는 일이 많음. 또는 그런 일이 많이 생김]가 끼어 천한 제가 지체 높은 낭군과 만났으니, 같은 신분의 사위를 얻어 오순도순 살리라던 꿈[중인층의 데릴사위를 얻고자 한 부모님의 꿈]은 모두 어그러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소녀는 시름을 얻어 끝내 병들어[상사병] 죽기에 이르러 늙으신 부모님은 이제 영영 기댈 곳이 없어졌으니, 이것이 첫째 한이옵니다.[소녀의 효심을 엿볼 수 있음]
여자가 시집을 가면 계집종이라도 남편과 시부모가 계시지요. 세상에 시부모가 알지 못하는 며느리는 없는 법이랍니다. 하오나 저는 몇 달이 지나도록 낭군 댁의 늙은 여종 한 사람 본 일이 없사옵니다. 살아서는 부정한 자취요, 죽어서는 돌아갈 곳 없는 혼백이 되리니[심생과 혼인을 했지만 신분의 차이로 심생 집안의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나타낸 말], 이것이 둘째 한이옵니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일이란, 음식을 잘해 드리고 옷을 잘 지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낭군과 함께 보낸 시간이 짧다고 할 수 없고, 제가 손수 지어 드린 옷도 적다고 할 수 없겠지요. 하오나 낭군의 집에서 낭군께 밥 한 그릇 대접한 일이 없고 옷 한 벌 입혀 드릴 기회가 없었으니[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지 못한 것], 이것이 셋째 한이옵니다.
인연을 맺은 지 오래지 않아 급작스레 이별을 하고 병들어 누워 죽음이 가까워 오건만, 낭군을 뵙고 마지막 작별 인사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런 아녀자의 슬픔이야 말해 무엇하겠사옵니까. 애간장이 끊어지고 뼈가 녹는 듯하옵니다[소녀의 한이 매우 깊음을 드러낸 표현]. 연약한 풀은 바람 따라 흔들리고 꽃은 흙이 된다지만, 아득히 깊은 이 한은 어느 날에야 사라질는지요?
아아! 창을 사이에 두고 만나던 것도 이것으로 끝이옵니다[지난 날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표출].
낭군께서는 미천한 저 때문에 마음 쓰지 마시고 학업에 정진하시어 하루빨리 벼슬길에 오르시기를 바라옵니다[심생을 염려하는 말].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편지를 본 심생은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리 내어 통곡해 본든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 심생은 붓을 던지고 무과에 나아가 벼슬이 금오랑에 이르렀으나 그 또한 일찍 죽고 말았다.
매화외사는 말한다.
“내가 열두 살 무렵, 시골 서당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날마다 동무들과 옛날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심생의 일을 매우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생은 내 어린 시절의 동창생이다. 이 사람이 산사에서 편지를 읽고 통곡할 때 내가 곁에서 지켜보았으며, 급기야 심생이 겪은 일을 듣게 되었고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들더러 심생의 풍류를 본받으라고 이 이야기를 해 준 게 아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든 반드시 이루겠다는 뜻이 있다면 규방 여인의 마음도 얻을 수 있거늘, 하물며 글을 짓고 과거에 합격하는 일이 그보다 어렵겠느냐?’
우리는 그때 이 이야기를 듣고 참신한 이야기라 여겼는데, 훗날 “정사”라는 책을 읽어 보니 이와 비슷한 것이 퍽 많았다. 이에 심생의 일을 적어 “정사”에 빠진 것을 보충한다.
['매화외사(梅花外史)' 평결 부분의 의미 : 작가 이옥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이별하는 비극적인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심생의 사랑’을 통해 신분 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이옥이 이 작품을 썼던 당시에 정조는 정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난 소설체의 글쓰기를 하는 이들을 억압했다. 따라서 이옥은 이러한 주제를 은폐하고 희석하기 위해 소설 말미에 ‘매화외사(梅花外史)’의 평결 부분을 붙인 것으로 이야기의 청자를 고려하여 비극적인 결말과는 다소 동떨어진 방향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음.]
이해와 감상
조선 정조 때에 이옥(李鈺)이 지은 전(傳). 김려(金錤)가 편찬한 ≪담정총서 捻庭叢書≫ 권11 〈매화외사 梅花外史〉에 실려 있다. 그의 전(傳) 21편 중 유일하게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애정을 소재로 입전(立傳)한 작품이다. 〈심생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의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난 심생(沈生)이 우연히 길을 가다가 호조계사(戶曹計士)로 노퇴한 중인(中人)의 딸과 눈이 맞아 뒤를 쫓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심생은 매일 밤 담장을 넘어 처자의 방문 앞에 기다리기를 한 달을 한 뒤에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심생의 부모가 이를 알고 그를 북한산 산사로 공부하러 보냈다. 그녀는 심생을 그리워하다가 끝내 병이 들었다. 죽음이 임박하여 심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직하고는 죽었다. 그녀의 죽음을 뒤늦게 안 심생은 글공부를 버리고 무과에 급제하여 금오랑(金烏郞)에 올랐으나 요절하였다.
〈심생전〉의 서술자는 사평(史評)에서 이 이야기를 12세 때에 시골 학당에서 선생으로부터 들었다. 선생은 심생과 동창으로 절에서 편지를 받았을 때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옥은 이 내용이 실재한 것임을 밝히고, 정사(情史)에 추록하기 위하여 쓴다고 하였다. 또, 풍류낭자의 일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모든 일에 대하여 진실로 얻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못할 일이 없음을 일깨워 주려고 들려준 것이라는 교훈성을 내세우고 있다.
〈심생전〉은 서술자의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두 남녀의 신분갈등으로 인한 혼사장애 모티프는 조선 후기 신분질서의 동요라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언문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것을 통해서 당시 국문소설 독자층은 여주인공과 같은 부유한 중인이나 상인의 부녀자였음을 알게 한다.
〈심생전〉은 한 인물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한 행적의 삽화식 서술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사건의 시말을 장면 제시적으로 서술을 하여 서술의 야담취향성을 보여 준다. 사건의 결말이 설화나 소설과는 달리 비극적인 것은 사실에 입각해서 기록해야 하는 전(傳)의 장르적 성격 때문이다. ≪참고문헌≫捻庭叢書, 李鈺의 文學理論과 作品世界의 硏究(金均泰, 創學社, 198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생전’은 양반가 자제인 심생과 중인 계층인 소녀가 나누는,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크게 심생과 소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부분(본문에 수록된 부분)과 심생의 사랑에 대한 매화외사(작가)의 평이 담긴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분의 주제 의식이 약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본책에 수록된 부분에서는 심생과 소녀의 사랑,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데서 오는 이별, 이에 따른 소녀의 죽음을 통해 신분의 장벽에 따른 두 남녀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 줌으로써 당시 신분 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매화외사의 평에서는 심생의 태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 신분 제도라는 사회적 장벽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랑의 성취’라는 적극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어떤 일이든지 노력이 있으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꼬집고 있다. 한편 ‘심생전’에 드러난 인물의 태도와 모습을 통해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데, 자유연애 사상, 여성 의식의 성장, 신분 질서의 동요, 중인층의 성장이 이에 해당한다.
심화 자료
심생전(沈生傳)
조선 정조·순조 때 활동하던 이옥(李鈺)이 지은 전(傳)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김려(1766~1822)가 편찬한 〈담정총서 潭庭叢書〉에 실려 있다. 신분제의 속박으로 인해 양반의 자제인 심생과 중인층 처녀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는 내용을 애틋하게 그렸다.
어느날 심생이 운종가(雲從街)에서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계집종에게 업혀가는 한 여자를 보았다. 아름다움에 반해 따라가 보니 중인의 딸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밤마다 그녀의 집 담을 넘어가기를 20일 동안 계속했으나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결국 심생의 진실된 사랑을 안 처녀는 심생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이고 자신의 부모를 설득시킨 뒤, 동침했다. 그뒤 심생은 밤마다 그녀를 찾았고 이를 눈치챈 심생의 부모는 절에 들어가 공부하도록 했다. 부모의 명을 거스를 수가 없어 절방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그녀가 보낸 유서(遺書)를 받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편지를 읽고 심생도 슬픔에 싸여 일찍 죽고 만다는 내용이다.
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으나 작품 결말에 그려진 심생의 죽음은 인상적이다. 또 주인공 여자는 춘정(春情)에 들뜬 심생을 슬기롭게 거절하기도 하고, 자신의 뚜렷한 주관으로 사랑을 받아들이기도 하며, 신분 때문에 겪은 불우한 현실을 토로함으로써 자신도 떳떳한 개체적(個體的) 인간임을 선언하기도 한다. 이같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이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이는 여성상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회상을 짙게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옥은 〈이언 俚諺〉에서 당대 여성의 섬세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포호처전 捕虎妻傳〉에 나오는 숯장사의 아내에게서도 이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생규장전 李生窺墻傳〉 또는 〈춘향전〉을 연결시켜주는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옥(1780~?) :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기상이다. 문무자, 매화외사, 화석산인을 비롯한 많은 호를 사용했다. 문체반정에 반기를 들었던 이옥은 자기만의 개성적인 문체와 내용을 고집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의 시대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을 후대에 남겨 주고 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이옥은 당대의 폐쇄적인 가치관 때문에 꿈을 펴지 못하게 된 그는 '심생전'에 드러난 심생과 소녀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매화외사(梅花外史)' 평결 부분의 의미
작가 이옥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이별하는 비극적인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심생의 사랑’을 통해 신분 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이옥이 이 작품을 썼던 당시에 정조는 정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난 소설체의 글쓰기를 하는 이들을 억압했다. 따라서 이옥은 이러한 주제를 은폐하고 희석하기 위해 소설 말미에 ‘매화외사(梅花外史)’의 평결 부분을 붙인 것이다.
이옥이 '심생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젊은 남녀의 순수한 애정이 한 사회의 규범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이 작품은 신분제로 인한 질곡을 문제시하고 있다. 소녀가 정성스레 마련해 준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폐쇄적이고 왜곡된 사회 속에서 자유분방한 인정(人情)의 발현을 추구하다가 좌절하는 운명을 그렸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진정’이 결국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심생전’은 욕망의 성취와 비극적 최후를 통해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애정 전기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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