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본문 및 해설 / 장지연
by 송화은율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장지연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고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작자 : 위암 장지연
형식 : 애국적 논설문
성격 : 개탄적, 애국적, 비판적, 격정적
문체 : 격렬한 감정적 문체
제재 : 1905년 11월 일본의 강압적인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
주제 : 매국노에 대한 준엄한 비판
출전 : 황성신문 2,101호(1905. 11. 20)
구성
① 이토오 후작에 걸었던 기대 - 이토 후작에 대한 민중들의 잘못된 인식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일본을 독립의 후원세력으로 '순진하게' 믿음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가능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자책이 담겨 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증오가 깔려 있다.
② 성립하기 어려운 5조약 - 임금의 강경한 성의(聖意)와 조약체결의 부당성을 이토오 히로부미 스스로도 족히 알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원천적으로 조약의 의미를 부정하고 비판하고 있다.
③ 정부 대신의 매국 - 조국을 팔아 넘긴 매국 5적을 통렬하게 꾸짖고 있으며, 비분강개한 마음이 거칠 데 없이 드러나 있으며, '개돼지만도 못하다'는 직설적인 표현 속에 신문 사설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언어적 정중함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작자의 애국적 감정에 충실한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④ 원통함 -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이천 만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동포여! 동포여!'라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 속에 담긴 격정적이고, 울부짖는 듯한 분노는 나를 빼앗긴 당시의 구한말 민중과 이 글을 쓴 장지연선생의 조국 사랑정신이 보이는 듯하다.
일본의 흉계를 세상에 알린 글로 그 당시 지식인의 고뇌에 찬 울분이 담겨 있지만, 기울어 가는 국가를 바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우리 지식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글로 유명하다.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 皇城新聞≫에 게재된 장지연 ( 張志淵 )의 논설. 이 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논설을 써서 을사조약의 굴욕적인 내용을 폭로하고, 일본의 흉계를 통렬히 공박하여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하여 ≪황성신문≫은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였다고 해서 3개월간 정간되었으며, 그는 일본 관헌에 붙잡혀서 90여 일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논설은 국한문혼용체로 쓰여졌는데, 그 내용은 민족정의를 호소하면서 격렬하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한 논조를 담고 있었다.
논설은 이토(伊藤博文)가 한국에 왔을 때, “……천만 뜻밖에 5조약이 제출되었다.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분열을 빚어낼 것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등박문의 본의는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을사조약에 숨겨진 일본의 침략적 저의를 폭로하였다.
또한,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자는 각자의 영리만을 생각하고, 위협에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어, 4,000년 역사의 강토와 500년 종사를 타인에게 바치고, 2000만의 영혼을 모두 타인의 노예로 되게 하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 ( 朴齊純 )과 각 대신은 족히 엄하게 문책할 가치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이라는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며 이름만 팔려고 꾀하였다.”라고 하면서,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5적을 통렬히 공박하고 있다.
이것은 한말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한 항일언론활동의 대표적인 논설이다.
당대의 경쟁지였던 ≪제국신문≫이 을사조약에 대해 “한때 분함을 참으면 100년 화근을 면함이라.” 하면서 후일의 자주력을 기르고, 국민이 자중할 것을 역설하는 신중한 논조를 펼친 데 비하여, ≪황성신문≫은 강제적 조약체결의 정황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이 논설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러 목놓아 통곡하는’ 전국민의 분노를 대변해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던 것이다.
≪참고문헌≫ 韓國新聞史(崔埈, 一潮閣, 1965), 韓國新聞史硏究(李海暢, 成文閣, 1971), 張志淵全書 1∼3(단국대학교부설 동양학연구소, 1979).
장지연 張志淵 [1864~1921]
본관 인동(仁同). 호 위암(韋庵) ·숭양산인(嵩陽山人). 초명 지윤(志尹). 자 순소(舜韶). 경북 상주(尙州) 출생. 1894년(고종31)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각처에 발송하고, 18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의 환궁(還宮)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이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大韓禮典)》 편찬에 참여, 이듬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이승만(李承晩) ·남궁 억(南宮檍) ·양흥묵(梁興默)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로 항일구국(抗日救國)의 필봉을 휘둘렀으며, 한때 사직하고 광문사(廣文社)를 설립,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정부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기용하였으나 거절하고, 물러나 역대 문헌의 수집과 저술에 힘썼다.
1906년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구국운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자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개편하였으나, 압력이 심하여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해조신문(海潮新聞)》 주필이 되었다. 경영난으로 신문이 폐간되자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등지를 방랑하다가 귀국, 1909년 진주(晉州)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로 취임, 이듬해 8월 29일 국권침탈이 되던 날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 이로 인하여 《경남일보》는 폐간되었다. 저서에 《유교연원(儒敎淵源)》《동국유사(東國類史)》 《대동시선(大東詩選)》 《농정전서(農政全書)》《일사유사(逸士遺事)》 《위암문고(韋庵文庫)》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 《대동문수(大東文粹)》 《대동기년(大東紀年)》 《화원지(花園誌)》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위암문고(韋庵文稿)
《위암집(韋庵集)》이라고도 한다. 신활자본. 12권 1책. 본래 저자의 맏아들 재식(在軾)과 장지연의 후배인 권도용(權道溶)이 편집하여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출판허가원을 냈다가 중요한 대목이 모두 삭제되는 바람에 출판을 중지하였다. 그뒤 195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 간행하였다. 권1∼3은 부(賦) ·시(詩) ·소(疏) ·표(表) ·전(箋) ·교서(敎書) ·진향문(進香文) ·고유문(告由文) ·서(書), 권4는 서(序) ·기(記), 권5는 발(跋) ·잡저(雜著) ·명(銘) ·찬송(贊頌) ·변(辨) ·논(論) ·설(說) ·상량문(上樑文), 권6은 취지문(趣旨文) ·축사(祝辭) ·제문(祭文) ·애사(哀辭) ·비문(碑文) ·묘갈명(墓碣銘) ·묘표(墓表) ·묘지(墓誌) ·행장(行狀), 권7은 만필(漫筆), 권8∼10은 사설(社說), 권11∼12는 부록으로 되어 있다. 특히 권7 이하에는 역사 연구에 참고가 될 사료(史料)가 많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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