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슬픔에 관하여 / 유달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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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관하여 / 유달영

 

 

<전략>

 

 

 나의 막내 아들은 지난 봄에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腎臟腫瘍)'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兒童病)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手術)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再發)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의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선고(宣告)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 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洪水),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新奇)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盲目)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었나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한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醫師)의 선고(宣告)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 한 것이다. 6·25 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지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 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 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 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 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生産)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聰明)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이 영혼을 정화(淨化)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信念)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神)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작자 : 유달영(柳達永
 형식 : 수필
 성격 : 종교적. 의지적. 교훈적
 제재 : 곧 다가올 아들의 죽음
 주제 : 종교적 신념을 통한 비극적인 삶의 극복 / 슬픔을 통한 영혼의 정화
 특징 : 이 들은 아들의 죽음을 앞둔 슬픔과 그러한 슬픔을 이겨서 영혼이 정화되기를 바라는 글쓴이의 심정이 대조를 통해서 표현되어 있다. 기쁨과 슬픔, 가난과 고뇌에 대한 평화경,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조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에게 더 강하게 전달한다. 비록 슬픔은 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앞부분에서 예술가들이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예술을 완성한 이야기를 제시하고, 뒷부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슬픔을 극복하고 이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출전 : <인생 노트>


 경위 : 옷감의 날과 씨. 일이 되어가는 경과
 만종 : 저녁 때에 절이나 교회에서 치는 종. 밀레의 작품명
 사람의 일생은 - 한 조각의 비단 : 사람의 한 평생은 실을 가로 세로 엮어 짜서 이루어지는 비단과 같이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되풀이되는 가운데 지나는 것
 자기의 마지막 - 쉬울 것이다 : 자기의 죽음을 모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장님과 같이 만들어 당장 눈 앞에 닥칠 재난을 모르게 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타게 한다.
 자식의 어버이 - 체험한다 : 자식이 부모를 위하는 마음보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고 깊고 넓음을 세 번째 체험한다.
 신이여 - 영혼을 정화하소서 : 신이시여, 계속되는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수필은 인간이면 누구나 접하게 될 슬픔을 소재로 하고 있다. 슬픔은 비록 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는 것과 슬픔을 겪더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고호와 밀레의 그림, 베토벤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슬픔을 극복하고 이를 초월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아들의 병이 불치의 것임을 선고받은 아버지의 괴로움과 슬픔이 종교적 세계로 승화되어 나타난 수필이다. 죽음을 앞둔 아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그시 다짐으로써 작자는 슬픔을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이 글에는 여러 가지가 서로 대조되어 나타나는데, 그 중 아들의 죽음을 앞둔 슬픔과 슬픔을 이겨서 영혼이 정화되기를 비는 작자의 인품이 가장 큰 대조를 이루며 읽는이에게 교훈을 준다.

 

 

 서양화가 그림 모음 사이트 http://www.youth.co.kr/rs/rs03.htm

 

 


빈센트 반 고호

빈센트 반 고호(1853.3.30. 네덜란드의 Zundert에서 출생, 1890.7.29.파리근처 uvers-sur-Oise에서 사망)는 일반적으로 램프란트이후 가장 뛰어난 네덜란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근대 예술에서 인상주의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 모두는 오직 10년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색의 개념을 파괴하고, 거친 화풍과 결국은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정신적인 고통이 표현된 작품... 걸작으로 그의 많은 자화상들과 잘 알려진 The starry Night(1889)이 있다.

 

 

그의 짝사랑은 실패의 연속이였다. 그래도 그는 한번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걸 헌신하려 했지만 투박하고 정열적인 그를 받아들일 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빈센트 반고호, 그는 세느,고갱과 더불어 네덜란드화가로써 가장 뛰어난 후기 인상파 화가이다. 그의 삼촌은 세계적인 화상 Goupil and Co.의 상인이었다. 1873년 그는 런던 지사에 보내졌고, 여관 여주인의 딸과 불행히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그 여자로 인해 그의 생활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깨어지고 곧 일도 그만두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신교도의 목사였고, 고호는 성직자로써 교육받았으나, 그는 1878년 그의 학업을 버리고 예비목사로써 일하기 위해 the grim Borinage주의 가난한 광부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의 생활을 포기하면서 가난과 정신적 병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종종 극도의 가난, 영양 실조로 고통 받으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고호는 네덜란드에 살게되는데, 때때로 하숙을 하기도 하고 그의 헌신적인 동생 테오로부터 그의 작은 월급으로 고호는 그림에 필요한 도구를 사게된다. 그는 노동자와 농부들을 많이 그렸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The potato Easters이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 사람들을 존중하려 노력했다. 그들의 작은 램프아래 감자를 먹으면서,그리고 그들의 육체적 노동과 그들이 정직하게 그의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라고 썼다.1886년 2월 그는 파리로 가게되고 그곳에서 그는 피사로, 드가, 고갱, 뚤루즈 로뜨렉등을 만났다. 이때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도덕성을 잃고있는 일본의 목판의 영향을 받아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인상주의 화가가 그랬듯이 공기와 빛의 가시적 모습을 재구성 할 목적으로 사용했다. 내가 눈앞에 보이는것을 정확하게 재구성하는것을 시도하는 대신 나는 더욱 강렬한 나 자신의 표현을 위해 내 방식대로의 색을 사용한다...

 

 

나는 인간본성의 무서운 열정을 빨간색과 녹색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그가 Seurat의 점묘법에 의해 영향 받았던때 그는 더 광범위하고, 정열적이고, 힘찬 필법을 찾아서 떠났다. 1888년 2월 그는 Arles에 정착했고 그 곳에서 그는 15개월동안 200개가 넘는 유화를 그리게 된다. 그는 이시기에 그림을 전혀 팔지 않았으므로 가난했고, 환각증세와 함께 정기적 신경질환으로 고생했다. 그는 그해 말엽에 고갱을 만나게 되는데, 동업하기를 바랬던 고갱과 싸우고 결국 그는 왼쪽귀를 자르고 만다.1889년 5월 그는 Arles 가까이의 St Ray의 정신요양소로 가게된다.그러나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Starry night와 같은 놀랄만한 작품을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그 해동안 150여개의 데생과 그림을 만들었다.그러나 그의 정신적 고뇌와 압박은 점점 더 심해졌고,1890년 7월 29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테오는 고호의 일생동안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며, 고호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되었다. 그는 형이 보리나쥬의 광부촌에서 힘들어할때도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재정적인 도움을 줬었고 그의 그림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으며 빈센트가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있을때까지 수없이 편지를 주고 받았다. 형 고호의 작품을 유일하게 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고호가 운명한 후 6개월 뒤(1881.1.25) 만성 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테오도루스 반 고호(1822년생)는 안나 카르벤투스(1819년생)와 결혼했다. 테오도루스 반 고호는 잘 생긴 남자로 통했으며, 온화한 성격을 가진 평범한 목사였다. 서적 판매상의 딸이였던 안나 카르벤투스는 친절하고 존경받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장남 고호의 까다로운 셩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에게서 인정받기를 무척이나 갈구했던 고호는 자신들의 게급과 시대에 충실한 이 전형적인 부모에게 골칫거리였다. 

(출처 http://user.chollian.net/~ksc93b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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