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by 송화은율
반응형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위성 땅, 아침 비가 흙먼지를 적시니

여관집 둘레 푸른 버들 빛 더욱 산뜻해라.

그대에 권하노니 다시 한 잔의 술을 들라.

서쪽으로 양관 땅에 나가면 벗이 없느니라.

요점 정리

작자 : 왕유(王維) / 조두현 옮김

갈래 : 칠언절구의 한시. 서정시

율격 : 외형률

성격 : 서정적. 관조적. 송별시(送別詩)

어조 : 소박하고 관조적인 목소리

제재 : 이별

주제 : 친구와의 송별(送別)의 아쉬움

출전 : 악부 시집

구성 :

기 - 1행 위성의 아침 정경 : 흙먼지가 가라앉은 맑은 아침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이별이라는 슬픔을 억제하기 위해 이처럼 산뜻한 정경을 앞서서 내세우고 있다.

승 - 2행 객사 주변의 풍경 : 친구를 전송하기 위해 같이 머물렀던 객사의 청신해진 버드나무를 가볍게 묘사하고 있다. 이별을 상징하는 경물(버들잎)의 선명한 색조로 명쾌하고도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여, 오히려 섭섭해하는 석별의 정을 부각시키고 있다.

전 - 3행 친구와의 이별을 달램 : 이별의 슬픔을 굳이 눈물로 표현하지 않고, '한잔의 술'로 대신 표현하고 있음을 알 게 된다. 여기에서 왕유의 낙천적이고 풍류(風流)적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한 잔의 술'은 벗과의 아쉬운 이별(離別)의 감정을 달래는 매개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 - 4행 친구와의 장도 격려 : 멀리 변방으로 떠나야 하는 벗에게 술을 권하는 담담한 말투에서 시적 화자의 깊은 관심과 진지한 우정을 엿볼 수 있다.

내용 연구

元二(원이) : '원'은 성, '이'는 둘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왕유의 벗 이름

安西(안서) : 지금의 신간성. 이 작품이 씌어진 당나라 때에는 안서 도호부를 두어 국경을 지켰다.

渭城(위성) : 장안(長安) 북서쪽에 있는 지명. 당시 이 곳까지 전송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읍) : 적시다

客舍(객사) : 지금의 여관(旅館)

柳色新(유색신) : 버들잎이 비에 젖어 더욱 싱싱해진 모양.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길 떠나는 이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면서 전송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故人(고인) : 여기에서는 친구의 뜻

위성 땅, 아침 비가 흙먼지를 적시니 : 흙먼지가 가라앉은 맑은 아침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이별이라는 슬픔을 억제하기 위해 이처럼 산뜻한 정경을 앞서서 내세우구 있다.

여관집 둘레 푸른 버들 빛 더욱 산뜻해라. : 친구를 전송하기 위해 같이 머물렀던 객사의 청신해진 버드나무를 가볍게 묘사하고 있다. 이별을 상징하는 경물(景物, 버들잎)의 선명한 색조로 명쾌하고도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여, 오히려 섭섭해 하는 석별의 정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대에 권하노니 다시 한 잔의 술을 들라. : 이별의 슬픔을 굳이 눈물로 표현하지 않고 '한 잔의 술'로 대신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왕유의 낙천적이고 풍류적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한 잔의 술'은 벗과의 아쉬운 이별의 감정을 달래는 매개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쪽으로 양관 땅에 나가면 벗이 없느니라. : 멀리 변방으로 떠나야 하는 벗에게 술을 권하는 담담한 말투에서 시적 화자의 깊은 관심과 진지한 우정을 엿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악부 시집>에 "위성곡(渭城曲)" 또는 "양관곡(陽關曲)" 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당나라 때 송별(送別)의 노래로 널리 애창되었고, 세 번 되풀이하여 부르기 때문에 '양관 삼첩(陽關三疊)'이라 했다.

'원이(친구)는 안서 땅에 보내며'라는 뜻을 지닌 이 시는 전반 2행의 서경과 후반 2행의 서정이 멋지게 짜 맞춰진 서정시이다. 시인은 1-2행에 비가 내려 흙먼지가 가라앉고 푸른 버들잎이 산뜻하게 빛나는 풍경을 먼저 펼쳐 보임으로써, 친구와의 이별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준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길 떠나는 이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면서 송별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비가 내려 산뜻해진 버들잎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별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친구의 장도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태돌를 취한다.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는 왕유의 시와 그림을 두고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는데, 위의 시에서도 이러한 회화적인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왕유의 시가 이처럼 경치의 제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서경을 확대하여 자신의 내면을 제시한다. 예컨대, 위의 3행에서 친구에게 술잔을 건네 이별의 아쉬움을 말없이 드러낸 다음, 4행에서 양관 땅을 나가면서 만날 수 없게 되는 친구의 사정을 이해해 준다. 왕유 시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 관조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의 순리를 믿고 그것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삶의 자연스러운 섭리를 지나치게 화려한 표현보다는 소박하고 관조적인 어조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시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선경 후정(先景後情)'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눈으로 관찰한 경치를 객관적으로 제시한 다음, 그러한 풍경을 가슴 속에 받아 들인 시인의 내면이 주관적으로 묘사된다. '선경'과 '후정'은 이처럼 시의 중요한 대립쌍에 놓이면서 대구법(對句法)을 형성한다. 객관과 주관의 조화를 꾀한 중용의 정신이 선경 후정의 원리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심화 자료

왕유 시의 특징

왕유 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아름다운 자연관조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도연명의 관조가 좀 침울한 것이었음에 비해서, 그의 것은 훨씬 명랑하다. 그는 자연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자연을 믿고 그것에 순응하는 태도를 풍류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대표적인 풍류 시인이라 할 것이다. 반항적이고 이단적인 기질이 없는 그는 육조(六朝) 이래의 화려한 시의 전통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개성을 살려 발전시켰다.

정지상의 송별시 '송인'은 이별을 제재로 한 한시의 걸작이며, 왕유의 시 '송원이사안서'와 함께 이별시의 압권으로 칭송되고 있다. 한번 감상해 보시라.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하시진고)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왕유(王維)

699 중국 산시 성[山西省] 치 현[祁縣]~759.

중국 문화사의 황금기에 활동한 유명한 예술가·문인으로 자는 마힐(摩詰). 시·음악·그림으로 표현되는 인문 교육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세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동기창(董基昌)은 그의 화론서에서 왕유를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규정했다. 남종화는 문인 취향의 그림으로서, 피상적인 묘사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중에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왕유의 모습을 탐지해내기는 어렵다. 왕유는 당대(唐代 : 618~907)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이내 강등되어 산둥 성[山東省]의 하찮은 직책에 임용되었다가, 734년에 수도로 소환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에 올랐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반란군에 사로잡혀 반란군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왕유는 억지 벼슬을 받았다. 758년 관군이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을 때, 왕유는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시를 썼고, 또 고위 관리인 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중난 산[終南山]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왕유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은 대부분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왕유의 예술은 당시의 기록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그림 사본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가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채택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나, 산수화를 발달시킨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생존시에 설경산수화로 유명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망천도 輞川圖〉라는 화권(畵卷)이다. 이 그림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후에 제작된 많은 모사품으로 대강의 구도는 보존되었다. 기록상 그의 작품에서 발묵(潑墨) 기법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것을 함께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세에 성인에 버금가는 지위까지 올라간 것은 그가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명시 선집에 그의 작품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이백(李白 : 701~762)·두보(杜甫 : 712~770) 등의 유명한 당대 시인들과 함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시인으로 손꼽힌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왕유의 평가

 

송나라 소동파는 왕유의 시와 그림을 비평하여 '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詩中有畵畵中有詩)'고 했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