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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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영 - 중앙선 기차
자유와 삶의 복합적 양태(樣態)
朴東奎
1967년 ≪창작(創作)과 비평(批評)≫에 「투계(鬪鷄)」를 발표하고, 70년대「선생(先生)과 황태자(皇太子)」를 발표하여 70년대 초에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송영은 초기에는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을 대체로 정신적 외상(外傷)을 받은 자들을 제재로 사용하였다.
이 정신적 외상은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는 세계에서 연유한 것이다. 소속된 조직원으로서의 조직적 기능을 상실한 수밖에 없는 세계, 혹은 정해진 법칙적 생활양식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세계, 자기를 오히려 움츠려야만 하는 압력에 자기가 마모될 수밖에 없는 세계, 이것이 그와의 사이에 놓여진 상대적 세계이다. 그러면서도 송영은 이 소외시키는 세계에 대응하는 창조적인 세계, 꿈꾸는 세계, 인간의 숨결이 흐르는 세계를 설정시켜 만들어내고 이것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대립의 과정을 송영 소설의 주제가 되는 <좌절>의 시발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송영의 소설이 그의 주변의 변두리 삶을 묘사할 때에도 단순한 세태소설(世態小說)로 끝나지 않고, 개인적인 결단을 그릴 때에도 지식인 특유의 제스처 소설로 끝나지 않는 것도 그 불화 때문이다. 그는 그의 주관성과 그의 주변 상황과의 간극(間隙)을 투철하게 깨닫고 있다. 그것이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좌절의 근본 요인이기도 하다. (김 현, 「社會아 倫理」)
이러한 지적은, 좌절의 양식은 결국 주관적 세계를 통한 극복을 의미하며, 이 극복은 삶에 대한 희구의 양식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 주관성에의 침잠은 압도적인 상황의 무게를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려고 애를 쓰다가 좌절하였을 때에 생긴다. 그 좌절은 그 개인의 모든 역량을 좌절당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도록 자극하고 강요한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은 일종의 상궤(常軌)를 벗어난 짓들이다. 「투계」의 종형이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종계를 쓰러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의 트릭을 꾸미는 것도 「선생과 황태자」의 이중사가 같은 감방의 수인(囚人)들을 학대하고 증오하는 것도 다 같이 객관적인 정황의 비정성(非情性)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려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들의 좁은 주관성의 세계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은 떨고 복종할 따름이다. (김 현, 「社會와 倫理」)
이러한 관점은 송영에게 있어서 삶의 좌절과 허망을 사회적 풍습 혹은 관습에 부딪치면서 확인하고, 이에 순응할 수 없는 인간적 삶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송영 소설은 분명히 좌절의 한 깃발과 인간적 삶의 깃발을 한 깃대에 매달아 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송영 소설의 주인공들이 거의 익명인 상태로 등장해 일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탈출을 시도한다는 그의 독특한 소설 공간은 말을 바꾸면 그들 주인공들이 어딘가 늘 갇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이들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 소설로서의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이상, 혹은 표상에 도달하려는 그의 의지가 비록 소극적인 인상을 준다 하더라도 이것이 문학의 가치를 저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화작업(美化作業)」에서 볼 수 있듯이 차라지 집 전체를 잃더라도 창(窓)을 고집하는 힘이 있는 이상, 그 의지는 소극적이라는 말로서 비난되기보다 오히려 문화적이라는 말로서 옹호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송영의 이상주의(理想主義)는 거친 폭력에 의하지 않고 차분한 정관(靜觀)에 의해서 추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요설을 지양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그의 눈은 그것이 비록 정적(靜的)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날카로운 비판의 안목으로서 독특한 영토를 개척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金柱演「靜力學의 小說, 마테오네집」)
김주연(金柱演)은 송영의 소설에 담겨진 세계를 <갇혀 있는 상태>로 만드는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유폐된 땅, 갇혀진 질곡>으로 인식되는 송영의 세계는 앞서 김현의 지적처럼 소외시킨 세계와 같은 차원의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송영의 세계가 현실인식의 어두운 측면과 병적인 측면과 예리한 관념적 인식의 혼합체로서의 냄새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며칠 전부터 2호 앞을 지날, 때마다 이 신참자가 두 번째 상좌라고 할 수 있는 이중사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순서로 따진다면 그 녀석은 제가 아무리 나이가 많든 또는 사회에서 쓰여 먹는 무슨 대단한 재간을 지녔건 앞자리에 바로 창살과 마주 앉아서 참새잡이나 전령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저놈은 자기보다 고참인 여남은 명의 동료들을 죄다 제쳐 놓고 두 번째 상좌에 앉게 되었을까. 물론 그렇게 결정한 것은 2호 감방장인 이중사이겠지만 그렇지만 장수병님은 이중사로 하여금 감방 질서를 깨뜨리게 만든 이 사나이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先生과 皇太子」)
「선생과 황태자」에 담겨진 질서의 파괴라는 사건의 흥미 도입 단계를 인용하였다.
이 인용에 있어서 감옥은 인간의 생존에 제약을 받고 자유를 제약당하고 질서에 복종하게 되어 있는 현실적 세계이고, 두 번째 상좌에 아무 이유 없이 앉게 된 것은 그러한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인 것이다. 이 완전한 절서의 호수에 2호라는 돌이 날아들어와 일으키는 파문의 의미가 바로 송영이 그의 소설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송영의 의지적 체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청년과 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바싹 다가서서 여인이 앉아 있는 가운데 좌석을 호시탐탐 넘보면서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쇠바퀴의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면서 열차가 양평역에 닿자 과연 그 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먼저 내릴 테니 광주리를 넘겨 줘요. 곁의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 그녀는 놀랍게도 굳게 닫혀 있는 객차의 창을 드르륵 열어젖히더니 서슴지 않고 한쪽 다리를 창턱에 걸쳤다. 〔중략〕
여인이 자리를 뜨자마자 환오는 부리나케 가운데 좌석을 행해 돌진했다. 바로 이때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이 그의 가슴패기를 가로막고 나섰다. (「중앙선 기차」)
그의 「중앙선 기차」도 마찬가지다. 열차라는 어쩔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자기의 질서를 가로막는 인간, 그것은 걷혀진 세계에서도 이루지 못하는 끊임없는 삶에 대한 질문의 화살을 스스로 던져 가는 인간인 것이다. 그의 소설은 이러한 공간 의식에서 그 주어진 공간 한계를 그 내부에 무질서를 유발하거나 혹은 유발을 저지하려는 양면의 충동을 통해서 상징은 더욱 깊어지고, 그 깊이 때문에 독자에게는 무엇을 의미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추궁이 강하게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첫 번째 명제는 갇혀진 세계, 울타리로 둘러싸인 한계상황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이는 송영의 일상적 사고의 근거에서 생겨난 체험의 독특한 표출이라기보다, 항상 그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표상성의 상징을 의미하고 있다. 즉 어떤 현실을 바라봄에 있어서 현실의 정확한 표출보다도 작가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정제되고 의미화되어진 현실을 대상으로 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는 정제된 현실의 투영에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조건적 상황과 연결하여 어떻게 사느냐보다는 이곳에 있어야 하느냐 하는 존재론적 의문을 지니고 있다. 존재의 생존 환경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바로 그의 소설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세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단편 「미끼」에서 자기의 고안을 출원하려고 변리사를 찾고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야 하는 덕수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실의 두꺼운 벽과 그 벽이 지닌 모순과 부조리의 철망으로 해서 손이 찢겨지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은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한 이간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고, 인간의 창의가 창의의 울타리를 벗어나 영원히 안주하고 있을 수 없는 창의의 변증법적 전개까지도 담고 있다는 사실로 해서 자유롭지 못한 세계를 보다 심화시켜 내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이 울타리 안에서 인간적 삶을 영위코자 하는 선의의 인간의 불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불꽃은 상황에 대한 반응의 양식으로 형상화되고 있지만, 그 반응의 밀도는 살아가고자 하는 명제보다 오히려 살아 있음의 편에서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절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송영의 특징은 무엇보다 그 소설 전개 방식에 있어서 두르러지게 나타나는 짜임새 있는 소설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중편「선생과 황태자」를 보기로 삼는다면 그것은 감방이다. 이 감방은 군대의 감방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 속에 기결·미결의 많은 죄수들이 함께 살고 있다. 소설 속의 화자(話者) 역시 죄수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화자인 동시에 소설의 시점(視點) 노릇을 하고 있다.
감방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인간들의 상황반응이다. 미로(迷路)에 들어간 쥐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자리에 작가의 시접은 놓여 있는 것이다. (金柱演「靜力學의 小說, 마테오네집」)
<미로에 들어간 쥐>를 관찰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삶의 뿌리가 뽑힌 자들이 모여서 일으키는 한 반응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응시력에 의한 항의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보편적 삶의 가치를 재확인해 보는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포괄적 시점에서 설정된 하나의 미로이고, 이 미로를 헤매며 부딪치는 인간 관계를 통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삶에 있어서의 가치를 획득코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소설에 우울의 색조를 지니고 있다. 이 우울은 한계상황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나, 인간적 삶에 대한 고뇌에서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여과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살아 있음에 대한 걱정과 고민에서 생겨나는 신을 향한 우울, 현실을 향한 우울, 영원한 희구를 버릴 수 없는 가장 절실함에 대한 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떠한 미로에 대한 예리한 감성을 드러내 보여 주고자 하는 것보다도 사물을 배치하고 형식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처럼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우울의 색조에도 한 가닥 파란 하늘이 담기듯이 그는 이 파란 하늘에 대한 기대를 지니고 절망이 아닌 통풍창구가 달려진 감옥에서 시멘트 바닥에 바로 누워 하늘을 보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순간적 행복의 한 몸짓을 담고 인간이 지닌 가장 절실한 삶을 검증하고 정제하고 현실의 울타리를 만져 보는 것이다.
「선생과 황태자」의 소설적 구조의 특성은 시간과 기술 양식의 특이한 배합을 통해서 생존 공간에 대한 새로운 창출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의 구조는 총체적 미를 지니고 미의 종류적 지향이 소설의 내용에 반영되어 주제화되고 있다.
소설 구조의 이러한 방식이 송영의「선생과 황태자」에서는 그 소설의 특이한 기법과 작가의 개성으로 해서 이질적인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구체적 예가 대화와 지문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대화>라는 소설 기술법은 화법을 통한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사건의 기술이나 인물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이는 또 어투나 톤을 통하여 감각적 효용성도 아울러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효용성을 감안하면서도 작가가 대화를 없앤 데는 송영 특유의 개산적 타당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화가 주는 시간적 단절의 회피이다. 지문은 호흡과 어투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정체 현상을 보여 준다. 즉 사실 제시의 스토리라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 지문과 대화의 혼합적 형식을 택함으로써 소설에 있어서 시간의 유동적 현상에 주목하였다.
……공연한 남들의 인사말,
요즘 어디 아프냐?
혹은
자넨 밤낮 무슨 걱정거리가 그다지도 많은가?
이따위 인사말 때문에 자기는 정말 환자가 아닐까 하고 자꾸 자문해 보다가 나중에는 자기 몸 어느 한 부분이, 아니면 거의 전체가 병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도 없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버렸지요.
이 문장 속에는 대화와 지문의 교묘한 배합을 통해서 시간적 유동이 한 행간 사이를 통하여 연결되고 <아프냐?> <많은가?>라는 의문투는 기술자(技術者)의 의식적 조명을 받아 새 감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화와 지문을 구별하지 않음은 작가의 의식적인 의도를 통해 현실을 뚫고 들어가는 심리적 요인과 작중 인물 상호간의 인간적 특성에 대한 구별을 무시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행간 사이를 꿰뚫는 시간의 유동, 바꾸어 말한다면 시간의 내재적 진행을 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 있어서 대화와 지문의 구별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작가가 내적 체험과 인간 관계의 현실적 양상을 소설에서 어떻게 조화시켜 기술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는 해도 이 소설에 있어서의 의미는 내적인 세계의 유동적 현상을 나타내기 위한 한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가 갖는 화자의 인간적 특성이나 어투가 성격의 창출에는 효과적이지만 공유적 동질성에 있어서는 기여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공질적 운명의 속성을 이 대화와 지문의 구별을 없앰으로써 강력히 부각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선생과 황태자」는 작가의 이러한 성격의 공통적 동질성―그것은 죄수라는 감옥 안의 인간으로 형상화되어 잇는 것이지만―을 가진 인간의 소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들 중에 민간인 순열이 <그 특유한 고약스런 냄새들로 자기가 겹겹이 에워싸여> 있는 감방에 들어오게 되고 그 감방에서 이 중사를 중심으로 한 죄수들 틈에 끼이게 되는 것이 발단이며, 감방 생활의 한 진행과 마지막 침착한 사나이였던 순열선생이 천진한 울음으로 끝나고 있다.
그는 탈진한 사람처럼 얼이 빠진 얼굴 위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천명오는 너무 놀라 발이 묶인 듯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순열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천명오가 놀란 것은 단지 순열씨의 울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고 천연스럽게 울고 있는 태도였다. 이때 순열씨의 울음소리는 갑자기 폭발하듯 더욱 격렬해 졌다. (「先生과 皇太子」)
이 소설의 말미에 순열씨의 울음의 의미는 그것의 상징성에 의미가 있다. 죽, 이 울음의 참뜻은 좌절과 실망의 단세포적인 울음이 아니다. 인간의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삶에서 인간의 유대의식이 싹트고 이 유대의식의 핏줄에서 인간이 지닌 본성적 동질성을 회복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발견과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에서 울고 마는 것이다. 그 울음은 그를 감시하는 자(者)나 그의 동료나 누구에게나 울고 있음의 소리가 전해지고, 그것은 파급하여 그들의 목소리로서 같이 울고 있다는 소리인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울음은 단계적 전개를 통해서 그 의미가 점층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첫째 울음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외출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감방 안과 바깥 세상과의 교섭 과정에서이다.
이 중사는 항상 그가 만든 독특한 방식의 저쪽 세계에 대한 통로를 지니고 있다. 이 통로라는 것이 환기통을 뚫고 고개를 내밀어 감방과는 다른 평화로운 자유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외출인 것이다.
니기미, 오랜만의 외출인가부다.
힘을 내기 위해 기합을 준 듯 중사는 말하고 천명오의 큰 손깍지에 오른발을 얹었다. 동시에 그는 손으로 천명오의 어깨를 짚고 훌쩍 올라섰고 다시 같은 동작을 거듭 하자 어느덧 중사는 천명오의 어깨를 밟고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솜씨가 체조선수같이 민활한 데 순열씨는 놀랐다.
두 손으로 통풍구의 창틀을 꽉 붙잡고 선 중사는 밑에 서 있는 순열씨를 내려다보고 한번 씨익 웃었다. 아래서 보니까 옷을 때 드러나는 중사의 왼쪽 뻐드렁니가 순열씨에게는 유난히 크게 보였고 그 노오란 이빨은 언젠가 그가 화면에서 본 일이 있는 어떤 야수의 그것과 흡사해 보여 순열씨는 흠칫 놀랐다. 〔중략〕
으흥, 벌써 떠나는구나.
중사는 변사처럼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혼자서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문득 천명오의 곁에 엉거주춤 서 있는 순열씨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선생, 거기서 저 나무가 보여요?
그가 통풍구 바깥을 손으로 가리켰으나 순열씨의 위치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요.
이중사의 이 외출은 6월을 보지 못하는 이 감옥에서 유월을 보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세계와 갇혀진 세계의 경계를 의미한다. 외출은 자유에 대한 희구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소설에서 외출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오히려 외출을 하고 난 후의 이중사의 태도에 있는 것이다. 통풍구를 통해서 바라본 저편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자유, 평화로움, 인간다움은 이 안에서 겪어야 하는 모멸, 좌절, 상실, 불안의 상대적 요인으로 흑백의 대조처럼 더욱 강렬하게 갇혀 있음의 실감을 자아내게 하는 촉매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중사는 이 외출 후면 더욱 우울하고 더욱 답답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고 우울한 세계는 평화로운 세계와의 대조적 양식과 그것이 작용하여 일으키는 반응만에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푸른 하늘을 나는 한 마리 새처럼 인간의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세계는 우리의 꿈이다. 세속적인 것, 인간끼리 얽혀진 이해 관계의 사슬들, 혹은 남녀 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인간들과의 사이에 서로의 손을 잡고 이 절대적 자유의 염원만을 지닌 채 서로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인간세계에서 먼 하늘과 평화로운 마을은 현실적인 자연 공간이면서 절대적 자유의 표징인 것이다.
송영은 이러한 세계를 본다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모여 사는 인간의 공질성을 차갑게 제시하고, 이 차가운 현실적 메커니즘은 인간으로 하여금 울게 만드는 것이다.
이 징후는 계속하여 동료의 울음, 감방의 비명과 코러스를 이루고 그 절정으로 순열씨의 좌절의 울음소리를 빚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시간의 복합성과 대화와 지문의 혼합과 플롯의 평면적 제시 방법 등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통하여 구체적 현실의 의미와 밀착하여 현실 상황의 갇힌 공간을 우리에게 알게 하고 이를 통하여 인간의 본질적 동질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송영 작가가 치밀히 계산한 짧은 디테일들의 연결 과정에서는 그의 공간개념이 살아 있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취약한 자유의식이 바탕이 되어 삶 그 자체를 안고 딩굴게 하는 것이다.
「의사 김씨」의 경우 이와는 저금 다른 변모를 보이고 있다.
「의사 김씨」에서 송영의 소설은 사상(事象)에 대한 표피적(表皮的) 감수성의 멋진 환상이나 분위기를 가지기보다는 소설내적 구조를 통해서 끊임없이 증거를 제시하고 이를 증언하고 그리하여 현실의 원액적 문제(原液的問題)들을 찾아 이를 그릇에 담고자 한다.
그것은 한 인간의 <과거>라는 축(軸)과 그것을 회전시키는 세월의 흐름 혹은 역사, 그리고 이들이 일으키는 파장을 통해 현실 속에 던져진 우리가 살아있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소설은 <나>라는 주인공이 고향을 오랜만에 찾는 데서 발단하고 있다. 고향을 지키는 터줏대감격인 노일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30여 년 전 의과대학생인 김병수를 찾아가게 된다.
이 김병수는 6·25 전 이른바 젊은 신진공산주의자로서 지하당 조직을 하다가 사변이 나고 적군이 내려오자 그 지방의 치안 책임자가 된다.
치안 책임자로서 양민을 학살도 하게 되고 지방 사람을 처형도 한다. 그러다가 사변이 끝난 뒤 그는 어떻게 구제를 받은 휘 고향에서 사라져 30여 년을 고양이섬이라는 <절해의 고도>처럼 음흉한 섬 속에서 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노일구와 <나>가 의사 김씨를 찾아 고양이섬에 도착하여 마을 반대쪽에 회색 페인트로 옷을 입고 있는 마치 벽지의 교회당 같은 괴상한 느낌의 병원 문 앞에 섰을 때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그는 없는 것이다.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다.
이 단순한 스토리 라인은 두 가지의 의미 있는 보조개념으로 짜여 있다. 그 하나는 고향의 의미이다. 그것은 인간 모두의 가슴에 다겨 있는 귀소본능처럼 고향이 주는 원색적 삶의시발의 가치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삶의 발전적 형태인 세월의 흐름이다. 그의 「의사 김씨」와,「선생과 황태자」의 감옥에서 환기창으로 내다보는 바깥 세상 <멀리 빨갛고 검은 기와 지붕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을 보았을 때와 <남의 집 담장을 기어 올라가 몰래 뒤란을 훔쳐보았을 때>라고 대칭되는 방식과 같이 세월의 흐름은 이처럼 고향과 엮어져 있다.
그는 인간의 고향을 축으로 세월의 흐름이 빚는 마모적 생을 회전의 힘으로 해서 인간끼리 모여 사는 것과 홀로 사는 것과의 갈등과 모순을 투영한 것이다.
「의사 김씨」에서 구체적 증거로서 제시된 의사 김씨의 삶은 대칭적 암시를 통해서 밝혀진다. 즉, 필리핀의 루손도 밀림에서 갑자기 출현한 일본군 오노 병장과 김병수 의사와의 대조 양상이 그것이다. 오노가 <과거를 붙잡고 거기에 매달리려고 했던 점>과 의사 김씨가 <과거로부터 맹렬히 달아나려고 했던 점>으로 표상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의 체험이 그 자신의 삶에 일으키는 반응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면서도 의사 김씨 역시 결국은 <과거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하고 있다. 이 탈출의 성공의 의미는 암시의 근본 목적이 세월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인간의 마모적 삶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심정처럼 본연의 인간 본질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긍정적 동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의사 김씨」는 그러한 의미에서 이 소설이 지닌 평면적 시간구조와는 달리 시간을 아코디언이 잔살을 줄여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 이 과거라는 시간을 끌어다가 참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송영은 상투적인 얼굴의 작가가 아닌, 적은 그의 소설 대부분에서 찾을 수 있듯이 문제의식의 핵을 언제나 한 편의 소설 구조 위에 고르게 펴내는 증거를 통한 증언의 삶을 창출하고자 하는 작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의사 김씨」의 작품 구조에서 시간과 역사, 그리고 한 인간의 실상과의 도식의 설정은 갇혀진 사회에서 다시 시간의 단절과 접속이 불연속성을 대상으로 발전해 나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송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은 인간적 개성이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포괄적 개념에 대한 송영 작가의 특이한 배려탓이리라 생각된다.
그의 소설의 인간은 인간이 지닌 가장 보편적 개념, 즉 자유, 삶, 존재 등 추상개념에서 찾아질 수 있는 개념의 꼭두각시를 인간으로 선택하고 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꼭두각시가 개념의 충실한 추구로서 소설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삶의 이쪽저쪽을 느끼고 생각하고 우는 다변성을 지닌 데에 매력이 있는 것이다.
「선생과 황태자」나「마테오네 집」에 등장하는 인간들이 한결같이 답답한 갇힌 세계의 인간이면서도 갇힌 세계에 대한 불만과 그 불만을 통한 인간의 형상성을 작가는 내세우지 않고 그들끼리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인간의 유대와 그들끼리의 눈물과 한숨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 현실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이 항상 증거를 바탕에 깔고 이들 증거를 통해서 증언적 삶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유대를 깊이 관찰하는 작가의 시각이 현실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는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가 자유나 삶, 혹은 갇혀진 세계의 현실 등 무엇을 그리고자 할 때마다 추상적 인간형이 먼저 제시되는 것은 증언적 색깔로 해서 인간의 원액적인 요소를 걸러내는 데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지붕 위의 사진사」의 경우도 주인공 강현수의 촬영 현장이나 그것을 발견한 <나>의 관계가 그것이다. 작가가 세밀히 삽입한 정치적 분쟁기라는 상황 속에서 안경 속에 빛나고 맑은 눈동자와 촌색시같이 순박하고 튼튼한 아내를 지닌 강현수가 하루 아침에 이적 행위자로 몰리는 것은 그의 촬영 버릇처럼 필름의 부재, 확연한 증거적 사실의 부재에 대한 작가의 진술이 표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송영 작가의 개성적 시각은 그가 현실의 어두운 그늘과 밝은 양지를 가려내고 식별하는 능력이 인식이나 사색의 실마리가 아니라, 저멀리 시야에 잡히는 목가적 세계에 대한 동경과 그것의 대비를 통한 오늘이 숨쉬는 현실을 리얼리즘의 구체적 실체감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송영의 소설「님께서 오신 날」이나「마테오네 집」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현대적 메시아에 대한 스스로의 좌절을 투명한 현실의 거울 위에 던져보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의 소설 미학이 갖는 아름답고 깨끗하게 정제된 양식성의 조화와는 달리 그의 소설은 얼음같이 차고 언제나 인간의 가슴 가운데를 관통하는 삶의 딩구는 괴로움이 있는 것은 그의 작가적 세계가 펼쳐나갈 수 있는 나래를 지녔음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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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