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손장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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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전신으로 사는 자체의 투영(全身으로 사는 自體의  投影)
姜仁淑

 

 



 손장순의 작품 속에는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들은 대체로 희연(<한국인>)의 동류이고 남자 주인공들은 문휘(같은 책)의 유사형이 많다.

 <한국인>의 인물형을 통하여 손 장순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추적하려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인>은 손장순의 가장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표작이며, 또 자전적(自傳的) 요소가 농후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어서 짧은 지면을 통하여 한 작가의 특징을 부각시키기에 가장 알맞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여주인공 희연은 지연(<立像>), 경미(<離婚施行>), 묘선(<우울한 파리>) 등과 같은 유형의 인물이다. 시대순으로 말하자면 이네명의 여인들은 손장순의 인생의 네 과정을 대표하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손 장순은 지연을 연상시키는 자유 분방한 처녀 시절을 거쳐, 문휘의 안방에서 희연과 비슷한 결혼 생활을 했고, 경미와 같은 방법으로 이혼을 했으며, 묘선과 거의 같은 여건으로 파리에 가서 살다가 미국을 거쳐 귀국했다. 지연·희연·경미·묘선 등은 이 작가와 이명동인((異名同人)인 셈이다.

 희연은 Y여고를 거쳐 S대 불문과를 나온 인텔리다. 그녀는 막내다운 발랄한 성격의 행동파 여성이다. '살아 있다는 것을 움직임으로 확인'(<고슴도치>)하는 것이 그녀의 삶이다. 희연에게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선(善)이다. 음악을 듣는 것, 집을 가꾸는 것, 데이트를 하는 것, 장을 보는 것― 그것들은 한결같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삶의 양상들이다.

 반면에 그녀는 '권태에 대하여 저항력이 약하다.'(<한국인>) '솜처럼 쌓이는 앙뉘'(<공지(空地)>)는 희연을 좀먹는 병균이다. 정지하는 것을 고난보다 더 무서워하는 희연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잘 견딘다.

 사실상 그녀는 삶의 어떤 과정에 대하여 두려움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 어떤 난관도 타개해 나갈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닥칠 현실과 난관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려는'(<한국인>) 희연은 '산다는 것 자체에 의욕과 희열을 느끼는' 여인이다.

 희연은 '뒤를 돌이켜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전진형((前進形)'이다. 그녀가 등산과 같은―극단적인 긴장을 요구하는 행동의 미학에 매혹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희연과 동류인 이 작가는 삶을 그대로 등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뒤를 돌아다볼 필요가 없는 전진, 순간에 자기의 전부를 거는 긴장, 끊임없는 상승의 의욕, 정복하기 위한 투쟁 등은 인생의 의미를 순간마다 확인시키는 박력 있는 삶의 일면이다.

 손장순이 등산 소설을 많이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신념을 가진 그녀에게 등산은 가장 박진력이 있는 삶의 과정으로 간주된 것이다.

 주저할 줄 모르는 희연의 추진력은 삶의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여에서 나왔다. '삶은 어차피 별것이 아니라' 는 것이 희연의 철학이다. 이 말은 사실상 손장순의 작품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인물들을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인생관이기도 하다. 전쟁통에 '죽었던 셈치고' 살아 본다는 니힐리스틱한 생활 태도는 일체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소인(素因)을 만든다. 그녀에게는 이상이 없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나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없다. 어차피 별것이 아닌 바에야 집착을 가지고 아둥바둥 매달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가치의 부재가 어떤 고난 앞에서도 초연해질 수 있는 희연의 대범성을 형성시킨다. 그녀는 '초연해지는 데 비교적 훈련이 되어 있다. 그 편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한국인>) 이런 니힐리즘은 희연에게 절박한 현실에서의 도피구가 되어 준다. 감정상의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심리적 딜레마 같은 것이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희연은 웬만해서는 감동할 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을 할 줄을 모른다.'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감성이 무딘 편이다. '이성에 대한 냉감증'(<한국인>),'모성 결핍증'(<기행문>) 등은 희연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다. 그 이유를 희연은 전쟁을 겪은 데서 찾으려 한다. 일체의 가치를 파괴한 전쟁의 참상이 '감성의 기능을 마비시킨 것일까.' 아니면 오빠의 환상벽((幻想癖),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S대의 관료적인 분위기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녀는 '정이 없는 여자"로 형성된 자기를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정감에는 무디어진 여성이다. 허튼 정열에 휘말려 속속들이 자멸(自滅)하는 경숙과 같은 비극은 희연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가망이 전혀 없다. '어떤 고통 앞에서도 진지하게 피를 흘리며 아파하지 않는' 희연은 자식에게 나누어 줄 모성애마저 아끼는 드라이한 감성의 소유자다.

 타인에 대한 사랑의 결핍은 희연을 자기 중심적인 에고이스트로 만들어간다. 문휘 한선 관희 그리고 혜미 <한국인>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에고이스트라는 공통 특질을 가지고 있지만 희연처럼 그것이 자식에게도 연장되지 못하는 철저한 에고이스트는 없다.

 뿐 아니라 희연의 에고이즘은 관희의 주저나 문휘의 열등감 같은 부정적인 증상을 나타내지 낳는다. 그것은 완강하고 건전한 자기 긍정의 성격을 띤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약점이나 결함 같은 부정적인 것까지 무조건으로 긍정하는 집중적인 자기애(自己愛)가 희연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녀의 정서는 자아를 향해 모조리 수렴된다.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한 정서만 풍부'한 희연은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위하여서는 철저한 노력을 기울이는 인물이다. 자아에의 충실만을 향하여 집중된다. 타인과의 연대(連帶意識)의식과 이어질 수 없는 희연의 절저한 자기 중심주의는, 정치나 경제에 대한 작가의 지대한 관심을 인물과 밀착시키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상당한 분량의 지면이 사회의 변동과 정치 경제의 동태에 대한 묘사에 할애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주인공들이 여전히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로 남는 것도 같은 데서 유래된다.

 희연의 절저한 자기 긍정의 시선은 자아에의 도취를 나타내는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진다. 희연형(型)의 여인들은 도처에서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각선미에 풍만한 육체를 가진데다가, 세련된 감각을 가진 멋쟁이들이며, 탁월한 두뇌와 정확한 투시력을 갖추고 있는, 재색 겸비의 여인들이다. '똑똑한 이비서 사모님', '이처럼 훌륭한 여성', '두뇌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남자가 감당하기 벅찬', '과만한 며느리', '희연의 주옥 같은 말' 그녀들을 수식하는 말들은 언제나 이렇게 최상급의 것들이다.

 희연의 나르시시즘은 그대로 작가  자신의 것과 동질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행문>의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외로 나가는 여행을 처음하는 처지에 머리가 이처럼 잘 돌아간 것은 역시 나의 우수한 두뇌 덕분이다.' 이것은 일인칭으로 씌어진 <기행문>에 나오는 작가의 나르시스적인 자기 긍정이다. '가장 연구비가 많고 1 년에 저명한 교수에게 한 사람씩만 주는' 특별 케이스를 재주 좋게 포착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아낌없는 자기 도취다. 이런 자기 도취가 그녀를 연상시키는 모든 인물들에게 고루고루 배분되어 희연형의 여인들의 나르시시즘을 형성시킨다.

 이러한 자기 도취는 삶을 즐기려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타난다. '상식의 모순을 탈피하고(중략) 이상적으로 살고 싶은' 것이 꿈인 희연은 예술과도 같이 아름답고 풍부한 내용을 가진 삶을 충실하게 살고 싶다. 생활의 예술화를 향한 그녀의 쾌락주의에는 일말의 죄의식도 끼어 들지 않는다. '생활의 여유와 정신력의 균형만 맞는다면' 미를 추구하고, 합리적으로 멋을 부리는 일이 죄가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 희연의 신념이다.

 체리 핑크나 피코크 블루의 의상, 그릇과 조화를 이룬 맛있는 요리, 춤과 음악과 대화, 벽지와 커튼의 조화, 사교 생활의 묘미, 자동차의 스피드, 스카이 라운지의 세련된 분위기, 커피와 샴페인의 깊이 있는 미각, 그런 것들은 희연에게 삶의 보람을 찾게 하는 귀중한 요소들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성의 존재도 한몫 낀다. 분위기를 돋보이게 할 생활의 자극제로서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이성은 그저 무대 장치나 소도구 정도의 기능밖에 가지지 못한다. 심리적으로 이성에 대하여 불감증인 그녀는 기분을 즐기는 이상의 것을 남자에게 나눠줄 마음이 없다. 자기애가 강한 희연은 정서의 자가 충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도 얼마든지 삶을 즐길 수 있다. '형광등 아래 짙어 가는 파란 어둠 속에서 샹송을 곁들려 포도주를 마시는' 때의 충족감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한 지연<(立像)>의 행복이다.

 '나만의 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긍지는 손장순의 여인들의 공통 특질이다. 혼자 사는 일을 충분히 즐기는 지연이나 나희<공지>에게 자아는 그 삶의 지주요 신앙이다. '못갈 데가 없이 다 가고 놀아 볼 대로 다 놀아 본' 자유 분방했던 처녀 시절에 희연이 타락하지 않은 이유도 그 철저한 자기애에 있었다. 인생은 망가져도 자아는 망가뜨릴 수 없다는 자각은 희연의 이혼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성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자기애 때문이다. 희연에게 있어 남자의 가치는 '여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에 좌우 된다'<한국인>. 그녀가 물질적 조건만 철저히 따지는 타산에 의한 결혼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감촉으로 실감이 되고 그것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공지>식(公志式)의 에로티시즘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건조한 거래가 그녀의 결혼이다. 하지만 가난한 공무원인 문휘에게는 사치품인 그녀를 구입해 낼 그 매력이 없었다고 작가는  <한국인>에서 말하고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점을 연상시키는 표현법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홍정과 구매 능력으로 파악한 손장순의 세계에서 희연형의 여인들은 탁월한 상재(商材)를 타고난 상인들 같다. 그녀들에게 있어 삶은 하나의 요령이요 테크닉이다. 특히 그것은 물질적인 손익 계산을 따지는 타산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들은 돈에 대한 집착을 자랑스럽게 간직하는, 선업 사회의 주민으로서의 철저함을 가지고 있다. 이혼하는 마당에서 수표부터 독촉하는 경미나 '계산이라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명리(<타산>)나 명현 같은 인간상은 손장순이 개발한 유니크한 인물형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아직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한국의 풍토 속에서 감정에까지도 물량적(物量的)인 척도로 주판질을 해대는 명리의 노골적인 물질주의는 분명 하나의 충격이다.

 타산에 의한 결혼이 어긋나서 손익 계산의 결과가 마이너스로 나타났을 때, 희연이 미련 없이 문휘의 안방을 박차고 나오는 행위는 손장순의 인물들의 의지력과 결단력의 크기를 보여준다. 스스로를 독종이라고 부르는 희연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그 자기 긍정의 폭이  무한정 넓다. 어떤 야박한 계산이나 어떤 나르시시즘도 그녀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수 없다. 철두철미한 자기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나 수치심이 전혀 없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긍정 때문이다. 인간의 속성을 직시하고 그 악까지 모조리 긍정하는 희연의 용기는 그대로 작가의 그것과 이어진다. 응큼하게 위장된 위선보다는 철저한 위악을 더 사랑하는 것이 작가의 특징이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놓고도 조금도 감정이 꿀리지 않는 그거야말로 진실로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때문에 개방은 풍부한 자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약자는 또 얼굴 가죽이 두꺼운 소리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나르시시스보다 더 싫어한다.                                           ( < 작가 노트> )

'약하고 감상적인 것만이 미덕은 아니다', '비합리성이 선성(善性)을 의미하는 것일까?'(<한국인>) 같은 물음은 손장순의 노출벽의 원천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강하고 이성적인 것, 그리고 합리적인 것이 씨의 바탕이다. 희연은 우리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자신에 차 있는 강한 여성이며,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주인공이다. 상문주의적(尙文主義的)인 윤리 의식에 얽매여 있는 한국의 풍토에 대담하게 반기(叛起)를 들고 나선 아마존―'삶을 전신으로 사는'(<알피니스트>)지극히 건강한 여성형이다.

 그런데 이 건강한 여인들 옆에 서 있는 남자들은 역할이 바뀐 느낌을 줄 정도로 박력이 없다. 어딘가가 단단히 고장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들은, '살얼음 속의 수초(水草)'가 아니면 아마존들이 데리고 노는 스틱 보이거나 링반델룽에 결려 있는 알피니스트다. 그들은 너무나 닮아 있다. 성우 (<살얼음속의 수초>) 깍두기 (同名의 소설) 석현(<이혼 여행>) 등은 모두 문휘(<한국인>)의 동류이다.

 그들은 끌도 없을 것 같은 열등감에 뜯기우는 자기 분열형의 인물들이다. 실속 없는 환상과 과욕이 그들을 파탄으로 몰고 간다. '대통령은 차례에 안 오고 차석은 무엇이나 싫어서' (<부동산 중개인>) 거점을 잡기가 어려운데다가 무엇을 '열망하다가도 막상 그것이 현실화되면 나자빠지니'(<깍두기>) 손에 남는 것이 없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치면서 자만심과 열등감 사이를 자맥질하는 사람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전신이 신경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과민성을 가지고  있다.

 희연의 둔감성이 하나 극이라면 문휘의 과민성은 반대편 극이다. 그는 모든 대인 관계에서 상처만 받는다. 절제 없는 감성, 자아의식이 강하면서 불안정한 개성, 받는 일에만 섬세한 감정의 일방통행, 철저한 점유욕, 시간시간마다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유아적 증상, 그런 것들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항상 별에 부딪치고, 그들에게 남는 것은 영원히 채워지지 못할 마음의 공동(空洞)뿐이다. 그 공허가 그들을 사디스트로 만들어 간다.

 약함과 잔인함이 원색적으로 노출되는 그들은 자제나 극기가 불가능한 미숙아들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재빨리 감정을 처리하고 의연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희연의 의지력이 그들에게는 없다.

 문휘형의 인물들은 삶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희연의 경우처럼 인생은 별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문휘의 고질이다. 문휘에게 있어 인생은 완벽해야 할 하나의 꿈이다. 사람을 자기 뜻대로 요리해 낼 능력이 없으면서 기대는 크니까 좌절이 오는 것이다. 그는 제일 훌륭한 남편이 되고 싶고 제일 훌륭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여자를 모른다. 여자를 사귄 경험도 없고 여자를 다루어 낼 수완도 없으면서 집념과 점유욕만 비정상적으로 강렬하다. 병신이 되어서라도 자기만을 필요로 하게 되기를 원하는 그의 비정상적인 점유욕은 여자를 거겁스럽게 만들 뿐이다. 아내의 애정을 확인하려는 집념 때문에 아내를 죽이게 되는 성우(<살얼음 속의 수초>)처럼 '태어난 이후로 줄곧 채워지지 못한 빈 마음' (<한국인>)을 모두 충족시켜 주기를 희연에게 기대하는 문휘는 순간순간마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기대는 다른 대인 관계에서도 나타나 그의 사회 생활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실직과 이혼을 한꺼번에 당하는 그의 비극은 지나친 기대와 꿈에서 생겨난다. 결국 그는 아무 데도 정착할 수 없이 떠밀려 다니게 되고, 그러다 보니 희연처럼 자신의 삶을 고루 즐길 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사업까지도 취미와 혼동하는 버릇 때문에 실패의 고배만 거듭 마시는 그는 이혼을 사무적으로 처리할 만큼 드라이해질 수 없다. 희연이 훌훌 털고 일어나 묘선으로 변모하는 시간들을 그는 고뇌 속에서 낭비하고 급기야 정신 병원 신세를 지는 참담한 갈등의 수렁에 빠져 버린다.

 그는 에고 속에 갇힌 열등감의 덩어리다. 남보다 탁월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 자신을 못 갖는 소심스러움 때문에 희연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져 스스로에게 도취될 수도 없는 문휘는 남을 때리면서도 맞는 사람보다 더 아픈 감성 때문에 노상 패를 철철 흘리는 아픔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열등감 때문에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보호하느라고 능력 이상의 지출을 감당해야 하는 문휘는 너무나 비타산적인 감상가인 셈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그이 방황은 감상의 올가미로 자승자박을 한 당연한 결과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할 사나이, 감정을 낭비하면서 사춘기적 정서 불안정에서 헤어나지 못할 그의 비극은 합리 정신과 의지력의 결여에서 온다.

 손장순의 인물들은 대체로 희연형(型)과 문휘형(型)으로 대별된다. 등산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과 범호 탈호 희연형에 가깝고, 혜미나 소라는 문휘형에 가깝다. 그밖에 거론된 여자의 수가 백여 명이나 되고, 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관희형(型) 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지적(知的)이고 합리적이며 관념성이 농후한 손장순의 세계는 작은 것을 갈고 다듬는 섬세함보다는 거시적인 것을 지향하는 욕심으로 채색되어 있다. 한 나라의 역사와 사회를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한국인> 같은 제목을 가진 그녀의 소설은 작품의 성공도를 떠나 그 의도의 크기에서 탈여성적 (脫女性的)이다.

 손장순은 자기를 거의 변형시키지 않은 채 작품 속에 투입시키는 작가다. 자신에 넘쳐 있는 이 담대한 작가는 인물을 윤색시키거나 미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작품 속에서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 여기에서 언급한 몇 편의 소설 외에도 <고슴도치> <동류> <막 내리다> 등의 작품 속에서 화장을 지운 맨얼굴로 우리 앞에 서있는 작가를 만날 수 있다. 그녀의 사생활을 길게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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