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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 본문 일부 및 해설 / 유치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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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 유치진

 본문

나오는 사람들

국서 : 농부, 50세                     우삼 : 이웃 사람

그의 처                                   영실 : 이웃 사람

말똥이 : 그들의 장자, 26세       문진 : 이웃 사람, 일꾼, 별명<텁석부리>

개똥이 : 그들의 차자, 23세       늙은 일꾼

국진 : 국서의 아우, 35세          젊은 일꾼

귀찬이 : 동네 처녀, 17,8세쯤    소장수 A, B, C

귀찬이 부 : 40세쯤                   유자나무집 셋째 딸

사음

기타 : 일꾼, 동네 사람, 동네 젊은 사람, 동네 계집애, 어린애, 술집 하인 등 다수

 

때 : 193×년
곳 : 시골 농가

 

무대

  좌편에는 헛간, 우편에는 마당, 마당에는 바깥 행길의 일부분을 경계하는 울타리. 그러나 이 집에서는 울타리 밖 행길에다가 일쑤 소를 매어 둔다. 울타리에는 길로 빠지는 조그만 삽짝문이 있다.

  헛간 좌편 벽에는 방문, 그 앞에 툇마루, 헛간의 후방에는 집 곁으로 통하는 입구. 마당에는 빨간 감이 군데군데 달렸다.

  명랑한 늦은 가을철.

 

제1막

  집 뒤에 타작 마당이 있는 듯 거기 일꾼들이 간간이 외치는 소리와 군호마저 해가며 노래 부르는 소리 들린다. 무대에는 절구통 뒤에 가마니를 쓰고 말똥이(더벅머리 노총각, 돼지꼬리 같은 댕기를 드렸다.)가 숨어 있을 뿐이고 아무도 없다. 웬일인지 말똥이는 오늘 아침부터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국서 : (집 곁에서 소리만) 말똥아! 말똥아! 이 배라먹다 죽을 놈이 어딜 갔어? (헛간으로 나온다. 완고한 농사꾼. 뒤통수에 눈꼽재기만 한 상투가 붙었다.)…일은 허지 안쿠 이 육시를 헐 놈이 어디로 새버리고 말었나? 원, 사람이 바뻐 죽겠는데……(이웃 사람 우삼 등장)

우삼 : 국서, 어때? 타작 잘들 하나?

국서 : 그저 그러이. 저 타작 마당으로 가세. 술이나 한 잔 나눠 먹게.

우삼 : 너남즉 할 것 없이 농사는 잘 됐어. 참 금년이야말로 풍년이야. 가다 드문 대풍년이거든!

우삼 헛간 입구로 퇴장. 개똥이 울타리 밖 행길에 나타난다. 뱃일하는 사람이 흔히 입는 툭툭한 샤쓰를 입고 조타모를 썼다.

국서 : 이놈 개똥아! 오늘같이 바쁜 날에 너는 어디를 쏘다니니. 없는 돈에 삯꾼 얻어서 일허는 것을 보구. 그래 사대육신 성헌 놈들이 왜 그렇게 빈둥거리고 노느냐 말이야? 이놈, 성 녀석은 또 어디 갔니?

개똥이 : (퉁명스럽게) 못 봤수, 나는.

국서 : 에이 죽일 놈들! 자식들 있다는 보람이 어디 있어! 그저 삼신 할머니의 잘못이야. 이 따위를 자식이라구 점지해 주신 삼신 할머니가 아예 미쳤어!

개똥이 : 아버지, 그렇게 부화만 내지 마시구 내게 노자를 만들어 주. 나같이 배 타고 돌아다니는 놈을 붙들고 농사를 지으라니 될 말이오. 여기서 이냥 놀기만 해두 갑갑해 죽겠는데.

국서 : 이놈아, 네가 아무리 뱃놈이기로서니 애비가 바빠서 이러는데 좀 거들어 주었다구 뼉다귀가 뿌러질 게 뭐냐?

개똥이 : ……저 이것 봐요 아버지. 우리 집 소, 그만 팔아서 나 노자해 주. 네? 나 만주 가서 돈 많이 벌어가지구 올께. 일천오백 냥〔30원〕만 있으면 돼요.

국서 : 뭐? 소를 팔어? 원, 이 지각 없는 자식놈의 소리 좀 들어 보게. 이놈아, 우리 소는 저래 봬도 딴 데 있는 그런 너절한 소하고는 씨가 다르다. 너두 알지? 우리 집 소의 사촌의 아버지의 큰형님뻘 되는 소가, 그러니까 우리 소의 사촌의 큰아버지뻘 되는 소지, 그 소가 읍내 공진회에 나가서 도 장관 나리한테서 일등상을 받았어. 정신채려라! 일등상이야. 그런 내력 있는 소를 함부로 팔아?……그 소가 우리 집에서 그저 밭이나 갈고 이웃에 불려가서 품앗이나 들고 하니까 그저 이놈이 업수이 여겨서.

개똥이 : 아버지, 요즘 만주만 가면 돈 벌이가 참 많대요, 이 때가 바로 물땝니다.

국서 : 흥, 이놈아, 건성으로 돈이 사람을 따르는 줄 알아서는 안 돼. 너 따위 배 타러 다니는 놈이 그렇게 대가리에다가 지꾼지 처지를 처바르고 게다가 비단조기까지 잡숫고 그래가지고두 돈을 벌어? 당최 그런 생각일랑 염두에두 두지 말고 뒷길에 가서 소 마구간이나 치워라. 그리고 성녀석 만나거든 어서 타작 마당으로 오라구 그래.

개똥이 : 아버지, 그렇지만.

국서 : 얼른, 이놈아! 시키는 대로 좀 고분고분히 해라! (개똥이 하는 수 없는 듯이 집 뒤로 나간다.)

    이 때 좌편에서 술집 하인 자전거로 술을 한 통 싣고 온다.

술집 하인 : 술 가져 왔어요.

국서 : 그래, 이리로 가져 온. 너 행길에 오다가 혹 우리 집 말똥이 못 봤니?

술집 하인 : 못 봤어요.

국서 : 원, 이런 육실한 놈이 어딜 갔담! (국서 술집 하인을 데리고 헛간 입구로 퇴     장)

말똥이 : (부르퉁해져서 쓰고 있던 가마니를 심술스럽게 뜯는다.)……아무리 아버지가 그래두 뒷간에서 개부르드키 그렇게 쉽게는 나를 못 불러 쓸 거야, 빌어먹을! 누가 일을 헌담! ……흥,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시키게. 나는 싫어. 막 죽어두 일은 안 헐 테야.

 집 뒤에서 타작하는 소리. 깽맥이 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문진이 헛간 입구에 나타난다.

문진 : (소리친다) 자, 술 먹으로들 오게! ……아무도 없구나. (사라진다)

말똥이 : (끙끙댄다)……으! 아이 갑갑해……술만 처먹구 지랄병만 허면 제일이야. 빌어먹을! (몸부림친다)

   (집 뒤에서 일꾼들의 노랫소리 들린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왔네.
에헤 데헤야
얼싸 좋고 좋아
어름아 지화자
네가 내 사랑이지.

   헛간 입구를 통해서 우삼이와 문진이가 어깨를 출썩거리고 춤추는 게 보인다.

말똥이 : ……에그, 그 거드럭대는 꼬락서니 참 볼 수 없군! 풍년이 왔으면 먹을 꺼나 남을 줄 아니까 장관들이지. (가마니를 둘러쓰고 다시 눕는다.)

문진 : (어깨춤을 추고 헛간으로 나온다.)

우삼 : (문진이와 같이 따라 나오며)……유월 저승을 지나면 팔월 신선이 닥쳐 온다는 것은 이 때를 두고 한 말이지. 밋건덩 유월, 둥둥 칠월, 어정 팔월이란 말은 잘 헌 말이거든! 더구나 금년같이 철이 잘 들고서야 어느 빌어먹을 놈이 농사짓기를 마다하겠는가, 허허헛……텁석부리!

문진 : (어깨춤을 추며)……암, 도처에 춘풍이지 키키키……

영실 : (술을 한 바가지 얻어키고 김치 가닥을 물고 헛간 입구에서 나오면서) 잘 먹구 갑네다. 술맛 좋은데. 국서, 우리집 타작은 모레니까 그저 바쁘잖거든 오오. 실컷 술 대접헐 테니까. (퇴장)

국서 : (나오며) 그래. 가구말구요.

우삼 : ……농사는 태국평천하지본이라 ……그렇지, 텁석부리?

문진 : 그런 케케묵은 소리는 치우게. 그보다 이게 어때, 우삼이? 농사를 짓다가는 말라 죽나니라……핫핫……

우삼 : (문진이와 같이 웃는다. 그리고)……아, 잘 취했는데, 국서, 나는 잘 먹구 가네. (우편에서 들어오는 사음을 만나) 마름 나으리, 날새 편안하십네까?

사음 : 자네 잘 취했구나, 우삼이.

우삼 : 금년 같은 해 안 취허구 언제 취해 보겠습니까? 작년에는 물이 없어 못해 먹구, 재작년에는 물이 많어서 못해 먹었죠. 그러다가 금년에야말로 풍년이거든요. (풍년가를 부르며 퇴장)

처 : (헛간 입구에서 사음을 발견하고) 아이구 마름님. 어서 오시오, 술 좀 자셔요.

사음 : (술을 한 바가지 키고)……술 맛 좋은데, 국서는 어딨나?

처 : 금방 여기 있었는데요. 저기 타작 마당으로 갔나 봅니다.

사음 : 어때? 금년에는 볏섬이나 늘겠지? 곡식들이 잘 됐으니까.

문진 : 암요. 도처에 춘풍이거든요!

처 : 아무려면 작년 재작년의 흉년에다가 비하겠습니까? (사음, 헛간 입구를 통해 타작 마당으로 퇴장. 다른 사람들도 다 따라 나간다.)

말똥이 : (혼자)……마름 녀석. 말세나 좀 낫게 받으려구 그저 알랑거리지! (일어서다가 발끝에 밟히는 것을 툭 차며) 이건 뭐야! (말똥이, 물독에서 물을 한 바가지 키고 절구통에 걸터앉는다. 여태까지 들리는 깽맥이 소리 멀리 들린다. 국서의 처와 술집 하인 헛간으로 나온다. 국서의 처는 방에 가서 돈을 내어 술값을 치른다. 술집 하인 자전거를 타고 우편으로 퇴장. 국진이, 헛간 입구에 나타난다.)

국진 : (국서의 처더러) 아주머니, 이 함지 좀 꿰매어 주슈, 얼른! (함지를 두고 나가 버린다.)

처 : 원, 이렇게 바쁠 적에 하필 이건 왜 깨지누? (함지를 가지고 다시 헛간으로 들어온다.)……어디 이걸 꿰맬 무슨 끄나풀이나 없나? 참! 방문위다 내가 삼〔麻〕끈을 얹었더라. 아이구 높아서 키가 안 자라네. 무슨 발돋움할 꺼나 없나. (발돋움할 것을 찾다가 말똥이를 발견) 에그! 이놈이 여기 있었구나! 우리 그걸 몰랐지…… 대관절 이놈아,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응? 외아들 잡아먹은 할미상을 허구. 이건 뭐야, 이 덩덕새 머리는? 애걔 꼴불견이로구나. 이놈아, 네 아버지한테 들키기만 해 봐. 난수로 맞을 테니까. 철없는 응석받이가 아닌 담에야 바뻐서 눈코 뜰 새 없는 이 때에 왜 게으름을 피고 있담! 자―생트집일랑 그만 허구 아침이나 먹구 얼른 타작 마당에 나가거라. 아버지가 뭐라구 야단하시거든 그저 배가 아퍼서 모정방에서 좀 엎드려 있었다구 그래.

말똥이 : 놔! 싫어! 일해두 못 얻어 먹기는 마찬가지지.

처 : 에그, 이게 무슨 소리야. 농사짓는 놈이! 이놈아, 그런 속알찌 없는 소리 말구 얼른 일어나! 네가 한두 살 먹었니? (말똥이, 그예 일어나지 않는다.) 에그 기막혀! 이놈아, 빨리 일어나서 일 좀 해라!

  귀찬이 부. 어수룩한 중년 농부. 이 때에 등장.

귀찬이 부 : 왜 이러우? 아들허구?

처 : 세상에 이것 봐요. 오늘같이 바쁜 날에 이놈이 집안은 맞잡어 도울 줄 모르고 여기 눌러붙어서 막 악을 쓰지 않겠소. 아주 '일해두 못 얻어 먹기는 마찬가지지.' 이러면서요. 우리 집안에서는 도무지 이런 자식은 없었어요. 이게 무슨 귀신이 씌었거나 그렇잖으면 정신이 뒤집혔거나 했나 봐요. 조선 천지에 농사지어 먹는 놈으로 이런 주둥아리를 놀리고 이렇게 게으름을 피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이우? 다른 집에서는 일을 해먹을랴두 농토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는 지경인데. 참 앙아라 보살이 내릴 일이지.

귀찬이 부 : 아마 어디가 아픈 거겠지요. 말똥아, 어디가 아프니?

처 : 아프긴 어디가 아퍼요. 어제는 햅쌀밥을 했는데 꾹꾹 눌러 담은 제 목아치를 한 그릇 다 처먹구, 게다가 에미 목아치까지 빼앗어 먹구, 그리구 방귀를 퉁퉁 뀌든데요.

귀찬이 부 : 이놈아. 일이 세어서 몸이 괴롭니?

처 : 괴롭다구 드러눕는 농사꾼이 어디 있겠수? 그러면 바루 상감봉 팔자게. 아마 무슨 귀신이 씌었나 봐요. 어느 점쟁이를 불러다가 물어 봐야지. 그렇잖으면 이럴 이치가 없어요. 농가에서 가을철에 일 많은 건 어디 금년에 시작된 노릇입니까? 어제까지두 이놈은 일을 잘했어요. 힘이 세서 밥도 잘 먹구 그랬는데, 별안간 오늘 아침부터 이래요, 밥도 안 먹구.

귀찬이 부 : 불시에 벙어리가 됐니? 이놈아, 무엇이 싫거든 싫다구 탁 털어 놓고 말을 해봐.

처 : 아니야요. 정녕 귀신이 씌인 탓입네다. 내버려 둬요. 타작이나 마치거든 막걸리나 받아다가 터줏님께 걸찍허게 고사를 드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도시 낫지 않을 병입네다.

말똥이 : (슬며시 감나무 밑에 가서 앉는다.)

귀찬이 부 : 참, 무슨 곡절이 있나 봅니다. 몸이 아퍼서 그런 것두 아니라면.

처 : 내버려 둬요. 우황 든 황소같이 저러다가 그만 뒤어지게.

귀찬이 부 : 아니 그럴 께 아니라.

처 : 그만두고 저 문 위에 있는 삼 노끈이나 좀 내려 주어요. 사람이 바쁘니까 함지까지 성화를 부린단 말이야.

귀찬이 부 : (삼 노끈을 내려 주며) 나 도리깨 좀 얻으러 왔는데요. 우리는 콩 몇 말 되는 것 미리 두들겨 팔아야겠어요.

처 : 저기 걸렸지요.

귀찬이 부 : (도리깨를 내리며) 참, 댁의 이번 추수는 어때요? 올해는 물이 흔해서 우리 동리엔 전반으로 잘 됐나 봐요. 젠장, 해마다 흉년에 쪼들리더니 이번에는 좀 허리를 펼는지.

처 : 농사가 잘 되면 어디 논임자 밭임자가 가만둡니까? 이 몇 해 동안 밀려 내려오든 콩도지, 쌀도지를 이번에 들어서 죄다 받어 낼려구 덤비는 걸요. 되려 흉년이 드는 것만 같지 못할까 봅니다.

귀찬이 부 : (소리를 낮추어서) 그런데 저, 댁에서도 이런 소문을 들었어요? 어찌되는 건지 내년부터서는 무슨 농지령이란 법령이 새로 내린다나요. 그래서 입때까지 밀린 도지는 이번 추수까지 다 해 들여 놔야 한대요. 그렇잖으면 논을 떼고 막 집행을 헌대요.

처 : 우리한테는 금년 봄부터 그런 말썽이군요. 어찌 되는 놈의 세상인지.

귀찬이 부 : 허는 수 없어서 우리는 우리 집 귀찬이란 년을 팔아 먹게 했지요.

처 : 귀찬이를? 그 얌전한 애를?

귀찬이 부 : 도지를 갚지 않으면 논을 뗀다는 데야 해 볼 장수가 있나요. 자식이라도 팔어서 갖다 갚어야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꿩 잃고 매 잃는다는 셈으로 논은 논대로 떨어지구 자식은 자식대로 굶겨 죽일 걸.

말똥이 : (혼자말같이)……논이 떨어지면 어쩌란 말야! 빌어먹을! 자식 팔아 먹구 잘 되는 집안은 못 봤어. (퇴장)

처 : (말똥이를 바라보고) 저런! 육실할! 저놈이 바로 환장을 했어!……그런데 귀찬이는 영 팔게 했수?

귀찬이 부 : 2천냥〔40원〕에 아주 작정을 지었답네다. 그것두 원체 요즘은 이곳 저곳서 계집애 팔려는 데가 많아서 좀체 사 갈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는 것을 읍내에 나까무라상헌테다가 말해서 일본으로 팔게 했어요. 선금으로 우선 천 냥〔20원〕받고, 도장 찍구 계약까지 했지요.

처 : 에그, 댁에는 딸을 잘 가져서 보퉁이 신세는 면하시겠구려. 우리 집에는 사내 새끼가 둘이나 있으면서 무슨 팔자 소관으로 그런지 사람의 간장을 이처럼 썩이는구려. 한 자식은 배 타러 다닌다구 떠댕기다가 집에 들면 농사짓는 것을 업수이 여기구, 한 자식은 여태 근실히 잘 하든 놈이 버쩍 오늘부터 병든 황소같이 늘어 자빠지니……우리 집안에는 무슨 망쪼가 든 거야요. 그렇잖으면 이럴 리가 없어요.

귀찬이 부 : (일어서며)……계집애가 나서 귀찮스럽다구 해서 개 에미가 귀찬이란 이름을 붙였지요. 그랬는데 그게 되려 우리한테 덕을 뵈겠지요. 이힛힛…….

처 : 참 세상일은 모를 일이야요. 뭐든지 그저 거꾸로만 돼 가거든요. 춘향모의 문자가 아니라도 인젠 아들 낳기는 바라지 말구, 딸 낳기만 바래야겠군요……이왕이면 저 뒤에 가서 술 한잔 자시고 가슈.

귀찬아 부 : 술요? 웬 게 남었수?

    국서의 처, 귀찬이 부를 데리고 헛간으로 나가려 한다. 그럴 적에 국진이 낫을 들고 들어온다.

국진 : (국서의 처에게) 함지 다 됐어요?……에그, 얼른 좀 꿰매세요.

    국서의 처와 귀찬이 부 헛간 입구로 나간다. 국진이 숫돌을 찾아서 낫을 갈기 시작한다.

    사이, 유자나무집 셋째 딸의 노랫소리 우편에서 들린다.

  (노래) 청치마 밑에다 소주병 차구서 오동나무 숲으로 임 찾아가누나.  

      우편에서 무대로 돌멩이 5, 6개 튀어 들어온다. 유자나무집 딸, 돌에 맞어 비명.  그 쪽을 향해서 국진이 소리친다.

국진 : 이놈들아, 왜 돌질을 해!

유자나무집 딸 : (상처를 만지며 빙글빙글 웃으며 우편에서 들어온다. 뒤를 돌아보며)……괜히 쟤들이 돌질을 하지. 아마 나를 미치광인 줄 아나 봐. 힛힛……(돌을 도로 주어 던진다.)

국진 : 좀 비틀거리는 걸 보니 너 어디서 취했구나 또?

유자나무집 딸 : ……임순네 집 타작하는 데서 한 잔 얻어 먹었죠. 이것 봐요. 나는 취하기만 하면 우리 서울 나지미상 생각이 나. 우리 나지미상은 목에다가 빨간 댕기를 두르고, 두 눈은 새까맣고…… 참 멋쟁이 서방님이더니…… (헛간으로 나오는 국서의 처를 보고) 개똥 어머니, 날새 안녕합니까? 개똥이는 어딨어요? 녜?

처 : 왜 넌 밤낮 개똥이만 찾어다녀? 걔 아버지헌테 들키기만 허면 또 혼날려구!

유자나무집 딸 : 그런 말 마세요. 개똥 어머니. 그러면 개똥이꺼정 나를 싫어해요…… 흥, 싫어하면 어때? 나만 정들었으면 그만이지…… (힘없는 콧노래를 부르고 나간다.)

국진 : (낫을 갈아 들고) 저 계집애 신세도 말씀이 아니로군. (집 뒤로 퇴장)

 

<하략>

 

 요점 정리

 

 작자 : 유치진(柳致眞 1905-1974)

 갈래 : 희곡

 배경 : 1930년대의 농촌

 성격 : 사실적. 현실적

 경향 : 현실 고발적

 구성 : 장막극(전 3막)

 제재 : 소

 주제 : 일제 강점기의 농촌 생활의 참담함

 의의 : 사실주의 계열의 첫 장막극

 구성 :

 제1막 : 국서는 소를 생명보다 더 아끼고, 개똥이는 소를 팔아 돈을 벌러 집을 나가려 한다.
 제2막 : 소를 팔아 귀찬이네 빚을 갚기로 하고 혼인을 시키려 하나 마름의 농간으로 소는 그들의 손에 넘어간다.
 제3막 : 소를 빼앗긴 국서네와 마을 사람들의 보람은 물거품이 되고, 주재소에 불을 지른 말똥이는 주재소에 붙잡혀 간다. 이 때 국서네 소는 마름을 들이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줄거리 :

 제1막 : 국서네 농촌 마을은 오랜만에 풍년이 들어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타작하기에 여념이 없다. 국서는 소를 가진 것을 긍지로 삼고, 아들보다 더 애지중지한다. 둘째 아들 개똥이는 만주에 가서 일확 천금을 모을 궁리를 하면서 소를 팔아 노자를 마련해 달라고 부모에게 조른다. 맏아들 말똥이는 마을 처녀인 귀찬이와 결혼할 사이이나, 그녀는 농사 빚 때문에 일본으로 팔려 가야 할 신세다. 그래서 소를 팔아 그 빚을 갚고, 귀찬이와 결혼시켜 달라고 조른다.

 

 제2막 : 국서네는 결국 빚을 얻어 귀찬이네 빚을 갚아 주기로 하고 말똥이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개똥이는 소를 몰래 팔아 만주로 떠날 궁리를 한다. 국서네는 돈을 빌리기가 어렵게 되자, 결국 소를 팔기로 결심을 한다. 그 때, 소장수가 그 소는 이미 팔리기로 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해, 국서와 말똥이는 개똥이를 의심하게 되고, 이에 집안에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다. 그러나 개똥이는 소를 팔 생각은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때, 마름이 나타나 밀린 빚 대신에 소를 끌고 가 버린다.

 

 제3막 : 귀찬이는 결국 일본으로 팔려 가고, 국서는 소를 찾기 위해 마름과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하기로 하나, 소송을 해 봤자 소작인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포기하면서 극도로 절망한다. 말똥이는 지주네 곳간에 불을 지르고 주재소에 붙잡혀 간다. 잡혀간 소는 마름을 들이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인물

국서 : 갖은 육담을 일상어로 사용하는 인물. 현실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지는 못하나 자식에게는 가부장적 권위를 드러내는 보수적 인물. 농부, 50세

국서 처

말똥이:그들의 장자, 26세

개똥이:그들의 차자, 23세

국진:국서의 아우

귀찬이:동네 처녀, 17,8세쯤

귀찬이 부:40세쯤

사음:마름

유자나무 집 셋째 딸

우삼:이웃 사람

영실:이웃 사람

문진:이웃 사람, 일꾼, 별명

‘텁석부리’

늙은 일꾼

젊은 일꾼:문 서방

소장수 A, B, C

기타 일꾼, 동네 사람, 동네 젊은 사람, 동네 계집애, 어린애, 술집 하인 등 다수

 출전 : <동아일보>(1935)

 내용 연구

 

 귀찬이 부의 상징성 : 딸을 사지로 보내는 줄도 모르고 그저 돈이 생긴 것에만 흥미를 갖는 인물이지만, 이것은 탐욕과는 거리가 있다. 궁핍한 삶으로 인한 최후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찬이 부가 갖는 일련의 행위는 당대의 민족적 행로와 관련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일쑤 : 가끔 잘 하는 버릇이나 일.

 삽짝문 : 사립짝문의 준말. 잡목 가지로 엮어서 만든 문

 눈꼽재기 : 눈곱자기. 눈곱의 속어

 육시 : 죽은 사람을 다시 목베어 죽임

 사대육신 : 사대로 이루어진 두 팔, 두 다리, 머리. 몽뚱이라는 뜻으로 온몸을 일컫는 말.

 노자 : 여행에 드는 돈

 이 베라먹다 - 어딜 갔어? : 평생 구걸해서 거저 얻어 먹다가 죽을 놈이라는 욕설

 논꼽재기만 한 상투 : 아주 작은 상투를 일컫는 말

 공진회 : 대한 제국 때 보부상으로 조직된 혁신 운동 단체

 물 때 : 밀물이 들어오는 때. 여기서는 좋은 기회를 말함. 천재일우(千載一遇)

 죽 쑤어서 - 시키게 : 기껏 힘들여 일을 해서 세운 공을 남에게 빼앗길 때 쓰는 말.

 밋건덩 유월 - 어정 팔월 : 원말은 '어정 칠월, 동동 팔월임.' 농사철은 매우 바쁜지라 육칠월이 미끈 듯 어정거리는 사이에 지나가고, 팔월은 추수에 바빠 동동거리는 사이에 빠져간다는 뜻

 도처에 춘풍 : 가는 곳마다 봄바람이지. 봄바람처럼 인심이 훈훈하고 먹을거리가 흔하다는 뜻

 농사는 태국평천하지본이라 : 농자 천하지대본이란 말을 잘못 말한 것. 우삼이의 지적 수준을 드러냄.

 그런 케케묵은 소리는 치우게 :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

 말세 : 곡식을 사고 팔 때 마질하여 주고 받아 먹는 구문(口文)

 난수로 : 어지럽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속알찌 : 소갈머리·심지(心志)

 세어서 : 힘들어서

 상감봉 팔자게 : 상감처럼 편한 사주 팔자게

 우황 든 황소같이 : 병들어 빌빌거리는 황소처럼

 쌀도지 : 일정한 세를 주고 빌려 주는 논밭. 여기서 콩도지, 쌀도지는 콩이나 쌀로 쳐서 주어야 할 세를 뜻함

 꿩 잃고 매 잃는다 : 꿩도 잡지 못하고 그나마 매까지 잃어버리다. 갈수록 궂은 일이 겹침

 보퉁이 신세 : 보따리를 짊어지고 유리 걸식(떠돌아 다니며 구걸하는)하는 신세

 계집애가 나서 - 덕을 뵈겠지요 : 낳은 아이가 여자라서 어미를 귀찮게 할 자식이라는 뜻으로 귀찬이라 했는데, 그 아이가 커서 40원을 벌게 해 주니, 귀찮은 이가 아니라 덕을 준 이가 되었다는 뜻

 춘향 모의 문자 : 암행 어사 출두한 이몽룡을 보고 춘향 모가 한 말. "부중생남중생녀(不重生男重 生女) 날로두고 이름이로구나. 지화자  좋을시구 남원부중 사람들 아들낳기 원치말고 춘향같은 딸을 나 곱게곱게 잘 길러 서울사람이 오거들랑 묻지 말고 사위 삼소 얼씨구나 잘씨구 수수광풍(誰水狂風)  적벽강 동남풍이 불었네. 궁뎅이를 두었다가 논을 살까 밭을 살까 흔들데로만 흔들어 보세 얼씨구나 절씨구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얼씨구나 좋을씨구"

 추수가 필요한 것이다 : 추수가 끝난 것이다. 짚가리가 무대 한 구석에 쌓여 있는 이유를 말한 것으로 시간적 배경을 나타내며 아울러 극의 전체적 상황을 암시한다.

 그건 무슨 떡에 웃긴가 : 그게 무슨 떡에 웃기라도 된다는 말인가? '도처 춘풍'이라는 말이 격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귀에 거슬림을 말하고 있다.

 사발통문을 돌릴 테니까 : 마름의 잘못을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규탄하는 문서를 만들어 알리도록 할테니까

 소는 농가의 명줄야 : 농사짓는 집에서 소는 그 집안의 목숨을 부지시켜 주는 중요한 것이라는 말

 지성이면 감천이야 :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일이야

 틀림없이 뒤집히고 말죠 : 재판에서 반드시 소를 되찾고 말게 되죠

 맘을 써 주셔서 고맙수 :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유자나무집 딸도 - 모양이 됐다는 게 아냐 : 유자나무집 딸도 홍서방이라는 거간꾼에 속아서 돈에 몸이 팔려 서울로 가게 되고, 나중에 미치게 되었다는 것 아냐.

 노래는 한 사람이 매기면 후렴은 일동이 따라 부른다 : 농악 놀이에서 한 사람이 먼저 노래를 불러 나가면 후렴은 모두가 따라 부른다. 이는 노동하며 부르는 노동요의 한 형식이기도 하다. 극에서는 극적 긴장을 나타내는 한 요인이 된다.

 에헤 데헤야 얼싸 좋고 좋아 어름마 지화자 네가 내 사랑이지 : '에헤 데헤야 '등은 흥을 돋두기 위한 구절로 이 노래이 가사는 극중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이겼지? 틀림없지? : 소를 빼앗긴 자신의 억울한 입장에 대한 국서의 확신이 드러나는 부분. 아울러 모순된 현실에 대한 국서의 순진한 인식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묵은 도지에 대해서 집행을 붙여 : 남의 논밭을 지어 먹고는 내지 못했던 그 동안 묵혀 두었던 세를 모두 받아가겠다고 강제 집행을 하게 되어서.

 소하고 도지를 서로 상쇄했단 말이냐 : 빼앗아 간 소를 돌려 받지 못하는 대신 묵은 도지를 갚지 않아도 되는 걸로 했단 말이냐?

 이 종이 한 장으로 우린 다시 두말 못하게 돼? : 이 계약서로 불리하고 억울하면서도 이제부터는 더 이상 권리 주장을 못하게 돼

 예 있었다간 나마저 미치고 말겠는걸 : 궁핍과 착취의 현실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대사라 할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선량한 소작농인 국서네 집안의 소를 매개로 1930년대 농촌의 구조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효과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오랜만에 풍년이 들어 농민들은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타작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그러한 기분도 잠시뿐이다. 농민들은 이번 풍년으로 이제 그동안 쌓인 빚을 모두 갚아야 할 처지가 되며, 그에 따라 결국 가난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심지어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자식을 팔기까지 하며, 여기에 마름의 교활한 횡포로 농민들의 인간적인 꿈과 소망이 모두 좌절되고 만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비극적인 삶을 그리면서도, 희극적인 인물을 내세워 해학과 익살로 극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바로 이러한 희극적인 요소가 비장미를 자아내게 함으로써, 이 작품의 비극성을 한층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심화 자료

 

1934년 유치진 ( 柳致眞 )이 지은 희곡 작품.

 

〔내 용〕

3막. 1935년 극예술연구회 ( 劇藝術硏究會 )의 공연극본으로 씌어진 작품이나 일제의 검열로 상연되지 못하고, 동경학생예술좌 ( 東京學生藝術座 )의 창립공연으로 상연되었다.

 

〈토막 土幕〉(1932)·〈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1933)로 이어지는 유치진의 농촌극의 대표작으로, 사실주의 ( 寫實主義 ) 계열의 한국연극 가운데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1930년대 한국농촌을 무대로 하였다. 소작농 국서(局瑞)의 가족은 소 한마리가 유일한 재산이다. 이것을 몰래 팔아서 한 몫 장만하려 드는 둘째아들, 소를 저당잡아서 서울로 팔려갈 위치에 처한 이웃집 처녀를 구하고 나아가 그 처녀에게 장가들고 싶어 하는 큰아들, 끝내는 밀린 소작료의 대가로 소를 몰아내려 드는 마름과의 옥신각신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끝내는 이 집안(그리고 마을 전체)의 비극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작가의 현실고발과 연극적 재치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민족항일기 농촌의 현실과 삶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이미 전작(前作)에서 다룬 바 있거니와,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소작인과 마름과의 관계에다 빈곤 때문에 도회지로 팔려가야 할 궁지에 몰린 동네 처녀, 마을을 탈출하여 새로운 기회를 엿보려는 아들, 서울서 타락하여 돌아온 동네여자 등 여러 등장인물이 전체적으로 매우 잘 짜여 있다.

 

〔의 의〕

그러나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은 표제인 ‘소’를 작품의 중심에 두고서 극 전체가 구상되었다는 데 있다. 유치진은 이 극으로 해서 일제경찰에 구속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리얼리즘으로부터의 후퇴라는 그의 작가경력의 큰 전환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1937년에 극예술연구회에 의하여 상연되었을 때에는 〈풍년기 豊年記〉라고 개제(改題)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柳致眞戱曲全集(成文閣, 1971), 劇作家修業三十年(柳致眞, 現代文學 1권 5호, 1955), 韓國新劇史硏究(李杜鉉, 서울大學校 出版部, 1966), 柳致眞과 愛蘭演劇(呂石基, 韓國演劇의 現實, 同和出版公社, 1974), 한국현대희곡사(柳敏榮, 弘盛社, 198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  

    1931년 서울에서 창단되었던 연극단체. 1931년 7월에 발족하여 1938년 3월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곧이어 극연좌 ( 劇硏座 )로 명칭을 변경하여 1939년 5월까지 존속하였다.

 

〔연혁〕

창립동기는 극영동우회(劇映同友會)에 의한 연극영화전람회로 되어 있으나 동우회는 형식에 불과하고, 그 이전의 동인모임인 막우회(莫友會)가 그 모태이다.

 

외국문학전공의 동경유학생들인 김진섭 ( 金晉燮 ) · 서항석 ( 徐恒錫 ) · 유치진 ( 柳致眞 ) · 이하윤 ( 異河潤 ) · 이헌구 ( 李軒求 ) · 장기제(張起悌) · 정인섭 ( 鄭寅燮 ) · 조희순(曺喜淳) · 최정우(崔珽宇) · 함대훈 ( 咸大勳 ) 등 10명이 주동하여 연극계 선배 윤백남 ( 尹白南 )과 홍해성 ( 洪海星 )을 영입한 12명의 동인으로 구성했다.

 

창립취지는 ‘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사도(邪道)에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 ( 新劇 )을 수립 ’ 하는 데 있었고, 상업주의에 의거한 신파극 ( 新派劇 ) 위주의 연극풍토를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방하여 우리 나라 신극의 확립방향을 뚜렷이 하였다.

 

〔활동〕

 전기 · 후기로 나누어볼 때, 전기(1934년말까지)는 먼저 기반구축작업에 착수하여 하계강좌를 열고 연구생을 모집(1931.8.)한 후 직속극단인 ‘ 실험무대 ’ 를 조직 (1931.11.)하고 신인연기자를 확보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은 동인들이 거의 무대실천 경력이 없고 기성배우는 기용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방침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제1회시연회(1932.5.)는 고골리 작 〈 검찰관 〉 (홍해성 연출)으로써 공연에 성공, 토월회 ( 土月會 )의 2회공연(1923) 이후 ‘ 10년 만에 보는 최대의 수확 ’ 이라는 호평을 얻었다.

 

이후 7회까지 공연된 작품 중 중요한 것은 괴링 작 〈 해전 海戰 〉 (2회, 1932.6.), 유치진 작 〈 토막 土幕 〉 (3회, 1933.2.), 쇼(Show,G.B.) 작 〈 무기와 인간 〉 (4회, 1933.7.), 입센(Ibsen,H) 작 〈 인형의 집 〉 (6회, 1934.4.), 체호프(Chekhov,A.P.) 작 〈 앵화원 〉 (7회, 1934.12.) 등이 있다. 연출은 주로 홍해성과 유치진이 맡았고 번역은 동인들이 하였다.

 

이 기간의 공연은 장 · 단막극을 합쳐 14편인데 그 가운데 유치진의 창작극 2편을 제외한 12편이 번역극이고, 번역극 중에서도 절대다수가 북유럽 중심의 근대연극이었다. 서구 근대사실주의를 도입하여 우리 나라 신극의 기틀을 마련한 최초의 성공적 기도였던 반면 창작극의 토착화라는 신극 고유의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공연활동이 소극장적 성격을 띠어 직업성을 배제하고 신파연극의 오염에 저항한 것이 이 극단의 주장이자 체질이었고 동인들에 의한 비평활동과 기관지 ≪ 극예술 ≫ (1934년 창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35년 이후 해산에 이르기까지의 후기의 성격은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창작극의 개발과 직업적 전문화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 고답적 입장에서 대중을 멀리하고 ’ 있으며 ‘ 조선의 감정에 맞지 않는 ’ 외국극을 한다는 비판이 극단내부에서 수용된 결과이다.

 

서구 근대극의 섭취를 통해 창작극을 진작한다는 기본입장은 이미 전기 활동에서도 강조되었거니와 그 성과와 더불어 창립 초기의 정열에도 불구하고 예술활동과 실생활 사이의 갈등이 극단내부에 싹터 흥행적 기반에 대한 배려가 현실화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 기간의 주요공연작품은 이무영 ( 李無影 ) 작 〈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 〉 (8회, 1935.1.), 톨스토이 (Tolstoi,L.N.)작 〈 어둠의 힘 〉 (9회, 1936.2.), 이광래 ( 李光來 ) 작 〈 촌선생 〉 (10회, 1936.4.), 유치진 작 〈 자매 姉妹 〉 (11회, 1936.5.), 유치진 각색 〈 춘향전 〉 (12회, 1936.9.), 쇤헬 작 〈 신앙과 고향 〉 (13회, 1936.12.), 부처 작 〈 포오기 〉 (14회, 1937.1.), 유치진 작 〈 풍년기 〉 ( 〈 소 〉 의 개제, 15회, 1937.2.), 톨스토이 원작 〈 부활 〉 (16회, 1937.4.) 등이다.

 

1935년 11월부터 1937년 4월까지의 18개월 동안 9회를 공연한 것도 이례적이며, 총 18편의 작품 중 8편이 창작극임은 주목할만하다. 유치진을 필두로 신인극작가로서 이무영 · 이광래 · 이서향(李曙鄕) 등이 배출되어 창작극의 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공연장소를 전기와 달리 연극전문극장으로 옮겼다는 점도 연극전문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극단의 발전과 성숙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홍해성이 1934년말 〈 앵화원 〉 연출을 끝으로 떠난 뒤 극작과 더불어 연출을 전담한 유치진과 서항석 양인이 사실상 극단 운영을 맡았다.

 

번역극 선택에서 ‘ 난삽하고 침통한 ’ 북구계통 희곡으로부터의 탈피가 뚜렷한 것이 특색이나, 극단 전문화에 따른 부작용으로서 상업주의적 성향(예컨대 부활)도 엿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극단활동에서 가장 큰 변화는 일제의 가혹한 작품검열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6회공연 때 골즈워디(Galsworth,J.) 작 〈 은연상 銀煙箱 〉 이 검열에 저촉되어 공연이 좌절된 데 이어 8회에 예정된 유치진 작 〈 소 〉 가 검열에서 통과되지 않고 대신 선정된 심재순(沈載淳) 작 〈 줄행랑에 사는 사람들 〉 , 한태천(韓泰泉) 작 〈 토성낭 〉 , 오케이시({{%247}}Casey,S.) 작 〈 쥬노와 공작 ( 孔雀 ) 〉 등이 모두 각하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극동인에 대한 잦은 환문(喚問) · 투옥이 잇달았고 극단은 일종의 사상단체로 지목받게 되어서 1938년 3월 해체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동인 중 서항석 · 유치진만이 남아 극연좌로 재출발하기에 이르렀다.

 

〔의의〕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사적 의미는 근대 서구 사실주의의 도입 · 정착을 통한 본격적 신극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의 토월회가 신파극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이룩한 공적을 이어받아 신극운동을 본격화시켰으며, 시대배경, 창립동인의 인적구성 및 자질, 운동목표의 명확한 인식, 상업주의의 비타협적 배격, 범문화계적 호응 등 여러 요인으로 해서 토월회식 좌절과 변질을 극복할 수 있었다.

 

8년이라는 장기간(극연좌까지 합쳐)의 활동을 지속했던 것은 그간 큰 변질 없이 운동을 지속해나갔으며, 극단 내부의 중대한 의견대립 또는 분파작용이 나타나지 않았고, 재정적 안정기반 없이도 극단을 운영하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다각적으로 연극운동을 펼쳐나갔다는 데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 말기의 가혹한 문화탄압의 일환으로 연극계의 여러 숙제를 미처 풀지 못한 채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것은 우리 나라 신극사상 가장 큰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던 이 극단, 나아가 우리 나라 신극의 발전을 위해 적지않은 불행을 낳게 하였다.

 

≪ 참고문헌 ≫ 韓國新劇史硏究(李杜鉉, 서울大學校出版部, 1966), 韓國現代戱曲史(柳敏榮, 弘盛社, 1982), 創劇作家修業三十年(柳致眞, 現代文學 제1권 제5호).(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의 시대적 배경

 '소'는 농업을 위한 도구이기도 했지만, 평화로운 농촌 공동체의 한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등을 통해 일본 농업 자본을 침투시켰을 뿐만 아니라, 합법을 가장한 편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 결과 예전의 토착 지주(地主)는 줄어 들고 소지주로 전락하였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상환(償還) 불능한 빚에 묶여, 토지와 가옥을 몰수당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경제 현실은 일제의 착취가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유치진의 "토막"에도 이러한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다. "토막"의 경선네는 한밤중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당시 유랑민의 비애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소'의 문학사적 특성

 이 작품은 1935년 동아 일보에 연재된 장편 희곡이다. 일제 강점하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농촌의 현실을 사실감 있게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유치진의 초기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처음 학생 예술제에서 공연되었다. '신협' 등에 의해서 되풀이 공연된 바 있다.

 현실 의식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유치진의 처녀작인 '토막'과 같은 계열에 드는 작품으로 가난한 소작농들과 마름의 갈등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유치진의 작품 성향이 '동반자 문학'의 성향을 띤 것이었음을 엿보게 한다.

 유치진(柳致眞 )  

    1905∼1974. 극작가 겸 연출가.

 

〔생 애〕

호는 동랑(東朗). 경상남도 통영 출신. 아버지 준수(焌秀)는 한약방을 경영하였고, 동생 치환(致環)은 시인이다. 1914년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그 뒤 부산우편국 부설 체신기술양성소에 입소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뒤 귀향하여 통영우체국 사무원이 되었다.

 

3·1운동 이후 일어난 교육열의 영향으로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 2학년에 편입하여 1925년에 졸업하고, 다음해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활동상황〕

롤랑(Roland,R.)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두고 귀국, 해외문학파 ( 海外文學派 ) 동인들과 함께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약칭 극연)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였다. 극연을 주도하면서 극작·연출 등을 주로 맡았다.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극연이 해산된 후, 1941년에는 극단 현대극장 ( 現代劇場 )을 조직하여 〈흑룡강 黑龍江〉(1941)·〈북진대 北進隊〉(1942)·〈대추나무〉(1942) 같은 어용극을 직접 쓰기도 하면서 총독부의 지시에 따른 연극을 주도하였다. 광복 이후 잠시 침묵하다가 1947년 봄부터 연극계 전면에 나타나 좌익연극과 대결하여 우익민족극을 주도하였다.

 

이해랑(李海浪) 등을 내세워 극단 극예술협회 ( 劇藝術協會 )를 조직하였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1947)이 되었다. 1950년에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초대극장장에 취임하였고, 자작극 〈원술랑 元述郎〉으로 개관기념공연을 가졌다.

 

6·25전쟁 때에는 은거하면서 희곡창작에만 전년하였다. 1958년부터는 국제연극협회(ITI) 한국본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국제회의에 자주 참가하였고, 1960년에는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창설과 드라마센터 건립공사에 전념하였다. 1962년 드라마센터가 완공되자 초대소장으로 취임하여 연극진흥에 힘썼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인재양성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1962년부터 드라마센터에 부설 연극아카데미를 설치하여 배우·연출가·극작가 등의 양성에 힘썼는데, 이것은 몇 년 뒤 서울연극학교로, 다시 서울예술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식민지수탈과 민족의 궁핍화과정을 사실주의수법으로 그렸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역사극과 낭만주의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주로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는 등 현실도피를 꾀하였다. 광복 후에는 주로 분단문제와 공산주의비판, 전쟁의 참혹상 등을 주제로 한 민족주의적 리얼리즘 작품을 발표하였다.

 

주요 희곡작품은 데뷔작 〈토막 土幕〉(1932)·〈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933)·〈빈민가〉(1934)·〈소〉(1934)·〈마의태자〉(1937)·〈제사〉(1938)·〈조국〉(1946)·〈자명고〉(1947)·〈별〉(1948)·〈장벽〉(1950)·〈가야금〉(1952)·〈처용의 노래〉(1953)·〈푸른 성인〉(1954)·〈청춘은 조국과 더불어〉(1955)·〈한강은 흐른다〉(1958) 등이다. 시나리오로는 〈철조망〉(1953)·〈논개〉(1957)·〈단종애사〉(1957)·〈개화전야〉(1958) 등이 있다.

 

연극계에 끼친 공로로 예술원상, 문화훈장, 5월문예상, 3·1연극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유치진희곡전집≫ 상·하권과 ≪동랑자서전≫, 그리고 많은 연극관계 논문을 남겼다.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리얼리즘 희곡작가로서, 역사극의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이며, 극작·연출·연극비평·연극교육·연극행정 등 연극전반에 걸쳐 활동한 근대연극사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韓國演劇史(李杜鉉, 민중서관, 1973), 韓國現代戱曲史(柳敏榮, 홍성사, 198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각사(圓覺社 )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 〔 夜珠峴 〕 에 있었던 개화기의 사설극장.

 

〔개 요〕

1902년에 협률사 ( 協律社 )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는데, 1906년에 문을 닫자 극장 건물이 한동안 관인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08년 7월 박정동(朴晶東) · 김상천(金相天) · 이인직 ( 李人稙 ) 등 3명이 건물을 대여받아 내부수리를 하고 원각사라는 극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전속단체를 재구성하여, 배우는 김창환 ( 金昌煥 ) 등 명창 40명과 가기(歌妓) 24명을 두었다. 당대 최고의 국창(國唱) 이동백 ( 李東伯 )이 단장이었고, 요식업계의 태두였던 안순환(安淳煥)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활동상황〕

판소리 · 민속무용 등 재래의 연희를 주로 공연하였으며,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시대 추세에 따라 창작창극을 시도하였으며,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 은세계 銀世界 〉 를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하였다.

 

원각사는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재정적 고충을 겪었고, 결국 1909년초에는 잠시 문을 닫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4월 내부대신 송병준 ( 宋秉畯 )이 조선상업은행취체역 김시현(金時鉉)에게 운영권을 넘기도록 하여 김시현이 맡았다.

그 뒤 공연활동이 활발해져, 경시청의 지시에 따라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 공인 ( 工人 )들이 일본연극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원각사는 신연극을 공연한다고 하면서도 창극 〈 춘향가 〉 · 〈 천인봉 千 棚 峰 〉 · 〈 수궁가 〉 등을 공연하였다.

 

1909년 11월의 〈 수궁가 〉 공연 이후 실제로 공연활동은 끝나고 공회당으로 변모해갔다. 즉, 국민회본부사무소로 쓰였고, 1910년부터는 연설회장과 연희장으로 가끔 대여하였다. 원각사가 1909년 11월 말 폐지되자 전속 명창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원각사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좋은 시설을 갖추었으나, 국운과 함께 숱한 풍운을 겪고 결국 1914년 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개화기의 대표적 극장인 원각사는 전문적 극장시설을 갖춘 500여 석 규모의 중극장으로 판소리를 분창하여 창극을 만들어냄으로써 근대연극의 기점을 마련하였다.

 

≪ 참고문헌 ≫ 韓國新劇史硏究(李杜鉉,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韓國劇場史(柳敏榮, 한길사, 198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민속)  

    〔소에 관한 우리 민족의 관념〕 

소는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식구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데,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소가 힘드는 일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며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소값이 비싸서 재산으로서도 큰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월 들어 첫번째 맞은 축일 ( 丑日 )을 소날이라 하여, 이 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였다.

 

그리고 도마질이나 방아질을 하지 않고 쇠붙이연장을 다루지도 않았다. 도마질을 하지 않는 것은 쇠고기로 요리를 할 때에는 으레 도마에 놓고 썰어야 하는데 소의 명절날이므로 이와 같은 잔인한 짓을 삼간다는 뜻이다.

 

방아는 연자방아를 의미하는데, 연자방아는 소가 멍에에 매고 돌리는 것이므로 자연히 소에 일을 시키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방아질을 하지 않는 것은 연자방아를 찧지 않던 풍속이 그 밖의 방아에까지 번진 것이다. 쇠붙이연장을 다루지 않는 것도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풍속이다.

 

한편, 우리 민속에는 기형이나 이상한 털색의 새끼가 태어나면 음양오행과 관련시켜 길흉을 예측하는 습속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84년 고타군주가 신라 사파왕에게 청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청우는 털색이 검은 소로 추정되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늙은 소나무의 정이 청우로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우는 선인·도인·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소에 관한 일화·전설〕

 우리는 소를 한 집안의 가족처럼 여겼기에 소를 인격화한 일화가 많다. 인의 사상에 따라 소를 인격화한 이야기로는 황희 ( 黃喜 )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황희가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묻기를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느냐?” 하니 농부는 황희 옆으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쪽 소가 더 잘 갑니다.”라고 하였다. 황희가 이상히 여겨 “어찌하여 그것을 귓속말로 대답하느냐.”고 물으니, 농부는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한 쪽이 이것을 질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는 것이다.

 

또, 김시습 ( 金時習 )이 소의 꼴 먹는 것과 불자(佛子)가 설법을 듣는 것을 비교한 것 등도 있다. 또 소의 우직하고 인내력 있고 충직한 성품을 나타내는 전설이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에는 권씨라는 농부의 생명을 구하고자 호랑이와 격투 끝에 죽은 소의 무덤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개성에는 눈먼 고아에게 꼬리를 잡혀 이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시켜 살린 전설이 전해지는 우답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나경의 습속〕

우리 나라의 관동·관북지방에는 예로부터 나경(裸耕)의 습속이 있었다.나경이라 함은 정월 보름날 숫총각으로 성기(性器) 큰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목우(木牛)나 토우(土牛)라 하는 의우(義牛)를 몰고 밭을 갈며 풍년을 비는 민속이었다.

 

땅은 풍요의 여신이요 쟁기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산력을 지닌 대지 위에 남자의 성기를 노출시킴은 풍성한 수확을 비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풍습이 관동지방에만 있고 남쪽에 없었다는 것은 토질이 척박하여 곡식의 결실이 잘 되지 않는 데서 풍년을 비는 마음이 절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소싸움〕

두 소를 마주세워 싸우게 하고 이를 보며 즐기는 놀이로서, 보통 추석날에 벌인다. 싸움날 아침이 되면 소 주인은 소를 깨끗이 씻어준 뒤에 여러 가지 천으로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에는 각색의 아름다운 헝겊으로 장식하며 목에 큰 방울을 달아준다.

 

순서에 따라 도감이 호명하면 주인이 소를 끌고 들어온다. 이때 소와 소 사이에는 포장을 쳐서 가려두어 미리 싸우지 않도록 한다.

 

승패는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밀리는 소가 패하는 것으로 한다. 주로 경상남도지방에서 성행하였으며, 강원도·황해도·경기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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