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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본문 및 해설 / 나운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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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나운규

 본문

  오늘도 영진은 오기호를 만나자 덤벼들었다. 마치 사나운 개처럼 오가를 만나기만 하면 달려드는 것이었다. 오기호는 동네 제일의 지주인 천(千)가의 앞잡이로 갖은 악랄한 짓을 감행하는 자였다. 그런데 미쳐서 정신이 나간 영진은 용케도 오가를 알아보고 만나기만 하면 달려드는 것이었다.

 

  영진은 대학을 다닐 때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그만 왜경에 붙들려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 이상이 생긴 청년이다. 그러자 학교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있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영진에게 무한한 동정을 베풀었다.

 

  영진에게 쫓기다 못해 오가는 마침내 천가의 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오기호 : 영감님, 저 저를 좀 살려 주십쇼

천  가 : 자넨 기호가 아닌가? 왜 그러나!

오기호 : 지금, 그 놈, 미친놈이 또……

천  가 : 뭐? 영진이란 놈이?

오기호 : 네, 뒤따라 들어옵니다.

천  가 : 알았다. 여봐라, 그 놈을 단단히 묶어라.

  천가의 말리 떨어지자 하인들이 우 하고 몰려든다.

하인들 : 네.

영  진 : 이놈, 오가야.

 

    영진은 오기호에게 달려들려고 악을 쓰나 마침내 천가네 일꾼들한테 묶이고 말았다. 묶이는 영진은 발버둥치며 땅 위에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이 때에 영진이 땅 위에 뒹구는 것을 측은히 바라다보는 동네 사람 가운데에 한 아리따운 처녀가 있었으니, 그 처녀가 바로 명순이었다. 명순은 오래 전부터 영진을 사모하고 있었던 터이라 그 광경을 보자마자 곧 영진네 집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명  순 : 아저씨, 큰일났습니다.

영진 부 : 너는 명순이가 아니냐? 어찌된 일이냐?

명  순 : 지금 영진 오빠가 천가네 하인들한테 묶여서 봉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영진 부 : 무엇이? 어디서?

명  순 : 바로 천가네 집 앞에서 그랬어요.

영진 부 : 알려 주어서 고맙다. 그러면, 빨리 같이 가 보자.

   명순의 전갈로, 불쌍한 아들 영진이가 묶였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허겁지겁 천가네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영진 부 : 오! 영진아, 이게 웬일이냐?

오기호 : 그 놈이 나를 만나기만 하면 행패를 부리니 오늘은 한번 혼을 내 줘야겠소.

영진 부 : 오 주사, 제발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오기호 : 안 돼. 단단히 혼을 내 줘야겠오.

영진 부 : 우리 아이가 정신이 나가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는 것이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오기호 : 미친놈을 집에 단단히 붙들어 매놓지 않고 왜 나돌아다니게 하느냐 말이오. 동네 사람이 안심하고 길을 다닐 수가 있어야지.

영진 부 : 제발 한번만 이 늙은 아비를 봐서.

오기호 : 그럼,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해 주겠소.

영진 부 : 오 주사, 정말 감사합니다.

오기호 : 그 대신 내가 늘 애기하던 말을 들어 줘야겠소.

영진 부 : 네?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영진에게 예쁜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천가는 오래 전부터 그 처녀를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천가는 오기호를 내세워 여러 가지로 협박도 해 보고 꾀어도 보고 하면서 영진의 누이동생 영희를 첩으로 삼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오가가 전부터 하던 이야기란 이것이었다. 그런데 영진의 부친은 영진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천가에게 돈을 꾸어 썼는데 그 빚을 아직 갚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 빚을 악랄히 독촉하면서, 빚을 갚지 못하겠으면 영희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오기호의 그런 말을 듣자 영진의 아버지는 진퇴유곡에 빠지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박 교장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박 교장은 많은 사람이 모여 떠드는 것이 수상하여 그 곳으로 다가갔다.

 

박교장 : 무슨 일이요? 왜들 이렇게 모여 있소?

영진 부 : 교장 선생님, 우리 영진이가……

박교장 : 영진이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영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정신병자로 그저 히히히 웃고만 있었다.

박교장 : 아니, 누가 영진이를 결박했소?

오기호 : 그 자가 하도 행패가 심해서 혼을 내 주려고 내가 시켰소.

박교장 : 오 주사, 정신이 나간 사람인데 무얼 알고 그러겠소. 내 체면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시오.

  그러면서 박 교장은 영진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묶은 새끼줄을 끄르기 시작했다.

박교장 : 자, 영진 군. 정신을 좀 차리게, 빨리 풀어 줘요.

영  진 : 히히히……

 

  이 때 동네 사람 속에서 흐느끼는 젊은 처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명순이었다. 동네 사립 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박 선생은 영진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더욱이 영진이 독립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왜경의 고문 끝에 정신 이상까지 생기게 된 것을 보고 더욱 측은히 생각했다. 영진은 박 교장의 도움으로 풀려 나왔다.

 

  며칠 뒤였다. 이 동네에 어느 대학생 하나가 찾아왔다. 지금 나타난 사각모를 쓴 청년은 윤현구다. 그는 영진의 죽마고우로서 서울의 대학생이다. 윤현구와 영진의 누이동생 영희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윤현구가 자기 집에 온다는 애들의 말을 듣고 영희는 달려나갔다.

 

윤현구 : 영희 씨!

    윤현구는 반가움에 못이겨 영희의 손을 성큼 잡았다.

윤현구 : 영희 씨.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영  희 : 윤 선생님!

   영희는 그만 반가움에 목이 메어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다.

윤현구 : 아니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영  희 : 아니에요. 반가워서 그만――

윤현구 : 하하하……나도 여간 보고 싶지 않았소. 자, 집으로 빨리 들어갑시다. 영진이가 보고 싶소. 어떻습니까. 영진의 증세는?

영  희 : 오빠는 인제 그만인가 봐요.

윤현구 : 왜요? 무슨 일이 또 있었나요?

영  희 : 네 며칠 전 그 오가라는 사람을 쫓아가다가 천가집 하인들에게 묶여 큰 봉변을 겪었어요.

윤현구 : 아니 무엇이? 음, 그래 실성한 사람을 가지고……

영  희 : 그런데 오빠도 그 오가를 보면 가만 두질 않아요.

윤현구 : 그럴 법도 하죠. 그 자는 세력가나 부자놈의 앞잡이로 갖은 나쁜 짓을 다 한다니까.

 

 윤현구도 그 오가가 천가의 앞집이로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선 영진의 아버지가 빌려 쓴 돈을 갚아야 문제는 해결될 터인데, 그것을 갚지 못하니 기막히는 노릇이었다. 현구는 사랑하는 친구며, 사랑하는 애인의 오빠인 영진이를 만나자 반가워서 두 손을 덥석 쥐었다.

 

윤현구 : 영진이, 내가 왔네. 현구가 왔네.

영  진 : 히히히……

영  희 : 오빠, 윤 선생이 오셨어요.

윤현구 : 이 사람아, 날 못 알아보다니.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며 학우인 윤현구가 피나게 부르짖어도 영진이는 도무지 못 알아보는 것이었다. 아!

 눈앞에 보면서도 실성했기 때문에 서로 다정하게 인사를 나눌 수 없는 영진과 현구.

 

   장면이 바뀐다.

    그 날 밤이었다. 윤현구와 영희는 서로 마주 않아서 한숨만 짓는 것이었다.

 

영  희 : 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윤현구 : 하여튼 영진이만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영  희 : 그걸 지금은 도저히 바랄 수 없으니, 저는 역시……

윤현구 : 천가의 첩으로 가겠단 말이요?

영 희 : 그건 죽기보다도 싫어요. 허지만, 아버지가 매일같이 시달리는 것을 보고 차마……

윤현구 : 조금 더 참아 봅시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영  희 : 그러나……

 

 현구와 영희는 장래의 일을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구는 서울서 가지고 온 바이얼린을 들고 그들이 즐겨 부르는 아리랑을 켜기 시작했다. 윤현구가 켜는 바이얼린 소리에 맞추어 언제부턴가 영진의 방에서는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  진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 노랫소리를 듣자 영희는 깜짝 놀랐다.

영  희 : 어마! 오빠가 노래를,

  영진의 방문이 열리고 영진이는 신이 난 듯 아리랑을 계속 부르며 나왔다.

영  진 :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하하하……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영진이는 노래를 부르며 마침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실성하여 모든 의식은 없었으나 아리랑의 노랫소리는 그의 귀로 스며들어 그의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동네에서는 농악 잔치가 벌어졌다.

풍년을 감사하는 놀이였다. 동네에서는 풍년가를 부르며 농악놀이가 한참 벌어지고 있을 때, 이 곳 천가의 집에도 술상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주인 천가가 주재소 주임인 일본인 순사를 청해놓고 대접하는 참이었다. 천가의 아리따운 첩이 술  을 권하는 것이었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나운규(羅雲奎 1902-1937)

 형식 : 시나리오. 무성 영화 변사용 대본

 성격 : 비극적. 저항적

 배경 : 일제 치하 농촌 마을

 제재 : 아리랑

 주제 : 민족의 비애와 억압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흐르는 항일 정신

 줄거리 :

 3·1 운동 실패의 충격으로 미친 김영진은 동생 영희를 아끼는데, 영진을 찾아온 친구 윤현구는 영희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머슴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를 본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 벌인다. 이 때 갑자기 환상에 빠져 든 영진은 반사적으로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이고, 그 때의 충격으로 영진은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내용 연구

 

 참고 사이트 : 

 이해와 감상

 아리랑은 나운규J08349(羅雲奎J08349) 시나리오·감독의 무성영화. 〔제작배경〕 한국영화사상 가장 초창기에 제작된 명작으로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2회작품으로 제작되었다. 나운규 감독의 데뷔작품이기도 하다.

 

당시의 우리 영화는 1919년에 김도산(金陶山)이 극단 신극좌J23436(新劇座J23436)에서 만든 연쇄극J23449(連鎖劇J23449) 〈의리적 구투 義理的仇鬪〉 속에 약 1,000피트의 필름을 제작, 삽입함으로써 영화사의 기점을 이루었다.

 

그 뒤 필름에 의한 완전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는 1923년 윤백남 (尹白南)이 민중극단J61723(民衆劇團J61723)을 이끌고 제작한 〈월하(月下)의 맹세(盟誓)〉가 최초로서, 당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외국영화의 번안모방물이거나 개화기신파물·통속사극물 등 그야말로 유치한 활동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서구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던 개화기 한반도가 일제의 무력에 의해 식민지가 된 지 10여 년, 영화 〈아리랑〉은 이러한 역사적·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제작되었다.

 

그리고 1926년 10월 1일, 당시 박승필J24411(朴承弼J24411)이 경영하던 단성사J23394(團成社J23394)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그야말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일대 충격을 안겨준 혁명적인 영화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항일민족정신을 그 주제로 하였으며, 작품 또한 영화사상 초유의 예술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내 용〕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와 함께 제1권이 시작되면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에 이어서 변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평화를 노래하고 있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쌓이고 쌓인 슬픔의 시를 읊으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철학공부를 하다가 3·1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金永鎭)이라는 청년은……”

 

영화 속에서 광인(狂人) 영진 (羅雲奎 扮)은 낫을 휘두르며 오기호(朱仁圭 扮)를 쫓아간다. 기호는 이 마을의 악덕지주 천가(千哥)의 머슴이며 왜경의 앞잡이이기도 하다. 영진은 온 마을사람이 송충이처럼 미워하는 기호를 이처럼 증오하며 왜경과 마주쳐도 찌를 듯이 낫을 휘두른다.

 

한편 영진에게는 영희(申一仙 扮)라는 여동생이 있으며, 그는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영희를 아낀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영진의 대학동창생 윤현구(南宮雲 扮)가 그의 친구를 찾아 이 마을로 온다.

 

그러나 영진은 현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희가 오빠를 대신하여 그를 맞이한다. 영진의 불행을 걱정하는 두 남녀 사이에 어느덧 순수한 애정이 싹튼다.

 

마침 마을에서 풍년의 농악제가 열린 날 고약한 머슴 기호가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혼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영희를 보고 그녀를 범하려 든다. 이 때 현구가 돌아와 기호와 격투를 벌이게 된다. 영진도 이 자리에 있었지만 정신이상자인 그의 눈에는 두 남자의 격투가 마치 재미있는 장난처럼 보여 히죽히죽 웃기만 한다.

 

그러던 영진이 환상을 본다.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隊商)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상인은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영진이 낫을 번쩍 들어 후려친다.

 

그 순간 대상은 사라지고, 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기호였다. 이 때 영진은 기호가 흘린 피를 바라보다 충격을 받으며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이 자리에 영진의 아버지, 교장선생, 천가, 그리고 일본순경 등과 마을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느새 영진의 손에는 포승이 묶여진다. 영진은 그를 바라보고 오열하는 마을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이러한 변사의 해설과 함께 영진은 일본순경에 끌려가고, 주제가 〈아리랑〉이 남아 흐른다. 〔의 의〕 위의 작품줄거리에서 보듯이 주인공 영진은 3·1운동 때 잡혀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민족청년이다. 그리고 그가 미워하고 죽이게 되는 기호는 일제에 아부하는 반민족적인 인물이다. 정신이상자가 아니면 올바로 살 수 없었던 일제시대, 그리고 정신이상자이기 때문에 살인행위가 가능하였던 작품의 방법론이 놀랍다.

 

영화의 촬영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우리 농촌의 생생한 현장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묘사하여 한국 리얼리즘영화의 남상(濫觴:시작)을 이루었다. 또한, 작품 속에서 기호를 살해하게 되는 대상의 환상장면의 설정과 처리는 뛰어난 기법으로 크게 찬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역시 이 작품의 가장 큰 감동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항일민족정신으로 높이고, 그것을 전통민요인 〈아리랑〉과 연결, 승화시킨 점이었다. 이로써 이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가였던 민요 〈아리랑〉은 암담한 시대를 사는 온 겨레의 애국가요, 겨레의 가슴마다 민족혼을 불어넣는 노래로 전하여지게 되었다.

 

한편, 영화 〈아리랑〉은 개봉이 되자 전국의 극장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영화의 영향으로 이 땅의 영화 제작이 활발하여지는 한편, 당시의 조선영화계가 번안모방물이나 개화기신파물 제작을 저버리고 민족영화 제작으로 면목을 일신하게 하여 민족영화 창조의 전통을 쌓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참고문헌≫ 韓國映怜側面秘史(安鍾和, 春秋閣, 1962), 韓國映怜全史(李英一, 三愛社, 1969), 韓國映怜發達史(兪賢穆, 韓振出版社, 1980), 아리랑을 만들 때(羅雲奎, 朝鮮映怜 一, 1936).

 심화 자료

 나운규(羅雲奎)  

 1902 ∼ 1937. 민족항일기의 영화인. 호는 춘사(春史). 회령 출신. 한의(韓醫) 형권(亨權)의 6남매 중 셋째아들으로 태어났다. 1912년에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년여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 청회선터널폭파미수사건 ’ 의 용의자로 잡혀 1년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1923년 출감하였다. 1924년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이 되었다.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윤백남 ( 尹白南 ) 감독의 〈 운영전 雲英傳 〉 에 단역인 가마꾼으로 첫 출연, 연기력을 인정받아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인 〈 심청전 沈淸傳 〉 에서 처음으로 주역(심봉사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이듬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 농중조 籠中鳥 〉 에 출연하여 절찬을 받음으로써 일약 명배우가 되었다.

그는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 만들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 아리랑 〉 과 〈 풍운아 〉 를 직접 쓰고 감독 · 주연을 맡아 영화계의 귀재(鬼才)로 불리게 되었다.

 

1927년에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하여 〈 옥녀 玉女 〉 · 〈 사나이 〉 · 〈 사랑을 찾아서 〉 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격조높은 문예영화 〈 벙어리 삼룡 〉 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독립투쟁하는 늙은 나팔수를 그린 영화 〈 사랑을 찾아서 〉 때문에 일본경찰에게 붙잡힐 뻔하였다.

 

대중적 인기는 절정에 달했으나 무질서한 사생활로 회원들이 떠나 다른 영화사를 창설함으로써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체되었다.

 

그 뒤 박정현의 원방각사(圓方角社)와 손잡고 〈 아리랑 후편 〉 · 〈 철인도 鐵人都 〉 를 만들었고, 우리 영화계에서 꺼리던 도야마프로덕션(遠山 Production)의 〈 금강한 金剛恨 〉 에도 출연하였다. 이 때문에 나운규의 인기는 하루 아침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생활을 위하여 배구자(裵龜子) 일행의 악극단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영화계를 1년여 동안 시찰하였고, 1932년에 귀국하여 윤봉춘을 비롯한 옛 동지들을 모아 영화 〈 개화당이문 開化黨異聞 〉 을 만들었으나, 검열로 많은 장면이 잘린 채 개봉되었기 때문에 흥행에서 큰 실패를 보았다.

 

같은 해 이규환(李奎煥) 감독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 시기는 제2기에 해당하는데, 이 때의 작품들은 〈 무화과 〉 · 〈 강 건너 마을 〉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명비판 · 사회비판 등 부정정신을 나타낸 것들이다.

 

그 밖에 〈 종로 〉 · 〈 칠번통(七番通)의 소사건 〉 · 〈 그림자 〉 등을 제작했으나 실패작이었다. 이 때는 그에게 가장 불우했던 시기로서, 극단 신무대 ( 新舞臺 )나 현성완(玄聖完)이 이끌던 극단 형제좌(兄弟座)를 위하여 연쇄극 ( 連鎖劇 )을 만들어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1936년 우리 나라 영화계에 획기적 선풍을 일으킨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나운규는 〈 아리랑 〉 제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하였다. 그는 계속 문예작품의 영화화에 주력하였는데, 이때 이태준(李泰俊)의 소설 〈 오몽녀 五夢女 〉 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예술적 승화를 이루었으나, 오랫동안 무리를 거듭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죽음으로써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 시기가 제3기이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으며, 악덕 · 난륜(亂倫)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직접 각본 · 감독 · 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의 영화사적 위치는 그대로 우리 나라 영화 자체의 성장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배우양성자이며 연기지도자였다. 그는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 아리랑 〉 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로 평가된다.

 

≪ 참고문헌 ≫ 韓國映 怜 側面 煉 史(安鍾和, 春秋閣, 1962), 映像의 英雄 羅雲奎(李杜鉉, 韓國의 人間像 5-文學藝術家篇-, 新丘文化社, 1965), 韓國映 怜 全史(李英一, 三愛社, 1969), 韓國映 怜 發達史(兪賢穆, 韓振出版社, 1980), 羅雲奎 그 藝術과 生涯(金源浩, 백미사, 198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타 자료

 1926년에 발표된 무성 영화의 극본이다. 스크린에는 배우들의 움직임만 나오고, 배우들이 입만 벙긋벙긋하면 변사(辯士)가 소리를 내는 형태였다. 이 글은 그런 변사 해설용의 극본이다.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의 두 번째 작품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나운규가 시나리오, 감독, 주연을 맡았는데, 항일 민족 영화라 할 수 있다. 흑백의 무성 영화로 국권 피탈 상황을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등 촬영 기법의 새로움과 몽타주 등 기법의 탁월함, 주연 나운규의 열연(熱演) 등이 어우러져 초창기 한국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과 36년에 그 후편이 만들어져 3부작이 되었으나, 1926년판 필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항일 운동의 새로운 양식을 시사해 준 "아리랑"은 민족 영화의 각성제 역할을 하였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사실주의에 입각한 화면 구성을 보이는 수작(秀作)이다.

 아울러, 작품의 주제가 항일 민족 정신으로 일관하면서도, 우리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접맥시킴으로써 민족의 혼을 되살려 놓은 글이라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인공 영진은 3·1 운동 때 잡혀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 이상이 된 민족 청년이다. 그가 미워하고 죽이게 되는 인물 기호는 일제에 아부하는 반민족적인 인물이다. 정신 이상자가 아니면 올바로 살 수 없었던 일제 시대, 그리고 정신 이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검열을 벗어날 수 있었던 작품의 전략이 놀랍다. 영화의 촬영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우리 농촌의 생생한 현장을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묘사하여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남상(濫觴)을 이루었다. 또한 작품 속에서 기호를 살해하게 되는, '대상'의 환상 장면의 설정과 처리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나란히 배치한 몽타주 기법으로 크게 찬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항일 민족 정신으로 높이고 그것을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연결, 승화시킨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삽입된 민요 '아리랑'은 당시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성영화 無聲映畵  

사일런트영화라고도 한다.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네마토그래프가 공개된 것을 영화의 시발점이라 한다면, 본격적으로 유성화(化)되는 1927년까지의 영화는 무성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창안 당시 카메라로 촬영되어 스크린에 투영되던 ‘움직이는 사진’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수록한 실사단편(實寫短篇)이나 짤막한 뉴스 종류였으나 이어 카메라의 성능을 이용한 트릭영화를 고안하게 되어 《달나라 여행》과 같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 인간을 주체로 한 극형식의 영화가 창안되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일어나는 장면만을 촬영한 것이었으나 차차 영화의 독자적인 표현을 구사하게 되고 내용도 다채로워져서 여러 나라에서 독특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각국의 작품경향을 개괄적으로 보면 프랑스는 인정극 ·범죄극, 이탈리아는 사극 ·정서극, 독일은 괴기 ·환상 ·애욕극, 영국은 기록영화, 북유럽은 신비영화, 러시아는 국책(國策)의 보급영화를 주로 만들었으며, 미국에서는 바이타스코프가 발명됨에 따라 프랑스와 같은 시기에 무성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밝은 오락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 사이에 만들어진 우수한 무성영화로 프랑스의 《달나라 여행》 《지고마》 《전쟁과 평화》 《광열(狂熱)》 《철로의 백장미》 《여배우 나나》 《안달루시아의 개》 《잔다르크의 화형》, 미국의 《국민탄생》 《키트》 《우매한 아내》 《포장마차》 《빅퍼레이드》 《황금광시대》, 독일의 《니벨룽겐》 《최후의 인간》 《기쁨이 없는 거리》, 이탈리아의 《쿠오바디스》 《카빌리아》 《불》 러시아의 《전함 포템킨》 《어머니》 《세계의 여섯째 주(洲)》, 북유럽의 《파도 이는 날》 《주인》 《영혼의 불멸》 등이 있다.

 

영화는 빛과 그늘, 형상을 율동미화(律動美化)하는 예술이라고 한 독일과 영화의 생명은 몽타주에 있다는 러시아영화제작자들의 태도와 작품경향은 무성영화의 성숙에 공헌하였다. 이것은 영화미학(映畵美學) 확립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한국에서 ‘활동사진’이라 불린 초기의 무성영화는 이 땅에 전화 ·전기 ·전차 ·철도가 들어와 개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칠 무렵인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활동사진광고’라는 제호의 광고가 실림으로써 도래(渡來)하였다. 초기 무성영화를 한국에 들여온 것은 일본 요시자와상회[吉澤商會]의 순회영화반이다. 이것을 영미엽연초회사(英美葉煙草會社)와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는 담배와 전차(電車) 유객(誘客)을 위한 선전용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들여온 단편 무성영화로는 프랑스계(系) 시네마토그래프인 《포병열차》 《기차》 《해수욕》 《이발소의 사고》 《여급과 손님》 등이 있고, 미국계 바이타스코프 《나이아가라》 《뉴욕의 대화재》 《메리 여왕호의 비극》 등이 있다.

 

1910∼20년 사이에는 《지고마》 《파우스트》 《나폴레옹》 《프레데릭백작》 등 훌륭한 내용을 가진 것들이 인기를 끌었다. 1919년 10월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연쇄극(連鎖劇:무대에서 나타낼 수 없는 장면을 영화로 보이는 극)에 삽입되는 약 1,000피트의 활동사진(무성영화)이 최초로 한국인의 손에 의해 제작 상영되어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1919년 10월 20일자 《매일신보》는 이에 대한 시사소감(試寫所感)에서 “…서양사진에 뒤지지 않을 만큼 되어 있고 배우활동도 상쾌하고 신이 날 만큼 되었더라”고 평하였다. 1923년 완전한 무성영화 《월하(月下)의 맹세》가 윤백남(尹白南)에 의해 제작되어 이 때부터 1935년 첫 유성영화 《춘향전》이 제작되기까지 화려한 무성영화시대를 이루었다.

 

이 사이 《춘향전》(무성) 《장화홍련전》 《비악(悲惡)의 곡》 《홍보전》 《심청전》 《개척자》 《멍텅구리》(최초의 희극영화) 《금색야차(金色夜叉)》 등이 만들어졌고, 1926년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이 제작되면서 무성영화는 절정을 이루었다. 외국 무성영화에서는 보조수단으로 자막을 삽입하여 대화나 줄거리의 진행을 나타냈으나, 한국에서는 무성영화가 수입되고 스스로 제작하면서부터 변사(辯士)라는 새로운 직업인이 등장하여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고 정황을 설명하였다. 이 변사의 감격조(感激調) ·비탄조 ·강조조 등의 어조(語調)는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최루탄적 구실을 하였으며, 변사의 효과를 돋우기 위해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아리랑

개 설

한국의 대표적 전통민요의 하나인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의 민요로, 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이들 여음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리랑은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퍼져 있어서 이른바 〈독립군아리랑〉을 비롯하여 〈연변아리랑〉 등의 이름이 쓰이고 있을 정도이며, 멀리 소련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아리랑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가요들을 토대로 하여 주로 강원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정선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아리랑〉, 그리고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을 묶어서 삼대아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들 세 가지 아리랑이 각 지역 민요의 기본적 음악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 내의 자생적인 전통민요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경우, 이른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특정인의 창의적인 윤색을 거쳐 인위적으로 변이되었다는 뜻에서 ‘신민요아리랑’으로 분류함으로써 삼대 ‘전통아리랑’과 구별된다.  역 사 〔지역적 분포〕 〈정선아리랑〉은 원래 〈아라리〉로 일컬어지던 노래이다. 정선을 비롯해서 이웃 영월과 평창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아라리〉는 이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를 가장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백산맥의 동서를 따라 길게 설정될 수 있는 이른바 메나리토리권에서 민요 〈메나리〉(또는 메노리)의 음악언어와 가장 밀착된 노래로 〈정선아라리〉가 평가될 때, 메나리야말로 가장 전통성 짙은 민요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의 기층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메나리→어산영(경상도지역)→산아지(호남지방)의 연계를 고려한다면 〈정선아라리〉의 전통성은 보다 더 넓은 지역에 걸쳐 논란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라리〉가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 영동·영서일대에서는 〈정선아라리〉 외에 〈강원아리랑〉 또는 〈자진아리〉로 일컬어지고 있는 또 다른 아리랑이 있다.

 

〈정선아라리〉에 비해 훨씬 장단이 빠르고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여음을 지닌 이 〈자진아리〉는 영서·인제 지방의 〈뗏목아리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뗏목아리랑〉이 그렇듯이 일노래로서의 쓰임새를 진하게 지니고 있다.

 

학산과 같은 강릉 교외 일대에서는 논노래 또는 들노래로 쓰이고 있지만, ‘어루리’며 ‘아라성’이라는 특수한 여음을 지닌 횡성·원주·여주·이천 일대의 아리랑과 충주지역의 아리랑도 기본적으로는 이 〈자진아리〉에 속하여 있다고 보이는 들과 논의 일노래들이다. 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정선아라리〉는 놀이노래라는 성격이 강하다.

 

〈정선아라리〉에서는 엮음 아라리라는 특수한 형식의 아라리를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노랫말이 일반 아라리보다 훨씬 길어서, 노래의 첫머리에서 중간 정도까지 상당한 부분이 빠른 말투로 사설을 엮어가는 노래이다. 그래서 일반 아라리에 엮음 아라리를 대비시킬 경우,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대비를 연상하게 된다.

 

호남 일대는 국악학계에서 육자배기토리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것은 이 지방 민요들이 육자배기를 기층적인 음악언어로 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토리에 속하면서도 그 음악언어의 특색이 육자배기와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후대에 약간의 윤색이 가하여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진도아리랑〉은 호남지역, 충청남도 일부, 경상남도 서부지역, 그리고 제주도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나, 밀집 분포지역은 진도이다.

 

한편 정자소리토리권인 영남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밀양아리랑〉의 경우에도 그 음악언어의 특성이 정자소리의 음악언어에 대하여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밀양아리랑〉의 분포는 밀양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도 동북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다른 두 지역 아리랑에 비하여 그 분포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는 셈이다. 〔역사와 변화〕 정선과 진도 그리고 밀양 등 3대 아리랑을 전통민요 아리랑으로 잡을 경우 그 가운데서도 〈정선아리랑〉은 메나리조의 밀착성이 짙어, 주어진 지역 민요의 음악적 문법의 기층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선아리랑〉이 민요적 지역성과 전통성을 으뜸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정선아리랑〉은 짙은 민요적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정선의 현지 주민들에게서 그 기원이 고려 말에까지 소급될 것으로 믿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리랑의 정통을 이은 계승자로서의 긍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남상이 그들의 생활공간인 태백산맥의 중허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지닌 민요적 원형성과 그리고 현지 주민의 믿음 및 그 전승태도 등을 묶어서 생각할 때 아리랑을 산간의 ‘흙의 노래’로서 비교적 쉽게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흙의 노래’는 ①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토착성이 강할 것, ② 지역적인 일상생활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 ③ 민간 전승다운 전통성을 지니고 있을 것, ④ 주어진 지역사람들의 보편성이 큰 노래 또는 소리일 것 등, 네 가지 속성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네 속성을 통틀어서 단일한 명제를 엮어낸다면, 오래 전부터 전하여진 것으로 믿고 지역주민 대다수가 그들의 지역 내 일상생활을 실어서 노래하고 있는 소리가 곧 ‘흙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그 기층구조가 메나리나 정자소리와 마찬가지로 밭과 논, 그리고 물이며 산에서 부른 ‘일노래’라는 성격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산과 들을 통틀어서 흙이라는 말로 포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흙의 소리인 아리랑은 산과 들·밭에서 부르는, 혹은 집안에서 부르는 ‘놀이노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애원성·탄성(嘆聲) 등이 실린 개인적인 소리라는 속성을 강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소박한 주관적인 서정이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지녔던 시정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세타령과 팔자한탄 등이 우세한 넋두리나 푸념에 견줌직한 소리였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개인생활 주변 일상성의 묘사를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갖추었을 또 다른 속성으로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의 기원설과 전설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공사와 관련된 아리랑에서 말하여 주고 있다. ≪매천야록 梅泉野錄≫에 고종이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원군·고종 때 당시 서울에도 이미 아리랑이 전해져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경복궁 공사를 위한 징용의 가혹함과 이 공사 경비조달을 위한 가렴주구가 아리랑에 얽혀서 전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대한제국 말기의 가혹한 정치와 사회현상을 타고 아리랑은 ‘흙의 소리’에서 ‘역사와 사회의 소리’로 탈바꿈해 나갈 결정적 단서 내지 동기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시대를 계기로 해서 비로소 아리랑이 역사성·사회성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랑의 기원을 고려 말 유신들의 망국의 한에서 찾고 있는 아리랑의 기원설 내지 전설이, 이미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을 역사·사회성에 대하여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흙다움과 역사·사회다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중의 우세를 지적할 때 제기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그것은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역사·사회성이 대원군 시대와 같이 역사적 충격을 받아 상대적으로 흙다움보다 훨씬 목소리를 높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아리랑이 사회화하고 역사화하는 제2의 충격은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나운규J08349(羅雲奎J08349)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었다고 더불어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아리랑의 사회화와 역사화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첩되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아리랑의 자체 변화는 민간전승이 역사적 변화에 적응한 결과라고만 설명될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으로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의 테두리를 떠나 다른 문화영역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농어촌 전통사회의 민간전승에서 좁게는 도시 민간전승, 넓게는 사회 민간전승으로 탈바꿈해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다른 민간전승에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 경우, 사회 민간전승이란 동시대의 한국사회 전체가 공유한 민간전승임을 뜻한다.

 

그런 한편, 아리랑은 그 사회화와 역사화를 통하여 대중문화·상업소비문화,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문화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간 것이다.

 

이 같이 ‘흙의 소리’ 아리랑이 역사화·사회화해 간 사실은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이른바 제3세계들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족주의적 문화운동으로서 일어난 민요운동과 동궤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 것이다. 〔신민요아리랑의 파장〕 아리랑은 앞서 언급한 삼대 전통 아리랑이 그 원류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비롯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은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발생할 수 있는 동기 구실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중가요화한 아리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민요아리랑 또는 전통아리랑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 말하자면 상업시대 및 산업사회의 대중들의 노래로서 살아남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가령 〈아리랑삼천리〉(박시춘 곡)를 효시로 삼아서,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다섯 편 가량의 대중가요 아리랑에서 오늘날의 〈영암아리랑〉(하춘화 노래)에 이르기까지 ‘대중가요 아리랑’의 맥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전통민요→신민요→대중가요의 길을 걸어갔으며, 한편 ‘가곡 아리랑’의 흐름도 있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그만큼 다양한 장르들을 포괄하게 된 것이다.

 

신민요아리랑의 효시라고 보아도 무관한 〈경기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노랫말로 유명하지만, 음악언어의 원류는 대체로 〈정선아라리〉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숱한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창작되었을 때, 〈경기아리랑〉은 달리 〈본조아리랑〉으로도 호칭되었거니와 그것은 〈경기아리랑〉이 신민요아리랑의 본조, 곧 본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기아리랑〉 이 외의 나머지 신민요아리랑들은 〈별조아리랑〉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삼대 아리랑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리랑의 물살은 시대의 차이, 갈래의 차이를 넘어서서 우리의 근대사회에 널리 또는 깊게 파장을 미쳐간 것이지만, 〈종두J31186(種痘J31186)아리랑〉이나 〈한글아리랑〉으로 이름지을 만한 특수한 아리랑의 파생을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종두아리랑〉은 천연두 예방주사를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한글아리랑〉은 문명퇴치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각기 창안된 것들이다.

 

이들 두 가지 보기들은 아리랑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창조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독립군아리랑〉이라는 또 다른 보기와 함께 이들은 아리랑이 민요의 텃밭인 민간전승 밖으로 벗어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이와 같은 아리랑의 탈민요 내지 탈민간전승을 크게 보아 아리랑의 원심력 방향 확산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중가요화나 가곡화도 그 같은 확산의 일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리랑의 탈민간전승운동이 굳이 한 방향, 한 범주로 묶여서 제약받을 수는 없다. 가령 상업화하는 경향, 예술(문학·음악 등)사에 편입되는 성향, 실용성 높게 사회화하는 경향 등을 지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군아리랑〉의 경우는, 가령 그것이 집단적 의지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자체 내에서 창작되어 집단의식의 독자성을 강하게 향유하고 있었다면, 전통민속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민속으로 평가하여도 좋을 것이다.

 

원심적 확산의 다양화는 민요아리랑의 사회화 내지 역사화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아리랑이 원형 지향적 전통성(구심성) 이외에,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높은 정도의 가변성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심성과 원심성의 극대화된 사례를 다른 전통민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면, 다른 민요와 상대적으로 아리랑이 가지게 되는 개성이 그만큼 크게 두드러져 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신민요아리랑의 파장은 급기야 천파만파를 불러 일으켜,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또 다른 파장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 및 구조 〔여러 가지 후렴과 그 어원론〕 여음의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리랑(我離郎)’을 비롯해서 신라의 ‘알영비(閼英妃)’, 밀양 전설의 인물인 ‘아랑J23442(阿娘J23442)’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의미 없는 사설(nonsence verse)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을 할 뿐이다.

 

즉, 아리랑의 여음은 여러 가지이며 그 쓰임새 또한 다양하다. 노래의 머리에서 앞소리 또는 내드름소리로 쓰이는가 하면, 노래의 꼬리에서 뒷소리 또는 받음소리로도 쓰이고 있다. 또는 앞사람의 노랫말이 끝난 뒤,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이어 다른 노랫말로 넘겨받는 넘김소리로도 쓰인다.

 

쓰임새의 다양성은 당연히 여음이 노랫말에서 차지할 자리의 다양성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다. 다른 민요의 여음은 대체로 일정한 마디(節) 구성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쓰임새며 노랫말에서 차지하게 될 자리가 일정하다. 그러나 아리랑의 경우 여음은 다른 면의 다양성과 더불어 마디 구성상의 다양성을 아주 특이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날 넘겨 주소. (밀양)
  아리 당다중 쓰리 당다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밀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낫네. (진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강원도)
  아라리요 아라리요 아리랑 어헐사 아라성아. (여주)

 

이와 같이 다양한 여음은 ‘아·이’, ‘아이·으이’, ‘ㄹ·ㅇ’, ‘ㄹ·ㅅ’ 등의 대립적 내지 대조적 음운교체의 엮어짐이 주류를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은 그와 같은 대립·대조적 음운교체가 한국인의 시적(詩的)인 ‘쾌감있는 음상J20421(音相J20421)’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아리랑이 지닌 지배적 정서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리랑 여음의 어원론적 설명은 그 같은 음운들의 엮어짐이 뜻이 있는 실사J16975(實辭J16975)로 간주됨으로써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고, 또 그 시도에 따라 이설이 분분한 아리랑 기원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가령, ‘我離郎’·‘啞而聾’·‘我難離’ 같은 보기는 아리랑의 여러 가지 여음을 각기 실사로 보고 한자로 옮겨놓은 것들이다.

 

여음 해설을 계기로 삼은 여러 가지 아리랑 기원론은 아리랑이라는 전승 자체 및 일부 노래말에 얽혀서 전하여져 있는 전설(설명 전설)과 함께, 크게 본 아리랑 전승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아리랑 전승은 아리랑이 노래말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말이 주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축을 세워서 각종 기원론과 전설도 의젓한 아리랑 전승의 일부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기원론은 진지한 노력이나 부분적인 상당한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민간어원설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론의 언어학적인 타당성과는 별도로 정서론 내지 주제론적인 타당성은 상당한 정도로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는 어원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감정이 투사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전승 내부에 몸과 삶을 담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경험론적인 실감이 거기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기원설은 대체로 보아 아리랑을 오랜 역사적 유래를 가진 노래로, 그러면서 아리랑을 비창감이 진하게 서린 노래로 부각시키려는 두 가지 경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전자를 아리랑 기원설의 역사주의, 후자는 비창지향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예외는 있으나 그 두 가지 경향성을 함께 고려할 때 아리랑 기원설에는 민족의 역사성 짙은 상흔이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아리랑 기원론이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적 원상의식(原傷意識)이라고 바꾸어 말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아리랑을 푸념·넋두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아리랑이 역사적 원상을 풀어나가는 양식상의 특색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아울러, 서러움·애달픔·원한을 말하게 되며 아리랑이 지닌 역사적 원상이 불러일으킬 감정 및 정조를 지적하는 것이 되며, 애원성이라고 하게 되면 역사적 원상의 노래인 아리랑이 지닌 소리로서의 특색을 지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시형식과 수사〕 아리랑의 시형식은 기본적으로 2행시, 곧 두 줄 시라고 볼 수 있으며, 가장 간결한 시형식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시형식은 민요형식의 단순성 매력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여음은 따로 계산하고 뜻 있는 실사로 엮어진 시행만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줄 시로서 한 줄이 대체로 3∼5음보 정도로 엮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모두 10음보를 넘지 않는 짧고 간결한 시형식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예상되는 중문과 복문 이 외에 단문으로만 된 두 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 아리랑의 단순성은 더욱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줄 시는 〈캐지량〉이나 〈강강술래〉의 한 줄 시에 비하면 양식의 안정도 크다는 장점을 지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세 줄 시와 네 줄 시에 견주어서 기억하기 좋고 즉흥성을 가미하기 쉽다는 양식상의 특색을 지적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민요 두 줄 시는 속담이나 속신 등 이른바 ‘민중의 신념’ 또는 ‘민중의 판단’이라고 총칭할 수 있는 ‘문장 구술 전승’과 한 범주에 들거나 아니면 서로 이웃할 수 있는 서술형식상의 속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팥 심은 데 팥나고 콩심은 데 콩난다.”고 하는 속담이나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 라는 속신 따위는 아리랑의 두 줄 구성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속신과 속담은 ‘민간 수사’라고 부를 만한 것의 최소 단위이다.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고 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민간 수사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은 실제로 민간 수사를 총망라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이 아리랑이 지닌 형식상 또는 수사상의 큰 장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리랑의 배후에 속신과 속담 등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리랑이 각종 민간 수사의 보고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랑은 그 양식이 단순하여 강한 암기성과 즉흥성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과 함께, 속담이나 속신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의 보고라는 사실이 어울려서 무수한 아리랑 노래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노래말의 문체적 원천 내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아리랑 노래말이 오늘날 많게는 한 지방의 경우 400∼500가지가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노래말의 가짓수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요는 그렇게 다양하게 계속 지어지고 있는 바탕, 큰 시문법이나 초구조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에서 대구법이 가장 우세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것을 ‘대구적 두 줄 구성’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대구는 대조와 대비의 대구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 두 가지 사물 또는 존재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이 대조의 대구법이라면, 이와는 달리 큰 것들 사이의 공질성이 강조된 것이 대비의 대구법이다.

 

“앞남산의 실안개는 산허리를 감고요 정든님 두 팔은 내허리를 감는다.”가 전자의 보기라면, “오릉촉단(吳綾蜀緞) 능라조(綾羅調)로 날 감지 말고 대장부 긴긴팔로 날 감아 주게.”는 후자의 보기로 알맞을 것이다.

 

두 가지 노랫말에서 다 같이 ‘임에 의한 허리감기’는 사람이 충족된 상태를 뜻하고 있다. 이미 충족되어 있는 사람은 ‘임에 의한 허리감기’와 동형동질의 것을 찾아 짝을 맞추고 있고, 이와는 달리 충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동행이질의 것을 찾아서 짝맞추기를 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낼 수가 있다.

 

이것을 아리랑의 짝맞추기, 정확하게는 아리랑 두 줄 대구의 짝맞추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짝맞추기에 의해 아리랑은 ‘도시(부)·농어촌(가난)’, 사회계층과 신분계층의 ‘위·아래’, ‘가짐·안 가짐’, ‘밝음·어둠’, ‘잘남·못남’ 등 종횡무진으로 노래부르는 것이다. 그 짝 맞추기에 따라 아리랑은 때로는 밝은 양지의 노래가 되고 때로는 어두운 음지의 노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짝맞추기 대구법을 기본으로 삼고, 거기에 반복법·말놀음·쌍소리·문답법·독백체 등이 간간이 활용되면서 무수한 변이를 낳게 되고, 오늘날 3,000여 가지가 넘는 노래말이 수집, 보고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아리랑은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온갖 말투와 말씨를 총동원한 소리의 소리, 노래의 노래가 될 수 있었다. 〔장단과 가락〕 민요·신민요 유행가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이 붙거나 뒷소리에 아리랑이라는 말이 붙는 노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 널리 불리는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긴아리랑〉·〈남도긴아리랑〉·〈해주아리랑〉은 부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 〈어랑타령(신고산타령)〉·〈긴아리〉·〈자진아리〉는 오늘날 아리랑으로 꼽지 않고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아라리에서 나온 것으로 강원도자진아라리이다. 이 아리랑은 8분의 10박자로 엇모리장단에 맞으며 엇모리 4장단에 메기고, 엇모리 4장단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고, 미나 라로 종지하며 미는 작게 떨고 레에서 도로 꺾는 목을 쓰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소박하고 구슬픈 느낌을 주어 서울에서 불리는 것보다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불리는 것이 훨씬 향토적인 맛이 난다.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강원도 긴아라리를, 촘촘히 엮어 엮음 아라리로 불려지던 것이 세상에 퍼진 것이다.

 

메기는 소리는 자유리듬으로 촘촘히 노랫말을 엮어가다가 세마치 8장단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하고 받는다.

 

선율은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엮지 않는 것은 매우 처량한 느낌을 주며 엮는 것은 노랫말을 빠르게 촘촘히 엮어나가며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끝에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내어 감정을 퍼버리며 뒷소리로 느리게 흐느끼는 느낌을 준다.

아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불리던 것으로 서울의 〈구조아리랑〉에서 나온 것이며, 장단은 세마치로 되어 있으나 흔히 4분의 3박자로 불러 신민요의 리듬으로 부른다. 세마치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솔·라·도·레·미로 되어 있고 솔이나 도로 마치는 경토리로 되어 있으며, 유창하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조선 말기에 성창하던 〈구조아리랑〉은 이 아리랑과 장단과 토리가 같으며 곡조가 약간 다를 뿐이다. 〈긴아리랑〉은 〈구조아리랑〉과 장단과 토리는 같으나 훨씬 느리고 곡조가 약간 변동되어 있다. 〈아롱타령〉은 장단과 토리는 〈구조아리랑〉과 같지만 곡조가 높은 음역에서 부르도록 바뀌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서울의 〈아롱타령〉에서 파생된 것이다. 장단은 8분의 9박자 세마치 장단으로 되어 있고 8장단을 메기며 8장단을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아리랑 어헐시구 아라리가 났네.” 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경토리와 메나리토리가 뒤섞여 있으며, 매우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진도아리랑〉은 〈남도긴아리랑〉을 변창한 것이다. 8분의 9박자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뒷소리로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하고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라·시·도로 되어 있고 라로 마치며 미에서 세게 떨고, 도에서 시로 꺾고 레보다 낮은 음에서 도·시로 흘러내리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이 아리랑은 구슬프고 구성진 느낌을 준다. 〈남도긴아리랑〉은 서울 〈구조아리랑〉을 육자배기토리로 바꾼 것으로 장단은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다. 〔다양성과 초역사성〕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일차적으로 전통민요이다. 따라서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자연적 습득 등과 같은 민속성 외에 지역공동체집단의 소산이라는 민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 집단성은 시대성과 사회성을 내포하게 된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 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 간다.”, “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매인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36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8월 15일에 만발하였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로 뭉친다.”

 

이와 같이 몇 가지의 노랫말을 나열해 놓는 것만으로도 〈아리랑〉이 근세의 민족사를 반영하고 있음이 일목에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뗏목꾼은 뗏목꾼대로, 광부들은 광부들대로, 심메마니는 또 그들대로 각기 그들 생활의 애환의 순간순간을 아리랑에 담고 있다. 직업공동체나 사회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이 강하게 아리랑에 담기게 되는 것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아리랑은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소리였다.

 

아리랑은 거시적으로 민족의 독자성에 이바지하였으나, 그보다 좀 작은 규모의 지역공동체이며 이익공동체의 독자성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리랑은 분명히 공동체의 휘장(徽章) 내지 민중의 휘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애원성(哀願聲)이나 한탄의 소리인가 하면, 항거요 비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체념의 하소연인가 하면 강한 삶의 의지의 표백이었고, 모가 난 말싸움인가 하면 익살떨기의 넉살부림이기도 하였다. 구시렁거리는 불만인가 하면 지독한 악담이요 욕이요 쌍소리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집단과 민중의 휘장이라고 하지만, 아리랑은 이 같은 다양한 목청과 소리투로 그 휘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바로 그것이 지녔던 집단 내지 민중의 휘장이라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회문화인 민요운동을 우리 민요사에서 유일하게 도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흙의 민속성에서 사회와 역사의 민속성을 향하여 아리랑은 자신을 확대할 것이다. 아리랑이 근대사를 살게 된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리랑의 집단성은 앞소리와 뒷소리, 매김소리와 받음소리 등으로 나뉘어 부르는 형식에도 곧잘 드러나 있다. 한데 어울려 일하고 놀이하는 사람들이 그 소리의 가름을 따라 제창이나 윤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에서 그 집단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그것은 동시에 매우 강한 개인성을 갖추고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주관성 높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토로하는 서정시이면서 원한과 아픔을 풀이하는 넋두리나 푸념이기도 하였다.

 

유사 대화체나 독백체가 이 속성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떼소리’ 또는 ‘무리소리’이면서도 ‘혼자소리’이기도 하다.

 

절로 한숨 짓듯이, 더운 숨결을 토하듯이, 혹은 매인 중치를 터놓듯이 혼자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리랑이다. 소리꾼은 그 혼자소리로 삶을 달래고 애간장을 삭이면서 목숨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자 소리 아리랑은 삭임의 소리, 푸는 소리 구실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성과 개인성은 아리랑이 지닌 또 다른 원심력과 구심력이지만, 그 양면성을 갖추고 있는 데에, 아리랑이 지닌 복합성을 읽게 되는 단서의 하나를 얻게 된다.

 

아리랑은 결코 단일한 장르의 민요가 아니다. 아리랑은 그 다양한 복합성 때문에 역사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적응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냥 단순히 과거의 화석으로 전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새로이 새 삶을 얻으며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단일한 민요의 소재를 들자면 아리랑만큼 질기고 굵은 맥을 지켜온 보기를 구할 수 없다. 그것도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면서 주제사적인 문제까지 더불어 제기하는 소재사의 맥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일의 한국의 시대, 그리고 사회에서 아리랑의 소재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재사의 맥이 더욱 굵어지고 더욱 길게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韓國 音樂民謠의 類型的 考察(金晉均, 東西文化 4, 啓明大學校 東西文化硏究所, 1970), 아리랑(金練甲 編, 現代文藝社, 1986), 아리랑……역사여, 겨레여, 소리여(金烈圭, 朝鮮日報社, 1987), 아리랑에 관한 음악적 고찰(李輔亨, 民學會報 15, 198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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