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사전(成進士傳)
by 송화은율성진사전(成進士傳)
이 세상에 인류가 생긴 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간교로운 일이 날로 치열하고, 거짓의 행위가 날로 들끓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세상에는 이런 일이 생겼다. 굶어 죽은 시신을 짊어지고 밤 들어 남의 문 밖에 서서 주인을 급히 불러 일부러 그의 노염을 충동시켜 놓는다. 그리고 종말에는 서로 붙잡고 격투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주인놈이 나의 둘도 없는 벗을 죽였네.”
하고 외치며 그 죽은 시신을 내놓고 장차 관가를 찾아 고발하려 했다. 주인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 중한 뇌물을 허비하고서야 일이 바야흐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야말로 험악한 일이고녀. 그러나 지극히 삼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간사한 놈일지라도 그 꾀를 팔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상말에는 ‘세 귀인(貴人)을 사귀기보다 내 한 몸을 삼가는 게 낫다’ 하였으니, 이제 성씨의 아들이야말로 그런 사람이구료.
성희룡(成希龍)은 상주(尙州)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집이 애초부터 넉넉하였다. 흉년을 만나매 식객(食客)이 많이 모여 들었다. 여러 종이 금방 밥상을 들고 나온다. 한 종이 달음질치며,
“어떤 누덕을 진 비렁뱅이가 오더니 까마귀 병아리 차듯이 앗아갑니다.”
한다. 희룡은,
“아마 주린 모양이니 주어 버리렴.”
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종이 또 뛰어와서,
“그릇까지 망태에 넣고 가려는 것입니다.”
한다. 희룡은,
“옳아, 그만둬.”
하고는 그 비렁뱅이를 앞에 불렀다. 그의 얼굴은 도리어 싸울 기색이었다. 희룡은,
“그릇을 팔아 먹으려는 건가?”
했다. 그는
“그러구말구.”
“그럼, 내게 팔어.”
“일천오백 냥에서 조금이라두 떨어지면 팔지 않으우.”
희룡은 서슴지 않고 돈 일천오백 냥을 주었다. 비렁뱅이는 한참 주인을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가더니 그의 아내를 불러 들이며,
“이 이는 사람이 아니고 부처님이시야.”
하고는 그 묶은 것을 풀어 죽은 아이 하나를 내놓고서,
“내가 불법으로써 남에게 덤비면 그는 반드시 나를 몰아칠테니, 그가 만일 나를 몰아친다면 나는 곧 이 죽은 아이로써 그를 위협한다면 중한 뇌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니, 이제 계교를 이룩하지 못하였군요. 이건 정말 당신이 몸을 삼가는 힘이 있는 까닭이니 모든 것을 사과하우.”
하고는 곧 돈과 그릇들을 던져 버리고 가 버렸다.
그리하여 성씨는 마침내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화서외사(花?外史)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까 만일 성씨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옥사(獄事)가 반드시 성립될 것이요, 옥사가 성립된다면 요즘 법을 맡은 이들은 반드시 ‘의옥(疑獄)’이라 하여 여러 해를 두고 판결하지 못할지니, 성씨의 처지로선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아아, 슬프외다. 만일 애초부터 서문표(西門豹)와 같이 밝은 사람이 법을 맡았다면 저 비렁뱅이는 반드시 이런 짓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옥(李鈺) 글/ 이가원(李家源) 옮김
갈래 : 전(傳)
성격 : 교훈적, 현실비판적
제재 : 비렁뱅이의 농간과 이에 인덕으로 대처하는 성진사
구성 :
발단 - 교묘하게 시비를 잘 거는 세태(世態)
전개, 절정 - 비렁뱅이가 성희룡의 집에서 시비를 걸었으나 성희룡의 인품에 감동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 : 지난날의 잘못이나 허물을 고쳐 올바르고 착하게 됨)함.
결말 : 성희룡의 행동에 대한 평가
주제 : 세태와 인심의 교활함을 고발하고 처세의 덕을 강조함, 생각을 신중히 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사람에게는 간사한 술책이 먹혀들지 않음.
출전 : 담정총서(潭庭叢書)의 문무자문초
내용 연구
이 세상에 인류가 생긴 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간교로운 일이 날로 치열하고, 거짓의 행위가 날로 들끓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당대의 세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음]
이제 세상에는 이런 일이 생겼다. 굶어 죽은 시신을 짊어지고 밤 들어 남의 문 밖에 서서 주인을 급히 불러 일부러 그의 노염을 충동시켜 놓는다. 그리고 종말에는 서로 붙잡고 격투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주인놈이 나의 둘도 없는 벗을 죽였네.”
하고 외치며 그 죽은 시신을 내놓고 장차 관가를 찾아 고발하려 했다. 주인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하고 중한 뇌물을 허비하고서야 일이 바야흐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야말로 험악한 일이고녀. 그러나 지극히 삼가는 사람[서술자는 독자에게 여리박빙(如履薄氷) 즉 살얼음을 밟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삶의 처세를 함에 있어 신중한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음]에게는 아무리 간사한 놈일지라도 그 꾀를 팔 수 없는 법이었다[어지러운 세태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
그러므로 상말[속담]에는 '세 귀인(貴人)을 사귀기보다 내 한 몸을 삼가는 게 낫다' 하였으니, 이제 성씨의 아들이야말로 그런 사람이구료.
성희룡(成希龍)은 상주(尙州)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집이 애초부터 넉넉하였다[주인공에 대한 소개]. 흉년을 만나매 식객(食客)이 많이 모여 들었다. 여러 종이 금방 밥상을 들고 나온다. 한 종이 달음질치며,
"어떤 누덕을 진 비렁뱅이가 오더니 까마귀 병아리 차듯이 앗아갑니다.[시비를 걸려는 의도적인 행위]"
한다. 희룡은,
"아마 주린 모양이니 주어 버리렴[성희룡의 후덕한 인품이 드러남]."
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종이 또 뛰어와서,
"그릇까지 망태에 넣고 가려는 것입니다."
한다. 희룡은,
"옳아, 그만둬."
하고는 그 비렁뱅이를 앞에 불렀다. 그의 얼굴은 도리어 싸울 기색이었다. 희룡은,
"그릇을 팔아 먹으려는 건가?"
했다. 그는
"그러구말구."
"그럼, 내게 팔어."
"일천오백 냥에서 조금이라두 떨어지면 팔지 않으우."
희룡은 서슴지 않고 돈 일천오백 냥을 주었다[후덕하고 넓은 도량으로 문제 해결을 하려고 함 / 비렁뱅이에게 오히려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도량을 베풂]. 비렁뱅이는 한참 주인을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가더니 그의 아내를 불러 들이며,
"이 이는 사람이 아니고 부처님이시야.[성희룡의 행동에 감복하였음을 보여줌]"
하고는 그 묶은 것을 풀어 죽은 아이 하나를 내놓고서,
"내가 불법으로써 남에게 덤비면 그는 반드시 나를 몰아칠테니, 그가 만일 나를 몰아친다면 나는 곧 이 죽은 아이로써 그를 위협한다면 중한 뇌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니[비렁뱅이가 행동을 한 목적], 이제 계교[요리조리 생각해 낸 교묘한 꾀]를 이룩하지 못하였군요. 이건 정말 당신이 몸을 삼가는 힘이 있는 까닭이니 모든 것을 사과하우."[개과천선(改過遷善) :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됨]
하고는 곧 돈과 그릇들을 던져 버리고 가 버렸다.
그리하여 성씨는 마침내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신중한 성격과 온화한 인품으로 재물을 온전히 지킴]
화서외사(花서外史)[작가 이옥의 별호]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까 만일 성씨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옥사(獄事)가 반드시 성립될 것이요, 옥사가 성립된다면 요즘 법을 맡은 이들은 반드시 의옥(疑獄)'[죄상이 복잡하여 의혹이 많고 판명하기 어려운 범죄 사건]이라 하여 여러 해를 두고 판결하지 못할지니, 성씨의 처지로선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아아, 슬프외다. 만일 애초부터 서문표(西門豹 :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재판관)와 같이 밝은 사람이 법을 맡았다면[지도층의 무능함을 비판] 저 비렁뱅이는 반드시 이런 짓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이해와 감상
'전(傳)'이라는 고전적 장르는 대체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기술하고, 그 인물의 성격과 인품 등이 그 행적의 필연적 동기가 되는 것으로 서술함으로써 교훈적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성 진사의 성격과 인품이 직접 사건에 개입하여 인과적으로 사건을 전개함으로써 전(傳)의 성격보다는 소설적 성격이 더 강하다.
다시 말해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야기이므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전(傳)'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있었던 일을 기록하려는 데 중점을 두었다기보다 사전의 경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임을 알 수 있다. 거지의 행패가 반복적·점층적으로 전개됨으로써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주인공의 원만한 처사로 사건이 반전되고 있음은 서사적 흥미를 중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진사전은 세태 인심의 교활함 즉 염량세태의 인심을 폭로하면서 이러한 현실에서 화를 당화지 않기 위하여 성희룡과 같이 삼갈 줄 아는 덕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 작품이다.
전(傳)은 한문 문체의 하나로 어떤 사람의 독특한 행적을 기록하고, 여기에 교훈적인 내용이나 비판을 덧붙인 글인데 보통은, 열전, 사전(私傳), 탁전(托傳), 가전(假傳)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주인공의 성격이 사건을 인과적으로 전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진사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보다는, 간사하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판을 치는 사회 현실과 그것을 제대로 척결(剔抉)하지 못하는 관(官)의 무능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함으로써 소설적 의미가 증폭된다. 즉, 성진사의 성격과 인품이 사건을 인과적으로 전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전'의 양식과는 차별성을 가지며, 이를 단서로 이 작품은 소설적 구조를 갖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심화 자료
전(傳)
한문 문체의 하나. 전은 원래 문자 그대로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본래 사가(史家)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 史記≫를 편술할 때에 백이열전(伯夷列傳) 이하 70여 편의 전을 남긴 이후에 역대의 ≪이십오사≫ 사가들이 이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정사(正史)의 필체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전은 차츰 정사뿐만 아니라 문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정사에 수용되지 못한 처사(處士)·일민(逸民)의 드러나지 않은 덕행이나 서인 천민의 본받을 만한 행실을 골계(滑稽)를 섞어가며 기교적으로 서술하여 후대에 드리우려 하였다. 그 수용되는 인물의 성격과 문장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다.
≪문체명변 文體明辨≫에서는 전을 ① 사전(史傳), ② 가전(家傳), ③ 탁전(托傳), ④ 가전(假傳)으로 나누었다. 설봉창(薛鳳昌)의 ≪문체편 文體編≫에서는 전을 ① 사전, ② 가전, ③ 소전(小傳), ④ 별전(別傳), ⑤ 외전(外傳)으로 각각 분류하였다.
사전은 정사의 열전을 뜻한다. 가전은 정사와 구별되는 사가에 간직할 목적으로 된 전을 말한다. 가전과 탁전은 가탁한 필법을 사용한 것이다. 소전은 체재가 간략한 것이다. 별전과 외전은 명칭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정사인 정전(正傳)에 누락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전은 서술하는 방법과 태도에 따라 정체(正體)와 변체(變體)로 구분된다. 정체는 서사를 주로 하고 변체는 의론을 주로 한다. 정체는 사적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시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사실 자체를 생각하여 법론을 금하게 된다. 대상도 달라서 정체는 달관귀인(達官貴人)을 많이 다룬다.
변체는 문인·기사(奇士)·창부(娼婦)·협녀(俠女)의 유가 많다. 후대에 낙척(어렵거나 불행한 환경에 빠짐.)한 선비들이 변체를 유희문(遊戱文)으로 여겨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들의 전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자전적(自傳的)이다. 둘째는 우언적(寓言的)이다.
자전적 전은 실제로는 글쓴이 자신의 흉금과 회포를 서술하고 있면서 객관적으로 인물화한 것이다. 사실(史實) 자체는 징실(徵實)하지 못하다. 설사 사실을 증거하였다 하더라도 종래의 정체처럼 사실위주가 아니다. 문학적인 윤색을 더하여 자기의 사상과 생활상태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었다
우언적 전이란 주인공이 실제인물이 아니고 허구적 인물이다. 설사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많은 과장과 윤색을 더하였기 때문에, 기록을 사실적인 진면목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의 용심과 처사는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로써 저자의 인생관과 이상을 영출한다.
고려시대의 가전(假傳)이나 박지원 (朴趾源)의 9전은 인물의 성격이나 서술방법으로 보면 이 두 가지 전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온달전 溫達傳〉은 어디까지나 정사이므로 소설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문체반정 (文體反正)에 걸려 억압받고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단적인 문학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한문단편에서는 박지원과 맞먹는 경지에 이르고, 민요시 개척에서는 정약용과 함께 가장 앞선 성과를 보여주어 한문학 혁신의 2가지 방향을 주도했다. 가계(家系)나 생애를 밝혀줄 만한 자료가 없으며, 지금 알려진 자료는 친구 김려의 문집 발문(跋文)과 지은이의 글뿐이다. 어렸을 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30세 전후로 서울에서 성균관의 유생(儒生)으로 있었다. 박지원의 제자 세대로, 박지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는 않았으나 정조의 문체반정에 따르지 않았다. 실록(實錄)에는 이때 그가 소설문체를 써서 선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으므로 정조가 문체를 개혁한 뒤 과거를 보게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도 문체를 고치지 못하자 그는 영남 삼가현(三嘉縣)에 이적(移籍)되었으며, 뒤에도 같은 문제로 다시 삼가현에 머물러야 했다. 그 뒤로는 본가(本家)가 있는 경기도 남양에서 저작활동에 힘썼다. 그는 유기론(唯氣論)의 사고체계를 갖고 가치의 원천을 이(理)가 아닌 기에서 찾았다. 그래서 성현의 도리나 고문(古文)의 규범을 벗어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해야 진실에 이른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바를 그대로 나타내면 고전적인 명문(名文)과 겨룰 만한 새로운 문학이 이룩될 수 있다고 했다.
이옥의 전(傳)은 23편으로 박지원의 작품보다 많고 등장인물과 사건이 훨씬 다양하다. 그 가운데 〈심생전 沈生傳〉은 사대부 잡안의 청년이 중인 계급의 처녀를 사랑하다가 둘 다 비참하게 된 사연을 다루어 신분질서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유광억전 柳光億傳〉에서는 과거 답안지를 지어 파는 사람이 자기는 급제하지 못하는 처지를 다루면서 세상에 못 팔 물건이 없게 된 상황을 그렸다. 그밖의 작품들에서도 사기꾼, 협객, 기인, 가객, 여염집 아낙네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세태와 인정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박지원이 한정된 소재에 고도의 표현 능력을 발휘했다면, 이옥은 흔히 있는 이야기를 받아들여 수법보다는 내용이 앞서는 작품을 내놓았다. 구전설화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면서 단편소설의 성향을 즐겨 받아들였다. 이옥의 시는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합리화될 수 없을 정도로 관습에서 어긋났다. 남녀관계에 대한 민요를 한시(漢詩)로 옮긴 〈이언집〉에서는 〈삼난 三難〉이라는 제목의 긴 서문(序文)을 앞세워 자기는 조선사람이므로 중국풍의 국풍, 악부(樂府), 사곡(詞曲)이 아닌 이언을 짓는다고 했다. 하층민의 남녀관계를 여성적인 감각으로 노래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했고, 우리말의 어휘와 어법을 대담하게 살려서 한문으로 새기면 말이 되지 않는 문구(文句)를 쓰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한문으로 창작된 유일한 희곡 〈동상기 東廂記〉도 이옥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백화(白話)가 섞인 한문이라 읽기 어렵고 연극으로 공연할 수 없었다. 지은이의 다양한 취향을 알려주므로 흥미롭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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