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격서(聲東擊西)
by 송화은율성동격서(聲東擊西)
앞부분의 줄거리
문장과 지모가 뛰어난 김 진사에게 어느 날 도적떼의 두령이 찾아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 진사는 머뭇거렸으나 생명에 두려움을 느끼자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요청에 따랐다. 말을 타고 배를 갈아탄 후 도달한 곳은 거대한 병영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김 진사가 도착하자 모든 자들이 나와 차례로 인사를 올렸다.
다음 날 조사(朝仕) 끝에 처음 맞으러 왔던 사람이 행수 두령으로 조용히 품하였다.
“지금 도중에 재력이 고갈된 실정입니다. 처분이 어떠하올지.”
대장은 이에 모종의 분부를 내렸다.
그 당시 전라도에 만석꾼 부자가 있었다. 그 집 선영(先塋)이 자기 집에서 30리 밖에 있었는데, 세도 재상가에 못지않게 선산을 잘 보호하였다. 어느 날 한 상주(喪主) 일행이 그 산지기의 집에 들렀다. 상주의 뒤에는 복을 입은 이 두 명과 지관(地官) 두 명이 따랐으며, 안장마에 노복들을 거느린 품이 기세가 대단히 등등하였다. 거실대가(巨室大家)의 구산(求山) 행차임은 일견에 틀림없었다. 산지기가 어디서 오신 분들인가를 물어 보았더니 과연 서울의 모 대감 댁 행차로 상주는 이미 교리(校理)를 하신 분이고, 복을 입은 이들도 역시 명사라고 했다. 이들 일행은 잠깐 쉬고 일어나서 모두들 산소 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나침반을 제일 윗 봉분의 뒤통수 한 금정(金井)의 땅에 놓고, 손가락질을 해 가며 한참 평론을 하더니 치표(置標)를 하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서 좌정한 후에 행장에서 간지 4, 5폭을 꺼내 놓고 붓을 저어 편지를 썼다. 즉시 하인에게 편지를 주고 각기 모읍 모읍과 감영에 전하고 답장을 받아 오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지기를 불러,
“대감 댁의 친산(親山)을 아까 치표한 자리에 쓰기로 하였다. 저 무덤이 아무 댁 산소요, 네가 그 댁 묘지기인 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제 우리가 묘를 쓰고 못 쓰고의 여부는 피차간의 세력의 강약에 매였니라.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장사는 아무 날 지내기로 정하였으니 술과 양식은 예비해야 할 것이다. 우선 30냥을 주니 이것으로 먼저 쌀을 팔고 술을 빚어 두고 기다려라.”
하고 일행은 떠나갔다. 산지기는 돈을 거절하려 하였지만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산주(山主) 댁에 달려가서 사정을 아뢰었더니 산주인 만석꾼은,
“저희가 비록 권세가라지만 내가 막는데 어찌 감히 묘를 쓰겠느냐? 장사를 지낸다는 날 이렇게이렇게 할 터이니 너희들은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하고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 날 이른 아침에 만석꾼은 집의 장정 7백 명을 거느리고 산소로 올라갔다.
<중략>
그러나 진종일 개미새끼 하나도 얼씬하지 않았다.
삼경(三更) 말이 되어서 멀리 만여 개의 횃불이 넓은 들을 덮고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상엿소리가 밤 하늘을 울렸다. 형세가 마치 만 기의 기병이 접근하는 듯했다. 그 행렬이 건너편의 산모퉁이로 돌아서 쉬는 모양이었다. 산상군은 모두들 신발을 단단히 묶고 몽둥이를 둘러메고 용기 백배하여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식경이 지나서 떠들썩하던 소리가 점차 죽어 가고 불빛도 차츰 꺼져 가더니 이윽고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만석꾼은 수상한 생각이 들어 급히 사람을 보냈다. 과연 사람은 하나도 없고 횃불은 막대 하나에 여럿을 매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들은 만석꾼은 비로소 크게 깨닫고,
“아뿔싸, 우리 집 재산을 전부 도둑맞았다.” 하고 급히 대군을 몰아 집으로 달려왔다. 과연 집의 전재물이 털리어 아무 남은 것이 없었고 다만 인명은 하나도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는 계교는 새 대장이 꾸며 낸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대장은 만석꾼의 재물을 털어 온 다음 날 술을 거르고 소를 잡아서 군졸들을 크게 호궤하였다. 그리고 이번 걸음의 소득과 앞서 창고에 쌓인 재물까지 마당에 꺼내 놓고 회계를 맡은 자에게 그 숫자를 셈해 보도록 했다. 3천 명에게 분배를 하면 각기 백여 냥이 돌아갈 만한 것이었다. 대장은 이에 포유문(布諭文)을 돌렸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것은 오륜과 사단(四端)이 있음이다. 너희들은 왕화(王化)에 벗어난 무뢰한 백성들로, 멀리 섬에 잠복하여 부모 처자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하였구나. 일하지 않고 놀며 의식을 취하니 약탈해서 살아가고 도적질이 업이로다. 무리를 모아 작당을 한 것이 몇백 몇천이고, 재앙을 내며 적악을 한 것도 몇 년인 줄을 모르겠구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너희들의 악행을 돕기 위함이 아니고 너희들을 옳게 인도하여 선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허물이 천이라도 고치면 귀하나니 이제부터 일심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동서남북 각기 고향을 찾아갈지어다. 모름지기 우리는 부모를 봉양하고 조상의 무덤을 지키며 살 것이다. 성현의 교화에 젖어 선량한 백성으로 돌아감이 해상의 명화적에 대겠느냐? 하물며 너희들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한 집의 가산에 족하니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밑천이 없다고 근심하랴.”
요점 정리
지은이 : 미상
연대 : 미상
갈래 : 야담계 소설, 사회 소설, 의적 소설
성격 : 현실비판적
근원설화 : 지략설화
제재 : 만석꾼의 재물을 털기 위한 지략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5단구성
발단 : 도둑 떼가 김 진사를 찾아와 우두머리가 될 것을 요청함
전개 : 김 진사는 만석꾼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그의 선산에다 묘를 쓰겠다는 통보를 하고 만석꾼은 수하의 작인들을 모아 산소를 지킴
위기 : 상엿소리가 나고, 수많은 햇불이 보였는데도 만석꾼의 산소로 접근해 오는 이들이 없자 의심이 생긴 만석꾼은 집으로 사람을 보냄
절정 : 만석꾼을 선산으로 유인한 도둑 떼들은 만석꾼의 집 재물을 모두 털어 감
결말 : 김 진사는 약탈한 재물들을 도둑 각자에게 나누어 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 것을 명령함
주제 : 법을 벗어난 도둑들의 교화
특징 : 지략 겨룸담(談)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홍길동전의 아류작에 가깝고, 김 진사의 처신에 일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줄거리 : 장래 도원수감으로 칭송을 받던 김 진사의 집으로 한 무리의 도둑이 들어왔다. 그들은 3천 명의 도둑 떼에 속한 일부로서, 그들의 우두머리가 죽자 김 진사를 새로운 대장으로 초빙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이들은 김 진사를 칼로 위협하여 말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 그들의 소굴로 인도하였다. 김 진사가 우두머리로 부임하였으나 산중에 먹을 것이 없었다. 이에 김 진사는 만석꾼의 재물을 털기로 하고 부하들을 만석꾼의 선산으로 보낸다. 대감 집 상주로 행색을 꾸미고 만석꾼의 선산에 도착한 이들은 일방적으로 묘를 사용할 것을 산지기에게 통보하였다. 산지기의 말을 들은 만석꾼은 자신이 거느리는 7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모아 선산으로 올라가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운다. 새벽쯤에 수많은 햇불이 보이자 만석꾼은 싸울 준비를 한다. 그러나 햇불은 사그러들고 아무런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러자 이상을 느낀 만석꾼은 부하들은 집에 보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그 사이에 김 진사의 부하 도둑들이 만석꾼의 재물을 모두 털어갔다. 김 진사는 재물을 도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선량한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명한다.
내용 연구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으로, 적을 유인하여 이쪽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그 반대쪽을 치는 전술을 이르는 말.]
앞부분의 줄거리
문장과 지모가 뛰어난 김 진사에게 어느 날 도적떼의 두령이 찾아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 진사는 머뭇거렸으나 생명에 두려움을 느끼자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요청에 따랐다. 말을 타고 배를 갈아탄 후 도달한 곳은 거대한 병영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김 진사가 도착하자 모든 자들이 나와 차례로 인사를 올렸다.
다음 날 조사(朝仕 : 벼슬하는 선비를 뜻하나 여기서는 아침 조회 정도의 뜻) 끝에 처음 맞으러 왔던 사람이 행수[한 무리의 우두머리] 두령으로 조용히 품하였다[제의하다, 말하다].
“지금 도중에 재력이 고갈된 실정입니다. 처분이 어떠하올지.[도둑들이 진사의 지혜를 요청하는 말임]”
대장은 이에 모종의 분부[만석꾼의 재물을 털 전략을 지시]를 내렸다.
그 당시 전라도에 만석꾼 부자가 있었다. 그 집 선영(先塋 : 조상의 무덤)이 자기 집에서 30리 밖에 있었는데, 세도 재상가에 못지않게 선산을 잘 보호하였다. 어느 날 한 상주(喪主) 일행이 그 산지기의 집에 들렀다. 상주의 뒤에는 복을 입은 이 두 명과 지관(地官 : 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 두 명이 따랐으며, 안장마(안장말)에 노복들을 거느린 품이 기세가 대단히 등등하였다. 거실대가(巨室大家 : 대단한 세도를 지닌 가문)의 구산(求山 : 묘를 쓸 산을 구함) 행차임은 일견에 틀림없었다. 산지기가 어디서 오신 분들인가를 물어 보았더니 과연 서울의 모 대감 댁 행차로 상주는 이미 교리(校理)를 하신 분이고, 복을 입은 이들도 역시 명사라고 했다. 이들 일행은 잠깐 쉬고 일어나서 모두들 산소 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나침반을 제일 윗 봉분의 뒤통수 한 금정(金井)[=금정틀. 뫼를 쓰기 위하여 판 구덩이. '우물'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눈동자'를 한방에서 이르는 말. 금정 놓아 두니 여우가 지나간다 일이 낭패로 돌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뫼를 쓰기 위하여 판 구덩이]의 땅에 놓고, 손가락질을 해 가며 한참 평론을 하더니 치표(置標 : 묏자리를 미리 잡고 표적을 묻어 무덤 모양으로 만들어 둠. 또는 그 표적)를 하고 내려오는 것이었다[묘 자리를 보는 척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만석꾼의 심기를 자극하기 위해 의도된 행동이다. 그들의 행위를 산지기가 보고 있으므로 그가 만석꾼에게 보고할 것임을 예측한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서 좌정한 후에 행장에서 간지[편지지] 4, 5폭을 꺼내 놓고 붓을 저어 편지를 썼다. 즉시 하인에게 편지를 주고 각기 모읍 모읍과 감영에 전하고 답장을 받아 오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지기를 불러,
“대감 댁의 친산(親山)을 아까 치표한 자리에 쓰기로 하였다. 저 무덤이 아무 댁 산소요, 네가 그 댁 묘지기인 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제 우리가 묘를 쓰고 못 쓰고의 여부는 피차간의 세력의 강약에 매였니라.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장사는 아무 날 지내기로 정하였으니 술과 양식은 예비[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선 30냥을 주니 이것으로 먼저 쌀을 팔고 술을 빚어 두고 기다려라.[만석꾼을 유인하기 위한 포석]”
하고 일행은 떠나갔다. 산지기는 돈을 거절하려 하였지만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산주(山主) 댁에 달려가서 사정을 아뢰었더니 산주인 만석꾼은,
“저희가 비록 권세가라지만 내가 막는데 어찌 감히 묘를 쓰겠느냐? 장사를 지낸다는 날 이렇게이렇게 할 터이니 너희들은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하고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 날[장사 지내는 날] 이른 아침에 만석꾼은 집의 장정 7백 명[만석꾼의 위세를 짐작케함]을 거느리고 산소로 올라갔다.
<중략>
그러나 진종일 개미새끼 하나도 얼씬하지 않았다.
삼경(三更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말이 되어서 멀리 만여 개의 횃불이 넓은 들을 덮고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상엿소리가 밤 하늘을 울렸다[거짓 상여 소리로 상대를 유인. 성동격서(聲東擊西 :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으로, 적을 유인하여 이쪽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그 반대쪽을 치는 전술을 이르는 말.)]. 형세가 마치 만 기의 기병이 접근하는 듯했다. 그 행렬이 건너편의 산모퉁이로 돌아서 쉬는 모양이었다. 산상군[만석꾼과 함께 산에 올라간 장정들]은 모두들 신발을 단단히 묶고 몽둥이를 둘러메고 용기 백배[(勇氣百倍) : 격려나 응원 따위에 자극을 받아 힘이나 용기를 더 냄.]하여 일전[한바탕의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식경[한 차례의 식사를 할 동안]이 지나서 떠들썩하던 소리가 점차 죽어 가고 불빛도 차츰 꺼져 가더니 이윽고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만석꾼은 수상한 생각이 들어 급히 사람을 보냈다. 과연 사람은 하나도 없고 횃불은 막대 하나에 여럿을 매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들은 만석꾼은 비로소 크게 깨닫고,
“아뿔싸, 우리 집 재산을 전부 도둑맞았다.” 하고 급히 대군을 몰아 집으로 달려왔다. 과연 집의 전재물이 털리어 아무 남은 것이 없었고 다만 인명은 하나도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성동격서(聲東擊西 :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으로, 적을 유인하여 이쪽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그 반대쪽을 치는 전술을 이르는 말.]을 친다는 계교는 새 대장이 꾸며 낸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대장은 만석꾼의 재물을 털어 온 다음 날 술을 거르고 소를 잡아서 군졸들을 크게 호궤[군사들을 위로하여 음식을 베품]하였다. 그리고 이번 걸음의 소득과 앞서 창고에 쌓인 재물까지 마당에 꺼내 놓고 회계를 맡은 자에게 그 숫자를 셈해 보도록 했다. 3천 명에게 분배를 하면 각기 백여 냥이 돌아갈 만한 것이었다. 대장은 이에 포유문(布諭文 : 나라에서 결정하여 행할 일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린다는 말이나 여기서는 나라가 아니라 대장이 결정해서 널리 알린다는 글)을 돌렸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것은 오륜[(五倫) : 유학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이른다]과 사단(四端 :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맹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을 이른다)이 있음이다. 너희들은 왕화(王化 : 왕의 통치)에 벗어난 무뢰한 백성들로, 멀리 섬에 잠복하여 부모 처자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하였구나. 일하지 않고 놀며 의식을 취하니 약탈해서 살아가고 도적질이 업이로다. 무리를 모아 작당을 한 것이 몇백 몇천이고, 재앙을 내며 적악[악한 짓을 많이 함]을 한 것도 몇 년인 줄을 모르겠구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너희들의 악행을 돕기 위함이 아니고 너희들을 옳게 인도하여 선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허물이 천이라도 고치면 귀하나니 이제부터 일심 개과천선(改過遷善 : 지난날의 잘못이나 허물을 고쳐 올바르고 착하게 됨)하여 동서남북 각기 고향을 찾아갈지어다. 모름지기 우리는 부모를 봉양하고 조상의 무덤을 지키며 살 것이다. 성현의 교화에 젖어 선량한 백성으로 돌아감이 해상의 명화적[조선 철종 연간에 횡행하던 도둑의 무리]에 대겠느냐? 하물며 너희들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한 집의 가산에 족하니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밑천이 없다고 근심하랴.”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홍길동전의 아류작으로 당시 홍길동전이 지닌 특성처럼 사회 반영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고전 소설은 대개 중국을 배경으로 작품이 전개되는데 이 작품은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실질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의적 설화를 근원설화로 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염정, 군담, 가정, 판소리계 소설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 소설에 등장하는 양반들은 갈등을 거듭하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원하는 벼슬을 하지 못한 몰락한 양반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잘못된 관리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소설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친다. 조선 후기의 상당수 작품들이 이들의 손에 의해 출간되었다. 다른 하나는 양반으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들로 이작품에서 김 진사처럼 만석꾼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왕의 도덕과 교화에서 벗어나는 짓은 용납하지 않은 유형이다. 두 유형의 양반들은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조선 후기의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세태에 불만을 품은 조선 후기 양반 계층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도둑의 두목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도둑의 우두머리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만석꾼의 재산을 탈취해서 그 탈취한 재산을 이용해 도둑 각자에게 나누어 주어 고향에 돌아가도록 만든다. 이는 산적 떼들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평범한 백성들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부조리한 과거 제도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양반 중에도 도둑 떼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뜻을 펴는 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알려주는데, 이는 결국 당대 신분 제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에 기여한 것으로 '홍길동전'을 무시할 수 없다.
심화 자료
지략설화(智略說話)
이인(異人)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 꾀를 써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오히려 반대로 남에게 속기도 하는 이야기를 다룬 설화. 숙종대왕·박문수·김삿갓·김선달형·꾀보 하인 등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 밖에 오성과 한음, 푸대접을 받는 사위, 아전, 학동, 상좌 등도 나온다.
숙종대왕·박문수 등 지체가 높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자기보다 지위나 능력에서 열세인 상대방을 꾀를 써서 도와주기도 하고, 마음씨가 나쁜 자, 악행을 저지르는 자의 소행을 밝혀서 처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나 꾀로써 이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 자기들보다 한 수 위인 상대, 즉 이인이나 지혜로운 아이를 만나 오히려 지략에서 눌리기도 한다.
지략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인공은 김선달형 인물이다. 그들은 남다른 기지로 곤궁한 처지를 모면하려고 남들을 속이지만 그 대가가 한 끼의 식사, 하룻밤 잠자리이니 악행이라도 큰 죄는 아니다. 자기 능력에 닿지도 않는 일을 맡고 나서거나, 상대방의 물건을 슬쩍하여 도리어 맡겨 놓고 그 대신 음식을 먹는다.
모르는 사람을 아는 체하거나 친척을 가장하기도 하고, 가짜 부고를 내어 부의금을 거두고, 빚쟁이에게 빚은 저승에서 갚았노라고 둘러댄다. 대동강·초친 팥죽·밀 반대기 등 엉뚱한 물건을 팔아먹고, 어리석은 체하면서 남의 음식을 먹어 치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훔치고는 점잖은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 음식을 공평히 나눈다면서 혼자 먹어 치운다. 콧대 높은 기생·처녀·과부를 허술한 주인공이 뜻밖의 술수로 차지한다.
이런 김선달형 인물은 지방마다 특색이 있으며, 방학중·정만서·정수동·태학중 등 여러 인물들이 있다. 김선달형 인물도 언제나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똑똑한 안사돈이나 말 잘하는 아낙네 등에게 한 수 지기도 한다.
그리고 김선달형 인물은 아니지만 평소에 푸대접을 받던 사위가 장인(장모)에게, 혹은 꾀보 하인이 상전을 어떤 기회에 꾀를 써서 평소의 울분을 설욕하기도 한다.
지략담은 자주 경쟁담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소담(笑談)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호랑이·여우 등 힘이 강한 상대를 여우·토끼·두꺼비·게 등의 약한 쪽이 꾀로써 물리치는 동물담도 지략담에 속한다. ≪참고문헌≫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충청남도민담(최운식, 집문당, 1980).
임꺽정(林──(의적))
?∼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의적(義賊).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한다.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여러 해 연이어 흉년이 계속된 데다가 당시 척족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이 발호하고, 관리들의 수탈이 횡행하는 틈을 타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날쌔고 용맹스러웠으며 자기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어지러운 사회를 틈타 처음에는 도당 몇 명을 모아 민가를 횡행하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해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삼아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결탁해 내통하였다. 그리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났다 한다.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정탐시키자 그들 무리는 미투리를 눈 위에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행방을 감추었다. 선전관이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돌아올 적에 도둑들은 선전관을 잡아 죽였다.
1559년(명종 14) 집을 개성에 두고 개성 근방에서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인 20여 명을 데리고 그들의 소굴을 습격했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한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도둑잡기를 게을리하는 수령에게는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는 서울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 장통방(長通坊 : 종로구 종로2가 부근)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다. 이 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해 10월에 금교역(金郊驛)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겁탈을 일삼았다. 이리하여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혔다. 이들은 이 때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이 해 12월에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 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는데,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었다.
서림의 입을 통해,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났다. 또, 이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의 여러 차례 잡은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 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 그 때 도둑무리는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을 무찔러 부장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이에 임금은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해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辛商輔)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자, 백주에 도둑 무리 1대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처자들을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
이 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李思曾)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추고(推考 : 죄가 있는 관원을 신문해 그 죄를 살펴 봄)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였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推官) 강려(姜侶)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해졌고, 관군의 물자마저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1561년 9월에 평안도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李壽鐵)이 임꺽정과 한온(韓溫)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 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했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이수철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이 해 10월 임꺽정 일당이 해주에서 평산으로 들어와 대낮에 민가 30여 호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림을 통해 임꺽정을 꾀어낸다는 방침을 바꾸고 새로운 조처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金世澣)을 임명해 정병을 딸려 보냈다. 이어 개성과 평양의 성내를 샅샅이 뒤졌으며 서울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 수문장의 수를 늘리고 날짜를 정해 새벽부터 일시에 수색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자는 달아났다. 이에 포졸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으면 감옥에 넣어 온종일 서울은 호곡소리로 들끓었다 한다.
한편, 정시(停市 : 시장을 일시동안 정지시킴) 및 모든 관청일을 중단시켰는데, 대신이 죽는 때 외에는 없던 일이었다. 또,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도둑으로 끼어 드는 일을 막기 위해 수색을 금했고, 황해도에는 전세 전부를, 평안도에는 전세 절반을 탕감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의정부에서는 “토포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 유둔하고 있어서 군민(軍民)이 곤궁, 피로하고 일도가 탕연해 원망의 소리를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고 일단 많은 도둑의 졸개가 잡혔으니 임꺽정을 잡는 일은 평안도·황해도의 감사·병사에게 맡기고 토포사를 올라오게 하였다.
1562년 정월, 남치근은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郭舜壽)와 홍언성(洪彦誠)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올렸다. ≪기재잡기 寄齋雜記≫에는 임꺽정이 잡힐 적의 정황을 이렇게 전한다.
남치근이 재령땅에서 진을 설치하니 임꺽정은 날쌔고 건장한 자만을 데리고 구월산에 들어갔고 나머지 무리에게는 요소요소를 지키게 하였다. 산을 올라가며 계속 수색하며 남은 무리를 죽이자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했는데, 계속 민가를 수색하자 임꺽정이 민가에 뛰어 들어왔다.
임꺽정이 주인 노파를 위협해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며 나가게 하였다.
이에 임꺽정이 칼을 빼고 뛰어나오며 도둑놈은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군졸들이 혼란한 틈을 타 술렁거리자, 군졸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다가 서림이 “저 놈이 임꺽정이다.”라고 소리쳐 끝내 상한 몸으로 잡혔다는 것이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고, 잡힌 지 약 15일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실록의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하였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은 이러한 정상을 이용해 자기의 신분 차별에 대한 한을 풀어보려고 했고, 그러한 처지에 놓인 두령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5도를 횡행하며 관군을 괴롭혔고 온 나라를 소란에 빠뜨렸다.
그가 죽고난 뒤 명화적(明火賊)은 그를 의적으로 떠받들었으며, 무수한 설화를 낳았고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그의 앞 시대의 홍길동(洪吉童),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
그리하여 일부는 살육을 자행하는 포악한 도둑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일부는 백성을 위해 관곡을 털어 나눠주는 의적으로 평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寄齋雜記, 星湖僿說, 燃藜室記述.
전(傳)과 소설(小說)의 갈래적 특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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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소설 |
작품 세계 |
사실 지향 |
허구 지향 |
구성 |
정형성(일정한 형태나 형식을 말함) |
인과성(원인과 결과를 이르는 말) |
대상 |
인물 |
사건 |
창작 의식 |
기록성 |
창조성 |
기능 |
교훈성(권선징악, 인과응보) |
흥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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