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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雪害木) / 본문 및 해설 / 법정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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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雪害木) / 법정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老僧)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물을 떠다 주는 것이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 들어주는 데 크게 감동한 것이었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 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 버리고 안 계신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히 살아 있는 노사의 상(像)이다.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 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이밧티이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殺人鬼) 앙굴리마알라를 귀의(歸依)시킨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神通力)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慈悲)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 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지은이 : 법정

 갈래 : 수필, 경수필

 성격 : 일화적, 교훈적, 사색적, 철학적, 종교적

 제재 : 설해를 입은 나무

 표현 : 실례와 비유적인 표현으로 알게 쉽게 드러내고 있는 수필로 생활 언어의 감각적 구사를 통하여 산 속의 정경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삶의 깊은 예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대립적인 소재를 사용함(시중들기 - 훈계, 눈 - 비바람, 자비 - 신통력, 위엄, 권위, 물결 - 무쇠로된 정)

 주제 : 진정한 자비와 사랑의 힘, 부드러운 것의 강함

 출전 : 무소유(1968)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사는 노승(老僧) 앞에 더벅머리(①더부룩하게 난 머리털. 예전에, 웃음과 몸을 팔던 계집. ②급이 삼패(三牌)도 되지 못한 계집으로서 오늘날의 술집 여자나 갈보와 같은 여자를 이른다. 여기서는 ①)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낯선 환경에 대한 어색함과 노승이 쏟을 훈계에 대한 지레짐작으로 인한 생각으로 불안해 함).


사연인즉, 이 망나니(언동이 몹시 막된 사람을 비난조로 이르는 말.)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물을 떠다 주는 것이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유능제강(柔能制剛 :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제압한다)의 의미로 평소에 들었던 훈계가 아니라 따사롭고 자애로운 태도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 들어주는 데 크게 감동한 것이었다. 훈계라면 진저리(몹시 싫증이 나거나 귀찮아 떨쳐지는 몸짓)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 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 버리고 안 계신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히 살아 있는 노사의 상(像)이다.[사제삼세(師弟三世) :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전세(前世)�현세(現世)�내세(來世)에까지 계속된다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매우 깊고 밀접함을 이르는 말.]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백절불굴(百折不屈) : 어떠한 난관에도 결코 굽히지 않음. 비슷한 말로 백절불요] 아름드리(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나 물건)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외유내강(外柔內剛 :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 속은 곧고 굳셈)을 나타내는 것으로 작은 힘이라도 꾸준히 계속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속담인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라는 말을 연상시킴.).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자연의 법칙과 삶의 예지를 알고 잠을 이루지 못함).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 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설해를 입은 나무들이 많은 산의 쓸쓸한 모습을 비유하고 있음) .


 사이밧티이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殺人鬼) 앙굴리마알라('앙굴리마알라'는 불교 '아함경'에 나오는 도둑으로, 석가모니의 자비에 감화되어 잘못을 뉘우치고 도를 이룬 인물)를 귀의(歸依)시킨 부처님의 불가사의(不可思議 :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하고 야릇함)한 신통력(神通力 :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는 영묘하고 불가사의한 힘이나 능력. 불교에서는 선정(禪定)을 수행함으로써 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慈悲 :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였다. 아무리 흉악무도(성질이 거칠고 사나우며 도의심이 없음)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 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돌에 구멍을 뚫거나 돌을 쪼아서 다듬는, 쇠로 만든 연장. 원추형이나 사각형으로 끝이 뾰족하다. 여기서는 물결과 대립된 소재)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빠져 나간다.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이 틈새도 없는 것을 관통한다. 이것에서 나는 무위의 가치를 안다. 말 없는 가르침, 그리고 무위의 가치는 우주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도덕경 제43장- )

 


아함경(阿含經) : 석가모니의 언행록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의 수필로 '노사'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사랑과 자비의 가치를 이야기한 글이다. 마지막 문장에 글의 핵심이 비유적으로 녹아 있다. '설해목'이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지는 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뜻으로 쓰였다. '앙굴리마알라'는 불교 '아함경'에 나오는 도둑으로, 석가모니의 자비에 감화되어 잘못을 뉘우치고 도를 이룬 인물이다. 이 글은 진정으로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이라는 역설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글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외유내강이 진정으로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충고와 격언'이라는 글에서

 

밀랍은 원래 딱딱하고 잘 부서지는 물질이지만,
약간의 온기만 가하면 말랑말랑해진다.
그렇게 해서 말랑말랑해진 밀랍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아무리 심술궂고 악의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정중함과 인간 본성의 관계는
온기와 밀랍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이 글 역시 이러한 부드러움의 자세가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법정 스님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러 나오는 글이라 더욱 깊은 감명을 주는 글로 볼 수 있다. 글은 체험을 바탕으로 할 때 훨씬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 때문이다.

 

 

 도덕경(道德經) - 제43장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천하에 가장 여린 것이 천하에 가장 강한 것을 부리고,
無有入無間. (무유입무간)
형체가 없으니 틈이 없는 곳도 들어간다.
吾是以知無爲之有益. (오시이지무위지유익)
그래서 나는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
말 없는 가르침과 하지 않음의 유익함을 알아서 행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드물다.

 

 

 아함경(阿含經)/Agama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들을 전하는 원시불교의 경전으로 하나의 경전이 아니라 석가모니가 실제로 설했다고 생각되는 말씀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경들의 총칭으로 경장을 가리키며, 4아함으로 분류된다. 4아함은 경전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 장아함(長阿含)과 증아함(增阿含), 취급하는 주제나 대화자의 종류 등에 따라 집성한 잡아함(雜阿含), 법수(法數)에 따라 분류한 증일아함(增一阿含)을 말한다. 아함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아가마의 음사이며, 그 원래의 뜻인 '오는 것'에서 유래하여 '예로부터 전해온 가르침', 즉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을 의미한다. 유사한 가르침이 남방불교에서는 팔리어로 전수되어 니카야(Nikya 部)라는 명칭으로 불린 데 대해 북방불교에서는 산스크리트로 '아가마'라는 명칭이 전수되었고, 이것을 중국에서 번역한 것이 아함경이다. 그러나 아함경에는 다섯 니카야 중의 마지막 소부(小部)에 상당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내용적으로 양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상응한다. ① 장아함경은 디가니카야 (Dgha-nikya 長部)에 대응되며 내용이 긴 30개의 경을 포함한다. ② 증아함경은 마지마니카야(Majjhima-nikya 中部)에 대응한다. 중간 길이의 222개 경을 포함한다. ③ 증일아함경은 앙구타라니카야(Aguttara-nikya 增支部)에 대응되며 교리에서 구사되는 숫자(法數)에 따라 472개의 경을 1~10법으로 집합·정리했다. ④ 잡아함경은 상유타니카야(Sayutta-nikya 相應部)에 대응되며 다른 아함에 수록되지 않은 1,362개의 짧은 경들을 모은 것이다. 이밖에 별역(別譯) 잡아함과 단권(單卷) 잡아함을 포함한다.

 

아함경의 기원은 BC 4~3세기로 추정된다. 석가모니 입멸(入滅) 뒤 100년 무렵부터 교단이 양분되면서 시작된 부파불교시대에 각 부파는 과거의 전승에 입각하여 자파의 독자적인 경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중 한 부파의 경장이 온전히 보존되어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지는 것이 팔리어의 5니카야이다. 이에 비해 현존하는 아함경은 부파에서 전해온 것들을 끌어모아 중국에서 4아함의 체재로 정리한 것이다. 각 아함에는 신층과 고층이 뒤섞여 있어 4아함 사이의 시간적 선후관계를 확정짓기 어렵다. 다만 증일아함에 신층이 많이 실려 있는 편이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아함에도 후세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아함을 아함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에서 시작된 관례이다. 서력 기원을 전후로 대승불교가 흥기하여 대승경전이 제작되기에 이르자 아함·아함경은 소승불교·소승경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아함경은 대체로 석가모니가 직접 설한 것으로서 불교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신앙적 입장으로도 중요한 것인데 소승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승불교의 한자문화권에서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합리적이고 명쾌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서양에 대한 영향이 대승경전보다 훨씬 커서 근래에는 중시되고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아함경(阿含經) 이야기

계(戒)·정(定)·혜(慧)를 닦아라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콜리성 북쪽의 한 나무아래 머무르시며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선정(禪定)을 닦으며 지혜를 구하라. 청정한 계율을 지니는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선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되며, 지혜를 구하는 이는 애욕에 매이지 않으므로 하는 일에 걸림이 없다. 계(戒)·정(定)·혜(慧)가 있으면 덕이 자라고 그 이름이 널리 퍼지리라. 또 세 가지 허물을 떠나면 마침내 아라한(阿羅漢)이 될 것이다.

 

지금의 이 몸으로 삼매(三昧)를 얻으려면 부지런히 깨닫기를 구하여, 이 생이 다하도록 청정한 도에 들어가라. 마땅히 실행할 것을 행하면 죽은 뒤에 다시 윤회하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 요긴함을 거듭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계를 지니고 선정을 생각하며 지혜를 깨달으라. 이 세 가지를 잘 지키는 사람은 덕망이 높고 그 이름이 드날리게 될 것이다. 음란한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잡된 생각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을 일러 해탈(解脫)이라 한다.

 

이 계행(戒行)이 있으면 저절로 선정이 이루어지고, 선정이 이루어지면 지혜가 밝아지리니, 이를테면 흰 천에 물감을 들여야 그 빛이 더욱 선명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마음이 있으면 도를 어렵지 않게 얻을 것이고, 일심으로 부지런히 닦으면 이 생을 마친 후에는 청정한 데에 들어갈 것이다.

 

만약 계(戒)·정(定)·혜(慧)의 행을 갖추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갖추면 마음이 저절로 열리어, 천상. 인간. 지옥. 아귀. 축생들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온갖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도 알게될 것이다. 마치 시냇물이 맑으면 그 밑에 모래와 자갈돌의 모양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이 밝음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다 나타난다. 도를 얻으려면 먼저 그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장 아함경)

마음의 주인이 되라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견고한 것도 없으며 결국 모두 흩어지고 만다. 망상 분별로 하는 일은 속임이 될 뿐이다. 세속의 인연으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느냐. 저 큰 수미산도 언젠가는 무너질 것인데 이까짓 사람 몸 따위이겠느냐.

 

나는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놀라거나 슬퍼하지 말아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다 법으로 부처를 이루었다. 이미 교법(敎法)이 갖추어져 있으니 너희들은 부지런히 배워 실행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해탈을 얻도록 하여라

 

사람이 바른 마음을 쓸 줄 알면 천신(天神)들도 기뻐할 것이다. 마음을 조복받아 부드럽고 순하게 텅 비워야 한다. 마음가는 데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마음가는 데로 한다면 세상에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 도를 얻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며 귀신이나 축생 혹은 지옥도 만들므로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온갖 법이 일어난다. "(장 아함경)

 

 

뗏목의 비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들이 교법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뗏목의 비유'를 들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강가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하기를

'강 건너 저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그러나 배가 없으니 어떻게 건너가지? 갈대나 나무로 뗏목을 엮어 건너가야겠군' 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강을 건너갔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뗏목이 아니었다면 강을 건너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그와 같이 함으로써 그 뗏목에 대해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하겠는가 ?

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강을 건너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뗏목으로 인해 나는 강을 무사히 건넜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워 놓고 나는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 할 일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을 배워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중아함경)

 

설법과 침묵

부처님은 어느 날 오후 아난다를 데리고 아지타바티 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셨다. 목욕을 끝낸 후 아난다의 청을 받아들여 바라문 람마카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 마참 람마카의 집에는 많은 비구들이 모여 설법을 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문 밖에 서서 그들의 설법이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이윽고 설법이 끝난 것을 아시고 문을 두드리셨다. 곧 비구들이 나와 문을 열고 부처님을 맞아 들였다. 부처님은 자리에 앉은 뒤 물으셨다.

"너희들은 조금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였으며 무슨 일로 여기에들 이렇게 모였느냐 ? "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조금 전에 법을 말하였으며, 그 법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착하다, 비구들이여. 너희는 모여 앉으면 마땅히 두 가지 일을 행해야 한다. 하나는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중아함 라마경)

 

독 묻은 화살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말룽가 존자는 홀로 조용한 곳에 앉아 이렇게 생각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

여래(부처)는 최후가 있는가, 없는 가, 아니면 최후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전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세존께서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그를 비난하고 떠나야겠다."

말룽카는 해가 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찾아갔다. 조금 전에 혼자서 속으로 생각한 일을 말씀드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세존께서는 저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실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 기탄 없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물으셨다.

"말룽카여, 내가 이전에 너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따라 수행하고 있었느냐 ?"

"아닙니다"

"그 밖의 의문에 대해서도, 내가 이전에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따라 도를 배우고 있느냐 ?"

"아닙니다"

"말룽카여, 너는 참 어리석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찌기 너에게 말한적이 없고 너도 또한 내게 말한 적이 없는데, 너는 어째서 부질없는 생각으로 나를 비방하려고 하느냐 ?"

말룽카는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머리를 숙인 채 말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이때 부처님은 비구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에게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어 있는지, 물푸레 나무로 되어 있는지, 화살은 보통나무로 된 것인지 대로된 것인지를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근심 걱정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고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또한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배우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카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중아함 전유경)

 

너무 조이거나 늦추지 말라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다가 이와 같이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 정진하는 성문(聲聞)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편이 낫지 않을까 ? '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야,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 "

"네 그렇습니다. "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 "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또 어떻더냐 ? "

"그대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슨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거문고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잡아함 이십억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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