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휘 - 불꽃
by 송화은율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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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전후세대 휴머니즘의 진폭
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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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가 한 문학의 특질을 결정하는 수가 있다. 선우휘 문학이 그런 경우이다. 선우휘 문학은 현대 한국 보수주의 문학의 한 전형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 그의 보주주의, 곧 반공주의의 이념이란 굳이 새삼스럽게 인식될 필요조차 없었던, 당연한 인식의 지평이었다. 살육의 전쟁 끝에 살아남고 허여된 이념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봐야 목숨 건 인정투쟁의 장이 완전히 막을 내린 건 아니었다. 바야흐로 이데올로기의 내면화의 투쟁 계절이 전개되었는데, 무엇보다 인간성의 회복과 수습을 위한 시절에 피폐한 피난민의 정서에 호소했던 이념은 <휴머니즘>이었다. 기실 반공주의의 딴 이름이 이 휴머니즘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인도주의라는 이름의 기치 속에서 그들은 반공주의를 호흡했다. 행동적 휴머니즘, 또는 실존적 휴머니즘, 혹은 저항적 휴머니즘, 혹은 비판적 휴머니즘 등이라고 해봐야 본질은 마찬가지다. 다만 가지치기를 해나갔을 뿐이다. 어느 것이나 개인을 기초로 해서 전후 인간성의 상실, 혹은 복구의 문제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체제 안에서 해결하려는 체제 이념적 태도를 가졌던 것은 마찬가지다. 만약 보다 온건한 정치적 태도 아래서 전후 인간성의 상실을 노래한 경향이 실존적 휴머니즘이었다면, 이 소설 경향의 선두에 조용히 나서고 있었던 것이 손창섭 문학이었고, 그 바른편 선두에서 보다 철저한 정치적 신념 아래 무장하고 일련의 문학적 조류를 형성했던 것이 선우휘 문학이었다. <행동적 휴머니즘>의 정체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고, 전쟁이라는 거친 투쟁의 장소를 거친 마당에 문단에 활력소를 제공한 이념적 쟁소의 하나는 이것이었다. 세대적 요인에 앞서서 상황적 요인이 문학사를 규정한 원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50년대 문학사에 선우휘가 마치 혜성처럼, 신데렐라처럼 등장한 배경에는 이처럼 전후라는 시대의 특수조건이 가로놓여 있었다. 전후라는 공간의 시대 의장을 벗고 나서도, 그 단일화된 폐쇄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된 체제이념은 당분간 불변이었다. 4·19로 빚어진 잠깐 동안의 이데올로기 해방 국면을 빼면, 녹색군부의 세월 동안 누구도 그렇게 만만히 체제에 도전할 수 없었다. 휴머니즘의 누추하고 범박한 이름의 옷이 오랜 기간 이 땅의 문학적 패션으로 군림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지평이 보일락말락하게 열리기 시작하던 60년대의 기간을 걸쳐서 이 패션의 이름을 퇴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단순히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할 때, 그 속에서 경험이 풍부하거나, 혹은 인간성이 풍부한 면모의 작가에 의해서 소설의 주도 국면이 이룩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의 자리에서 진술될 가치가 있는 것은 극적인 싸움의 기록이거나, 아니면 인간성의 재생의욕이면 족한 것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휴머니즘, 특히 행동적 휴머니즘의 이름을 걸고 치장된 전후문학의 한 세계를 지금 우리는 본다. 거친 세월의 침식과 함께 이 이름의 의장 또한 낡은 것이 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파괴와 살육의 경험 현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이 역사 속에 머리를 디밀기 시작하면서, 좁은 휴머니즘의 감수성이란 이미 퇴색된 것이 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근대화 속도의 빠른 전개와 함께, 60년대, 70년대, 후속 세대의 빠른 등장은 여러 지점에서 세대간 감수성의 분열을 야기시켜 조만간 전후적 감수성의 퇴조라는 현실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60년대 말 이후 점차 이 세대의 문화적 주체성이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한결같이 주춤거리거나, 어쩔 수 없이 보수의 자리에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은 역사의 피할 수 없는 운명법칙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 세대의 사회적 위상은 이미 중진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었거니와,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나 이 세대의 진보적 몫이 여전히 시효를 다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세례를 입은 최초의 세대였던만치 적어도 정치적 독재에의 항거 몫이 중요하게 남아 있었고, 일인 독재가 지속되는 한 그것은 그러하였다. 한편으로 개발 독재의 과실에 편승하면서 내부적으로 거기에 저항하는, 비판적 자유주의의 세력이 여기에 마련되고 있었던 셈인데, 70년대의 종막과 함께 이 상황 역시 변전하였다. 식민지 세대가 완전 퇴조하게 되면서 전후세대는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최후 보루세력으로 남게 되었거니와, 70년대 이후 급속하게 전개된 산업화의 속도감각은 이 보수화의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하였다. 이데올로기의 개방 속도를 의미하게 마련인 이 산업화의 속도감각에서 그들은 일종의 위기의식조차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개방현실은 궁극적으로 전쟁에의 기억을 무화시켰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냉전이념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산업화의 추세 속에 이미 냉전체제의 붕괴 메커니즘이 깃들여 있었음을 이미 뜻하거니와,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선우휘의 시대 안에 이러한 역사적 변전 운명이 고스란히 암시되고 있었다. 냉전체제의 붕괴라는 그 끝을 보지는 못하고 그는 타계하였지만, 그가 오늘의 현실을 목도하였다면 어떻게 반응하였을지 궁금하다. 냉전시대의 역사감각에 그만큼 충실한 작가도 드물었으며, 지나간 역사에 대한 탐색에 대한 자세로 그를 접근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는 이처럼 변전하며, 그 속에서 삶과 문학의 운명 역시 변전한다. 한때의 전위가 역사 속에서 보수로 낙오하는 일은 역사 속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선우휘의 경우, 그가 5공의 정치적 혹한기에 한 신문사를 대표하는 논객의 위치에서 어떤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수행하였던가를 우리 모두는 잘 안다. 오늘날 젊은 세대 일반의 그에 대한 폄하 분위기는 이와 관계 있다. 선명한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문학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문학사적 부침의 운명 역시 불가피한 것인지 모른다. 문학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멀찍이 떨어져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이 현상 자체는 당연한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어떤 탈이데올로기적 문학경향이 대두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또 다른 성격의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관여되어 있음을 혹자는 주장한다. 문학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배제, 추방이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선우휘 문학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어려운 것은 요컨대 이 문제와 관련된다. 왜 한때 행동주의 문학의 기수로까지 추앙되었던 사람의 문학이 이제 와서 역사의 왜곡이나 되는 것처럼 백안시되어야 하는가. 가치중립적 비평태도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변전의 운명이 만약 역사의 불가피한 법칙이라면, 변전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역사주의의 올바른 태도일 수 있다. 말년의 행적이 어떻다 해서 초년의 행적까지 소거시킬 수 없다는 것은 엄정한 사초들의 태도였다. 모든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만 재단하려 들 때, 역사 자체가 사라지거나, 비쩍 마른 빈곤의 내용만이 남게 된다는 것은 역사적 서술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자주 확인하는 바이다. 말년의 헤겔이 어쨌다 해서 죽은 개 취급을 하지 말 것을 권고한 것은 마르크스였으며. 행동주의 작가 앙드레 말로가 말년에 드골 정권의 문화장관을 지냈다해서 말로 문학이 없어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 위에 있다. 세계관은 반동적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리얼리즘의 승리를 구가했다고 발자크 문학을 높이 평가했던 것은 엥겔스의 변증법적 시각이었으며, 문학사에 있어서 세계관과 작품으로서 성과 사이의 불일치 현상은 우리가 자주 보는 바이다. 이데올로기만이 문학의 전부라고 보는 것은 문학을 보는 좁은 태도이며, 역사 속에서의 모든 유물은 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전후 문학사 속에서 선우휘의 위치 또한 그렇게 볼 수는 없을까. 당대의 지평 안에서 선우휘 문학이 수행했던 문학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평가하며, 그 영향 관계를 통해서 문학사의 전체적인 의미망을 조감해 보는 것은 필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행동주의적 체질이 유난히도 약한 이 나라 풍토에서 그 한 사례의 검증은 이 나라 문학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문학 이전에 그 인간의, 삶의 행적을 점검해 보려는 태도도 이와 관계 있다. 행동주의 문학이란 다름아닌 문학에 앞서서 삶을 전제하는, 실천적 문학태도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한 우익적 이데올로기의 생애라 해도 그 전형성이 우리를 흥미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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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에 의하면 1922년 평북 정주 태생인 선우휘가 경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사회경력을 출발시킨 자리는 일제말기 교원의 자리였다고 한다. 사범학교가 당시 가난한 수재들이 모인 관급학교로서, 교원양성의 설립목표를 가진 학교였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관급교원의 자리란 체제보수의 기능과 뗄 수 없는 자리였을 것인데, 북녘 오지의 마을에서 보통학교 훈도 노릇에 머물렀던 그는 해방과 함께 바로 월남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의 계층의식의 바로미터가 되는 서북출신 실향민의 처지가 이로써 마련되었으며. 이후 그는 곧 기자생활에 뛰어들게 된다. 해방 정국의 혼란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취재하는 사회부 초년기자가 그의 직분이었던 셈이다. 그의 생애의 업이 된 기자 감각이 이에서 마련되었거니와. 그렇지만 어찌 된 탓인지, 기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그는 사직서를 내던지고 다시 전직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설로는 이 무렵 미국유학의 길을 꿈꾸었던 참이라고 하는데, 여의치 못해 주저앉게 된 그는 일선학교 교사로 몸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한 획기적 전환점이 마련된다.
6·25를 앞둔 시점에서 어떤 혼란의 현실이 벌어졌던가를 우리 모두는 알거니와, 5·10선거에서 8·15 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내전적 현실 전개과정에서 그는 4·3사건과 그에 이어지는 여순사건 등을 목도하고, 군인의 길을 자원한다. 이 시절의 심경을 작가는 작품 「오리와 계급장」(《지성》,1958.秋)에 간략히 피력하고 있거니와, 그처럼 피나는 내전의 계절에 앉아 죽거나 전장에 나가 싸워 죽거나 매일반이라는 심정에서 일종의 도피행각을 벌였던 것이라고 스스로는 말하고 있다. 정훈장교를 지원하게 된 그는 6·25 중간 잠시 특수부대 요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고 하나, 대개의 군생활을 정훈 병과 주변에서 맴돌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면모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정훈 병과란 곧 병영내에서 이데올로기적 사무를 관장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가 문단에 나온 것 역시 이 정훈관으로서의 현역복무 시절이었는데, 군인-작가로서의 이 시절 선우휘의 면모는 우리 문학사로서도 유니크한 삽화적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직업군인이면서 작가인 최초의 선례가 이에서 마련되었기 때문이다.--이후 최인훈이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1957년 대령으로 예편 후, 그는 다시 신문사에 몸담아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등의 직책을 전전하며, 전후 세대의 대표작가이면서 동시에 한국 언론계의 거목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의 후반기 생을 장식한 작가--언론인으로서의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자로서의 정상적인 궤도를 밟지 않았음에도 그가 언론인으로서 빠른 성장가도를 달렸다는 점만은 분명한데, 특별히 3공화국의 민정이양 초기에 그는 편집국장 직위에 있으면서 일종의 필화사건을 겪어 구속되는 화를 입게 된다. 이 사건의 여파가 그의 작가생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런 풍파를 겪은 뒤에도 다시 언론계의 정상에 복귀한 그는 70년대에 주로 주필과 논설고문의 위치에서 신문사의 논조를 결정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작품활동이 뜸해짐과 함께 <유신> 치하에서 어려운 논설가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갔던 그는 1973년에 다시 한 번 필화의 화를 입게 된다. 논설로서 한 정치적 사건에 관여한 탓이었다. 이러한 역정은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충실도를 반증해 주는 자취들이라 할 것이다. 그가 다시 작가로서의 재충전을 도모하게 되는 시기는 7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서의 일인데, 그의 최대 장편이면서 대표작인 「노다지」(《주간조선》,1979.2∼1981.8)가 바로 이 시기의 정점에 씌어졌던 것이며, 1986년 타계하기까지도 그는 한국의 대표적 보수언론인으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고 있었다. 5공화국 시절 매주 고정 칼럼을 통하여 영향력 있는 필봉을 휘둘렀던 것인데, 오늘날 언론인으로서 그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바로 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문필 생활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될 정도로 한때 험악한 사회적 물의를 겪기도 했던 그는 그 신념인의 모습 그대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죽기까지 필봉을 놓지 않았으므로 그는 참으로 엄청난 양의 논설을 개진한 셈이며, 작품을 통한 문학적 집필량 역시 녹록치 않다.
30여 년 작가생활 동안 장편 10편, 중편 7편, 단편 64편 등 총 81편의 작품 기록을 남겨놓음으로써 어느 전업작가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문필 총량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로나, 언론인으로나 어느 한편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그의 복합적 면모가 여기에 있는 것인데, 삶과 글쓰기를 등위화시켰던 바르트다운, <문사>의 개념에 흡사한 면모가 그 아니었던가 볼 수 있다.
굳이 구분한다면 작가와 논객, 작가와 칼럼니스트의 입장 중 그는 어느 한쪽을 더 선호하였던 것일까. <2∼3년 먹을 것을 대주는 독지가>만 나타난다면 편집국장직을 포기하고 작가 노릇에 충실하리라는 엄살을 그가 한 때 내비친 적이 있다. 하지만, 사회적 반향이 즉각적인 대신문사의 논객 위치와 아무런 제도적 장치의 배경이 없는 작가의 위치를 쉽게 바꿀 수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그로 하여금 소설가의 위치 또한 쉽게 버릴 수 없도록 하였을 것임은 당연한데, 그런 만큼 작가와 논객의 위치를 겸임하는 자리에서 소설적 언어와 논설 언어의 상호 수렴 현상이 빚어졌던 것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문필의 한 특징이 여기에 있는 셈인데, 행동주의 작가로 시발했던 작가의 원질적 요소의 측면이 이를 가능케 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행동주의 문학 강령이란 문학적 실천과 함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문학적 실천주의의 또 다른 윤리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행동주의 문학이 겨우 기자 직업으로 시종하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은 우리 문학의 폭과 깊이를 시사하는 한 바로미터가 아닐 수 없거니와, 이 한국적 협소함의 범위를 감안하면서, 한국 전후문학의 바운더리를 이해하는 데는 선우휘 문학의 구체적 자장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장의 원점으로서 「불꽃」(《문학예술》, 1957.7)에 대한 검토가 또한 필수적인 것인데, 세월이 지나가도 선우휘 문학의 원점이자, 전후문학의 한 단서로서 「불꽃」의 자리는 여전히 불변이기 때문이다. 한국 행동주의 문학의 반경을 그리는 자리에서라도 이것이 일으킨 파문과 반향의 자리를 우리의 문학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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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가 드물게 직업군인 이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불꽃」 등장의 문학사적 배경 이해를 위해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되어 좋겠다. 전후 행동주의 문학의 강렬함이 대망되던 시절에 육군 대령의 계급장처럼 확실한 신분은 달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2회 동인문학상의 수상식장의 육군 정복의 복장을 하고 나타난 그를 두고 당대 문인들은 이채로운 기억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거니와, 군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당시 대부분의 문인들에게 있어서 이 점은 충분히 콤플렉스를 자극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작품보다 앞서 행동주의 문학의 뉘앙스란 곧 전쟁문학의 범위를 넘는 어떤 것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초기작들이 어떤 식으로든 강한 행동주의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데뷔작 「성(聲)」(《신세계》, 1955)-데뷔작의 명칭이 「귀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표 당시 제목은 「성(聲)」이었다.-을 차치하고 보면, 초기작들인 「One Way」(《신태양》, 1956), 「테러리스트」(《사상계》, 1956.12), 「불꽃」(《문학예술》, 1957.7) 등이 모두 행동주의적 모티프에 기반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비록 휴전상태에 접어든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하더라도 이 시기까지 여전히 전쟁의 포연은 가시지 않고 있던 때다. 따라서 문단인들이 비록 우리 문학사에는 낯선 감각이긴 하나, 어떤 행동적 문학의 절실한 개화를 예기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극적 체험치고 전쟁 이상 가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전쟁의 경험 세대라면 생득적으로 감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문학상의 수상소감에서 밝힌 선우휘의 다음 언명은 그래서 문학적 겸손이자, 동시에 실천적 자랑스러움의 내밀한 고백일 수 있었다. 아마추어 작가의 입장을 내세운 것이긴 하나, 아마추어리즘의 표백이야말로 바로 「불꽃」 산출의 문학사적 필연성을 역설적으로 피력한 바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라는 것이 오랫동안 머리를 괴롭혀서 그것을 극복하기에 무엇을 창조해 본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이 사회에 참가하여야 하는가의 당면한 과제를 놓고 생각할 때 공산주의의 문제는 몹시 나를 괴롭혔다.
그후 인천중학교에서 교원을 지내던 나는 여순반란사건에 충격을 느끼고 육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6·25를 통한 전쟁의 경험에서 가끔 나는 무엇인가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문학과 군무는 병행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작품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불꽃」은 나 자신을 포함한 같은 연대의 개아와 역사의식의 문제를 그려보고자 한 것(……)
--(《사상계》, 1957.9)
이처럼 작가 자신을 포함한 같은 연대의 개아와 역사의식의 문제를 그려보고자 한 것이라는 점에서 「불꽃」은 현저히 세대론적이었다. 이처럼 세대론적인 것이었기에 그것은 필연적이며 동시에 우발적이었는데, 우발적이라 함은 전후세대가 아직 역사적 현실성을 띠며 나타나기 이전 단계에 그것은 놓여 있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세대 등장의 문화사적 조건은 무르익어 있었던 것인데, 「불꽃」등장에 대한 반향의 놀라움과 충격 속에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이를 뜻하고 있다. 동인문학상 발표 다음 호의 독자 투고란에서 우리는 <불꽃은 위대한 작품>이라는 투의 벅찬 감개가 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거니와, 그것이 당대 독자의 실감이었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심사위원들의 반응 역시 대개 이런 감개무량함의 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 대한 문인들의 반향이 얼마나 압권의 것이었던지는, 다른 후보추천작들이 겨우 1표씩을 얻고 있음에 반하여 이 작품만은 추천위원 절대 다수 지지를 뜻하는 7표를 얻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팔봉, 백철, 박영준, 손우성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지지 분위기는 더욱 심하였다. 그 중 가장 열광적이었다고 할 만한 박영준을 살피면, 해방 이후 최대걸작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는 발언에 이르며, 행동적 휴머니즘의 지지자들이었던 백철, 손우성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백철은 나중 동인문학상 회고의 자리에서 이 작품이 일으킨 반향의 측면을 오히려 형식적인 각도에서 <중편 소설 붐> 현상으로 설명하고도 있거니와(『동인문학사의 전통』, 박영사, 박영문고 188), 이처럼 넌지시 건네는 설명법이란 그다운 문학사적 설명법이 아닐 수 없다. 심하게 좌익 콤플렉스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카프 전력의 문인들 의식을 감안하고라도 「불꽃」에 대한 이와 같은 범문단적 지지 분위기는 특기할 만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60년대 김승옥이 일으킨 <감수성의 혁명> 열기에 대한 지지 분위기와 이것이 비견하다고나 할까. 오늘날의 감각으로 본다면 한갓 중편에도 미달하는, 거친 하드 보일드의 행동적 문체에 대해서 이처럼 범문단적 우호 분위기가 가해진 이유란 무엇일까. 이를 재는 일은 「불꽃」과 현재적 감수성 사이의 거리를 재는 일에 다름아니거니와, 이를 자세히 검증하기 위해서는 전후적 감수성에 대한 사심없는 이해, 관찰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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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눈으로 보아 전후문단이 대단치 않게 보이는 것은 물론 그럴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그 동안 40년 세월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유하게 감수성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그럴 수 있다. 전후적 감수성으로부터의 그 동안 이탈의 세월을 그것은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꽃」을 놓고 볼 때 이 작품이 더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구한말 세대, 3.1운동 세대, 6.25 세대의 3대가 역사가 중첩되어 있으며, 그 시간감각은 오늘의 감각으로 볼 때 지나간 먼 역사의 감각으로 퇴색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퇴색된 시간의 감각 속에 역사의 진실이 있으며, 이제 묻혀버린 시간 속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당대인들의 역사감각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불꽃」이 당시 평자들로부터 각별한 주목을 얻게 된 요인에는 중편 분량의 확장된 작품공간 안에서 우리 근대사의 역사의식을 깨우친 점이 몰각될 수 없거니와, 지금으로 봐선 소략하기 짝없는 그 역사의식의 감각이 당시에 그만큼 신선하게 보였다는 것은 그 시절 역사감각의 불모 상태를 의미하는 바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확장된 역사감각으로 당대의 시선을 막바로 잰다는 것은 바로 역사감각 자체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전후적인 실존감각만을 두고 볼 때도 그렇다. 전쟁의 포성은 사라졌지만, 어떻게든 문학을 통해서나마 생과 사의 감각을 되살려야 한다는 게 당대 전후문학인들의 문학적 강박관념이었다. 이 강박관념은 그러나 대단히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해방과 함께, 분단과 함께 축소된 문학사의 지평, 문단적 환경 속에서 그들은 작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제 말기까지 우리 문학사를 수놓았던 장편소설사의 감각은 사라지고, 손바닥만한 단편의 양식 한계내에서 그들은 작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제 말기 세대를 대표하는 저 김동리, 황순원류의 토속적, 혹은 서정적, 혹은 사변적 인물들의 형상화 감각이 그들을 지배하는 문학적 원류였다. 변변한 문예답지 하나 제대로 발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전선문학>류의 잡지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이데올로기 색채가 강한 <자유세계>류의 잡지에서 새로운 문학적 텃밭을 일구어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전후 세대의 기수로 등장한 한 소장 비평가가 「우리는 화전민이다!」(이어령)라고 외친 것은 과연 과장이 아니었는데, 이같은 전후의 불모상황을 딛고 간신히 문예잡지의 재건시대를 이룩한 것이 50년대 중반기이다. 《사상계》사가 <동인문학상>을 창설한 것이 또한 1956년도였던 것인데, 1회 수상작으로 결정된 김성한의 「바비도」를 보면 지금으로서는 금석지감의 느낌을 주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요컨대 이러한 시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 배경하에서 행동주의 문학에 대한 기대 지평만은 조금 뚜렷하였던 편인데, 그 염원의 기대 지평에 불을 당긴 작품이 「불꽃」이었던 셈이며. 바야흐로 무엇인지 모르는 커다란 실감의 실체에 그들은 압도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꽃」등장의 문학사적 필연성, 그리고 우발성이란 이러한 배경 상황을 두고 말함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불꽃」으로 예광탄을 쏘아올린 선우휘 문학 역시 더 이상의 진경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음을 우리는 아쉬운 대목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 역시 예광탄으로만 수놓아진 문학을 연출했을 뿐이고, 말년에 불쑥 「노다지」의 거편을 이룩하기까지 그의 문학은 계속 예고편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을 우선 전반적인 한계의 대목으로 지적으로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여러 편의 짭잘한 중·단편의 세계를 쉬지 않고 발표해 나간 형편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판단 내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물론 당대의 문단 형편과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과도 관련되는 바이지만, 초기에 자신의 문학을 결정적으로 비약시킬 만한 작품을 「불꽃」이후 그는 더 이상 내놓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기실 「불꽃」자체에서부터 내포된 한계의 성격이 크다는 것으로 여러 평자들의 의견은 합치되며, 「불꽃」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한계로서보다 행동주의적 한계로서 그 점이 드러난다고 우리는 볼 수 있다. 「불꽃」의 주인공 <고현> 자체가 벌써 웅혼한 행동적 영혼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의 체질적인 반행동적 한계가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이 문학사적 한계의 지점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선우휘 문학에 대한 기대가 결국은 행동주의 문학에 대한 기대로 수렴되는 것이었다면, 이 기대 지평을 멀찍이 넘어서 활짝 달려나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휴머니즘의 논변에 매달린 이유를 그 기본적인 이유로 지적할 수 있다. 1부와 2부를 나눠 놓고 볼 때, 1부에 비교하여 2부가 상대적으로 소략한 것임은 당시의 심사과정에서도 지적된 바이거니와, 1부가 주인공 고현의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한 방관주의자의 논변 개진에 주력한 양상이라면, 전체주의적 폭력의 비인간화된 현실에 대한 행동적 항거의 부분은 극히 단편적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행동의 불가피성에 대한 설유에 해당하는 양상이지, 작품 전체로 보아서는 오히려 방관자의 사상과 논리가 더 많이 피력되어 있는 양상인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논변적 양상은 그것이 전체주의적 사회 통제 이념에 대항하여 개인적 휴머니즘의 논리를 구축한 성격의 것이지 행동주의 자체를 선양한 문학적 성격의 것일 수 없음을 뜻하고 있다. 작가가 동인문학상의 수상 소감에서 밝힌 바 그대로 그의 문학적 관심은 공산주의와의 싸움, 즉 반공주의의 논리 구축에 주력된 것이지, 행동주의적 세계관과 문학적 실천에 순수한 관심을 둔 것일 수 없음을 그것은 뜻하는 것이다. 선우휘 초기 단편에 속하는 「성(귀신)」이나, 「One Way」, 「테러리스트」등 또한 대개 이런 성격에 머무는 것이지, 행동주의의 강렬한, 순수한 이념에 포섭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의 열기는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에 대한 회고의 열기이며, 지금 불우한 처지에 대한 인간적 연민의 열기이지 행동가적 열정의 모습이 아니다. 가령 가장 행동적이라 할 수 있는 「테러리스트」에서 이 점을 살펴볼 수 있는데, 술집 안에서 시비가 붙어 갑자기 뛰쳐나간 <길주>가 「주먹에 간장을 쓱 바르고 둘을 건너다보며 싱긋 웃」는 것으로 가장 인상적인 행동가적 면모가 부각되어 있지만, 이러한 장면이란 전형적인 활극을 통해서 인상깊게 엿볼 수 있는 것이지, 행동주의적 문학 양태라 하기는 어렵다. 작품 전편이 일종의 회고적 문투로 구성되어 있음에서 이 작품의 기본성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불꽃」이후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나마 있던 초기의 행동적 열정이 사라지고, 휴머니즘적인 페이소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품에 가까운 초기 단편들의 세계가 대개 그렇다. 발표순으로 다섯 번째가 되는 「똥개」(《사상계》,1957.8)는 그 윤곽이 실향민의 애환을 그린 성격으로 됨으로 말미암아 어느덧 감상적 색조조차 드러내는 양상을 보이며, 여섯 번째 「거울」(《문학예술》1957.9)에 가서는 바야흐로 행동을 취해야 할 시점에 이르러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는, 그럼으로써 선우휘적 행동적 휴머니즘의 면모가 실상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한 이발사(면도사)가 먼 옛적 일제 시대에 자기를 고문한 바 있는 형사 전력의 손님을 맞아 복수 충동과 자기 연민의 감상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얘기를 그린 작품인데, 결국 어떤 이유로든 행동의 요청에 직면하여 자기 연민의 휴머니즘적 감상에 빠지게 되는 것을 합리화하는 얘기가 이것이다. 행동주의보다는 휴머니즘 쪽에 선우휘다운 본질이 놓여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징후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초기 선우휘 문학의 한 대표작쯤으로 여겨지는 일곱 번째 작품 「화재(火災)」(사상계, 1958.1)를 보아서도 선우휘 문학의 행동적 한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마치 정의의 사도가 저지른 어떤 불가피한 범죄의 현장을 추적해가는 것처럼 진격해 나가던 이 소설은 행동주의로서는 참으로 어설픈 결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자기 연민을 벗지 못하는 어느 회의주의자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의 종국은 귀착되고 말기 때문이다. 일제 말과 해방 그리고 전쟁의 혼란을 겪으면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아버지의 현실에 맞서서 아직 병들지 않은 아들 세대의 연결성을 그리고자 한 것에 이 작품의 주지가 있는 셈인데,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아버지 세대를 고발하고자 일어선 아들 세대의 행동이라는 것이 겨우 의지적 방화도 못 되고, 실화 혹은 교묘한 방화 방조에 그친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작품의 대체적인 이야기이다. 왜 이처럼 기껏 행동적 기치를 표방해 놓고도 다만 지불 불능의 상태로서 그의 작품 행동은 끝날 수밖에 없었을까. 내면적 지식인의 심리주의와 추리소설적 기법을 실험하는 의미로서 이 작품이 제작되었다고 보기에는 그 행동적 지불 불능의 상태가 너무 허망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동주의가 아니라 (행동적) 휴머니즘의 범주의 맴도는 그의 작품 세계의 특질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쳤던 「오리와 계급장」, 그리고 「단독 강화」(《신태양》, 1959)를 통해서 우리는 선우휘의 초기적 열정의 면모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공산주의와의 싸움의 기록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인간다움의 앙양이다. 자전적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 초점 화자가 등장하고 있고, 또 그 주변의 인물들 역시 과거 화려한 행동적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리와 계급장」은 상대적으로 행동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 인물들의 행동적 전력에 대한 후일담 역시 기본적으로는 회고적이며, 따라서 그 인물들의 오늘의 형세는 모두가 날개 꺾인 인물들로 되어 있다. 행동적이라기보다는 휴머니즘의 반경 안에서 이 작품을 섭취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국방군과 인민군, 두 우연한 동반자의 동시 죽음으로 작품을 귀결시키는 소품 「단독 강화」가 훨씬 행동적이라 해도 좋으리라. 다만 그것이 소품이기 때문에 극적인 드라마의 성격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며, 비극적이긴 하되 동포애의 주체로서 인민군 병사가 너무 어린 나이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무슨 이데올로기적인 논리가 침입할 틈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렇긴 하되 동족상잔의 분단 비극을 그다운 동굴의 무대배경하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으로, 그리고 본능적 인간의 행동적 모습이 가차없이 그려지고 있다는 점으로 이 작품은 선우휘의 작품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기억될 만하다. 전장의 휴머니티를 다룬 작품으로 우리의 전후문학사는 이만한 작품도 흔하게 갖지 못한 형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편 소품이 아닌 중편의 작품들을 통한 양상은 어떠한가. 그의 초기 중편들로서는 가장 이른 「깃발 없는 기수」(《새벽》, 1959.12). 와 함께 「추억의 피날레」(《신세계》, 1961.12),「싸릿골의 신화」가 (《신세계》, 1962.8∼9) 등이 꼽힐 수 있는데, 이 중 그의 행동적 특성을 반영하는 작품으로는 「깃발없는 기수」가 많이 거론된다. 이에 맞서는 것으로 그다운 휴머니즘이 잘 부각된 작품으로는 「싸릿골의 신화」가 주목될 만한데. 간첩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추억의 피날레」는 아무래도 어색한 느낌을 지울 없기 때문이다. 「깃발 없는 기수」와 「싸릿골의 신화」로서 그의 초기 중편 세계가 대별될 수 있는 이유이다.
「깃발 없는 기수」가 그의 초기 대표작쯤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행동의 시대라 할 수 있은 해방기를 무대로 선택 앞에 직면한 젊은이들의 세계를 다룬 작품이 이 소설이며, 그런 만큼 리얼리즘적인 품격과 행동적 풍모를 담고 있는 작품이 이 작품이다. 주인공 격이며, 초점 화자인 <윤>은 신문기자이며. 그 옆에 회의주의자인 <형윤>이 놓여 있고, 그 왼편에 좌익인 <순익>이 놓여 있는 형국이다. 그밖에도 그 시대에 존재했을 법한 다수의 인물유형이 존재하며, 해방 공간의 처연한 풍경이 선하게 잡힐 정도로 그것은 다양한 현실묘사의 장면들을 담고 있음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대해 선뜻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극을 이끌어 가는 주동적 인물인 <윤>의 행동거지가 석연치 않은 데서 극적 추진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행동적인 열정에 들떠 있으며, 좌익과 미국 세력에 대해서 생리적인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도 좋으며, 또 남자로서의 육적인 감각을 발산하고 있는 것도 좋지만, 결말을 향해 이끌고 나아가는 주인공의 행동목표가 불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음에서 극의 추진력이 반감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선우휘로서는 드물게 행동주의적 윤리강령을 문학적으로 실천해 본 작품이라 하겠으나, 좌익계 지도자와 그 정부의 불륜의 현장을 덮친다는 것으로 그의 최종목표가 설정되어 있음은 아무래도 객관적인 설득력이 약하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이 작품이 서둘러 결말을 짓고 있다는 느낌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의 인물이 행동적 주인공으로는 박약한 느낌을 주거니와, 주인공의 행동계기를 설명하는 이유로서 어린 인물들을 끌어들여 오히려 감상적 색조를 드리우고 있는 점도 이 작품의 취약한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싸릿골의 신화」는 행동적이라기보다 극히 휴머니스틱한 모티프에 기조하여 씌어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스토리 골격 자체는 간단하다. 6.25 초기 인민군의 진공으로 낙오하게 된 국방군 패잔병들이 산간오지에 남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애환을 겪는 얘기이다. 개연성의 측면을 배제해 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하나의 얘깃감이 되는 이 작품은 그러나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런 여러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간으로 폐쇄되고 있는 점, 거기에 여러 가지 인물유형의 성격들이 뛰놀고 있는 점 등으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흡사 카뮈의 「페스트」와 같은 작품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대체적인 방법적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 「깃발 없는 기수」가 말로의 소설풍을 닮았다고 한다면, 「싸릿골의 신화」가 현저하게 실존주의적 풍모를 띠고 있는 것과 상관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세계에 밀어닥친 전화의 체험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 가치와도 전혀 무관할 수 없고, 무엇보다 백의민족의 전통적 가치관을 잘 투영하고 있다는 점으로 드문 소설적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깃발 없는 기수」와 이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 문제는 요컨대 독자로서의 취향문제를 가르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선우휘 작품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문제임이 살펴질 수 있다. 결국 행동주의와 휴머니즘 사이에서 진동했던 것이 선우휘 초기의 작품양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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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행동주의와 휴머니즘 사이에서 진동하던 선우휘 문학은 6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지적된다(배경열, 「선우휘 소설 연구」, 서울대 대학원 1992). 크게 보면 이 변화는 결국 한국 전후문학의 전후성 탈각 과정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선우휘 개인사로서는 단지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언론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지점이 이 지점이며, 그 때문에 한때 옥고의 고초조차 치러야 했던 것이 작가의 개인사적 변화 계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기들로 말미암아 이제 그의 문학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행동적 열정을 잃어버리고 더욱 내면성의 강화 양상으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부터 70년대 초, 중반기 약 4∼5년간 작품활동의 중단 시기를 갖게 되는 시점까지 우리는 그의 문학의 2기를 설정할 수가 있으며, 이 시기 그의 대표작으로는 「십자가 없는 골고다」(《신동아》, 1965. 6), 「망향」(《신세계》, 1965.8), 「사도행전」(《신동아》, 1966.1∼6.미완), 「묵시」(《현대문학》, 1971.2)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문학세계 전반으로는 작가적 시야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주조의 측면에서는 대개 휴머니즘 독자의 기간, 더 자세히 규정하자면 내면적 휴머니즘의 특징적 기간으로 이 시기를 설명할 수 있겠다.
이 시기의 단초를 이루는 작품으로 「십자가 없는 골고다」가 우선 주목되는 것은 그 내면성의 특질 양상 때문이라 할 만하다. 여기의 주인공 K. 김은 작가의 실존적 행적을 대개 반영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될 만하다. 그 인물이 미쳐서 정신 병원에서 감금되어 있다는 게 이 작품의 발단 동기인데, 그 계기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토설한 비분강개의 논설이 한 젊은이를 움직여 그를 죽음에까지 몰고 가게 되었다는 사건에서 연유하고 있다. 한 젊은이의 죽음이 결과된 이상 그 죽음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K. 김은 면할 길 없다. 주인공의 내면적 번민의 이유는 여기에서 파생한다. 십자가를 허락치 않는 교묘한 권력의 책동이 한 죽음의 사건까지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회인식은 그 번민의 내적 이유를 강화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른바 비극적 교착상태가 그의 미쳐감의 내적 구조를 형성하는 셈인데, 어떤 해결도 있을 수 없는 도저한 자아 분열의 상태에서 작품이 종결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작품은 전형적인 내면 비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시기 작가의 내면 풍경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능히 엿보게 하는 작품 사실이면서, 권력적 현실에 대한 회의와 환멸의 눈길이 이런 내면적 경향의 소설작품을 낳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선우휘 문학의 초기와 중기를 구분하는 단초로서 이 작품이 주목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내면화의 경향이 실향의식과 어울려 독특한 귀향의지의 소설을 파생시킨 것으로 이 시기 주목될 만한 작품이 또한 「망향」이다. 실향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친구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에서 고향 산천의 풍경, 나아가 그 집안의 쥐 소리까지가 편집적인 망향의지와 모티프들로 설정되어 있음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넘어 끔찍함까지 안겨줄 정도이다. 「똥개」「오리와 계급장」 등으로 이어진 그의 독특한 망향 주지의 소설 세계가 이로써 한 정점을 이룩한 셈이거니와. 이 망향 의지가 유년시절에 대한 회고의 의지로 환치되어 작가 자신의 실존적 편력을 그대로 한 편의 장편소설화해 보려는 노력으로써 발동된 작품이 그의 중기의 역작 「사도행전」이랄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러나 불행히도 해방 후로 넘어오는 단계에서 집필 중단되어 미완성 교향곡의 상태를 빚게 되고 말았거니와 이런 자전의 의욕 역시 이 시기 그의 문학의 전반적인 내면화 경향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문학 세계의 특질 중 하나로 기독교적 모티프를 자주 끌어온다는 점이 이 문맥에서 유의미하게 지적될 만하거니와, 종교의 세계에 깊이 침잠된 관심 자체가 벌써 내면화의 자세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것임은 말할 나위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행동주의의 문학적 자세가 역전되었을 때 그의 소설은 강한 내면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70년대 초반 마침내 문학적 침묵기로 들어서는 마지막 굴절의 지대에서 빚어낸 작품 「묵시」는 그 내면화 과정의 한 정점을 표상하고 있다. 한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역할이 있었던만치 그에게도 작가의 역사적 처신에 관한 문제가 자연 의식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역사 의식적 바탕 위에서 행동가적 처신과 내면적 인간의 존재방식 사이에서 깊이 고뇌한 흔적이 이 작품에는 배어 있다. 춘원 이광수의 일제 말 행적이 그 친구 되는 시인 <서낭>이라는 사람의 벙어리 행각에 비교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품의 초점이 <서낭>이라는 인물에 맞춰지고 있음은 그의 이후의 문학적 침묵과 관련하여 여러 모로 음미될 만하다. 작품이 씌어진 당시 시점은 바야흐로 유신으로 나아가는 길목의 심난한 정치적 계절이었으니, 정치환경을 지키는 언론인의 신분으로서나 한 작가의 위치로서나 말꾼의 처지가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스산한 시국의 계절에 차라리 벙어리 흉내를 내고 살았던 일제 말 식의 한 무명의 우국시인을 동경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말꾼으로서의 처지에 깊은 연민조차 느끼게 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 선우휘로서는 그야말로 <묵시>의 비극적 세계관에 매료되었고,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할 마음자세까지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니, 이후의 문학적 침묵이 바로 그 점을 증거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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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이후 70년대 강권 정치 시대의 본격 개막과 함께. 5년 이상 완강히 침묵을 지켜나가던 그의 비언표적 문학활동은 70년대의 중반을 넘어서는 1976년경에 이르러서야 띄엄띄엄 겨우 언어 회복의 조짐을 드러낸다. 70년대 전기간에 걸쳐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위치는 논설주필 자리에 고정되었던 것인데, 그 정치적 삭풍의 세월에 시국에 대응하는 일만으로도 그의 필봉 잡기는 벅찬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막중한 책임의 자리에서 놓여나면서 그는 이제 그의 필생의 역작 「노다지」에 달려들게 되는데, 이제 3기, 그러니까 70년대 후반 문단 재복귀 이래 타계하기까지 그의 생애 말기의 과정은 문학적으로 일종의 결산의 시기라 해도 좋겠다. 말하자면 그 동안 쓰고 싶었던 글을 마음껏 쓰며 세월을 갈무리하던 시절이 이때가 아니었던가 볼 수 있는데, 이 시기 그의 음미할 만한 중·단편으로는 중편 「쓸쓸한 사람」(《문예중앙》, 1977.겨울)과 「희극배우」(《한국문학》, 1978)가 꼽힐 수 있다. 그의 생애의 주제라 할 만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전자인 셈이며. 재담가로서 그의 소탈한 면모가 잘 드러난 작품이 후자이다. 작가의 휴머니스틱한 면모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인상적이다.
「쓸쓸한 사람」이 그의 생애의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작품 속에 신념인의 사회적 변전 운명에 대한 숙고가 인간적 연민과 함께 잘 그려져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신념인의 모습이란 한 종교적 인간의 강한 행동적 면모에 다름아닌데, 교회가 처한 절체절명(絶體絶命 : 몸도 목숨도 다 되었다는 뜻으로, 어찌할 수 없는 궁박한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편집자註)의 위기 앞에서 스스로를 희생시킴으로써 위기를 구한 일제 말기 목회자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상은 그의 미완의 역작 「사도행전」에서도 뚜렷하게 음각된 바 있거니와, 일제 말기 신사참배의 강요에 맞서 싸우다가 교회의 파산 지경에까지 이르는 위기에 처해 스스로를 굴복자로 내세움으로써 교회를 구한 희생인의 면모로 묘사된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단독자의 결단 형태로 수행됨으로써 이후 목회자들의 오해와 박해에 직면, 오히려 교회인들로부터 추방되는 사회적 불운에 처하게 되는데, 기자의 입장에서 이 사회적 부조리의 운명을 추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자각의 내면 투사의 형식으로 말하면 곧 행동 지향성과 내면 지향성 사이의 이율배반적 길항 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존재탐구의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배반의 운명 형식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김은국의 「순교자」에 흡사히게 인간성의 깊은 존재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은 국면에 있어서 기자의 존재란 결국 외면적 행동과 내면적 비밀 사이의 경계영역을 밝히는 존재로서 드러나고 있어 한편 흥미로운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인간의 변전 운명을 추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선우휘다운 것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바로 그 전형성의 면모에서 선우희 생애의 주제를 간직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그것은 은밀히 그의 문학적 원점인 「불꽃」과 내통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기도 한다. 말하자면 내면적 인간에서 행동적 인간으로 탈각하여 나오는 인간성의 작품이 「불꽃」이라 하면, 그 반대로 가장 행동적 인간에서 내면적 인간으로 역진하게 된 한 인간성의 보편 회귀 과정을 다룬 작품이 이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의 인간이란 결국 강한 신념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견지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행동적 외화의 측면이 내면성으로 투사될 때, 신념인의 고독한 모습이란 곧 내면적 인간의 그것이 아닐 수 없고, 이런 신념과 행동, 행동과 내면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 관련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선우휘다운 경험적 사유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정리의 형식을 얻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기실 처음부터 선우휘 소설이 행동주의 문학의 깊은 자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고 대개 주춤거리다가 그 입구 주변을 맴도는 양상으로 그치곤 했던 것도 그 본래의 내면적 성향을 어쩌지 못하는 데서 온 이유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희극배우」는 이런 점에서 별다른 번민의 이유없이 작자의 소탈한 인간성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월남한 희극배우와 그의 대본을 써주며 살아온 죽마고우, 대본작가의 이인삼각 운명을 제목에 걸맞게 희극적인 톤으로 그린 작품이 이 소설인데,사회적인 자리를 떠나서 매우 해학적이었다고 하는 그의 인간성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인간성이 간단치 않은 면모였음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거니와. 이처럼 속도감 있는 대화 문체에 희극적인 톤을 얹는다는 것은 확실히 전후 작가로서 흔한 면모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과 애환의 삶에 대한 연민의 정서 등, 그다운 휴머니즘의 정취는 깊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와의 갈등이라는 그다운 세대적 주제가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반영되어 있는 것은 누구나 금방 느낄 수 있는 사실인데, 그렇긴 하나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이라는 맹목적 열정에만 사로잡히지 않은 넉넉한 인간성의 풍모를 또한 우리는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문학 전체를 <휴머니즘>이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 것도 요컨대는 이런 다양한 작품군의 존재 사실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이만한 작품들의 꾸러미를 하나의 책자로 묶어낼 수 있는 것만 해도 한 작가의 생애로서 그것은 실패하지 않은 것이란 인상을 던져줄 만하다.
이데올로기로서는 퇴색한 이름이라 해도 휴머니즘의 사상적 힘이 문학적으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어떤 것이라는 확인을 여기서 우리는 가질 법도 하다. 전후세대의 문학이 지나간 세대의 유적 같은 것만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실감을 안겨주었다면 그것은 세대간 교통의 공적으로서 새롭게 의미가 부여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작품들의 기저음을 통해서 전후세대는 또 전후세대로 자기 세대의 운명의식을 표출해 온 것이니, 문학이란 또 세대적 운명법칙을 벗어나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여기서 우리는 잘 확인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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