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출발점에 선 당신에게 / 본문 일부 및 해설 / 신영복
by 송화은율새 출발점에 선 당신에게 / 신영복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도리·들보·서까래·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어느 날 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이를테면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의 윤곽을 그렸습니다. 한자로 그것을 '탁(度)'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장에 갈 때는 깜박 잊고 탁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신발가게 앞에 와서야 탁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법 먼 길을 되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당신의 발로 신어 보면 될 일이 아니요?" 차치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던 그 노인이 발로 신어보고 신발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탁(度)'과 '족(足)'이 뒤바뀌어 있는 우리의 사고(思考)를 다시 한번 반성케 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략>
지은이 : 신영복
갈래 : 수필
성격 : 사색적, 교훈적, 유추적, 반성적, 주관적, 설득적
주제 :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구체적인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한 삶의 발견의 중요성
구성 : 사실 체험(목수가 집을 그리는 순서를 봄) - 유추(차치리를 떠올림) - 깨달음(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특징 : 문헌에 나오는 고사에 자신의 체험을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고 있고, 상반된 삶의 방식을 대조하고 있다.독자를 받는 사람으로 설정한 편지 형식의 글이며,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체험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반성하고 있다.
출전 : 나무야 나무야(1996)
망지도(忘持度) :
치수를 재고 그것을 잊고 왔다는 말로 자기의 발을 내밀었다면 쉽게 살 수 있었을 것을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를 비유함.
- 한비자 (고사) 정(鄭) 나라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신발을 사기 위해 먼저 자기 발의 크기를 재었다. 시장에 가서 그 치수표를 잊고 온 것을 알고 다시 먼저 잰 치수를 가지러 집으로 돌아왔다가 시장에 가니, 그 때는 시장이 파한 후였다.
노인이 그린 집의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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