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문답(山中問答) / 이백
by 송화은율산중문답(山中問答) / 이백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요점 정리
작자 : 이백
갈래 : 칠언 절구의 근체시
형식 : 칠언절구로 1.2.4구 마지막 글자 山(산), 閑(한), 間(간)은 운자(韻字)들이다.
성격 : 서정적
표현 : 이상적, 낭만적, 탈세속적, 은둔적
제재 : 산중생활, 산 속의 한가로운 삶
주제 : 자연 속에 묻혀서 사는 생활의 즐거움, 세속을 벗어난 자연 속의 한가로운 삶
의의 : 자연과 조화된 삶을 영위하면서 그 속에서 인생의 자유와 이상을 추구하는 동양적 인생관이 표현됨
구성 :
1행 [기] 삶의 모습에 대한 스스로의 확인
2행 [승] 진정한 자유와 평화 - 1, 2행은 산중 생활에 대한 문답
3행 [전] 이상 세계의 전개
4행 [결] 세속과의 완전한 결별 - 3, 4행은 탈속적 이상 세계에 대한 형상
출전 : 이태백 문집(李太白文集)
내용 연구
산중문답(山中問答) : 문답은 흔히 두 사람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생각되지만, 이 시에서는 자문자답으로 풀이하여 감상하면 시적인 정취가 더욱 깊어진다.
여(余 ) : '나'라는 말로 이 시는 흔히 문답의 형식으로 보기가 싶지만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것으로 의미를 파악하면 더욱 의미가 깊은 시가 된다.
하사(何事) : 무슨 일로? 무엇 때문에? 왜? 등등 이유를 나타내는 의문형이다.
서(棲) : 栖와 같은 글자로 깃들 서. 살 서. (예) 서식(棲息)하다.
벽산(碧山) : 푸른 산, 곧 조용한 산
묘연(杳然) : 아득히.
묘(杳) : 아득할 묘. 杳然은 아득하고 가물가물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서 지금도 흔히 쓰이는 단어이다. 然은 이와같이 형용사나 동사 뒤에 붙어서 그 모습을 형용하는 접미사로도 많이 쓰인다. (예) 결연(決然), 확연(確然), 은연중에(隱然中에), 공공연하게(公公然하게)
人間(인간) : 요즘에는 주로 "사람"이란 뜻으로만 쓰이지만, 한문에서는 "人生世間"의 뜻으로 "사람이 사는 세상"을 뜻하기도 한다. 즉 非人間은 지금 말로 "비인간적"이란 뜻이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란 뜻이다.
묻노니 : 정신적인 자유에서 나오는 스스로의 질문이다. 자신이 세속과 완전히 결별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 의사 소통의 수단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나타낸다. 1930년대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위의 시 구절 중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을 빌려 쓰고 있다. '왜 사냐건 / 웃지요.'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인데, 그 표현에는 전원에서 사는 일의 평화로움이 잘 나타나 있다.
복사꽃 : 선계(仙界)를 장식하는 꽃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동양의 관념적 선경(仙境)인 무릉도원을 암시한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 '桃花流水(도화유수)'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 도원(武陵桃源), 곧 선경(仙境)을 상징한다. 작자가 일생을 통해서 그리던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세계를 나타낸다. 복숭아꽃은 동양의 전통적인 선경(仙境)인 무릉 도원을 암시하는 소재이다.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 세속적 인간 세계를 초월한 이상(理想)세계(世界), 이백이 꿈꾸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암시한다. 즉, 이미 신선(神仙)이 된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별유천지(別有天地) : 또 다른 천지(우주, 세상)가 있다. '별천지'는 속된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좋은 세계, 別은 有를 수식하는 부사이고, 有+A= A가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이백이 지은 시 가운데서 특히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데, 극도로 절제된 언어 속에 깊은 서정과 뜻을 응축해 내는 절구(絶句)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이 그려 내고 있는 것은 물론 속세를 벗어난 선경(仙景)이다. 이미 푸른 산에 동화되어 있는 화자는 번거로운 '말'의 세계, '논리'의 세계를 뛰어넘은 상태로 그윽한 미소가 있을 뿐이다. 그 미소는 맑은 물에 떠가는 복숭아꽃의 이미지와 한데 어울려 '비인간(非人間)'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삶에 대한 만족 속에서 동양적 자연 친화 사상을 역연(歷然)하게 드러내고 있다. 복숭아꽃의 이미지로 무릉 도원을 상기시키는 시적 표현과 물음에 답하지 않고 웃음을 짓는 태도가 어울린다. 도교(道敎)가 유행하던 진(晉)나라 때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園記)의 글 중에서 그 뜻을 얻어 쓴 것이다. 즉, 도화원기 중에 어떤 어부가 복사꽃 근처의 입구에서 별천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한시의 특성 때문에 시어의 사용이 제한되어 있면서도 극도로 절제되고 함축된 언어 속에 자신의 내면 세계를 끝없이 펼쳐 보이며, 세속과의 완전한 결별을 통해 이상적인 신선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세속에 대한 미련의 여부를 스스로의 질문을 통해서 확인하며, '말 없는 미소'로써 세속과의 완전 결별이라는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끝 부분에서는 계곡물을 따라 떠가는 복숭아꽃을 통해 이백이 일생 동안 꿈꾸던 신선의 세계, 곧 무릉 도원(武陵桃源)을 그려내며, 그 세계에 사는 신선처럼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는 자신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백의 시 가운데서도 특히, 그의 호방한 작품 세계나 낭만적인 삶의 자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심화 자료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問爾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이태백 문집(李太白文集)〉 (김달진 번역에는 余가 爾로 번역되어 있음)
이백(李白:701-762)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생애
제1기(출생~25세)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촉(蜀)의 면주(綿州: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창밍 현[彰明縣])에서 출생했다는 설,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 아버지가 상인이었다는 설, 서북 지방의 이민족이었다는 설 등 일정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5세경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국에서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20세 무렵에는 임협(任俠)의 무리와 사귀었으며, 칼로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익주(益州:지금의 쓰촨 성에 있음)의 자사(刺史) 소정(蘇)에게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와 함께 민산 산[岷山]의 남쪽에 은거하는 등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제2기(25~42세)
20대 중반에 고향인 촉을 떠나 약 10년간은 안릉(安陵: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에 있음)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27세경 그 지방의 명문 허어사(許師)의 손녀와 결혼했다. 맹호연(孟浩然:689~ 740)과의 교제도 이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35세 무렵에는 산둥[山東]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후 40세 무렵 공소부(孔巢父)·배정(裵政) 등 은일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산둥의 추라이 산[徠山] 기슭 죽계(竹溪)에 모여, 술에 취해 생활했다. 당시 이를 '죽계의 육일'(六逸)이라 했다.
제3기(42~44세)
742년(天寶 1) 가을 처음 장안에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친하게 지낸 도사 오균(吳筠)이 조정에 입조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게 된 듯하다. 장안에서는 우선 자극궁(紫極宮:도교사원)에서 당시 저명한 태자 빈객 하지장(賀知章:659~744)을 만나 '천상의 적선인(敵仙人)'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에 퍼졌다. 그뒤 현종(玄宗)을 알현하여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임명되었으나 정규직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이백의 일생 중 관직에 몸담았던 것은 이 시기이며, 이한림·이공봉 등의 호칭이 이때 나왔다. 조정에 나가는 일은 누구보다도 이백 자신이 희망했던 것이기는 했지만, 궁정시인으로서의 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황제 측근들과의 마찰로 인해 744년 장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사람이 법도와 체면을 중시하는 궁정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백은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굴절된 고독감을 느꼈다. 이 3년간은 시간적으로는 짧았지만, 다수의 작품과 다양한 체험으로 수놓아진 중요한 시기였다.
제4기(44~56세)
744년 봄 장안에서 나온 이백은 동쪽으로 향했으며, 그해 여름 뤄양[洛陽]에서 두보(杜甫:712~770)를 만났다. 두 시인이 만남으로써 서로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우정의 시가 탄생되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흥미가 깊은 시기이다. 다만 상호 영향관계에 있어서 두보가 이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관계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의 나이차와 그 시점에서의 명성과 역량의 차이라는 일반적인 원인 외에도 같은 시대의 시인을 평가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달랐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다. 이백은 동시대의 시인을 언급한 시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두보는 같은 시대의 시인을 읊조린 경우, 그 시인의 작시 기량과 자질을 칭찬한 작품이 많다. 두보 및 고적(高適:702경~765)과의 직접적인 교유는 6개월 내지 1년 반 정도로 끝나고, 이백은 양쯔 강[揚子江] 하류지역에서부터 다시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완전한 방랑생활은 아니었으며, 양원(梁園:지금의 허난 성[河南省]에 있음)과 산둥 성에 생활의 근거지를 두었다. 장안에서 추방된 후 약 10년간의 이 시기가 제2차 방랑시기이다.
제5기(56~62세)
755년(天寶 14) 11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12월 뤄양이 함락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장안이 함락되고, 현종은 촉으로 피신했으며, 황태자[肅宗]가 영무(靈武:닝샤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서 즉위했다. 당시 이백은 양쯔 강을 따라 선성(宣城:지금의 안후이 성[安徽省]에 있음)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장안이 함락된 56세의 겨울, 루산 산[盧山]에 은거하고 있던 그는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수군에 막료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백은 안녹산을 토벌하기 위해 참가했다. 그러나 황실 내부의 분쟁으로 영왕의 군대는 적군(賊軍)으로 간주되었고 영왕은 살해되었으며, 이백도 체포되어 심양(陽: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 시[九江市])의 감옥에 갇혔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단 석방되었으나, 대역죄가 추가되어 결국 멀리 야랑(夜郞:지금의 구이저우 성[貴州省] 서북부)으로 유배되었다. 759년(乾元 2년) 3월 이백은 야랑으로 가던 도중 양쯔 강 상류의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사면 통지를 받게 되었다. 다시 자유을 얻은 이백은 양쯔 강 중류의 둥팅 호[洞庭湖] 부근에서 시인 가지(賈至:718~772)를 만난 뒤 강남의 온화한 풍토에서 지냈다. 762년(寶應 1) 62세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후이 성에 속함)의 현령이었던 족숙(族叔:일족의 숙부 세대에 속함) 이양빙(李陽)에게 병든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구당서 舊唐書〉에는 여러 해에 걸친 과도한 음주가 그 원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그해 11월 무렵 이양빙의 손에 시문의 초고를 맡기고 죽었다. 수군에 참가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양쯔 강에서 보낸 6여 년의 기간을 만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작품
이백의 현존하는 1,000여 수의 작품은 제재나 시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의 시의 내용을 제재에 따라 자리매김할 경우 가장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여행·이별·음주·달빛·유선(遊仙) 등 소위 그의 세계관에서 유출되는 일련의 제재이다. 그것들은 소재로서 사용되는 경우, 주제로서 사용되는 경우, 혹은 어느 쪽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 등 다양하면서도 공통된 감각과 발상으로 그의 시의 특색을 더욱 증폭시켜주었다. 이 때문에 이백의 작품에는 각 제재의 기본적인 성격이 집약적·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은 1,000여 년에 걸친 이백 시의 읽기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시사'(詩史)로 불리는 두보의 시집이 대체로 제작연대로 배열된 데 비해, 이백의 시집은 각 시대를 통해 오로지 제재로 구분된 '분류본'이 중심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작품의 제작연대가 불확실한 것이 많다는 외적 조건이 작용했으나 근본적으로 그의 시가 두보의 시와는 달리 개별 작품의 창작 상황을 사상(捨象)시킨 일반적인 상황을 노래했다는 것과 제작연대가 불확실하더라도 작품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등이 내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이백 시의 주요한 제재를 보면, 공통된 발상으로서 시공감각의 확대에 대한 지향, 미확정인 것에 대한 지향이라는 2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행의 시에서 보이는 아득히 먼 시공에 대한 동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 이별의 시에서 보여지는 장래를 알 수 없는 흔들리는 심상(心象)의 상태, 음주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수용하기 힘든 고양감, 심적 세계의 확대, 순간의 영원화, 광대 또는 영원한 시공에서 미지의 세계인 밝은 달빛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인간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설정된 신선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자유로운 비상 등 가장 이백적인 감각을 지닌 제재들 외에 여성의 슬픔을 노래한 규원(閨怨)의 시, 변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노래하는 변새시, 역사를 장식한 장대한 드라마를 미미한 인간세계의 한순간의 꿈으로 노래한 회고시 등 이백은 다른 시인과 더불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두보·한유(韓愈:768~824)·백거이(白居易:772~ 846) 등이 이룩한 시사(時事)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 서사적 제재에 기초한 장대한 시편, 또는 시에 의해 인생과 자연계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작품 등은 이백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두보와 한유는 이백의 대표적 제재인 이별에서는 그리 저명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한편 시형(詩型)에 있어서도 이백의 작품은 흥미로운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형으로는 우선 절구(특히 7언절구)를 꼽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악부(樂府) 계열의 고체시를 들 수 있다. 율시에는 미숙했으며, 특히 7언율시에서는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볼 만한 작품이 없다. 이백과 두보는 이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두보가 가장 성과를 거둔 시형은 7언율시이며, 상대적으로 7언절구에서는 뒤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백거이의 작품은 비교적 균형있는 분포를 보인다. 또 한유의 대표작에는 장편 고체시에 속하는 것이 많다. 이백은 왕창령(王昌齡:698~755경)과 함께 당대 7언절구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에 그의 작품은 '신품'(神品)으로도 일컬어졌다. 또 그의 대표작 중 7언절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결국 이 시형이 가진 표현기능의 존재방식은 이백에게 있어서 시적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물상
이백이 어떠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점은 결국 그에 관한 단편적인 전기자료와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밖에 알 수 없다. 그는 당시의 시인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정치가를 지망했으나 장안에서의 방만한 생활과 영왕의 수군에 참가했을 때의 낙관성에서 보여지듯이, 정치가로서는 그리 적성에 맞지 않았다. 현종이나 영왕 또는 지방의 유력자들도 시인으로서의 이백이 자신의 궁정이나 막하에 있기를 바랐으며, 그에게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때문에 이백은 정치적으로는 평생 불만이었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재능을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는 심경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실패는 시인 이백에게 더욱 많은 시간과 의욕을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다양한 경험과 다원적인 시각을 제공했다. 만약 그가 장안에서 궁정시인으로서 성공하고 관리로서 출세했다면, 많은 군중시와 응소시(應詔詩)의 명작을 낳기는 했겠지만, 자유롭고 변화가 심한 이백의 시세계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결국 재야의 시인으로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중국문학사 측면으로서는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백의 사상과 시풍에 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비평이 시도되고 있다. 이를테면 도교적·유교적·낭만적·고전적·정열적·객체적·쾌락적·민요적·애국적 등등, 거기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요소가 지적되는 것도 별로 신기할 바가 없다. 한 사람의 시인에게 이만큼 평가가 다양한 예도 드물다. 그의 자유로움과 변환성은 이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작품 전체가 어느 한 가지 기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다양한, 또는 다원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본(傳本)
그의 시문은 사후 이양빙에 의해 〈초당집 草堂集〉(10권)으로 묶여졌다. 또 친구 위호(魏顥)도 〈이한림집 李翰林集〉을 펴냈다. 이들 당대의 이백시집은 일찍이 산실되었다. 북송의 요사(樂史)에 의한 〈이한림집〉 20권과 〈이한림별집〉 10권도 일찍이 산실되었다. 다만 그 계통을 이은 송본(宋本)이 명대에 중간된 〈이한림집〉 30권으로, 소수만 남아 있다. 또 이것들과는 별도로 북송의 송민구(宋敏求)가 요사의 판본을 대폭 증보하여 분류한 책을 펴냈으며, 저명한 문학자 증공(曾鞏)이 재정리한 뒤 쑤저우[蘇州]의 장관 안처선(晏處善)에 의해 1080년에 간행되었다. 이 안씨 간본(蘇州本)은 실전되었지만, 그 계통을 이은 송본 〈이태백문집〉 30권이 현존 최고(最古)의 전본으로서, 일본 도쿄의 세이카도 문고[靜嘉堂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주석서로는 남송 양제현(楊齊賢)의 주에 원초(元初) 소자윤(蕭子贇)이 보충한 〈분류보주이태백시 分類補注李太白詩〉 25권이 가장 앞선 것이다. 청대의 왕기(王琦)는 양(楊)·소(簫) 2가(家)의 주를 보정하고, 여기에 명대 호진형(胡震亨)의 주 〈이시통 李詩通〉과 자신의 주를 첨가하여 상세한 집주를 만들고, 나아가 산문에도 주를 달았으며, 연보와 관련자료도 종합하여 〈이태백문집〉 36권을 간행했다. 이것은 이백 시의 주석사(注釋史)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헌으로 손꼽힌다. (BIE | 金成童 옮김 )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당시(唐詩)
중국 당대(唐代:618~907)에 지어진 시의 총칭. 단 오대(五代)의 작품도 포함된다. 이 시기에 작가들의 폭도 다양해졌으며, 많은 시인들이 활약했다. 청대(淸代) 1707년(강희 46)에 편찬된 〈전당시 全唐詩〉에 2,300여 명의 시인과 4만 8,90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가 가진 문학상의 의의를 논할 때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 고전시의 형식이 이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정형화되어 있는 당시의 운율법칙은 후세 모든 시인들의 규범이 되었다.
당시의 발전단계는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晩唐)의 4시기로 구분된다. 초당(618~712)의 시인은 대부분 관리였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주류는 궁정시였다. 그리고 여러 시인들이 경쟁했기 때문에 서로의 시를 제약하는 갖가지 규칙이 정해져서 시의 정형화를 촉진했다. 초당4걸로 병칭되는 왕발(王勃)·노조린(盧照隣)·양형(楊炯)·낙빈왕(駱賓王)이 유명하다. 초당 후기에는 유미주의(唯美主義) 시풍을 계승하면서 궁정시인으로서 율시(律詩)의 완성을 적극 후원한 문장4우(文章四友)가 있었다. 이들은 최융(崔融)·이교(李嶠)·소미도(蘇味道)·두심언(杜審言)으로, 후에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이 근체시를 완성시키는 데 바탕을 마련했다.
성당(713~765)의 시인은 유명한 사람이 많지만 왕유(王維)· 이백(李白)· 두보(杜甫)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사상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데, 왕유는 불교, 이백은 도가, 두보는 유가의 신념을 지켰다. 그에 따라 이들 시의 품격도 달라졌다. 왕유는 '자연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오언(五言)이 중심이 되는 시를 썼으며 전원의 한적한 생활과 산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다. 이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위대한 시인으로, 아름다운 산수시(山水詩)의 정취와 웅대한 악부시(樂府詩)의 풍격을 흡수했고 오언·칠언의 장편·단편에 모두 능했다. 두보는 성당 시대에 이백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또다른 위대한 시인이다. 그들은 흔히 '이·두'로 불리지만, 이백의 성격이 격정적이고 자유분방한 데 비하여 두보는 유가적인 윤리관을 바탕으로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중당(766~835)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한유(韓愈)와 백거이(白居易)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율시도 잘 지었으나 고체시(古體詩)에 특히 뛰어났다. 한유의 고시는 흔히 '험난하고 괴이하다'고 형용되어지며 백거이의 시는 평이하고 명쾌하다. 또한 이들은 안사(安史)의 난 직후의 혼란했던 사회상을 작품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백거이는 신악부(新樂府) 운동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고발했으며, 한유는 고문운동(古文運動)에서 문장의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했다.
만당(836~907)에서는 경쾌한 필치로 시를 지었던 두목(杜牧)과, 연애를 주제로 상징수법을 사용했고 칠언고시에 뛰어났던 이상은(李商隱)이 걸출하다. 이상은은 중국 시인 가운데 가장 난해한 시를 쓴 작가로 중국시의 창작기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당시선집으로는 송대 주필(周弼)의 〈삼체시 三體詩〉와 명대 이반룡(李攀龍)이 지었다고 하는 〈당시선 唐詩選〉이 있다. 전자는 중당·만당의 금체시(今體詩)만을 수록하여 섬세하고 아름다운 당시의 특징을 강조했고, 후자는 주로 초당·성당의 시를 수록하고 고체시도 실었지만 선택이 조금 치우친 감이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당시의 전개 양상
당나라 이전까지의 시는 주로 정치 윤리에의 기여를 목적으로 삼았으나 당나라로 접어들면서 인간 감정에 대한 반응을 정치나 윤리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시하게 된다. 특히, 이전까지는 시 창작의 중심지가 궁정이었으나, 7세기 초당(初唐)을 과도기로 시는 궁정을 떠나 8세기 전반 성당(盛唐)의 이백, 두보, 왕유에 이르러서 강렬한 개성적 감정, 공상의 비약에 의한 새로운 이미지, 상징으로서의 자연 파악, 자유로운 시어의 사용 등으로 중국시의 황금기를 맞는다.
시형도 종래의 '고시(古詩)' 이외에 '율시(律詩)', '절구' 등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전기(前期)에 축적된 운율(韻律)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기 이래로 일기 시작한 불교에 대한 관심도 시의 심화를 도왔으나, 동시에 전기의 미문이 지닌 비정성(非政性)에 대한 반발로서 고대적인 정치와 윤리에 대한 반발로서 고대적인 정치와 윤리에 대한 관심이 부활되기도 했다. 8세기 후반 중당(中唐)의 한유, 백거이 등은 시를 그러한 방향으로 연장시켰으며, 9세기 만당(晩唐)의 두목, 이상은 등은 얼마 동안 다시 유미(唯美)적인 경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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