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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둘기 / 장 콕토(Jean Coctea)​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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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둘기 / 장 콕토(Jean Coctea)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상냥한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요점 정리

작자 : 콕토(Jean Coctea)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콕또(Jean Cocteau1889~1963)의 대표작 중의 한 편이다. 콕또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팔방미인이다. 시인이며 소설가이며, 창작가, 연출가, 배우, 화가이기도한 그는 주로 애상적이며 서정적인 시를 많이 썼다. 이 작품도 그의 시정신을 대표할 만한 수작으로 꼽힌다. 사랑과 자유와 순결과 평화의 상징인 산비둘기를 내세워 인간의 본성적인 순애를 그리고 있다.

심화 자료

콕토(Jean Cocteau)

1889. 7. 5 프랑스 파리 근처 메종라피트~1963. 10. 11 파리 근처 밀리라포레. 프랑스의 시인·극작가·소설가·배우·영화감독·화가.

대표작으로는 시집 〈천사 외르트비스 L'Ange Heurtebise〉(1925), 희곡 〈오르페우스 Orphee〉(1926)·〈지옥의 기계 La Machine infernale〉(1934), 소설 〈무서운 아이들 Les Enfants terribles〉(1929), 초현실주의 영화 〈시인의 피 Le Sang d'un poete〉(1930)와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ete〉(1946) 등이 있다.

유산과 젊은시절

콕토는 파리에서 성장했으며, 말투·교육·사고방식·습관 등에서 언제나 자신을 진정한 파리 사람으로 여겼다. 그의 집안은 명실상부한 파리의 부르주아 계층에 속해 있었고, 그런 집안답게 교양이 넘치고, 부유하고, 음악·미술·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은 극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기억은 서커스나 고급 유흥장에서 펼쳐지는 흥행물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고,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되는 진지한 비극의 형태로 남아 있기도 했다. 19세에 그는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를 출판했다.

콕토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해 동안 말하자면 정치적 혼란이 전혀 없이 세련된 예술적 취향이 장려되던 시절의 산물이었다. 그가 무대 예술에 실질적인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였다. 콕토가 발레극을 쓰고 싶다고 의견을 밝히자, 당시 러시아 발레단 감독을 맡고 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나를 한번 놀라게 해보라"(Etonne-moi)라고 응수했다. 이 한 마디는 결국 젊은 시인으로 하여금 〈퍼레이드 Parade〉(1917, 에리크 사티가 곡을 붙임)·〈지붕 위의 황소 Le Boeuf sur le toit〉(1920, 다리위스 미요가 곡을 붙임) 같은 발레극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품도 쓰게 만든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유명한 한 마디는 그의 연극과 영화에도 종종 인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콕토는 벨기에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이때 관찰한 풍경은 나중에 그의 소설 〈협잡꾼 토마 Thomas l'imposteur〉(1923)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조종사 롤랑 가로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공중 비행에서 영감을 얻은 초기 시집 〈희망봉 Le Cap de Bonne-Esperance〉(1919)을 그에게 헌정했다. 1916~17년에 그는 당시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현대 예술계에 이따금 출입하면서, 파블로 피카소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와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같은 문인들을 사귀었다.

라디게의 영향

전쟁이 끝난 직후 콕토는 나중에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 레몽 라디게를 막스 자코브의 소개로 만났다. 천재로 소문나 있던 16세의 소년 라디게는 단순성과 고전적 명증성의 미학을 옹호했는데, 이때 라디게가 주장한 미학은 뒤에 콕토 자신의 작품의 특성이 될 만큼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라디게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34세의 장년인 콕토는 사상과 용기와 열정을 끊임없이 공급해주던 우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연인이 죽고 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한 콕토는 아편에 빠져들었고, 이때문에 그는 일정 기간 요양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 철학자인 자크 마리탱이 요양소로 그를 찾아왔다. 이 신학자를 통해 콕토는 짧은 기간이나마 그리스도교로 귀의했다. 이 복합적인 체험은 그의 삶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고, 그 기간 콕토는 그의 가장 중요한 몇 작품을 썼다. 장시 〈천사 외르트비스〉에서 시인은 한 천사와 격렬한 다툼을 시작하는데, 이 천사는 뒤에도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여 콕토와 싸움을 계속한다. 1926년에 처음 무대에 올려진 〈오르페우스〉는 당대의 연극에서 비극을 부활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이 작품에서 콕토는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나름의 해석을 심화했다. 1929년 3월의 3주일 동안에 완성한 소설 〈무서운 아이들〉은 폴과 엘리자베스라는 두 남매를 통해 사춘기의 거칠 것 없는 특성을 파고들어 연구한 작품이다. 1950년에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거기에 따른 해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 〈시인의 피〉를 제작함으로써 활동 영역을 넓혔다. 영화로는 첫번째인 이 작품은 그 자신의 정신적 체험을 다룬 것으로, 주제는 그당시만 해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으나, 그후 다른 작품들을 통해 종종 표현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덜 사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주제로 느껴진다. 1930년대초에도 그는 흔히 그의 대표적 희곡으로 평가되는 〈지옥의 기계〉에서 그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다룬 바 있다. 이 두 작품에서 그는 인간성의 위대한 주제에 보다 가깝게 다가갔다.

1940년대의 영화 제작

1940년대에 콕토는 영화 쪽으로 다시 돌아와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다음에는 영화감독으로 뛰어들어, 동화를 각색한 〈미녀와 야수〉와 그 자신이 희곡에서 다룬 바 있는 시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재창조한 〈오르페우스〉(1950)를 제작했다. 당대의 중요한 시각 예술가로서 콕토는 1950년에 생장카프페라에 있는 '빌라 산토 소스피르'의 실내 장식을 맡았고, 일련의 중요한 그림 제작에도 착수하여 망통에 있는 시청사, 빌프랑슈쉬르메르에 있는 생피에르 예배당, 밀리라포레에 있는 생블레즈데생플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프레쥐에 있는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은 그가 74세에 죽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끝나 양자인 에두아르 데르미(화가로 나중에는 영화계에서도 활동함)가 맡아서 작업을 계속했다. W. Fowlie 글

라디게(Raymond Radiguet)

 

1903. 6. 18 프랑스 생모르~1923. 12. 12 파리. 프랑스의 소설가·시인.

그가 17세 때 쓴 육체의 악마 Le Diable au corps〉(1923)는 놀라운 통찰력과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는 걸작으로서, 사춘기 소년이 갖는 사랑에 대한 시적 정취와 성적 도착을 표현한 독특한 작품이다. 라디게는 16세 때 파리에서 선풍을 일으켰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문화계를 이끌었던 다다이즘 예술가들과 입체파 예술가들의 광적인 생활에 합류했다. 여기에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막스 자코브 및 에리크 사티와 장 콕토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특히 장 콕토는 라디게의 보호자가 되었다.

라디게의 문학적 시도는 처음부터 친구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는 〈불타는 뺨 Les Joues en feu〉(1920)이라는 시집과 조르주 오리크의 음악에 맞춘 짤막한 2막 희곡 〈펠리칸 Les Pelicans〉(1921)을 내놓았고, 전위파 잡지에 기고했다. 〈육체의 악마〉가 나오자, 평론가들은 이 젊은이를 느낌과 생각 및 문체에서 꾸밈없는 단순함과 절제를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전통의 대가로 인정했다. 〈육체의 악마〉는 전쟁 때 16세의 남학생이 전선에 나가 싸우고 있는 군인의 아내를 유혹하는 이야기이다. 군인의 아내는 둘 사이에 생긴 아기를 낳다가 죽는다. 라디게는 사춘기 소년의 입을 통해 민감하면서도 냉담하게 이 이야기를 서술한다. 라디게는 이 책에 이어 2번째 소설이자 마지막 작품인 〈오르젤 백작의 무도회 Le Bal du comte d'Orgel〉(1924)를 썼는데, 명쾌함과 섬세함 및 격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라디게는 방탕한 생활과 지나친 음주로 쇠약해진 끝에 장티푸스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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