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찬가(北竄歌)
by 송화은율북찬가(北竄歌)
앉은 곳에 해가 지고 누운 자리 밤을 새워
잠든 밧긔 한숨이오 한숨 끝에 눈물일새
밤밤마다 꿈에 뵈니 꿈을 둘너 상시과저
학발자안 못 보거든 안족서신 잦아질 때
기다린들 기별 올까 오노라면 달이 넘네
못 본 제는 기다리나 보게 되면 시원할까
노친 소식 나 모를 제 내 소식 노친 알까
천산만수 막힌 길에 일반고사 뉘 헤올고
묻노라 밝은 달아 양지에 비추는가
따르고저 뜨는 구름 남천으로 닫는구나
흐르는 내가 되어 집 앞에 두르고저
나는 듯 새나 되어 창전에 가 노닐고저
내 마음 헤아리려 하니 노친 정사 일러 무.
여의 잃은 용이오 치 업는 배 아닌가
추풍의 낙엽같이 어드메 가 지박할고
제택도 파산하고 친쇽(親屬)은 분찬하니
도로에 방황한들 할 곳이 전혀 업네.
어느 때에 주무시며 무스 것을 잡숫는고
일점의리 살피더니 어느 자손 대신할고
나 아니면 뉘 뫼시며 자모 밧긔 날 뉘 괼고
남의 업슨 모자 정리 수유상리 못하더니
조물을 뮈이건가 이대도록 떼쳐 온고
요점 정리
지은이 : 이광명
갈래 : 유배 가사
성격 : 애상적, 사모곡, 한탄적
수사법 : 대구, 은유, 직유법
구성 :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며 전체 분량은 2율각 1구로 세어 282구
1~8 행 :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9~14 행 : 고향집에 가고 싶은 마음
15~22 행 : 홀어머니에 대한 염려와 울분
주제 :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함
특징 : 일반적인 유배 가사에 드러나는 임금에 대한 충의사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
출전 : 증참의공적소시가
내용 연구
앉은 곳에 해가 지고 누운 자리 밤을 새워[풍찬노숙(風餐露宿) :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데에서 먹고 잔다는 뜻으로, 객지에서 겪는 모진 고생을 이르는 말.]
잠든 밧긔[잠드는 시간 외에] 한숨이오 한숨 끝에 눈물일새
밤밤마다 꿈에 뵈니 꿈을 둘너 상시(常時)과저[꿈을 가져다 현실처럼 여기고 싶구나]
학발자안(鶴髮慈顔)[머리가 하얗게 센 자애로운 얼굴로 어머니를 뜻함] 못 보거든 안족서신(雁足書信)[기러기 발목에 매달아 보낸 편지] 잦아질 때
기다린들 기별 올까 오노라면 달[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넘네
못 본 제는 기다리나 보게 되면 시원할까
노친 소식 나 모를 제 내 소식 노친 알까[늙으신 어머니 소식도 내가 모르는데, 내 소식을 어머니가 알 리가 있겠는가]
천산만수(千山萬水)[화자와 어머니 사이의 장애물] 막힌 길에 일반고사(一般苦思)[괴롭거나 고통스러운 모든 생각] 뉘 헤올고
묻노라 밝은 달아[도치법] 양지에 비추는가
따르고저 뜨는 구름[도치법] 남천[남쪽 하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닫는구나
흐르는 내[화자가 동일시하고자 하는 대상]가 되어 집 앞에 두르고저
나는 듯 새[화자가 동일시하고자 하는 대상 / ‘내’가 되고 ‘새’가 되어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표출함]나 되어 창전에 가 노닐고저
내 마음 헤아리려 하니 노친 정사(情思) 일러 무삼.
여의(如意)[여의주] 잃은 용이오 치[배의 방향을 돌리는 기구인 '키'의 잘못된 음] 업는 배 아닌가
추풍의 낙엽같이 어드메 가 지박할고[머무를꼬]
제택[문중의 여러 집안.]도 파산하고 친쇽(親屬)[친족]은 분찬하니
도로에 방황한들 할 곳이 전혀 업네.
어느 때에 주무시며 무스 것을 잡숫는고
일점의리[(一點衣履) : 한 벌뿐인 옷과 한 켤레뿐인 신발.] 살피더니 어느 자손 대신할고
나 아니면 뉘 뫼시며 자모 밧긔 날 뉘 괼고
남의 업슨 모자 정리 수유상리(須臾相離) 못하더니[잠시라도 서로 물러나 떨어지지 못하더니.]
조물을 뮈이건가[움직이게 했는가. ‘뮈다’, ‘움직이다’의 옛말.] 이대도록 떼쳐 온고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작가가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를 갔을 때 멀리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작품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절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1 755년(영조 31) 이광명(李匡明)이 지은 유배가사. 형식은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는데,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며 전체 분량은 2율각 1구로 세어 282구이다. ≪증참의공적소시가 贈參議公謫所詩歌≫에 실려 있다.
저자는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시골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역률(逆律)로 처형된 뒤 25년이 지난 영조 31년에 나주괘서(羅州掛書)의 변이 일어나자 소론(少論)의 원로대신이었던 진유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갑산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신임사화(辛壬士禍)의 후유증과 피해 대중의 참담한 당시의 사회 현실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원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李匡明의 謫所詩歌에 대하여(鄭琦鎬, 論文集 3, 仁荷大學校, 1977)
≪참고문헌≫ 流配歌辭硏究(李宰植, 建國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나주괘서의 변
1755년(영조 31) 소론(少論)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 ‘을해옥사’ 또는 ‘윤지(尹志)의 난’이라고도 한다.
[배경]
이에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등 소론 4대신은 이를 시기상조라고 따지고 공격하였다. 경종 말년 세제 연잉군의 정무대리(政務代理)까지 강행되었다. 그러자, 소론에서는 승지인 김일경(金一鏡)·이진유(李眞儒)·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의 역모를 무고(誣告), 4대신 및 수 백인의 노론 일파가 참살, 실각당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노론이 등장하면서 김일경의 옥사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소론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 때 김일경 부자의 참살은 물론, 윤지의 아버지인 훈련대장 취상(就商)도 고문으로 죽었다.
또한 뒷날 을해옥사의 주역인 윤지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제주도로 유배당하고, 뒤에 나주로 옮겨져 20여년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영조 즉위 얼마 뒤 실세한 소론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1727년(영조 3) 노론 일부가 실각하자,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일으켰다.
[전개과정]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 윤지가 적소(謫所)인 나주에서 나라와 노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은밀히 세력을 규합해 모의를 계획하고 있었다.
윤지는 아들 광철(光哲)과 함께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및 이효식(李孝植), 박찬신(朴纘新) 등 서울과 지방 각지의 소론을 모으고,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불평분자들을 끌어들여 점차 기반을 구축해갔다.
윤지는 거사 전에 우선 인심을 동요시키고자 1755년 1월에 나주 객사(客舍)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였고, 푸닥거리로 민심을 현혹시키며 동지 규합에 힘을 썼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괘서가 발각되었다. 이로써 윤지는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에게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았으며, 그해 2월에 처형당하였다.
이 때, 박찬신 및 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 등 많은 소론파 인물들이 함께 사형되었고,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원찬(遠竄)되었다. 3월에는 조태구·김일경 등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였다.
5월에는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에서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과 관련, 윤지의 일파인 심정연(沈鼎衍)이 붙잡혀 사형되었다. 이어 춘천에서 윤혜(尹惠)·김도성(金道成)·신치운(申致雲) 등이 주모한 역모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 모두 사형되었다.
[결과 및 의의]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남아 있는 소론파 인물들도 대부분 연루, 실세되어 재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소론의 역모 주동자를 모두 제거한 영조는 ≪천의소감 闡義昭鑑≫이라는 책을 편찬하게 하여 이 사건들의 시말을 자세하게 밝히게 하였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당쟁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계에서 차지하였다.
반면, 실세한 소론들은 거의 신원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원망이 누적되어 당화(黨禍)는 잠재된 채 윤지의 난으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이 여의치 못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참고문헌≫ 闡義昭鑑 ≪참고문헌≫ 逆賊尹志等推案 ≪참고문헌≫ 藥坡漫錄 ≪참고문헌≫ 朝野輯要 ≪참고문헌≫ 續朝野輯要 ≪참고문헌≫ 國朝寶鑑 ≪참고문헌≫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李成茂 外,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확인 문제] 2012년 기출 수능
<보기>를 바탕으로 위 시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북찬가’에는 유배지에서 겪는 어려움을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염려하는 것에도 내용의 상당 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작가의 의식 기저에는 아버지의 부재로 말미암은 고독감과 편모 봉양의 책임감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형제가 없는 독자라는 점, 게다가 친자식도 없다는 점이 그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고, 그 고독감은 스스로에게 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① ‘꿈’을 둘러 평상시처럼 하고 싶다며 어머니와 함께 하고픈 소망을 드러내는군.
② ‘막힌 길’은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는 화자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군.
③ ‘내’와 ‘새’에 화자의 마음을 의탁하여 외로운 어머니를 위로하려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군.
④ ‘여의 잃은 용’과 ‘치 업는 배’는 입신양명을 못해 어머니께 죄송스러운 심정을 드러내는군.
⑤ ‘나 아니면 뉘 뫼시며’를 통해 편모를 봉양해야 하는 화자의 무거운 책임감을 엿볼 수 있군.
정답 ④ ‘여의 잃은 용’과 ‘치 업는 배’는 각각 ‘여의주를 잃은 용’, ‘키가 없는 배’란 뜻으로 중요한 것을 잃어 힘을 쓸 수 없는 처지를 가리킨다. 이는 어머니와 헤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를 빗댄 표현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못해 죄송스러운 심정과는 거리가 멀다.
오답 피하기
① ‘밤밤마다 꿈에 뵈니 꿈을 둘너 상시과저’는 매일 밤 어머니를 만나는 꿈을 둘러 마치 평상시처럼 지내고 싶다는 말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는 소망을 드러낸 표현이다.
② ‘천산만수 막힌 길’은 먼 곳으로 유배와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하는 화자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③ 화자는 ‘흐르는 내’, ‘나는 듯 새’가 되어 고향 집 앞과 창 앞에 가고 싶어 한다. 이는 ‘내’와 ‘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외롭게 지내시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⑤ ‘나 아니면 뉘 뫼시며’는 돌볼 이가 없는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화자의 책임감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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