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병자일기(丙子日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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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일기(丙子日記)

아침에 물가에 내려 대나무를 가지고 지은 찬밥(찬합에 담은 밥)을 일행이 몇 술씩 나누어 먹고, 사내 종인 충이와 어산이가 대나무를 베어다가 연장도 없이 두 간(間) 길이의 문 하나 달린 제비 둥지만한 움집을 지으니, 생댓잎을 깔고 댓잎을 엮어 세 댁 부녀자 일행 열네 명이 그 안에 들어가 밤을 새우고, 종들인 피를 베어 막을 지어 의지하고 지내나 물이 없는 무인도라 대숲에 가서 눈을 그러모아 녹여 마시고, 당진서 축이 심히 아파 모두 모여 몸조리하고, 오위장의 양식을 지어 날라다 바닷물에 대충 씻어 밥을 하나 모든 양반들이 피난하니(피난할 때 거룻배로 나갔으므로) 거룻배를 타고 나가서 물을 길어 오되(와야 하는데) 우리 일행은 거룻배도 없고 그릇도 없으니 한 그릇 물도 못 얻어먹으니 주야로 남한 산성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싶구나. 마음을 달래어 날을 지내니, 인생이 얼마나 질긴 것인가. 끈질긴 것이 인명이니 알지 못하겠도다. 한 사건에 한 자식(세 자식)을 다 없애고, 전쟁의 참혹함에 설움을 이기지 못하더니, 이제는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다 잊고 다만 산성(나라, 임금)을 생각하고, 지극한 슬픔 중에 나라가 이리 된 일을 부녀자가 알 일이 아니지만 어찌 통곡하지 않겠는가.

- 무인도에서의 피난 생활과 나라와 남편에 대한 걱정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놀라 일가가 근처 무인도로 피난하여 고생하는 과정을 소상히 보여주고 있다. 연장도 없이 겨우 대나무를 베어 움막을 짓고, 물이 없어서 대숲의 눈을 녹여 먹고 바닷물에다 쌀을 애벌 씻어 밥을 지어 먹어야 했던 눈물겨운 피난 생활, 그 가운데서도 남편을 걱정하면서 남한산성을 향해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아내의 애절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 죽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집안 일의 처리 결과

죽은 어머니와 아들을 꿈에 보고 느꼈던 감회와 처마 밑에서 다정히 새끼를 기르는 제비를 보면서 세상 떠난 자식들이 생각나서 그 제비가 한없이 부러웠다는 서글픈 심회, 그리고 종들과의 농사에 관계된 일들을 담고 있다.

병자일기(丙子日記)

요점 정리

연대 : 조선 인조(1636 - 1640)

작자 : 남평 조씨(南平曺氏)

갈래 : 수필, 한글 필사본 일기(1636년부터 1640년까지)

표현상 특징 : 자신의 감회와 생활 주변의 잡다한 일들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문체가 유려하고 문장의 호흡이 긺.

주제 : 무인도에서의 피난 생활과 나라와 남편에 대한 걱정 그리고 죽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집안일의 처리 결과 등등이며 날짜마다 주제가 다름.

의의 : 작자와 연대가 분명한 대규모 한글 필사본 일기로 최초의 여류 실기 문학임.

기타 : 조선 후기의 국어와 생활상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역사 연구의 보조 자료임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병자일기'는 인조 14년(1636) 12월부터 인조 18년(1640) 8월까지 병자호란 중에 겪은 고난과 시련을 기록한 일기로, 개인이 남긴 글로는 거의 희귀한 예이다. 난리통에 황급히 피난하면서도 일기를 쓴 그 철저함이야말로 이 글이 값진 기록 문학임을 말해 준다.

정치적인 사건은 '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역사서이고, 작자 미상의 '산성일기(山城日記)'가 전해지지만 그것도 작자가 사건의 바깥에서 지켜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이다. 이에 반해 '병자일기'는 자신이 스스로 피난을 가는 급박한 정황 속에서 적은 것이라, 체험적 요소가 강하고 전쟁통의 비참한 모습이 있는 그대로 적혀 있어, 문학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일기는 일기문의 요건인 날짜, 날씨,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 대한 근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수필로서의 일기문이 갖는 특성을 두루 보여 주고 있다. 여성의 섬세한 감각과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병자호란을 당한 사대부가의 부인이 가족을 이끌고 피난가면서 남편과 나라를 걱정하는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1989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한글 필사본 일기인데, 작자가 예순을 넘긴 나이에 남긴 기록 문학이기 때문에 담담하면서도 곡진(曲盡)한 표현 속에서 인간적 원숙미(圓熟美)와 넉넉한 한국적 정서를 느끼게 한다. 세 아들을 잃고, 남편마저 청나라 땅으로 잡혀간 상황에서, 더러는 병고(病苦)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절절이 써 내려 간 하루하루의 기록은 한국 여인의 한(恨)의 한 전형(典型)을 보는 듯하다.

이해와 감상1

 

조선 인조 때 정경부인(貞敬夫人) 남평조씨(南平曺氏)가 쓴 일기. 한글필사본. 작자는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 시북(市北) 남이웅(南以雄)의 부인이다. 이 일기는 인조 14년(1636) 12월부터 인조 18년(1640) 8월까지 3년 10개월에 걸쳐 기록한 것이다.

겉표지의 제목은 ‘숭정병자일기(崇禎丙子日記)’로 되어 있으나 대개 ‘병자일기’라는 제목으로 통용된다. 원본은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공암리(성강마을)에 있는 남산영당(南山影堂)에 후손들이 보존, 관리하고 있고, 축소 영인본 전문이 ≪역주 병자일기 譯註 丙子日記≫에 실려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원본은 한 책으로 묶여 있으나, 종이의 크기로 보아 본래는 네 책으로 되어 있었던 것을 합철한 듯하다. 현재 전하는 책은 표지 1장에 본문 72장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상으로 보아 앞과 뒤에 각각 낙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로 보아 현재 전하는 것은 원래 있었던 기록의 중간 부분만인 것으로 짐작된다.

글씨는 해서체로 되어 있는데, 달필이라고 보기에는 곤란하지만 읽는 데에는 크게 불편하지 않다. 작품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난중피란기(亂中避亂期)·서산당진체류기(瑞山唐津滯留期)·충주체류기(忠州滯留期)·서울귀환기(歸還期)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난중피란기는 병자호란으로 급히 피난길에 오른 병자년 12월 15일부터 난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진으로 거처를 옮긴 정축년 2월 17일까지에 해당하는데, 피난길에 겪은 갖가지 어려움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서산당진체류기는 정축년 2월 18일부터 무인년 1월 25일까지에 해당하는데, 친척들의 배려 속에 서산 당진에 머물면서 심양으로 떠난 남편을 걱정하고 죽은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충주체류기는 무인년 1월 26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까지에 해당하는데,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농사를 지으며 집안을 꾸려가는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서울귀환기는 무인년 5월 29일 이후의 기록에 해당하는데, 다른 시기의 기록들과는 달리 심양(瀋陽)에서 귀환한 남편의 일상 생활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자와 창작 연대가 분명한 최초의 여성실기문학으로 병자호란에 대한 민간의 체험을 소상히 알려준다는 데 국문학사적 의의가 있으며, 민속학적으로나 국어학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譯註丙子日記(全鎣大·朴敬伸 譯註, 예전사, 1991), 한국문학통사 3(조동일, 지식산업사, 1994), 丙子日記硏究(朴敬伸, 국어국문학 104, 국어국문학회, 1990), 丙子日記의 隨筆的 性格(朴敬伸, 울산어문논집 7,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1), 丙子日記에 나타난 1630년대 후반의 民俗(朴敬伸, 울산어문논집 9,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남평 조씨(南平曺氏, 1574-1645)

 

남평 조씨(南平曺氏, 1574-1645)로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남이옹의 아내. 현감(縣監)을 지낸 조경남의 딸. 치밀하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남이웅(南以雄/1575~16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령(宜寧). 자 적만(敵萬). 호 시북(市北). 시호 문정(文貞). 1606년(선조 3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사부(師傅)가 되고 세마(洗馬)·위솔(衛率)·통례(通禮)를 지냈다. 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수찬(修撰)·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23년 인조반정 뒤 오위장(五衛將)·황해도관향사(管餉使)·안악군수를 지내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황주수성대장(黃州守城大將)으로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 춘성군(春城君)으로 봉해졌다. 36년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선양[瀋陽]으로 끌려갈 때 우빈객(右賓客)으로 시종하였고, 돌아와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46년(인조 24) 우의정이 되어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사사(賜死)에 반대하고 사직했다가, 48년 좌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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