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법(法)과 묘(妙)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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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과 묘(妙)

남구만 지음

박소동 번역

경술년(1670)에 나는 고향 결성(潔城)으로 돌아가 지내었다. 집 뒤켠에 넓이가 수십 보 남 짓에 깊이가 6, 7척 쯤 되는 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못의 고기들을 구경하곤 하였다.

하루는 이웃사람이 대를 베어 낚싯대를 만들고 바늘을 두들겨서 낚싯바늘을 만들어 나에게 주면서 낚시를 하도록 권하였다. 나는 서울에서만 오래 지내었기 때문에 낚싯바늘의 길이나 넓이, 굽은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으므로 그저 이웃사람이 주는 그대로가 적당한 것으로만 알 뿐이었다. 그러나 종일토록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다음날 손<客>이 한 사람 와서 낚싯바늘을 보더니 '고기를 잡지 못한게 당연하 다. 바늘 끝이 안으로 너무 굽어 고기가 물기도 쉽지만 뱉기도 쉽게 생겼으니 끝을 밖으로 조금 펴야 된다.'고 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시켜 두들겨 밖으로 펴게 한 다음 다시 종일토 록 드리웠으나 역시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 다음날 또 손 한 사람이 와서 바늘을 보더니 '못잡을 게 당연하다. 바늘끝이 밖으로 펴 지기는 하였으나 굽은 테의 둥글기가 너무 커서 고기 입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여 나는 또 그 사람을 시켜 바늘 굽이의 둥글기를 좁게 만든 다음 다시 종일토록 드리워서 겨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손 두 사람이 왔기에 나는 낚싯바늘을 보여주며 지금까지의 일을 말하니 그 중 한 사람이 '적게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바늘은 굽힌 곡선의 끝이 짧아 겨우 싸라기를 끼울 만해야 하는데 이것은 굽힌 끝이 너무 길어 고기가 삼킬 수가 없고 삼켜도 다시 내뱉게 생겼다.'고 하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 끝을 짧게 만들도록 한 다음 한참동안 드리우고 있노라니 여러번 입질을 하였으나 낚싯줄을 당기는 중에 빠져서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손이 '저 사람의 바늘에 대한 견해는 맞으나 당기는 방법이 빠졌다. 대체로 낚싯줄에 매달린 찌는 부침(浮沈)에 따라 입질하는 것을 아는 것인데, 움직이기만 하고 잠기지 않는 것은 완전히 삼킨 것이 아니라서 갑자기 당기면 너무 빠른 것이고, 잠겼다 조금 나오는 것은 삼켰다가 다시 뱉은 것으로 천천히 당기게 되면 이미 늦은 것이다. 때문에 잠길락말락할 때에 당겨야 한다. 그리고 당길 때에도 손을 들어 곧바로 올리면 고기의 입이 막 벌어져서 바늘 끝이 아직 걸리지 않아 고기 아가미가 바늘 따라 벌려져서 나뭇가지에서 낙엽이 지듯 떨어져 버린다. 까닭에 비로 쓸 듯이 손을 비스듬이하여 당기면 고기가 막 삼키자마자 바늘끝이 목구멍에 걸려 좌우로 요동을 쳐도 더욱 단단히 박히게 되므로 이것이 놓치지 않는 방법이다.'고 하였다.

내가 다시 그 방법대로 해 보니 드리운 지 얼마 안 되어 서너마리를 잡았다. 그러자 손이 말하기를, '법은 이것이 전부이나 묘(妙)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하면서 나의 낚싯대를 가져 다 직접 드리웠다. 낚싯줄도, 바늘도, 미끼도, 내가 쓰던 그대로이고 앉은 곳도 내가 앉았던 곳으로, 달라진 것이라곤 낚싯대를 잡은 손일 뿐인데도 드리우자마자 고기가 다투어 올라와 마치 바구니 속에서 집어올리듯 쉴사이 없이 낚아올렸다. 내가 '묘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것도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하니 손이 말하기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법이다. 묘를 어떻게 가르쳐 줄 수가 있겠는가?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한 가지가 있다. 당신은 내가 가르쳐 준 법으로 아침이고 저녁이고 드리워 정신을 가다듬고 뜻을 모아 오랜동안 계속하면 몸에 배고 익숙해져서 손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조절되고 마음도 저절로 터득하게 될 것이니, 이처럼 된 후에 묘 를 터득하거나 못하거나, 혹 그 미묘한 것까지 통달하여 묘의 극치를 다하거나, 또는 그 중 한 가지만 깨닫고 두세가지는 모르거나, 아니면 하나도 몰라 도리어 의혹되거나, 혹은 황연(恍然)히 자각하여 스스로 자각한 줄도 모른다거나 하는 따위는 모두가 당신에게 달린 것이 니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하였다.

그제서야 나는 낚싯대를 던지고 탄식하였다.

"훌륭하다 손의 말이여! 이 도(道)를 미루어 간다면 어찌 낚시에만 적용될 뿐이겠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일로 큰 일을 깨우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손이 떠나고 나서 그의 말을 기록하여 스스로를 살피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남구만(南九萬)

 

1629(인조7) - 1711(숙종37).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 본관은 의령(宜寧), 시호는 문충(文忠).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 효종 2년(1651) 23세에 사 마시에 합격하고 효종 7년(165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시작하여 이조정랑, 전라도관찰사, 한성부윤, 병조판서, 영의정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숙족 33년 (1707) 79세 때 치사(致仕)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서인으로서 남인의 배척으로 남해와 강릉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문사(文詞)와 서화(書畵)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 이 밝았느냐]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한다. 이 글은 <약천집> 권28 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제는 [조설(釣說)]이다.

 

심화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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